
사법 정의를 잃은 나라의 마지막 언어
사법은 나라가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는 언어이다. 거리의 언어가 거칠어지고, 정치의 말이 서로를 찢을 때에도 사람들은 마음 한켠에서 이렇게 기대한다. “법정만큼은 아직 숨을 고르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감정이 아니라 사유가 말하고, 권력의 속도가 아니라 규범의 무게가 문장을 이끌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판결문이 누군가를 이기게 하기 위한 연설이 아니라, 모두를 설득하려는 조용한 설명이어야 한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요즘 마주하는 문장들 앞에서 마음이 자주 무거워진다. 논증보다 결론이 먼저 서 있고, 판단보다 감정이 앞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문장 하나하나가 이성에 호소하기보다, 이미 정해진 입장을 방어하려 애쓰는 듯 보일 때도 있다. 법리가 삶을 비추기보다, 이념의 그림자를 길게 끌고 들어오는 순간, 판결문은 공공의 언어가 아니라 특정한 편의 선언처럼 읽히기 시작한다. 그때 사람들은 더 이상 법을 읽지 않고, 기류를 읽는다.
이 낯설지 않은 풍경은 오래된 성경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예레미야는 한 나라가 무너지는 징조를 말할 때, 먼저 전쟁이나 기근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집 안 가득 차 있는 ‘속임’을 말한다. 새장에 새들이 가득하듯, 일상의 구석구석에 거짓과 왜곡이 자연스럽게 들어차 있는 상태를 본다. 그것은 부패가 예외가 아니라 관행이 되었고, 정의의 붕괴가 개인의 타락이 아니라 제도의 성격이 되었음을 뜻한다.
예레미야의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문 곳은 법정이었다. 고아의 송사가 공정하게 다뤄지지 않고, 빈민의 재판이 가볍게 취급되는 사회. 그곳이 바로 멸망의 중심이었다. 그의 분노는 부유함 자체를 향하지 않는다. 문제는 사람들이 잘 살게 된 방식이다. 송사를 왜곡하고, 재판을 거래하며, 타인의 삶을 밟고 올라선 번영. 법정이 약자의 마지막 피난처가 아니라, 강자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장소가 되는 순간, 그 나라는 이미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오늘 우리가 느끼는 사법에 대한 불안도 이 오래된 직감과 맞닿아 있다. 헌법의 문장이 선택적으로 읽히고, 확정되지 않은 혐의가 판단의 전제가 되며, 어떤 사람에게는 시간이 유난히 느리게 흐르고, 어떤 이들에게는 숨 돌릴 틈 없이 가속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경험들이 쌓일수록 법의 중립성은 개념이 아니라 질문이 된다. 사법이 시대의 바람을 읽기 시작할 때, 법은 질서를 세우는 기준이 아니라 권력 싸움의 도구가 된다. 그리고 도구가 된 법은 언제나 가장 힘센 손에 쥐어진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물음은 여전히 조용히 그러나 깊이 울린다. “내가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은 신앙적인 위협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통찰처럼 들린다. 사법 정의를 잃은 국가는 스스로를 지탱할 도덕적 뿌리를 잘라내는 셈이다. 그 뒤에 찾아오는 붕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형벌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썩어 무너지는 필연적인 결과다. 법이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고 오히려 눈물을 만들어낼 때, 공동체는 이미 깊은 피로 상태에 들어가 있다.
사법부의 왜곡은 단순한 제도적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이 사회가 누구의 삶을 귀하게 여기고, 누구의 상처를 감수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지에 대한 집단적 고백이다. 고아와 빈민의 송사가 쉽게 지나쳐지고, 권력자의 잘못은 끝없이 미뤄지며, 약자의 저항은 빠르게 처벌되는 나라에서 몰락은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 된다.
나라는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는다. 판결문 한 줄, 비틀린 송사 하나, 설명되지 않은 침묵들이 차곡차곡 쌓여 공동체의 기초를 갉아먹는다. 예레미야의 시대나 우리의 시대나 크게 다르지 않다. 사법 정의의 회복 없이 미래를 말하는 것은, 이미 금이 간 토대 위에 평화를 설계하겠다는 자기기만에 가깝다. 그리고 그 자기기만은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나라를 비워 간다.
사법은 국가의 마지막 언어다. 정치가 소란해지고 여론이 분열될 때에도, 시민은 여전히 법정만큼은 이성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리라 기대한다. 판결문은 감정이 아니라 논증으로 말해야 하고, 권력의 방향이 아니라 규범의 무게를 따라야 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문장들은 차분한 이성보다 적대적 정서에 더 가까워 보인다. 결론이 먼저 정해지고, 그 결론을 합리화하는 문장들이 뒤늦게 배열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념과 정치적 이해가 법리를 앞서는 순간, 판결문은 더 이상 공공의 언어가 아니라 특정 진영의 선언문으로 변질된다.
이러한 풍경은 성경이 이미 오래전에 경고했던 장면과 겹쳐진다. 예레미야는 한 나라가 멸망의 문턱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징후로, 외적 침략이나 경제 파탄을 먼저 말하지 않는다. 그는 “새장에 새들이 가득함같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다”고 고발한다. 이것은 부패가 예외가 아니라 일상이 되었고, 정의의 붕괴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제도의 성격이 되었음을 뜻한다. 특히 그의 비판은 사법의 영역을 정면으로 겨냥한다. 고아의 송사가 공정하게 다뤄지지 않고, 빈민의 재판이 왜곡되는 사회, 바로 그곳이 멸망의 중심부다.
예레미야가 본 문제의 핵심은 권력자들이 “살지고 윤택해진”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그들의 번영이 법과 정의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송사를 왜곡하고 재판을 거래하며 타인의 삶을 희생시킨 결과라는 데 있다. 법정이 약자의 마지막 피난처가 아니라, 강자의 이익을 세탁하는 공간이 되는 순간, 국가는 이미 도덕적 파산 상태에 들어간다. 법전은 남아 있고 재판 절차는 유지되지만, 법의 영혼은 빠져나간다.
오늘 우리가 느끼는 사법부에 대한 무거운 의심도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헌법적 질서가 선택적으로 해석되고, 확정되지 않은 혐의가 판결의 전제가 되며, 어떤 권력자에게는 시간이 멈추고 어떤 이들에게는 가혹하게 가속되는 현실은 법의 중립성을 근본에서 훼손한다. 사법이 이념과 정치의 흐름에 편승하는 순간, 법은 질서를 세우는 기준이 아니라 권력 투쟁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리고 도구가 된 법은 언제나 가장 강한 손에 의해 휘둘린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질문은 지금도 날카롭다. “내가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느냐.” 이것은 신앙적 수사가 아니라, 역사에 대한 통찰이다. 사법 정의를 상실한 국가는 스스로를 지탱할 도덕적 정당성을 잃는다. 그때 찾아오는 붕괴는 외부에서 떨어지는 형벌이 아니라, 내부에서 썩어 무너지는 필연적 결과다. 법이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고 오히려 눈물을 만들어내는 흉기가 될 때, 그 국가는 이미 생명력을 소진한 공동체다.
사법부의 부패와 이념적 편향은 단순한 제도적 결함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가 무엇을 옳다고 여기고, 누구의 삶을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지에 대한 총체적 고백이다. 고아와 빈민의 송사가 가벼이 여겨지는 나라, 권력자의 범죄는 지연되고 약자의 저항은 엄벌되는 나라에서, 몰락은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다.
나라가 무너지는 것은 하루아침이 아니다. 판결문 한 줄, 왜곡된 송사 하나, 침묵 속에서 누적된 불신이 결국 공동체의 기초를 갉아먹는다. 예레미야의 시대나 오늘이나 다르지 않다. 사법 정의의 회복 없이 국가의 미래를 말하는 것은, 무너진 기초 위에 평화를 설계하겠다는 공허한 자기기만일 뿐이다.
“새장에 새들이 가득함같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번창하고 거부가 되어 살찌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하니. 내가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5:27-29).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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