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단에서 흘린 눈물, 로버트 맥쉐인의 영성
반세기 훨씬 전의 일이다. 나는 대학 시절, 로버트 머레이 맥쉐인(Robert Murray M’Cheyne, 1813–1843)에 관한 한 권의 영어 전기를 읽었다.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공부하고 돌아오신 교수님이 맡은 과목의 과제였다. 밴너오브투루스 출판사 책이었다. 나는 지금도 설교단에 서면 맥쉐인을 떠올리곤 한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 책에서 느꼈던 잔잔한 울림은 지금도 내 안 어딘가에 남아 있다.
맥쉐인이 세상을 떠난 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설교하던 교회당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들은 안내자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맥쉐인 목사님은 어떻게 그렇게 설교할 수 있었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때 안내자는 말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설교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팔꿈치를 강단에 괴고 턱을 손에 받친 채,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이내 그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고, 그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맥쉐인이 설교 중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자주 그렇게 울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안내자는 방문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여러분도 은혜로운 설교를 하고 싶다면, 맥쉐인 목사님처럼 이 강단에 올라와 한 번 울어 보십시오.”
나는 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설교의 비밀이 기술이나 수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배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앞에서 마음이 실제로 녹아내린 사람, 그 은혜에 깊이 감동하고 감격한 사람의 입에서만 살아 있는 말씀이 흘러나온다.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눈물은 결국 은혜의 강물이 되어, 메마른 회중의 심령을 조용히 적신다.
맥쉐인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먼저 학부에서 인문학과 고전을 배우며 학문의 기초를 다졌고, 이어 신학부(Divinity Hall)에서 목회자의 길을 준비했다. 당시 그는 스코틀랜드 국교회의 목회 후보생으로 정규 신학 교육을 받았다. 바로 이 시기에 그의 내면에는 평생 그를 붙들어 줄 경건의 뿌리가 깊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동료들과 스승들은 이미 학생 시절부터 그의 진지한 영성과 섬세한 양심을 조용히 주목하고 있었다.
맥쉐인은 길게 살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생애는 길이로 평가되지 않는다. 그의 삶은 짧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이 얼마나 깊이 그분과 연합하여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조용한 증언으로 남아 있다.
그는 에든버러에서 태어나 던디의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다 스물아홉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침묵 이후에 그의 목소리는 더 맑게 들리기 시작했다.
맥쉐인의 삶에는 과장이 없었다. 그는 눈부신 업적을 남긴 교회 행정가도 아니었고, 시대를 흔드는 웅변가로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가 평생 붙들고 있었던 것은 단순하고도 깊었다. 그는 구원의 복음의 위대함에 사로잡힌 사람이었고,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이었으며, 사람들의 영혼을 진심으로 아파한 목회자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회중에 대한 사랑, 바로 그 두 사랑 사이에서 그는 설교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했다. “왜 그렇게 마음이 무너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말이 화려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언어는 놀라울 만큼 맑고 단순했다.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에는 하나님 앞에서 오래 머물렀던 사람에게서만 흘러나오는 투명함이 있었다. 맥쉐인은 사람들을 자신에게 묶어 두지 않았다. 언제나 그들의 시선을 그리스도께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돌려놓았다.
그는 설교의 능력이 기술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설교 준비만큼이나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일을 두려움으로 감당했다. 그가 남긴 말, “성도에게 가장 큰 필요는 거룩한 목회자다.” 이 문장은 단순한 격언이 아니라, 그가 평생 떨리는 마음으로 붙들고 살았던 자기 고백에 가까웠다. 그는 설교자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목회는 강단 위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병든 이들의 집을 찾았고, 어린 영혼들의 이름을 기억했으며, 한 사람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깨어나는 순간을 무엇보다 귀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의 사역은 넓게 퍼지기보다 깊이 스며들었다. 던디의 거리와 가정 속에,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약한 건강 속에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고, 결국 장티푸스로 스물아홉의 생을 마쳤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너무 이른 퇴장이었다. 아직 남아 있어야 할 설교가 더 많아 보였고, 더 오래 교회를 섬겨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짧은 생애를 통해 이미 충분히 말씀하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맥쉐인이 떠난 뒤, 그의 친구 앤드루 보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생애는 하나의 살아 있는 설교였다.” 이 말은 어쩌면 이것이 그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문장일 것이다. 그는 설교를 잘한 사람이기 전에, 자기 삶 전체가 설교가 되어 버린 사람이었다.
오늘까지도 많은 신자들이 따르는 ‘맥쉐인 성경 읽기표’와 그의 설교와 서신들은 여전히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조용히 이끈다. 그러나 그의 가장 깊은 유산은 어떤 프로그램이나 책 이전에 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투명하게 살고자 했던 한 젊은 목회자의 떨리는 마음이다.
맥쉐인의 삶은 우리에게 큰 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하나님 앞에 오래 머무는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멀리까지 울려 퍼질 수 있는지를 말한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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