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대통령 이재명 (당선 초기 사진)
통치자의 정교분리 원칙 오독
원제: 국가보다 먼저 있었던 종교와 예배의 자유: 권력의 한계와 침묵하지 않는 양심에 대하여 (제주 강연)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는 미국 제32대 대통령, 4선 대통령(재임 1933-1945)이다. 그는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동시에 겪으며 미국을 이끌었다. 민주주의의 방향을 자유와 책임의 결합의 재정의했다. 전쟁의 목적을 단순한 국가 이익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보편적 가치의 수호로 설명한 지도자였다.
루즈벨트는 1941년 국정연설에서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네 가지 자유를 제시했다. 그것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 종교와 예배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였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 자유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기억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그래서 이 사상을 계승하고 기념하기 위해 ‘4대 자유 상’이 제정되었다. 이 상은 나치 점령을 경험한 네덜란드에서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오늘날에도 자유와 인권을 위해 헌신한 인물과 단체에게 수여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루즈벨트의 사상과 유산을 계승하는 기관들이 이 네 가지 자유를 민주주의의 핵심 기준으로 보존하고 확산시키고 있다.
루즈벨트가 자유를 강조한 이유는 자유가 하나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말할 자유가 있어도 먹고살 수 없다면 공허하고, 생존이 보장되어도 국가 폭력의 공포가 있다면 인간다운 삶은 불가능하다. 그중에서도 그는 예배의 자유를 특별히 중요하게 보았다. 예배의 자유는 개인의 신앙 선택을 넘어, 국가보다 더 높은 기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사회가 인정하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예배의 자유가 사라질 때 국가는 도덕과 진리의 최종 판단자가 되고, 권력은 쉽게 절대화된다. 실제로 전체주의 국가는 언제나 종교를 통제하거나 국가 이데올로기에 종속시켜 왔다.
그래서 루즈벨트에게 예배의 자유는 특정 종교인을 위한 특권이 아니라, 권력이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을 분명히 하는 자유였다. 4대 자유 상은 바로 이 점을 기억하게 한다. 자유는 국가가 선의로 나누어 주는 혜택이 아니라, 국가가 침범하지 말아야 할 인간의 기본 조건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루즈벨트가 말한 “네 가지 자유”는 전쟁 시기의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현대 헌정 질서가 어떤 인간상을 전제로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압축된 선언이다. 사람은 단지 먹고사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고, 믿고, 판단하고, 두려움 없이 살아야 하는 존재다. 그래서 자유는 사치품이 아니라 공동체의 뼈대가 된다.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권 체계도 이 뼈대를 거의 같은 축으로 공유한다. 표현의 자유가 있고, 종교의 자유가 있으며, 결핍과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려는 장치들이 촘촘히 놓여 있다. 그러나 문제는 조항의 존재가 아니라 그 조항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의미를 누가 어떻게 축소하고 왜곡하는지에 있다. 특히 “종교의 자유”, “예배와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한국의 정교분리)가 그렇다. 이 네 주제는 서로 따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문장으로 이어진다. 국가는 절대자가 아니며, 국가 권력은 제한되어야 하고, 신앙과 양심은 침묵을 강요받지 않으며, 복종은 언제나 무조건이 아니라는 문장이다.
첫째, 종교의 자유는 개인 취향의 권리가 아니다. 유럽과 미국와 기독교계에서 “종교의 자유”는 다종교의 자유를 일컫지 않았다. 종교는 기독교를 일컫는 용어이다. 종교의 자유는 기독교권 안의 여러 가지 그룹들, 로마가톨릭교회, 동방교회, 프로테스탄트교회, 장로교, 침례교, 성공회 등의 교회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지칭한다. 종교의 자유는 인간이 국가 이전에 이미 서 있는 자리, 곧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리에서 비롯된다. 종교의 자유를 “국가가 베푸는 혜택”처럼 이해하는 순간, 종교는 곧 국가가 제한하고 통제하고 회수할 수 있는 특권이 된다. 그때부터 국가는 “너희는 믿어도 되지만, 여기까지”라고 선을 긋고, 믿음의 내용을 심사하고, 종교의 표현을 허가제처럼 다루려 든다. 중국과 북한 등 공산주의 국가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그러나 국가의 통제, 조종, 간섭하는 자유에 제한된다.
그러나 미국과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종교의 자유는 그 반대다. 국가는 종교를 승인하는 주체가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주체다. 종교의 입을 틀어막지 않으며 비판과 충고와 견제의 설교와 비판의 자유를 보호하는 주체이다. 그래서 헌법이 “국교를 인정하지 아니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특정 종교를 우대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면서 동시에 국가가 종교적 진리의 심판자 자리에 서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제한하는 선언이다. 국가는 “무엇이 참된 예배인가”를 판결할 권한이 없다. 국가는 “누가 올바른 신앙을 가졌는가”를 판정할 권한이 없다. 국가는 신앙을 통치의 도구로 삼지 않겠다는 방식으로만 정당성을 유지한다. 종교의 자유는 국가가 관대해서 주는 선물이 아니라, 국가가 겸손해서 인정하는 경계선이다.
둘째, 예배와 신앙의 자유는 종교의 자유를 실제 삶의 형태로 드러내는 핵심이다. 종교의 자유가 “믿을 자유”라면, 예배의 자유는 “믿음을 따라 살 자유”다. 예배는 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몸과 시간과 공간을 동반하는 공적 행위다. 모이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성례를 행하고, 공동체적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예배다. 그러므로 “믿는 것은 자유지만, 밖으로 드러내지는 마라,” “믿는 것은 자유지만 정치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는 말은 사실상 예배의 자유를 부정하는 말이다. 예배를 집 안의 취미로 축소시키고, 신앙을 내면으로만 가두는 방식은 겉으로는 중립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특정 세계관의 강요다. 신앙을 공적 영역에서 추방하려는 정치적 기획일 때가 많다.
여기서 다니엘서가 우리에게 아주 현실적인 균형을 가르친다. 다니엘은 국가 체제에 충실한 공직자였다. 그는 무능한 체제 파괴자가 아니었고, 분노로 움직이는 선동가도 아니었다. 그는 국가의 선을 위해 일했고, 질서를 존중했고, 행정의 책임을 다했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까지 침범할 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기도 금지령 앞에서 그는 고집을 부리는 방식으로 국가를 모욕하지도 않았고, 두려움 때문에 신앙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하늘을 향한 창을 열어두었다. 그 불복종은 무정부적 반항이 아니라, 예배의 자유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속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 도덕적 용기였다. 그러니 예배의 자유란 ‘국가에 도전하려는 공격성’이 아니라 ‘국가도 침범할 수 없는 내적 중심’의 표현이다. 국가는 그 중심을 존중할 때 건강한 나라가 되고, 그것을 억압하려 할 때 폭력적인 나라가 된다.
셋째, 양심의 자유는 이 모든 자유를 지탱하는 내면의 기둥이다. 양심은 단지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라는 자율성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성경적 전통에서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보는 자리이며, 진리와 선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자리다. 양심의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책임이다. 그래서 양심의 자유는 ‘국가가 원하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을 보호한다. 국가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시민은 폭력적인 시민이 아니라 양심적인 시민이다. 양심적인 시민은 권력의 부당함을 알아차리고, 합법의 외피를 둘러쓴 악을 악이라 말하며, 다수가 원하는 것이라도 하나님과 정의에 어긋나면 멈추어 서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의 한 문장이 이 원리를 가장 간결하게 말한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이 말은 무조건적인 국가 불복종이 아니라, 충성의 질서를 바로잡는 말이다. 국가에게 줄 것을 주되, 하나님께 드릴 것을 국가에게 넘기지 말라는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로마서 13장이 다니엘서와 긴장을 이루며 우리를 지혜롭게 만든다. 로마서 13장은 권세에 복종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질서는 인간 공동체의 선이고, 무정부 상태는 약자를 먼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복종은 국가를 신격화하는 복종이 아니다. 바울 자신이 불의한 명령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고, 복음 때문에 투옥되었으며, 황제를 신으로 섬기라는 요구를 거부했다는 사실이 그걸 증명한다. 로마서 13장은 “무조건 복종하라”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질서를 존중하지만, 권력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면 그 한계를 분명히 하라”는 윤리로 읽어야 한다. 다니엘서가 말하는 양심적 불복종과 로마서 13장이 말하는 원칙적 복종은 모순이 아니라 한 쌍이다. 국가는 제자리를 지킬 때 존중받고, 제자리를 넘을 때 제한받는다. 양심의 자유는 그 제한의 마지막 선이다.
넷째, 교회와 국가의 분리(한국의 정교분리)의 진정한 의미는 이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묶어 준다. 정교분리는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지 말라”는 뜻이지, “국가가 교회를 침묵시키라”는 뜻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가장 자주 왜곡되는 지점이다. 정교분리를 핑계로 “교회는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 발언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대한민국은 종교가 정치에 간섭하거나 비판하는 설교를 하면 처벌하는 법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중립의 언어를 빌린 검열이다. 교회가 정치 권력을 탐하고, 권력을 잡아 직접 통치하는 것은 마땅히 경계의 대상이다. 그러나 교회가 공적 영역에서 정의를 말하고, 생명을 말하고, 권력의 죄를 지적하는 것까지 막는다면, 그것은 정교분리가 아니라 종교 억압이다. 정교분리는 국가가 종교를 지배하지 않기 위한 장치이며, 종교가 국가를 우상화하지 않기 위한 장치다. 정치에 대한 종교의 침묵을 강요하는 ‘정교분리 이해’는 사실상 국가주의적 종교관이다. “믿어도 좋지만, 말하지는 마라”는 말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말이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제거하는 말이다.
교회가 정치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곧 정당 정치에 복무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교회는 어느 권력의 홍보 기관이 아니다. 어느 정치 진영의 확성기가 아니다. 교회의 발언은 권력 획득을 위한 선동이 아니라, 권력 제한을 위한 증언이다. 성경의 예언자들은 왕을 대체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왕을 향해 “당신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었다”고 말했다. 억압을 향해 “그것은 악이다”라고 말했다. 가난한 자를 향해 “너는 잊힌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예언자적 비판과 충고와 견제의 말은 정권의 안위를 돕지 않는다. 정의의 회복을 돕는다. 그래서 교회(설교자)의 공적 발언은 “정치 참여”가 아니라 “정치의 도덕적 심판에 대한 책임” 활동이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교회의 침묵은 이미 정치적이다. 침묵은 종종 강한 자 편에 서는 정치적 선택의 방식이다. 교회가 침묵할 때, 그 침묵은 이미 정치적이다. 신앙고백은 침묵하지 않는다. 침묵은 실제로는 강자의 편이며, 중립은 실제로 폭력의 연장이다.
이 모든 논의는 다시 한 곳으로 돌아온다. 자유는 결국 “공포로부터의 자유”와 연결된다. 공포는 폭력으로만 생기지 않는다. 법이 권력에 종속될 때, 시민은 불안해지고 침묵하게 된다. 그래서 사법부 독립은 신앙 논쟁과 무관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 질서를 지키는 핵심 제도다. 사법부가 정치의 도구가 되면, 표현의 자유는 금세 ‘허용된 말’로 축소되고, 종교의 자유는 ‘허용된 종교’로 바뀌며, 양심의 자유는 ‘불편한 양심은 처벌받는 것’으로 변한다. 결국은 공포가 일상이 된다. 그러므로 사법부 독립은 단지 판사 집단의 자존심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두려움 없이 말하고 믿고 판단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적 바닥이다. 법이 권력에 종속될수록, 신앙은 더 사적으로 밀려나고, 양심은 더 위험해지고, 교회의 발언은 더 쉽게 “정교분리 위반”이라는 딱지로 봉인된다. 이런 흐름을 막는 것이 헌정 질서이며, 동시에 신앙의 자유를 보전하는 사회적 조건이다.
종교의 자유는 “국가가 허용하는 신앙”이 아니라 “국가도 침범할 수 없는 자리”다. 예배와 신앙의 자유는 믿음을 내면에 가두지 않고 삶으로 드러낼 자유다. 양심의 자유는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게 판단할 자유이며, 방종이 아니라 도덕적 용기의 근거다. 정교분리는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국가가 교회를 침묵시키지 못하게 하는 이중의 경계선이다. 이 네 가지를 함께 붙들 때, 우리는 다니엘서와 로마서 13장이 가르치는 균형을 이해하게 된다. 국가는 존중되어야 하지만 절대화되어서는 안 된다. 복종은 기본이지만 무조건이 아니다. 교회는 권력을 잡으려 해서는 안 되지만, 권력을 향해 말하기를 멈춰서도 안 된다. 그때 공동체는 비로소 자유롭고, 신앙은 비로소 건강하며, 국가는 비로소 제자리에서 사람을 섬기는 권력이 된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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