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숫자보다 무거운 것: 다수의 소음 속에서 공의를 기다리며
요즘 나는 정치 뉴스를 접하면 피로가 몰려든다. 다수가 결정했다는 말이 너무 쉽게 정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숫자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다수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결정했다는 까닭으로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순간들이 나를 괴롭힌다. 무엇이 옳은지 따지기 전에, 왜 이렇게까지 서로를 밀어내야 하는지 묻게 된다. 다수결을 절대가치로 여기는 나라는 다수결의로 몰락할 수 있다.
나는 성경을 신앙과 삶의 마지막 기준으로 붙들고 살아왔다. 그래서 이 정치적 혼란 앞에서 먼저 성경을 펼친다. 성경은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지 않지만, 다수가 항상 옳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라”(출 23:2)는 경고를 먼저 들려준다. 이 말씀은 다수가 모였다는 사실이 곧 진실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냉정한 현실 인식이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보다 무리 속에서 더 쉽게 책임을 내려놓고, 더 빠르게 잔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질서와 입법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자행되는 일들을 바라보며, 나는 성경의 예언자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보다, 그 법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물었다. 절차를 통과했는지보다, 그 결과가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밀어내는지를 보았다. 권력이 손에 쥐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밀어붙이는 결정들, 숙의보다 속도가 앞서는 입법, 소수의 목소리를 번거로운 장애물처럼 취급하는 태도는 오래된 성경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미 병든 징조다.
나는 정치가 완전해질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드는 어떤 제도도 죄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성경은 너무 솔직하게 말해 준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다수결이라는 도구가 절대적인 선처럼 사용될 때 나는 불안해진다. 도구가 목적이 되고, 숫자가 양심을 대신하는 순간, 법은 공동체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아니라 누군가를 밀어내는 무기가 된다.
성경의 선지자들은 불의한 법 그 자체를 향해 “화 있을진저”라고 말했다. 그 법이 합법적으로 만들어졌는지, 다수의 동의를 얻었는지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가난한 자의 권리를 빼앗고, 약자를 더 약하게 만드는 법이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이미 폭력이라고 보았다. 이 말은 오늘을 사는 나에게도 무겁게 다가온다. 합법이라는 말이 정당함을 자동으로 보증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교회의 자리를 다시 생각한다. 교회는 어느 편의 숫자를 응원하는 집단이 아니다. 교회는 언제나 숫자 뒤에 가려진 얼굴을 바라보아야 하는 공동체다. 다수의 결정으로 상처 입는 이들이 누구인지, 그 결정이 생명을 살리는 방향인지 아니면 편의를 위해 희생을 요구하는 선택인지를 묻는 자리다. 침묵이 안전해 보일 때조차, 교회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목회자의 역할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믿는다. 목회자는 다수의 의견을 신앙으로 포장하지 않고, 합법이라는 이름 아래 숨은 의도를 분별하도록 돕는 사람이다. 숫자의 힘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라는 느리고 불편한 기준 앞에 서도록 성도들을 초대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공격적인 외침이 아니라, 양심을 깨우는 낮은 목소리에 가깝다.
예언자적 목소리는 언제나 고독하다. 다수의 환호 속에서, 그들은 늘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정말 이것이 옳은가?” “이 결정의 대가를 누가 치르게 되는가?” 나는 오늘의 교회가 이 질문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정당과 진영을 넘어, 생명과 공의의 방향을 가리키는 파수꾼으로 남아 있기를 소망한다.
나는 정치인들에게 완전함을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를 바란다. 숫자의 우위를 내려놓고, 잠시 멈춰 서서 묻는 용기다. 이 법이 정말로 공동체를 살리는지, 가장 약한 이들의 삶을 더 무겁게 만들지는 않는지, 권력을 증명하기 위한 결정은 아닌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겸손이다.
오늘도 나는 다수의 소음 속에서 기도한다. 숫자가 아니라 공의가, 속도가 아니라 숙의가, 승리가 아니라 책임이 결정을 이끌어 가는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가 이 혼란 속에서 더 크게 말하기보다 더 깊이 분별하며, 끝까지 사람의 얼굴을 잃지 않는 공동체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사람의 얼굴을 잃지 않는 공동체, 이는 즉각적인 판단이나 날카로운 언어로 세상을 규정하기 전에, 무엇이 생명을 살리는 길인지 오래 머물며 묻는다. 교회가 서둘러 편을 가르기보다, 상처 입은 현실 앞에서 먼저 멈추어 서고, 쉽게 결론을 내리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침묵할 줄 아는 공동체로 남아 있는다.
사람의 얼굴을 잃지 않는 공동체는 언제나 추상적인 구호나 이념, 숫자나 통계보다 구체적인 한 사람을 먼저 떠올리는 공동체이다. 법과 정책, 정의와 질서를 말할 때조차, 그 결정으로 삶이 흔들릴 얼굴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태도를 가진다. 교회가 말하는 진리는 언제나 이름 없는 ‘대상’이 아니라, 이름을 가진 이웃의 삶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사람의 얼굴을 잃지 않는 교회 공동체는 상대를 논리로 이겨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같은 연약함을 지닌 존재로 바라본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판단이 어긋나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그 역시 두려움과 기대, 상처와 책임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교회가 이 사실을 잊는 순간, 말은 더 정교해질지 몰라도 사랑은 빠르게 식어 버린다.
사람의 얼굴을 잃지 않는 공동체는 속도를 늦출 줄 안다. 즉각적인 분노나 정의의 언어에 휩쓸리기보다, 그 말이 누군가의 삶에 어떤 무게로 떨어질지를 생각한다. 진리를 말하되, 그 진리가 누군가를 짓누르는 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한다. 이는 진리를 희석하는 태도가 아니라, 진리를 끝까지 사람의 삶 안에 머물게 하려는 인내다.
무엇보다 사람의 얼굴을 잃지 않는 무리는, 세상을 향해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선다. 자신의 분별이 완전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언제든 수정될 수 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교회의 말에는 늘 낮은 온도와 여백이 남아 있다. 그 여백 속에서 상처 입은 이들이 숨을 쉬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다시 말을 건넬 수 있다.
세상의 혼란 앞에서 더 크게 외치는 공동체가 아니라, 더 깊이 기도하며 사람을 바라보는 공동체, 마지막까지 사람의 얼굴을 붙들고, 그 얼굴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알아보려 애쓰는 공동체, 나는 이런 교회, 이런 나라를 바란다. 그곳에서야 비로소 교회와 국가의 말은 소음이 아니라, 조용한 빛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덕성, 고백명상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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