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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단단함 너머, 비어 있는 넉넉함으로

 

한동안 나는 신학의 언어들과 신앙의 문장들을 정교하게 세공하는 일에 몰두했다. 어떤 질문 앞에서도 명쾌하게 대답할 수 있는 언어, 신학적 모호함을 허용하지 않는 또렷한 개념들이야말로 내 영혼의 안전망이라고 믿었다. 서가에 책이 쌓여갈수록 나는 점점 더 단단해졌고, 이른바 가방 끈이 길어 갈수록 그 견고함이 곧 내주 동행하는 성령 하나님이 기회를 준 것으로 생각하여 대견해했다. 그러나 지식의 부피가 커질수록 기도의 호흡은 얕아졌고, 마음 밑바닥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피로가 고여 갔다.

 

나의 지성은 세상을 설명하는 날카로운 도구가 되었지만, 정작 내 안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떨림과 상실감에는 무지했다. 하나님에 대하여 정의(define)를 내리는 말들은 화려해졌으나, 그분 앞에 머무는(abide) 시간은 어색해졌다. '마음의 혁신'은 개념의 습득과 많은 지식 그리고 그것들을 공리적으로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존재의 굴복이었음을, 나는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지식으로 무장한 나는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을 만큼 단단해졌지만, 어떤 난해한 것도 파악하고 해석하고 글로 표현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누구의 아픔도 스며들지 못할 만큼 좁아져 있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아는 자'의 위치에 서고 싶어 한다. 나 역시 그랬다. 학문적 또는 과학적 통찰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사상과 삶을 분석하고, 신앙의 구조를 파악하는 일은 나를 통제권 안에 있게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문득 깨달았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거세된 지식은 영혼의 경작지를 넓히기보다 오히려 감옥처럼 그것을 가둔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의 거대한 메커니즘을 설명하면서 정작 자기 마음의 일그러짐에는 무심한 지성보다, 하루를 서툴게 살아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기지 않는 정직한 자의 한숨이 더 지혜에 가깝다는 사실이 비로소 선명해졌다.

 

하나님이 물으시는 질문은 신학적 난제가 아니었다. 그분은 내가 얼마나 많은 전문 신학 서적을 섭렵했는지, 어느 정도로 그것을 심도 있게 간파하고 비평하고 창의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는지, 그것도 학자에게는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을 묻는다. 내가 어떤 숨을 쉬며, 누구의 손을 잡았으며, 무슨 긍휼의 마음으로 학생들과 신도들과 친구들과 테이블에 둘러앉았는지를 바라보신다. 학문과 정보는 나를 상당히 능숙한 신학자로 만들었지만, 내 안의 근원적인 갈증을 다 해소해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많이 알수록 마음은 쉽게 굳어갔고, 사람 사이에 벽이 쌓이고, 타인의 연약함을 보는 시선은 날카롭고 차가워졌다. 자칫 겸손이 거세된 지식이 사랑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자기의(自己義)라는 우상을 세우지는 않는지, 두려움이 생겼다.

 

신앙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 앞에 서는 일이다. 이제 나는 새로운 것을 알게 될수록 이전보다 더 조심스러워진다. 확신으로 나를 증명하기보다 경외함으로 입술을 다무는 법을 배운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내가 모르는 신비가 훨씬 더 광활하다는 사실이 이제는 나를 불안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름'의 빈터가 비로소 하나님이 일하실 공간이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가장 깊고 소중한 배움은 나 자신의 참담한 연약함을 올바로 직시하는 데서 시작된다. 타인의 실패를 보며 내게는 "나는 저들과 같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던 어떤 이의 은밀한 우월감이 내 안에 없는지 생각해 본다. 우리 모두는 같은 유혹 앞에 서 있는 연약한 존재이다. 다만 그 연약함을 대하는 태도가 다를 뿐이다. 헨리 나우원이 고백했듯, 우리는 모두 '상처 입은 치유자'로 부름받았을 뿐, 완전한 자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

 

요즘 나는 지혜로울 뿐 아니라 정직한 사람으로 살고 싶기도 하다. 논리로 나를 세우기보다, 겸손으로 나를 열어두는 삶이 더 오래 나를 살게 할 것이라 믿는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을 따르는 일은, 하나님이 특별 계시로 알려준 정답을 소유하는 것 만이 아니라 그 길 위에서 함께 걷는 호흡의 문제이다.

 

나는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고, 자주 길을 잃는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엄청나게 많다. 다행스런 것은 성경이 진리의 보고이고, 그것이 나의 신앙과 행위의 최종적 권위라는 사실이다. 이제는 그 모름과 방황을 부끄러워하며 숨기지 않는다. 그 결핍의 자리에서 배움은 또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아는 것은 보잘것없으나, 하나님 앞에 선 이 자리만큼은 어제보다 조금 더 투명해졌다. 이 정도면, 오늘의 나의 영적 여정은 충분하다.

 

최덕성의 고백명상록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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