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주의의 유토피아 약속을 접하면서
사회주의의 유토피아 약속과 하나님의 말씀의 숨결 사이에서, 완성되지 않을 세상에서, 나는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
나는 종종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꾼다. 조금만 제도가 정교해지면, 조금만 사람들이 각성하면, 이 불안과 불의가 정리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한다. 그러나 그런 상상은 늘 피로를 남긴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은 깊어지고, 완성의 약속은 언제나 다음 세대로 미뤄진다.
그때마다 나는 성경이 들려주는 낮은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 이 세상은 결국 우리가 완성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목소리이다. 그리고 나는 이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자리에서 신앙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상 사회의 설계도를 건네주지 않는다. 대신 끝, 마지막, 종말을 말한다. 불로 정결케 될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이후에야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한다. 그 약속은 지금의 세상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지금의 세상을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초대처럼 들린다.
어거스틴이 말한 두 도성, 곧 자기 사랑으로 세워진 도성과 하나님 사랑으로 지향되는 도성은 지금도 뒤엉킨 채로 우리의 일상에 공존한다. 우리는 그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
나는 그런 탓으로 유토피아의 언어에 조심스러워진다. 인간의 이성과 의지, 제도와 계획으로 이 땅에서 구원을 완성할 수 있다는 약속은, 그럴듯하지만 위험하다. 그 약속은 종종 인간의 죄성과 자기 중심성을 과소평가하고, 국가나 이념에 구원의 자리를 내어준다. 그렇게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권력과 강제의 손에 들어간다. 역사는 그 결과가 얼마나 잔인했는지를 이미 충분히 증언해 왔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시장과 자유를 곧바로 신성시하지도 않는다. 돈과 효율, 경쟁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우상숭배일 수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문제는 체제가 아니라 마음이라는 오래된 진실이다. 여기서 나는 다시 고개를 든다. 무엇을 신뢰하는가, 무엇에 궁극적인 안전을 맡기는가? 이 질문 앞에서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모두 시험대에 오른다.
나는 점점 하나의 구체적인 결론에 이른다. 성경은 낙원을 약속하지 않지만, 붕괴를 늦추는 길을 가르친다. 정직, 노동, 책임, 절제, 약자에 대한 자비, 소유에 대한 존중, 이 원칙들은 어느 체제에서도 삶을 버티게 하는 숨결처럼 작동한다. 이 원칙들이 지켜질 때 세상은 완성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파괴하지는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언제나 이처럼 소박하고, 그래서 더 깊고 풍요롭고 신뢰할 만하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질서를 유지하는 도구이지, 구원의 주체가 아니다. 국가는 악을 억제하고 선을 장려한다. 그런 기능은 필요하지만, 그 역할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다. 국가는 우리의 양심을 대신할 수 없고, 하나님 자리에 앉을 수도 없다. 그 경계를 잃을 때, 국가는 가장 위험한 우상이 된다. 교회는 그 우상을 축복하는 곳이 아니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경고하는 예언자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거창한 체제 논쟁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내 안에 남는다. 오늘 나는 정직했는가, 책임 있게 일했는가, 약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는가. 내가 속한 작은 자리에서 이웃 사랑은 실제가 되었는가. 이런 질문들 앞에서 신앙은 다시 살아 움직인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사실은 나를 냉소로 이끌지 않고, 오히려 절제된 희망으로 이끈다. 나는 이 땅에서 완전한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오늘의 실패 앞에서 절망하지 않는다. 동시에 나는 이 땅을 가볍게 여기지 않기에, 오늘의 선택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의 태도라는 것을 조금씩 배워 간다.
유토피아는 인간이 만드는 도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그날까지 나는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조심스럽게, 그러나 성실하게 산다. 체제를 신뢰하지 않고, 그렇다고 세상을 버리지도 않은 채로 살고 있다. 말씀의 숨결에 기대어, 완성되지 않은 오늘을 책임 있게 호흡하며 생기를 유지하고 있다.
최덕성, 고백명상,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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