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혜의 비와 계약의 피: 셰익스피어의 탐욕의 신학 2
--탐욕에 대한 한 편의 묵상(칠거지악, 3-3)
1. 황금빛 도시, 어두운 마음
베니스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도시다. 상업과 계약의 거리, 황금의 피가 흐르는 곳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이 빛나는 항구의 심장 한가운데, 돈과 인간의 영혼이 맞부딪히는 극장을 세웠다.『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 1596 추정)은 단지 상거래의 이야기 또는 기지 넘치는 법정극이 아니다. 그것은 돈이 인간의 양심을 압박하고, 정의가 자비와 충돌하는 세계에서, 인간이 어디에 서야 하는가를 묻는 신학적 연극이다.
이 연극 속에서 모든 인물은 욕망의 무게를 짊어지고 움직인다. 샤일록은 돈을 사랑하고, 복수를 탐한다. 바사니오는 사랑을 얻기 위해 부를 탐한다. 안토니오는 친구를 위해 희생하지만, 그의 선의조차 세상의 냉혹한 계약 법칙 앞에서 흔들린다. 그들의 욕망이 교차하는 베니스는 마치 거대한 영혼의 실험실처럼 보인다. 인간의 탐심이 그 안에서 끓어오르고, 자비의 빛은 그 위에 희미하게 비친다.
2. 탐심의 초상 ― 샤일록의 금전과 복수
샤일록은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다. 그는 사회의 외부인으로, 조롱과 모욕 속에서 살아간다. 사람들은 그의 돈을 빌리면서도 그를 경멸한다. 그의 탐욕은 단지 돈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상처 입은 자존심의 방어기제다. 돈은 그에게 힘이고, 방패이며, 인간으로 대접받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다.
그래서 그는 복수를 계약의 형식으로 포장한다. “돈을 갚지 못하면,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베겠다.” 그 조항은 피로 쓴 계약서이며, 복수의 신학이다.
그는 말한다. “유대인에게 눈이 없소이까? 유대인에게 손, 감각, 감정, 애정이 없소이까?” 이 절규는 억압받은 인간의 분노이자, 세상에 대한 고발이다. 그러나 그 절규는 곧 탐심의 그늘로 기울어간다.
그는 법과 돈, 계약이라는 이름 아래서 자비 없는 정의의 신이 되려 한다. 그의 정의는 피를 요구한다. 그의 복수는 자비의 가능성을 죽인다. 그의 신은 금으로 만든 우상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샤일록은 율법에 매인 인간의 초상이다. 그는 계약(율법)을 절대화하여 인간의 피까지 담보로 삼는다. 그는 정의를 외치지만, 그의 정의에는 사랑이 없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 한 파멸된 인간의 전형이다. 율법만 있고 은혜가 없는 세계, 그것이 바로 샤일록의 베니스다.
3. 탐욕의 변주 ― 사랑과 금전의 경계
바사니오의 사랑 또한 완전히 순수하지 않다. 그는 포셔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부를 탐한다. 그의 구혼은 낭만이 아니라, 계산된 모험이다. 그는 말한다. “그녀는 부유하고 아름답다.” 사랑과 탐욕이 이 한 문장 안에 섞여 있다. 그의 여정은 인간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영혼의 사랑을 말하면서도, 금전의 도움 없이는 그 사랑을 시작할 수 없는 인간의 모순이다.
셰익스피어는 사랑조차 탐욕의 언어로 물든 시대를 보여준다. 포셔는 이 모든 갈등의 한가운데에서, 부유한 여인이자 지혜로운 재판관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세상의 정의가 피를 요구할 때, 하늘의 자비를 변호한다. 그녀의 말은 이 연극의 신학적 정점이다.
4. 자비의 법정 ― 포셔의 은혜의 설교
법정 장면에서, 셰익스피어는 자비와 정의의 대결을 무대 위에 올린다. 샤일록은 법을, 포셔는 은혜를 대표한다. 그녀는 말한다. “자비는 억지로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부드러운 비와 같습니다. 자비는 두 번 복이 되나니, 베푸는 자와 받는 자 모두에게 복이 됩니다.”
이 대사는 단지 문학적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복음의 언어다. 자비는 인간의 법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질서, 곧 은혜(grace)의 영역이다.
샤일록이 요구하는 ‘정의’는 피를 흘리지만, 포셔가 말하는 ‘자비’는 생명을 살린다. 그녀는 은근히 신학적 변론을 펼친다. “당신이 피를 흘리면, 당신도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요, 법은 당신을 죽일 것이다.” 율법의 칼날은 결국 그 칼을 든 자를 상하게 한다.
이 장면에서 셰익스피어는 기독교의 중심진리인 “율법은 인간을 죽이지만, 은혜는 인간을 살린다”를 연극의 언어로 재현한다.
5. 탐욕의 종말 ― 법과 복수의 한계
결국 샤일록은 패배한다. 그는 돈도, 복수도, 신앙도 모두 잃는다. 그의 몰락은 단순한 ‘악인의 벌’이 아니라, 율법주의의 붕괴다. 그는 법을 이용해 인간을 심판하려 했으나, 그 법이 자신을 심판한다. 그는 인간의 피를 요구했으나, 스스로 피 없는 껍질이 된다.
셰익스피어는 샤일록을 완전히 악마화하지 않는다. 그는 그를 인간으로, 탐욕과 상처의 피조물로 그린다. 그 안에는 우리 모두의 초상이 있다. 우리는 그를 조롱하면서도, 그 안에서 우리의 그림자를 본다. 그의 패배는 인간의 패배이며, 그를 심판하는 법정은 곧 인간 전체의 법정이다.
6. 기독교적 관점 ― 율법과 은혜, 정의와 자비
셰익스피어의『베니스의 상인』은 기독교적 신학의 두 축인 율법과 복음을 극의 구조 속에 새겨놓았다. 샤일록은 율법의 형상이다. 그의 계약은 완벽히 합리적이고 정당하지만, 그 안에는 사랑이 없다. 포셔는 복음의 형상이다. 그녀의 자비는 논리로 증명되지 않지만, 인간을 구원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탐욕은 단지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영적 오만이다. 샤일록의 탐욕은 정의를 빌린 복수이고, 바사니오의 탐욕은 사랑을 가장한 소유욕이다.
이 모두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인간의 자기중심성에서 비롯된다. 셰익스피어는 이를 통해 신학적 결론을 제시한다. 자비 없는 정의는 폭력이고, 은혜 없는 법은 죽음이다. 그리고 인간의 탐욕은 그 둘을 뒤섞어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7. 사랑의 승리 ― 은혜의 도시로 변한 베니스
연극의 마지막, 모든 갈등이 풀리고 포셔와 바사니오는 결혼한다. 안토니오는 용서를 얻고, 샤일록은 침묵 속으로 사라진다. 베니스는 다시 평화를 되찾지만, 그 평화는 단순한 화해가 아니라 하늘의 자비로 씻긴 도시의 회복이다.
그 위에 내리는 은혜의 비, 그것이 셰익스피어가 그린 마지막 장면의 보이지 않는 주인공이다. 포셔의 말처럼, 자비는 억지로 내릴 수 없다.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 곧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의 탐욕 위에 스며드는 순간이다. 그래서 『베니스의 상인』은 단지 법정극이 아니라, 은혜의 드라마다.
8. 인간의 탐욕, 하나님의 자비
『베니스의 상인』이 던지는 궁극적인 질문은 “정의와 계약, 복수와 이성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대답은 셰익스피어의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자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부드러운 비와 같습니다.” 이 문장은 단순한 시적 은유가 아니라, 탐욕으로 가득한 인간 세상에 내리는 하나님의 응답이다. 그 비가 내릴 때, 계약은 용서로 바뀌고, 복수는 회개로 바뀌며, 탐욕의 도시는 은혜의 도시로 변한다.
셰익스피어는 이 연극 작품에서 강력히 말한다. “인간은 탐욕으로 스스로를 팔지만, 자비로 다시 사라진다.” 이 문장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이 품고 있는 인간의 타락과 구원, 율법과 은혜의 역설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 표현이다.
“탐욕으로 스스로를 판다”라고 함은 인간의 자기파멸적 본성, 곧 탐욕과 자기 거래의 죄를 판다. 자기 영혼을 욕망의 시장에 내놓는다. 주인공 샤일록이 돈과 계약이라는 질서 속에서 자신을 지키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돈의 논리가 그를 구속한다. 그의 탐욕은 단순히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존심을 금전으로 환전하려는 욕망이다. 그는 자신이 법과 계약으로 세상을 통제한다고 믿지만, 결국 그 법이 자신을 심판한다. 그는 자비를 모르는 정의 속에서, 자신의 인간성까지 팔아버린다.
이처럼 인간은 탐욕으로 스스로를 판다. 자신을 지키려고 욕망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 욕망은 오히려 자신을 노예로 만든다. 이를 성경의 언어로 말하면,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자율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팔아넘긴 존재다.
인간은 “자비로 다시 사라진다.” 은혜의 회복을 경험한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을 절망으로만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라진다”는 말은 단순한 사라짐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욕망의 해체와 구원의 변형이다. 곧 인간이 자비(mercy)를 통해 자기의 욕망이 녹아내리고,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난다.
이 자비의 얼굴은 이 작품에서 포셔를 통해 나타난다. 포셔는 법의 언어로 정의를 말하면서도, 그 정의 위에 은혜를 놓는다. 그녀의 “자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부드러운 비와 같다”는 말은, 인간의 죄와 탐욕을 씻어내는 하나님의 은총이 은밀히, 그러나 확실히 세상 위에 내린다는 고백이다. 이 자비는 거래의 논리가 아니다.
샤일록이 요구하는 정의가 “피 한 방울까지 계산”하는 거래라면, 포셔가 말하는 자비는 값 없이 주어지는 은혜다. 이 은혜가 인간을 “다시 사라지게” 한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탐욕의 자아를 잃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다는 뜻이다. “사라진다”는 것은 파멸이 아니라 구원, 소멸이 아니라 회복을 가리킨다.
셰익스피어는 소유의 끝에서 은혜가 시작된다는 것을 인간학적 역설로 표현한다. 탐욕은 “갖고자 하는 욕망”이지만, 자비는 “내어주는 사랑”이다. 인간은 탐욕 속에서 자기 자신을 붙잡으려 하지만, 그 결과 더 깊은 결핍 속으로 빠진다. 반대로 자비는 자기 자신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충만을 얻는다.
셰익스피어가 말하는 복음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탐욕으로 자신을 팔아 사망에 이르지만, 하나님의 자비가 그를 다시 사서 그를 새롭게 만든다. 이것이 “인간은 탐욕으로 스스로를 팔지만, 자비로 다시 사라진다”는 문장의 신학적 의미다. 탐욕은 인간의 타락이고, 자비는 하나님의 구원이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는 바로 그 두 세계가 맞닿아 있는 도시다. 계약과 은혜, 법과 사랑, 정의와 자비 사이의 좁은 다리 위에서, 인간은 결국 어느 한 편을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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