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노는 사탄의 화로이다
―분노에 대한 한 편의 묵상 (칠거지악, 3-6)
분노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잠든 불의의 화로(火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불씨처럼 작고 조용하게 타오르다가, 어느 순간 세상을 태워버릴 만큼 거대한 화염으로 번진다.
인간은 이 불길을 두려워하면서도 끊임없이 가까이 다가가 손을 녹인다. 분노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상처받은 정의감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노할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느끼는 영혼이 살아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그 불길이 정화의 불이 될지, 파괴의 불이 될지는 우리 안의 ‘이성’과 ‘기도’가 얼마나 깨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
분노의 본질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이다. 위협받을 때, 억울할 때, 모욕을 당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불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 불이 죄가 아닌 경우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할 만한 일에, 적절한 때에, 적절한 정도로 화를 내는 것은 미덕”이라고 말했다. 모세가 금송아지 앞에서 돌판을 던졌던 분노, 예수가 성전의 상을 뒤엎으셨던 분노는 모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서 비롯된 거룩한 불이었다. 이런 분노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타락한 세상을 향한 애통에서 흘러나온다. 그것은 불의에 맞서는 사랑의 열이며, 생명의 질서를 지키려는 하나님의 숨결이다.
인간의 분노는 쉽게 탈선한다. 의로운 불은 교만과 복수의 욕망을 만나면 즉시 검은 연기를 내뿜는다. 인간의 분노는 언제나 자신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는 유혹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심판하겠다, 내가 갚겠다”는 속삭임이 들리는 순간, 분노는 더 이상 정의의 불이 아니라 교만의 화로가 된다.
이집트 사막의 수도사 아가톤이 “분노하는 자는 비록 죽은 자를 살릴지라도 하나님께 받지 못한다”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분노는 거룩한 열정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영혼을 어둡게 만드는 사탄의 불길이 되기도 한다.
이 불길의 위험성은 그 통제 불가능성에 있다.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분노를 “이성이 떠난 자리에 들어서는 광기”라고 했다. 그러나 그 광기는 단순한 감정의 폭발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이 도망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이 복수의 도구로 몰입된 상태다.
화가 극에 달하면 인간은 차분히 보복의 계획을 세운다. 이성은 여전히 작동하지만, 사랑이 빠진 이성은 냉철한 잔혹함으로 변한다. 분노는 이처럼 이성과 의지가 결합된 감정이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마음속의 분노는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복수의 형체로 나타난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 행동, 표정, 혹은 침묵 속에 은밀히 모습을 드러낸다.
성경은 분노를 어리석음의 징표로 보았다.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드러내나,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는다.”(잠 12:16) 분노는 즉각적인 감정의 폭발일 때 어리석음이 된다. 그러나 슬기로운 자는 그 불길을 품은 채 해가 질 때까지 지키지 않는다. 해가 지는 순간, 분노의 불은 어둠을 먹고 자라나기 때문이다. 바울은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권면했다. 그것은 단순히 화를 빨리 풀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의 구조적 경고다. 분노를 오래 품으면 그것이 독으로 변해 영혼의 혈관을 막는다.
이집트 사막의 수도사 에바그리우스는 분노를 “기도를 방해하는 가장 사악한 감정”이라 했다. 그는 분노가 영혼의 눈을 어둡게 만들어 하나님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다고 경고했다.
단테의 『신곡』은 이를 극적으로 형상화한다. 지옥의 늪 속에서 분노한 영혼들은 서로를 물어뜯고, 짙은 진흙 속에서도 여전히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으르렁댄다. 그들은 햇빛이 비추는 하늘 아래 있을 때조차 분노의 연기에 싸여 살았으며, 결국 그 어둠이 그들을 지옥으로 끌고 내려갔다. 인간의 분노는 이처럼 외부의 현실보다 내부의 감정에서 지옥을 만든다. 분노의 불은 세상을 태우기보다 먼저 자신을 태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는 완전히 악으로 규정될 수 없다. 분노는 정의를 향한 열망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하나님 자신이 분노하신다. 하나님의 분노는 충동이나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거룩과 사랑의 속성에서 비롯된 정결한 반응이다. 하나님은 불의와 죄를 미워하시지만, 그 목적은 파멸이 아니라 회복이다.
분노는 사랑의 한 형태이며, 자녀를 바로잡으려는 훈육의 열이다. 인간의 분노가 이 하나님의 분노를 닮을 때, 그것은 의로운 분노가 된다. 그 불은 미움의 불이 아니라 사랑의 불이며, 정죄의 칼이 아니라 회복의 불꽃이다.
분노를 다스리는 길은 억누름이 아니라 정화다. 분노를 없애려 하면 오히려 그것은 더 깊은 곳으로 스며든다. 마치 덮어둔 불씨가 꺼진 듯 보이지만, 언젠가 바람이 불면 다시 타오르듯이 말이다. 분노는 억제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빛에 드러내야 할 감정이다. 분노의 열은 사랑의 불빛으로 전환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예수의 분노가 그러했다. 그는 성전을 더럽힌 자들을 향해 채찍을 드셨으나, 그 분노의 끝에는 십자가의 용서가 있었다. 예수의 분노는 단죄가 아니라 구속이었다.
분노를 다스린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불을 제어하는 일이다. 그 불을 가라앉히는 것은 억제된 침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기도다. “주여, 내 안의 불을 평화의 불로 바꾸소서.” 이 기도는 단순한 억제의 요청이 아니라, 창조의 간구다. 하나님은 우리의 분노를 없애시는 분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의 불로 변모시키시는 분이다.
따라서 분노를 다스린다는 것은 냉각이 아니라 변형이다. 그 불을 꺼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 불이 빛이 되도록 돌려놓는 것이다. 그때 분노는 더 이상 파괴의 에너지가 아니라, 정의와 사랑의 에너지로 변한다.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그 불은 이제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된다.
결국 분노란 사랑의 그림자다.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의에 대한 분노는 정의를 향한 사랑이고, 배신에 대한 분노는 진실을 향한 사랑이다. 그러나 그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분노는 타인을 찢는 칼이 된다. 그러므로 분노를 다스리는 길은 사랑을 회복하는 길이며, 그 사랑은 언제나 십자가에서 시작된다.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는 안다. 하나님도 분노하셨으나, 그 분노의 끝은 용서였음을. 그분의 불길은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고, 오히려 구원의 빛으로 변했다. 인간의 분노가 하나님의 사랑과 만나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우리는 참된 평화를 배운다. 분노의 불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불이 더 이상 타인을 태우지 않고,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성숙한 영혼이 배우는 가장 깊은 기도이다. 분노를 사랑으로 태우라.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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