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으로 분노를 이기라
―분노에 대한 한 편의 묵상(칠거지악, 3-8)
분노는 영혼의 용광로다. 상처와 억울함, 무너진 기대와 흔들리는 자존이 녹아내리며 뜨겁게 끓어오르는 자리. 성경은 이 불길을 악으로만 단정하지도, 무조건 방치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분노의 현장을 하나님의 빛으로 비추어, 그 불이 파괴의 화염이 아니라 정화의 불이 되도록 이끈다.
성경의 분노 교훈은 한 문장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그러나 간결한 문장 안에, 원인에 대한 진단과 경계, 그리고 치유와 길들이기의 영성이 응축되어 있다. “분을 내되 죄를 짓지 말라”(엡 4:26).
우선, 성경은 분노의 근원을 마음의 지층에서 캐어 올린다. “너희 중 싸움이 어디로부터 오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약 4:1–3). 욕구가 신격화될 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마음은 칼을 간다.
창세기의 가인은 하나님께 받지 못한 제사를 동생 탓으로 돌린다. 그의 안색이 변하고(“코가 타오르다”는 히브리어 그림 언어처럼), 분노는 곧 살의가 된다(창 4:5–8). 여기서 원인은 ‘객관적 사건’이 아니라 ‘왜곡된 해석’과 ‘불만족한 욕망’이다.
잠언도 말한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큰 명철이 있고 성내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잠 14:29). 급한 분노 뒤에는 상한 자아, 좌절된 욕구, 높아진 자존(교만)이 얽혀 있다(잠 13:10). 자존이 왕좌에 앉을수록 분노는 신속하고 크다.
또 하나의 지층은 상처다. 멸시당했다는 느낌은 과거의 금이 현재로 번지는 통로가 된다. “어리석은 자는 분노를 당장 드러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잠 12:16). 참는다는 말은 억압이 아니라 ‘해석의 지연’이다.
성경은 ‘즉각적 폭발’이 아니라 ‘느림의 판단’을 지혜로 둔다. 그 느림은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라 신학이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출 34:6; 시 103:8) 분이시다. 더딤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분노의 또 다른 뿌리는 ‘통제의 우상’이다. 내 뜻대로 흘러야 한다는 욕망이 늘 강줄기를 바꾸려 들 때, 현실이 거슬리면 마음은 홍수를 일으킨다. 요나는 “내 말이 옳다”며 하나님의 긍휼에 화를 낸다(욘 4장).
하나님의 질문—“네가 성내는 것이 합당하냐?”—는 모든 분노의 현장에 걸어둘 표지판이다. ‘합당한가?’ ‘누구를 위한가?’ ‘얼마나 오래 가는가?’ ‘어떤 열매를 맺는가?’—이 네 물음은 분노가 의(義)의 불인지, 자아의 불인지 가려내는 거룩한 리트머스 시험지다.
성경은 분노 자체를 금하는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성전의 탐욕을 보시고 “노하심”(막 3:5)을 드러내셨고, 상을 뒤엎으셨다(요 2:15).
그러나 그분의 분노에는 몇 가지 표지가 있다. 첫째, 대상이 죄와 불의이지 사람 자체가 아니다. 둘째, 동기가 자기 체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 사랑이다. 셋째, 기간이 짧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엡 4:26). 넷째, 열매가 회복과 정화다. 예수의 분노는 늘 십자가의 용서로 수렴한다.
반대로 모세가 가데스에서 분노를 폭발시켜 반석을 쳤을 때, 하나님은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민 20:12)고 책망하셨다. 의로운 분노와 죄된 분노의 경계는 ‘거룩이 드러나는가’로 판별된다.
성경은 분노가 낳는 파괴성을 숨기지 않는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분냄으로 말미암아 행악하게 됨이니라”(시 37:8).
야고보는 더 노골적이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 분노가 혀를 타고 나갈 때, 그 불은 “온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약 3:6) 관계와 공동체를 잿더미로 만든다.
그래서 잠언은 집요하게 혀를 경고한다.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분노는 흔히 ‘정의’의 가면을 쓰지만, 그 뒤에서 혀는 전쟁을 벌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불을 다룰 것인가? 성경은 ‘끄는 법’보다 ‘길들이는 법’을 가르친다. 첫째, 지연과 침묵—“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시편의 지혜는 더 구체적이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마음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시 4:4). 마음에 말한다—내면에서 하나님께 먼저 말하고, 혀는 잠시 멈춘다. 이 침묵은 도피가 아니라 하나님께로의 회귀다.
둘째, 하늘 법정에 위탁—“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롬 12:19; 신 32:35). 맡김은 정의 포기가 아니라 심판권의 반환이다. 다윗은 두 번의 기회에도 사울을 치지 않았다(삼상 24, 26장). 시편의 탄식과 저주는, 칼을 들지 않기 위해 혀로 하나님께 고발장을 쓰는 영적 기술이다. ‘위탁’은 분노를 피로 씻지 않고, 기도로 씻는 길이다.
셋째, 화해를 향한 신속한 발걸음—예수는 예배보다 화해를 앞세운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먼저 가서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복수의 속도 대신 화해의 속도를 높이라. 에베소의 교회는 분노의 장식을 벗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로 부름받는다. 용서는 기억의 삭제가 아니라 심판권의 포기다. “아페시스”—붙잡은 것을 풀어 놓는 일. 나는 과거를 내 손에서 놓고, 미래를 하나님께 연다.
넷째, 자기 점검과 겸손—“사람의 슬기로운 것은 그의 노를 더디 하게 하며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화니라”(잠 19:11). 분노의 순간, 나는 무엇을 지키려 했는가? 체면? 통제? 우월감? 겸손은 방화벽이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한 문장이 불길의 방향을 바꾼다. 성령의 열매—온유, 절제—는 분노를 무력화하는 덕목이 아니라, 불을 ‘난방’으로 바꾸는 내면의 기술이다(갈 5:22–23).
다섯째, 의(義)를 사랑으로 완성—바울은 악을 미워하되(롬 12:9),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12:17),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한다(12:21). 성경의 의는 뜨거운 정의감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랑이 없는 의는 또 다른 폭력이 되기 쉽다(고전 13:1–3). 의와 사랑이 접속될 때, 분노는 창조적 에너지로 전환된다. 느헤미야의 분노는 백성의 착취를 멈추고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제도 개혁으로 이어진다(느 5:6–13). ‘제도화된 사랑’—공의는 그렇게 온기가 된다.
여섯째, 그리스도의 길로 개조—베드로는 십자가의 주를 이렇게 그린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예수의 제자됨은 분노의 회로를 십자가의 회로로 개조하는 일이다.
로마서는 한 걸음 더 간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화목제물”(롬 3:25)을 세우셨다.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가 십자가 위에서 사랑으로 완성되었다. 복음은 ‘분노를 말리지 말라’가 아니라 ‘분노를 십자가로 데려가라’이다. 그곳에서 분노는 죄책과 수치, 복수심과 통제욕을 태우고, 온유와 절제, 평강과 화해의 빛으로 변한다.
일곱째, 공동체적 안전장치—분노는 혼자 있을 때 커지고, 공동체 안에서 길들여진다. “평강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교회의 권면, 친구의 경고, 화해를 돕는 중재는 감정의 댐을 터지지 않게 하는 수문(樹門)이다. 잠언은 이렇게 말한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공동체는 이 ‘마음 다스리기’를 함께 훈련하는 학교다.
이 모든 길 끝에, 성경은 분노를 완전히 지워버리지 않는다. 그 대신 분노에 ‘복음의 방향’을 준다. 의로운 분노는 실제의 죄를 향하고(판단은 사실에 근거),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서 동기부여되며(자기 체면이 아니라), 절제되고 짧고(해가 지기 전 꺼지고), 회복과 정의라는 열매를 남긴다(회개와 화해, 제도적 선).
반대로 죄된 분노는 모욕감에 집착하고, 과장된 해석과 기억을 끌어다 붙이며, 오래 품고(원한이 되어), 말과 칼로 파괴를 남긴다. 의로운 분노는 애통과 함께 오고, 죄된 분노는 오만과 함께 온다. 의로운 분노는 기도문을 쓰고, 죄된 분노는 고발장을 쓴다—하나님께가 아니라 사람에게 쓴다.
밤길을 가다 보면, 횃불과 들불의 차이가 분명하다. 횃불은 길을 비추고, 들불은 길을 없앤다. 성경은 우리의 마음에 횃불을 들려준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마 5:9).
화평은 비겁함이 아니라, 가장 높은 형태의 용기다. 불을 끄는 용기가 아니라, 불을 빛으로 바꾸는 용기. 그 용기의 중심에는 언제나 한 이름이 선다—온유와 진리, 인내와 거룩,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 그분의 품에서, 우리의 분노는 맹목의 화염에서 성숙의 온기로 변한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배운다. 분노를 이기는 길은 감정의 제거가 아니라 복음의 형상화임을. 불을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십자가 아래서 불을 다루는 예술임을. 그 예술의 마지막 붓질은, 언제나 사랑이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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