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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의 탐식: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 문학 거장들의 식탐 이해에 대한 한 편의 묵상 (칠거지악 6-1)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의 문학 세계는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했지만 그들의 인간학은 하나의 축을 공유한다. 자기 배를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인간, 자기의 배가 신이 된 인간, 하나님 대신 자신을 신으로 섬기는 인간의 초상이다.

 

셰익스피어는 탐식(食貪, gluttony을 육체의 차원에서, 톨스토이는 사회의 차원에서, 도스토에프스키는 영혼의 차원에서 인간 욕망의 국면으로 그려냈다.


셰익스피어는 육체의 탐식을 다루었다. 주인공은 잔과 육고기로 인생을 채우려 하지만, 그 풍요 속에서 영혼은 점점 무뎌져 간다. 그의 포만은 생명의 충만이 아니라 양심의 마비이다. 그의 웃음은 단순한 희극이 아니라 영혼이 잠들어버린 인간의 웃음이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입과 위장을 수단삼아 죄의 메카니즘을 해부한다.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입에서 시작되고, 그 입이 결국 영혼을 삼킨다는 것을 보여준다.

톨스토이는 탐식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부활에 등장하는 귀족 사회는 배고픈 자들의 피로 자신의 식탁을 차린다. 음식은 풍요의 상징이 아니라 불의의 구조를 보여주는 사회적 은유다. 탐식은 한 사람의 식욕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 없이 다만 번영을 소비하는 방식이다. 톨스토이에게 식탐은 사회적 영혼의 병리 현상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 대신 물질의 안락함으로 구원을 대체한 상태를 가리킨다.

 

도스토옙스키에게 탐식은 영적 차원으로 심화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주인공 표도르의 카라마조프는 먹고 마시는 육체적 인간을 넘어 영혼까지 삼키는 인간이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허기를 인식하지 못하고 욕망과 쾌락으로 자신을 채우려 한다. 그러나 그 배부름은 끝없는 공허를 낳는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러한 유형의 인간을 자기 배를 신으로 삼는 자”(3:19)로 묘사한다. 탐식이 단순한 식욕이 아니라 신학적 반역, 곧 하나님이 낸 자신을 섬기는 행위임을 드러낸다.

이렇게 셰익스피어의 육체적 탐식, 톨스토이의 사회적 탐식, 도스토옙스키의 영적 탐식은 서로 다른 장르의 시대를 초월해 한 점으로 수렴된다. 이들의 문학은 모두 탐식의 본질을 신학적 언어로 번역한 인간학 삼부작이다.

 

셰익스피어의 신은 인간의 위장을, 톨스토이의 식탁은 사회의 구조를, 도스토옙스키의 숟가락은 영혼의 깊이를 비춘다. 세 작가는 모두 자기의 방식으로 이렇게 증언한다. 인간의 문제는 배가 고픈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가를 모르는 데 있다.

1. 헨리 4헨리 4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세계에서 인간의 죄는 언제나 연극의 한 장면처럼 살아 움직인다. 그의 무대에는 단순히 왕과 영웅만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위장과 양심도 배우로 등장한다.

 

셰익스피어의 헨리 4(1598, 1600)헨리 5(1600)의 주인공 펠스테프 경(Sir John Falstaff)은 육체의 무게로만이 아니라 영혼의 무게로 무대 한가운데를 점령한다. 펠스테프의 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다. 그 안에는 술과 고기, 농담과 게으름, 쾌락과 자기 정당화의 논리가 뒤섞여 있다.

 

그의 식탁은 풍요의 상징이 아니라 탐식의 제단이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음식의 은혜를 기억하기보다, 그 음식이 가져다주는 쾌락의 온기를 숭배-예배한다. 먹고 마시는 행위는 그에게 생명의 감사가 아니라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술 취한 신학이 된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웃음을 자아내지만, 그 웃음은 결코 가벼운 희극의 웃음이 아니다. 그것은 양심이 잠들어버린 인간의 나른한 웃음, “오늘만 살자는 세속적 신앙의 희미한 미소다.

 

주인공 펠스태프는 탐식이 단순한 위장의 욕망이 아니라 영혼의 병리적 상태임을 드러낸다. 그는 무절제한 식욕으로 자신을 채우지만, 그 포만감 속에서 그의 양심은 점점 더 굶주린다.

 

그의 배는 불룩하지만, 그의 영혼은 텅 비어 있다. 그는 인생을 오로지 먹고 마시기 위한 잔치로 선언한다. 그러나 그의 선언은 결국 하나님 없는 축제의 의미와 책임이 사라진 공허한 향연이 된다. 그의 웃음 뒤에는 회피가, 그의 포만 뒤에는 공허가, 그의 즐거움 뒤에는 깊은 피로가 있다.

 

셰익스피어는 탐식을 단순한 도덕적 교훈으로 그리지 않는다. 인간의 욕망을 연극적 상징으로 펼쳐 놓는다. 펠스태프의 육체는 탐욕의 시각화이며, 무기력은 영혼의 타락이 어떻게 웃음으로 위장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실험이다. 인간이 자신의 죄를 쾌락이라는 유머로 덮어버릴 때 그 죄가 얼마나 더 깊은 자기기만으로 변하는지를 증명한다. 그의 탐식은 결국 영혼의 둔화, 책임감이 마비된 인간의 마지막 표정이다.


펠스티프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세계에서 탐식의 죄가 얼마나 존재의 깊은 층을 파고드는가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의 배는 인간 욕망의 상징이오, 그의 나태한 영혼은 하나님 없는 삶의 종말이다. 펠스태프가 무대 위에서 남긴 유쾌한 농담은 사실상 자신의 죽음을 연기하는 영혼의 독백이다.

 

 

셰익스피어는 펠스태프를 내세워 탐식이 단순히 음식을 사랑하는 죄가 아니라 삶을 잘못 살아가는 죄, 무질서한 사랑(amor inordinatus)의 한 얼굴임을 폭로한다. 펠스패프의 식욕은 생명, 삶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예배다. 결국 무절제한 잔치는 하나님 없이 배를 신으로 섬기는 인간의 미사가 되어 버린다.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한 방울의 술, 한입의 고기, 한 번의 웃음 속에서도 인간의 영혼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펠스태프는 그렇게 탐식의 죄를 연극 형식으로 고백하는 인간의 자화상, 먹음으로써 잃어버린 낙원의 후손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2. 부활


레프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부활은 배고픈 인간의 이야기다. 그 배고픔은 위장의 결핍이 아니라 영혼의 굶주림이다. 귀족들의 식탁은 반짝이는 은그릇과 수정 잔으로 채워져 있지만, 그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인간의 내면은 점점 더 굶어간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먹는다는 행위를 단순한 생존의 행위로 그리지 않는다. 그것은 불평등한 세계의 상징, 그리고 하나님 없는 인간의 허기로 나타난다.

 

러시아 귀족들의 연회장 그곳에 공기는 포만감으로 무겁다. 숟가락과 포크가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예배의 종소리처럼 울려 퍼진다. 그들의 재단은 식탁이고, 그들의 신은 입맛이다.

 

톨스토이는 이 장면을 서정적으로 그러나 잔인하게 그려낸다. 그가 비판하려는 것은 음식이 아니다.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기는 사회 전체의 구조다. 배고픈 농민의 굶주림이 귀족의 미식으로 이어지는 세계, 그것이 부활이 그려낸 탐식의 세계다. 그는 먹는 자와 굽는 자를 대비시켜, 그를 먹는 자와 굽는 자를 대비시키며, 탐식이 단지 개인의 욕망이 아니라 사회적 불의의 의식 구조임을 폭로한다.

 

귀족들의 입술은 지방으로 번들거리고, 그들의 눈은 마치 자신이 먹은 음식을 반사하듯 흐릿하다. 그들의 손은 기름에 젖어 있지만, 마음은 메말라 있다.

 

작가는 이 포만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면서 묻는다. “이들이 무엇으로 배를 채우는가? 그들의 영혼은 무엇으로 굶어가고 있는가?”


주인공 네흘류도프는 바로 이 탐식의 세계 한가운데서 양심의 식욕을 되찾는 인간이다. 그는 한때 이 식탁의 일원이었다. 화려한 정, 화려한 접시 위의 고기, 달콤한 포도주, 정제된 대화 속에서 그는 자신의 도덕을 잊어버렸다.

 

톨스토이는 그를 다시 굶주리게 한다. 네흘류도프가 만난 것은 빵이 아니라 진실의 굶주림, 음식이 아니라 속죄의 배고픔이었다. ‘부활은 바로 이 굶주림에서 시작된다. 주인공은 더 이상 맛있는 것을 찾지 않는다. 대신 의로움의 맛을 찾는다.

 

그는 이 과정을 거쳐 탐식의 반대편에 있는 영적 식욕을 보여준다. 인간은 배가 고파서 먹는 것이 아니라 불안을 달래려고 먹는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탐식을 단순히 음식의 문제가 아니라 불안의 신학적 징후로 제시한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영혼의 움직임 그것이 바로 탐식의 본질이다. 귀족들은 빵으로 자신을 채웠지만, 네흘류도프는 죄책감과 회개로 자신을 채운다. 이 차이가 곧 부활의 문턱이다.

 

3.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 1821-1991)는 탐식을 영적 탐욕의 은유로 사용했다. 그의 세계는 언제나 식탁에서 시작된다. 그 식탁 위에는 빵이 아니라 욕망의 무게가 올려져 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1880)의 주인공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는 먹고 마시는 인간이 아니라, 삼키는 인간이다. 탐식, 음욕, 권력욕이 한 몸으로 뒤엉킨 인물이다. 그는 음식과 여인과 권력을 구분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탐색한다.

 

그의 식탐은 배의 문제가 아니라 신의 부재를 채우려는 영혼의 폭식이다. 그의 입은 늘 열려 있고, 그의 영혼은 늘 닫혀 있다. 도스토엡스키는 이 인물을 앞세워 탐식이 얼마나 신학적인 행위인지를 폭로한다.


표도르의 탐식은 생리적 욕망이 아니라 신을 대신해 자기 자신을 섬기는 종교 행위다. 그는 자신을 위해 먹고, 자신을 위해 사랑하고, 자신을 위해 믿는다. 그의 위장은 예배당이고, 그의 식욕은 찬송이 된다. 그는 하나님 없이도 배부를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탐식의 본질이다. 탐식-식탐 활동은 하나님 없는 인간이 자기 배를 하나님으로 삼는 행위다. 그의 식탁은 우상의 제단이다.

표도르의 아들인 드미트리 이반, 알리샤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아버지의 배를 닮았나 닮았다. 드미트리는 육체의 배로, 이반은 이성의 배로, 알리샤는 영혼의 배로 세상을 삼킨다. 그러나 스토옙스키의 시선은 언제나 그들의 안쪽으로 향한다.

그는 인간의 위장을 통해 영혼의 공간을 본다. 욕망이란 결국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시도이며, 탐식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그 배고픔을 달래려는 인간의 실패한 구원 시도다.


스토옙스키의 식탐에 대한 묘사는 죄와 벌에 등장하는 루진과 스비드리가일로프도 자신을 채우려는 식욕적 존재들로 묘사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보여준 식탐, 곧 영적 탐욕의 주제가 죄와 벌에서는 변주(變奏)로 등장한다. 같은 주제이지만 다른 인물, 다른 형식, 다른 음색으로 반복되고 재해석된다.


루진과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음식을 먹지 않지만 늘 씹는자들이다. 그들의 대화, 그들의 개혁, 그들의 사랑은 모두 자기 자신을 섬기려는 식욕 행위다. 그들의 영혼은 식탁 위의 칼과 같다. 날카롭고, 차갑고, 그러나 아무것도 자르지 못한 채 흔들린다. 그들의 식탁은 단순한 허영이나 쾌락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굶주림을 자기 사랑으로 오해한 영적 오식(誤食)이다.

 

스토옙스키는 먹는다는 행위를 인간 실존에 대한 은유로 쓴다. 먹는다는 것은 무언가 자신을 채우려는 시도, 곧 인간이 결핍을 견디지 못한다는 증거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아무리 많이 먹어도 그 배고픔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 까닭을 알고 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인간의 허기는 하나님을 향 배고픔이라는 사실이다. 표도르는 그 허기를 술로, 여인으로, 웃음으로 덮었지만, 그의 내면은 여전히 굶주리고 있었다. 그의 폭식은 영혼의 절규였다.

 

도스토옙스키에게 탐식은 죄라기보다 증상이다. 하나님이 사라진 자리에서 인간은 자신을 먹기 시작한다. 세상은 한 끼의 식사처럼 소비되고, 사람은 사랑이 아니라 섭취의 대상으로 변한다.

 

탐식은 결국 영혼의 식인(食人)이다. 스토옙스키는 이 영적 포만의 지옥을 누구보다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의 신은 배요, 그들의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3:19). 그는 이 성경 구절을 고스란히 소설로 옮겨 놓는다.

 

그가 무대에 올리는 인물들은 늘 허기져 있다. 그들은 진리를 논하고 사랑을 외치지만, 사실은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메우려고 자기 자신을 먹고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를 신학적으로 읽어낸다. 탐식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기 자신을 섭취하는 행위, 곧 신의 부재를 먹음으로 부정하려는 시도다.

 

그래서 그는 말없이 우리에게 묻는다. 인간은 무엇으로 배부를 수 있는가? 쾌락인가, 지식인가, 권력인가? 아니면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의 빵인가?


도스토옙스키의 대답은 언제나 동일하다.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자신을 채우는 모든 시도는 탐식이다. 그것이 음식이든 사망이든, 이성이든 권력이든 상관없다. 그는 펠스테프처럼 웃지 않는다. 그의 인물들은 웃지 못하고, 그저 먹으며 웃고, 울며 먹는다.

 

결국 도스토옙스키의 러시아 기독교 문학은 하나의 복음적 선언으로 귀결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4:4).

 

도스토엡스키의 식탁은 생명의 빵을 담은 거울이다. 인간이 무엇으로 배부르려 하는가를 비추는 영혼의 식탁 위에 놓인 성경이다. 식탐은 단순한 식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욕망을 삼키는 존재의 탐욕이다. 탐식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배를 섬기는 우상숭배(3:19).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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