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관의 피: 셰익스피어의 탐욕의 신학 1
--탐욕에 대한 한 편의 묵상(칠거지악, 3-3)
1. 피로 물든 야망의 새벽
스코틀랜드의 안개 낀 황야, 천둥소리와 함께 세 명의 마녀가 등장한다. 그들의 음성은 한낮의 공기보다 어둡고, 그그들의 목소리는 한낮의 공기보다 어둡고, 그들이 내뱉는 말은 인간의 욕망보다 교묘하다. “맥베스여, 그대는 장차 왕이 되리라.” 이 한 마디는 에덴 동산의 뱀이 던진 한 마디와 같다.“네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와 같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Macbeth, 1623)는 그의 4대 비극 중 가장 짧지만 가장 강렬한 작품으로 꼽히는 희곡이다. 마녀들의 예언에 사로잡힌 한 장군이 야망에 눈이 멀어 살인을 저지르고 결국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다.
셰익스피어 사후에 편집된 이 책은 탐욕과 야망의 본질을 다룬 인간학적 비극이자, 기독교적 죄의 서사다. 전장에서 용맹으로 이름을 떨친 귀족 맥베스는 충성스럽고 절제된 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마녀의 예언은 그의 내면 깊숙이 잠들어 있던 탐심의 불씨를 건드린다. 그 불은 작게 피어올랐지만, 이내 그의 영혼을 전부 태워버린다.
톨스토이의 『사람에게는 얼마 만큼의 땅이 필요한가』가 말하는 “조금만 더”가 인간의 탐욕을 드러내듯이,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왕이 될 수도 있다”는 속삭임 앞에서 무너진다. 탐심은 언제나 가능성의 얼굴로 찾아온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유혹이다. 그리고 인간은 유혹 앞에서 신의 음성보다 자기 안의 욕망을 더 쉽게 듣는다.
2. 유혹의 목소리 ― 마녀와 인간의 거울
셰익스피어의 마녀들은 인간의 운명을 조종하는 초자연적 존재로 보이지만, 실은 인간 내면의 탐욕을 형상화한 그림자다. 그들의 말은 강요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말할 뿐이고, 인간은 그 말을 스스로 실현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타락의 음성이다.
“그대는 글래미스의 영주요, 또한 코도르의 영주이며, 머지않아 왕이 되리라.”
맥베스가 이 예언을 듣는 순간, 그의 눈빛이 흔들린다. 그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마음속에서는 살인을 계획하고 있다. 죄는 언제나 외부의 강제가 아니라 내면의 상상으로부터 시작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탐심은 행위 이전의 죄, 인간 죄성의 헛간에 숨어 있는 욕망이다. 그것은 이미 욕망의 단계에서 시작된 불순종이다.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마음에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했다. 셰익스피어는 바로 이 원리를 문학적으로 구현한다. 맥베스는 아직 칼을 들지 않았으나, 그의 심장은 이미 왕을 죽였다.
3. 왕관의 유혹 ― 야망의 신학
맥베스의 비극은 단지 권력욕 때문이 아니다. 그의 탐욕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려는 인간의 오만이다. 그는 왕위가 자신에게 예언된 것이라면, 그것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성취의 방식이다. 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섭리를 앞당기려 한다.
이것이 탐욕의 본질이다 — 신의 질서를 신뢰하지 못하고, 인간이 자신의 시간표를 신의 뜻 위에 올려놓는 그것이다. 밤의 어둠 속에서 맥베스는 결단한다. “별들이여, 너희의 불을 감추어라. 내 검은 욕망을 비추지 말라.” 그의 고백은 기도 같지만, 사실상 반(反)기도다. 그는 하나님의 빛을 피하려 한다.
이 장면은 시편의 반전이다. 시편 기자는 “주의 빛이 내 어둠을 밝히신다”고 노래했다. 그러나 맥베스는 “빛이 내 어둠을 드러내지 않게 하소서”라고 속삭인다. 탐욕은 결국 빛을 두려워하는 어둠의 신앙이다.
4. 죄의 연쇄 ― 레이디 맥베스와 유혹의 합창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탐욕을 개인의 문제로만 그리지 않는다. 탐심은 언제나 공모의 죄다. 레이디 맥베스가 남편의 주저함을 비웃으며 말할 때, 욕망은 부부의 언어로 합창이 된다. “당신이 왕이 되려면, 피로써 길을 열어야 해요.” 그녀는 인간 욕망의 또 다른 얼굴인 야망의 정당화를 대변한다. 남편의 양심을 ‘겁쟁이의 핑계’라 부르고, 그를 부추긴다.
그러나 살인의 밤이 지나자, 그 피는 그녀의 손에서 씻기지 않는다. “이 손에 묻은 피가 바다를 붉게 물들이겠구나.” 그녀의 광기는 단지 죄책감이 아니라, 탐욕이 남긴 영혼의 부식이다.
셰익스피어는 탐욕의 결말을 단순한 도덕적 징벌로 끝내지 않는다. 그는 탐욕을 영혼의 붕괴로 묘사한다.
맥베스와 그의 아내는 더 이상 잠들지 못한다. 잠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은혜의 상징인데, 그들은 그 은혜를 스스로 끊어버린다. “나는 잠을 죽였다.” 맥베스의 이 고백은 곧 “나는 평안을 잃었다”는 영적 선언이다.
5. 피의 왕좌 ― 탐욕의 파국
왕을 죽이고 권좌에 오른 맥베스는 잠시 승리의 미소를 짓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파멸의 씨앗으로 가득하다. 탐욕은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왕이 되었지만, 이제는 권력을 빼앗길까 두려워한다. 그는 바그코를, 그 아들을, 그리고 모든 위협이 될 만한 자들을 차례로 제거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자신이 세운 왕좌 밑에서 지옥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는 사탄이 심어놓은 불안을 먹고 사는 괴물이 된다. 밤마다 환영이 그를 괴롭히고, 피의 환상이 그를 쫓는다. 그는 스스로 신이 되려 했으나, 결국 신의 심판 아래 놓인 자가 된다.
그의 왕국은 무너지고, 아내는 광기 속에 죽고, 마지막 전투에서 그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는 아무도 나를 죽일 수 없다”는 마녀의 말만 믿고 싸운다. 그러나 그의 종말은 역설적이다. 그의 상대인 맥더프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일찍 잘려 나온 자”였다. 결국 그는 자신이 붙잡은 예언의 언어 속에서 자기 멸망의 운명을 스스로 완성한다.
6. 셰익스피어의 신학 ― 탐욕은 신의 자리를 훔친다
맥베스의 죄는 단지 살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찬탈하려는 탐욕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신다”는 진리를 거부하고, 인간이 왕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의 욕망은 에덴동산의 아담과 같다. 하나님 없이 선과 악을 판단하려는 교만, 바로 그 교만이 탐욕의 심장이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비극을 통해 신학적 명제를 연극의 형식으로 드러낸다. 죄는 욕망의 생각에서 시작된다. 탐욕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함이다. 야망은 스스로 신이 되려는 시도다. 그리고 그 끝에는 언제나 피와 어둠이 있다.
셰익스피어는인간의 비극을 통해 신학적 명제를 연극의 형식으로 드러낸다 이 작품은 단순히 왕좌의 이야기나 정치의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신으로 삼을 때, 어떻게 파멸에 이르는가를 보여주는 신학적 경고다.
7. 어둠의 심연에서 ― 구원의 그림자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타락 속에서도 미묘한 구원의 여운을 남긴다. 레이디 맥베스가 광기 속에서 “이 피를 지워 달라”고 울부짖을 때, 그것은 은연중에 ‘용서받고 싶다’는 영혼의 울음이다. 그녀의 절망은 부정신앙(不正信仰, unbelief, false faith)의 고백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을 갈망하는 마지막 몸부림으로 읽을 수 있다. 무신론적 불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왜곡된 믿음이다. 죄의 자각은 있었으나 은혜의 신뢰가 결여된 상태이다. 그녀의 절망 속에는 “나는 너무 더럽기 때문에 하나님도 나를 용서하지 못하실 것이다”라는 은근한 불신이 깔려 있다. 이것이 바로 부정신앙이다. 죄를 깨닫지만, 하나님의 용서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 절망은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부정하는 절망적 신앙이다.
맥베스 부부의 파멸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비극이지만, 동시에 은혜의 필요성을 드러낸다. 셰익스피어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침묵 속에서 성경의 목소리가 들린다. “죄가 많아진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느니라”(롬 5:20)
8. 교훈 ― 왕관은 무겁다
『맥베스』는 결국 한 인간의 야망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발문이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마녀의 속삭임이 있고, 레이디 맥베스의 유혹이 있으며, 왕관을 탐하는 맥베스의 불안이 있다.
셰익스피어는 묻는다. “너는 무엇을 위해 왕이 되려 하는가?” 그 질문은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다. 하나님이 주권자임을 잊는 순간, 인간은 반드시 누군가의 피 위에 서게 된다.
맥베스의 손에 묻은 피는 씻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 피는 또한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면 씻을 수 없음을 증언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어둠은 인간의 어둠을 드러내기 위한 배경이며, 그 위에 비치는 작은 빛,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의 탐욕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진리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왕관은 결국 무덤의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십자가는, 피로 물든 왕관 위에 드리워진 하나님의 자비의 표지다. 이것이 셰익스피어가 남긴 마지막 질문의 의미다. 인간은 왕이 되고싶어 했으나, 하나님은 종의 모습으로 오신 왕을 통해 구원을 이루셨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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