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설교와 정치적 설교
정통 신학은 언제나 역사 속의 논쟁 속에서 형성되어 왔다. 교회는 이단이 제기한 문제들에 직면할 때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성령의 인도 아래 교리적 판단을 정립해 왔다. 그 과정에서 교회는 무엇이 복음의 진리이며 무엇이 그 진리를 왜곡하는가를 분별했고, 그렇게 형성된 신학적 합의가 곧 보편교회의 정통 교리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정통 신학은 단순히 평온한 사색 속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도전과 논쟁 속에서 다듬어져 온 신앙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강단에서 정치적 주제를 다루는 일에 비교적 신중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는 교회가 정치적 분열에 휘말리는 것을 경계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동시에 설교자가 사회와 정치 현실을 깊이 이해하고 성경적으로 해석할 만큼 충분한 인문적 식견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정치와 사회 문제는 단순한 의견 표명이 아니라 역사, 철학, 법, 제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요구하기 때문에 설교자들에게는 쉽지 않은 영역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신학 전통은 오래전부터 설교자의 이상적 모습으로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든 목회자”라는 표현을 사용해 왔다. 이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동시에, 그 말씀이 오늘의 현실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성실하게 성찰해야 한다는 뜻이다. 복음이 인간의 삶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통치 선언이라면, 설교 역시 개인의 내면적 신앙에만 머물지 않고 시대의 현실과 대화를 시도할 수밖에 없다.
최근 손현보 목사가 주일예배 강단에서 정치적 주제를 설교하면서 언론과 교회 안에서 논쟁이 일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문제의 연장선에 있다. 이 논쟁은 단순히 한 설교자의 발언이 적절했는가를 넘어서, 강단이 어디까지 공적 현실을 다룰 수 있는지, 그리고 복음의 공공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다시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감정적 비난이나 단순한 정치적 입장 대립으로 흘러가기보다, 성경과 신학 전통에 근거한 차분한 토론 속에서 이루어질 때 교회와 사회 모두에 의미 있는 성찰을 제공할 수 있다.
설교단에서 정치 주제의 설교를 한 손현보 목사에 대하여 한국기독교윤리실천운동 관련자이며 ‘고사모’ 그룹의 관련자 이영우 장로는 언론사에 설교강단의 정치 주제의 설교를 비난하는 글을 실었다. 이에 대하여 ‘고애연’ 관련자 김한식 목사는 비판의 글을 실었다. 성경과 신앙고백에 근거한 신학적 반박이 아니라, 정치적 인상 비평과 감정적 낙인을 신학의 언어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는 요지의 글이다.
진리는 고립된 주장 속에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필요를 채우려는 서로의 성실한 노력 속에서 점점 더 명료하게 드러난다. 서로 다른 문제 제기와 응답, 비판과 성찰의 과정을 거치면서 교회는 성경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신앙의 진리는 더욱 분명하게 정리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논의와 노력 자체는 교회가 진리에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건강한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서로의 진지한 시도와 노력을 환영할 만한 일이다.
김한식의 이영우에 대하에 반박의 논점은 일곱 가지다. 첫째, 논점 회피(허수아비 논법)이다. 이용우는 설교의 신학적 문제(본문 왜곡, 교리 충돌 등)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논쟁을 “정치 선동 여부”라는 프레임으로 바꿔 본래의 신학적 질문을 회피했다.
둘째, 신학적 근거 결여다. “탈선”, “정치 선동”, “복음의 자리 찬탈” 같은 강한 판정어를 사용하면서도 본문 주해, 문맥 분석, 교리적 근거, 신앙고백서 충돌 등 신학적 입증을 제시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정치적 인상 비평에 가깝다는 비판이다.
셋째, 선지자적 설교를 사실상 부정한다. 이용우는 원칙적으로는 선지자적 공적 설교를 인정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공적 악과 정치 문제를 다루는 설교는 곧바로 정치 선동으로 규정한다. 이는 결국 선지자적 사명을 실질적으로 봉쇄하는 모순이라는 지적이다.
넷째, 정교분리를 왜곡한다. 이용우는 정교분리를 근거로 강단의 정치적 발언을 비판하지만, 글의 논리상 이는 정교분리가 아니라 강단 침묵론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개혁주의 정교분리는 국가와 교회의 직무 구별이지 교회의 공적 발언 금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섯째, ‘혐오’라는 감정적 낙인을 사용한다. 이용우는 “혐오”, “증오”, “편 가르기” 등의 표현을 반복하지만 신학적으로 무엇이 혐오인지 기준을 제시하지 않았다. 결국 개인의 불쾌감이나 정서를 신학적 판정처럼 사용했다는 비판이다.
여섯째, 복음의 공공성을 축소한다. 교회의 정치화를 우려한다는 명분 아래 공적 사안에 대한 설교적 적용까지 제한하는 방향으로 논리가 전개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복음을 개인적 위로 수준으로 축소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일곱째, 신학적 비판이 아니라 정치적 낙인이다. 이용우의 글은 손현보 목사의 설교가 신학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입증하지 못했다. 대신 “정치 선동”, “혐오” 등의 낙인으로 불편한 강단을 제거하려는 시도였다고 평가한다.
성경의 기능은 개인의 경건과 영성, 윤리를 지도하는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 성경은 인간의 내면적 신앙만을 다루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전체와 그 질서를 바라보게 하는 계시의 말씀이다.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은 악을 배제한 모든 영역 위에서 여전히 주권적으로 통치한다.
성경은 죄 사함과 구원의 메시지를 핵심으로 담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단지 개인의 구원을 설명할 목적만으로 주어진 책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뿐 아니라 창조, 역사, 공동체, 정의, 통치, 인간 삶의 질서 등 세계 전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함께 드러낸다.
따라서 성경은 인간의 영적 구원을 중심에 두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삶과 사회와 역사 전체를 향해 말하는 포괄적 계시의 책이다. 성경은 개인의 신앙을 형성하는 말씀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전면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예배 강단은 단순히 개인의 내면적 위로를 제공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인간과 사회의 죄를 비추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리다. 성경의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시대의 불의와 왜곡을 향해 말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복음을 개인의 구원이나 심리적 위로에만 가두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진리를 공적으로 증언해야 할 책임이 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이러한 강단의 공적 사명을 충분히 감당하는 일을 주저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회적 갈등을 건드리는 설교가 교회 내부의 불편을 낳을 수 있고, 정치적 논쟁에 휘말릴 수 있으며, 교회의 평온한 분위기를 깨뜨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현대 설교 강단은 종교의 역할을 개인적 영역으로 축소하는 특징을 보인다. 성경을 사사화(私事化)하는 경향이 강하다. 강단 역시 공적 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저함이 계속되면 강단은 점차 시대의 현실과 분리된 공간이 되고 말 것이다. 복음이 인간의 삶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통치 선언이라면, 그 말씀은 개인의 영혼뿐 아니라 사회의 질서와 인간 공동체의 삶에도 빛을 비추어야 한다. 설교자가 공적 악과 불의를 외면한 채 신앙을 오직 사적인 위로의 언어로만 말한다면, 강단은 성경이 보여주는 선지자적 전통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
설교 강단이 특정한 정치 세력의 도구로 전락함은 타락 그 자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설교자가 공적 영역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배신이다. 교회는 세상의 권력을 장악하려고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비추는 공동체이다. 설교자는 신중함과 분별력을 가지고, 그러나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시대 속에 적용해야 한다.
‘정치설교’와 ‘정치적 설교’는 다르다. ‘정치설교’는 성경이 말하는 정의, 권력, 통치, 공공의 책임과 같은 정치적 주제를 성경의 맥락 안에서 해석하고 선포하는 설교다. 이는 성경 자체가 다루고 있는 공적 삶의 문제를 신앙의 빛 아래에서 설명하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개인의 삶뿐 아니라 사회와 공동체의 질서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설교이다.
반면 ‘정치적 설교’는 특정한 정치 이데올로기나 정파적 입장을 먼저 전제한 뒤,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도구적으로 끌어오는 설교를 의미한다.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한 해방신학 유형의 설교가 이에 해당한다. 이 경우 성경은 설교 메시지의 기준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정당화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설교는 복음의 선포라기보다 정치적 주장에 가까워질 위험이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강단이 정치적 현실을 언급하느냐 여부가 아니라, 성경이 현실을 해석하도록 하는가, 아니면 현실의 이데올로기가 성경을 이용하도록 하는가에 있다. ‘정치설교’는 성경 말씀이 사회와 역사 속에서 갖는 의미를 드러내려는 시도이다. 반면, ‘정치적 설교’는 성경을 정치적 목적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이 둘을 구분하는 일은 강단의 책임과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주목할 것은 설교가 정치적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설교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가 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 정의를 오늘의 삶 속에서 어떻게 선포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설교자의 본래적 소명이다. 강단이 이 사명을 회피하지 않을 때, 교회는 비로소 복음의 공공성을 증언하는 신앙고백공동체로 설 수 있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리포르만다> 게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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