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헨델 메시아의 구원 서사
헨델 메시아의 배경
에덴 이후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보편적 정서는 불안이다. 동생을 살해한 가인은 에덴의 동쪽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성경은 그곳을 놋이라 일컫는다. 놋(Nod)은 히브리어로 ‘유리하다’, ‘방황하다’라는 뜻이다.
사랑해야 할 대상에게 등을 돌린 인간이 머무는 삶의 자리로 적합한 이름이다. 뿌리 뽑힘, 안식 없음, 고향 상실이야말로 시간 속을 걸어가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이다. 하이데거도 인간의 근본 정조가 불안이라고 말했다. 불안은 특정한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낯설어지는 체험이다.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불안의 뿌리이다.
불안에 사로잡힌 인간은 불안의 대용물을 찾기 위해 애쓴다.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를 맹렬하게 추구하는 것도 결국은 자기 속에 있는 결핍을 채우기 위한 몸부림이다. 인간은 저마다 자기를 세상의 중심으로 인식한다. 중심이 되려는 각자의 욕망이 부딪칠 때마다 갈등과 분열은 심화된다.
갈등은 일쑤 다툼으로 이어지고, 그 규모가 커지면 전쟁이 된다. 폭력이 일상이 되고 파괴의 열정이 세상을 뒤엎을 때 사람들은 전적으로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기를 기다린다. 기원전 8세기, 살인 기계인 앗시리아 제국이 중근동 세계를 피로 물들일 때 이사야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눕고,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니는 세상의 꿈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다. 어처구니없는 꿈이지만 그 꿈조차 박탈당한다면 인간은 심연의 잡아당기는 힘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세상의 꿈은 언제나 어리석어 보인다. 하지만 그 어리석음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함이다.
위기는 우리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몰지만 새로운 기회의 문이 되기도 한다. 창조적인 이들에게는 위기야말로 변화의 돌쩌귀이다. 18세기 초반, 영국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던 헨델도 삶의 위기에 직면한다. 건강에 적신호가 켜져 다소 의기소침해졌고, 제작비용이 많이 드는 오페라에 대한 수요가 줄어 들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막 산업혁명의 초기 단계로 진입하고 있던 영국은 일종의 혼돈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빈민가가 형성되었고, 도시 위생은 나빠졌고, 범죄는 늘었다.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계급갈등도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기존의 종교는 그러한 사회 문제에 적절한 답을 주지 못했다. 웨슬리 형제가 시작한 감리교 운동은 바로 그런 상황에 대한 응답이었다. 사람들 속에 묻혀 있던 신성한 사랑의 불꽃을 재점화시키는 것이 그들의 소명이었다. 형식적 신앙을 넘어 마음의 변화를 지향했던 것이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현실에 대한 시대적 응답이다. 오페라가 주춤하던 시기에 그는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오라토리오를 영국에서 대중화하는 데 성공했다. 성경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독창, 중창, 합창, 오케스트라가 서사를 구성한다. 레치타티보는 빠른 서사적 진행을 이끌고, 아리아는 서정적인 감정을 드러내고, 합창은 성경의 핵심 내용을 요약하는 동시에 극적인 긴장으로 청중들의 신앙적 응답을 유도한다.
1741년, 생의 위기에 직면했던 헨델이 불과 24일 만에 작곡을 완료한 ‘메시아’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예언과 성취’는 메시아의 도래를 다루고, 2부 ‘수난과 속죄’는 메시아의 구원 사역을 다루고, 3부 ‘부활과 최후 승리’는 구원의 완성을 노래한다.
제1부
삶이 곤고해지고, 역사의 전망이 불투명해질 때 사람들은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기를 바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랫동안 대제국의 틈바구니에서 아슬아슬한 생존의 줄타기를 해야 했다.
동쪽으로는 앗시리아와 바벨론 제국, 남쪽으로는 애굽, 서쪽으로는 그리스와 로마 제국의 압박을 받았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으로 이스라엘은 전쟁 기계인 제국들의 야욕 속에서 가녀린 생존을 이어가야 했다. 어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사람들은 언젠가 메시아(‘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오셔서 그들을 궁극적으로 구원해 주시리라는 꿈을 키웠다.
말씀의 대언자인 예언자들은 역사의 암흑기에 그러한 확신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였다. ‘메시아’ 1부는 레치타치보, 아리아, 합창이 반복되면서 메시아에 대한 약속과 그 실현이 빚어내는 기쁨의 분위기를 한껏 드러낸다. 신포니아에 이어지는 첫 곡에서 테너는 오랜 시련에 지친 이들에게 하늘의 위로를 전한다. "예루살렘 주민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일러주어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고, 지은 죄에 비하여 갑절의 벌을 주님에게서 받았다고 외쳐라".
이어지는 곡들은 언약의 사자가 나타나 전쟁과 억압의 어두운 시대를 물리치고 평화와 형제애가 넘치는 세상이 도래할 것임을 노래한다. 기쁨과 감사의 분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제12번 곡 합창은 관객들을 절정의 기쁨으로 인도한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이사야 9:6)
숨을 고르듯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이어진 후 소프라노가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기쁜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하는 장면이 배치된다. 제 17곡 합창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에 대한 장엄한 고백이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누가 2:14) 메시아의 시대는 회복의 시대이다. 일그러졌던 모든 것들이 온전해지고, 어긋났던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회복의 시대가 열렸다. 예수는 상처 입은 모든 이들을 안식으로 초대한다.
제2부
그러나 세상사는 굴곡이 많다. 유장하게 흐르는 역사의 물줄기도 때로는 증오의 협곡을 지나며 물결이 거세지기도 하고, 거대한 장애물을 만나 흐름을 멈출 때도 있다. 좋은 세상, 아름다운 세상은 저절로 도래하지 않는다. 세상에 드리운 어둠의 뿌리는 매우 깊다. 어둠을 이기기 위해서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요한 3:20) 세상에 오실 메시아는 환영받지 못한다. 그의 존재 자체가 어두운 세상에 대한 심판이기 때문이다.
메시아 제2부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는 장엄한 합창(22번 곡)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메시아는 세상의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는 전능자로 오지 않는다. 죄로 얼룩진 세상 한복판으로 들어와 사람들이 겪는 모든 아픔과 설움과 모순을 온몸으로 겪어내신다.
에덴 이후의 세상은 자기 속에 있는 어둠과 폭력성의 책임을 타자들에게 전가했지만, 메시아는 마치 그 모든 일의 책임이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책임을 떠맡으셨다. 우리의 고통을 대신 당하시고, 우리의 슬픔을 함께 겪어내셨다. 메시아가 겪은 수난은 단순히 인간이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그는 타자의 고통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것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임을 드러내면서 우리를 그런 삶의 자리로 부른다.
불의한 세상이 만들어낸 고난의 현실은 회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사랑과 연대의 힘으로 돌파해야 할 과제이다. 레비나스는 가려지지 않는 타자의 얼굴은 일종의 부르심이자 명령이라고 말했다. 타자의 존엄이 훼손당할 때 침묵하지 않는 것, 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수난의 메시아는 버림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온 세상의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멸시와 천대, 슬픔과 고통, 모욕이 그를 괴롭힌다. 사람들은 볼품없는 그의 모습을 보며 조롱에 가담한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난다. 메시아 제32번 곡은 “주님께서 나를 보호하셔서 죽음의 세력이 나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실 것이며 주님의 거룩한 자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시편 16:10)라고 노래한다.
역사의 궁극적 통치자가 살아계신다. 세상의 군왕들이 제 아무리 반역을 꾀해도 그들의 도모는 허사로 끝나고 만다. 제2부는 그 유명한 ‘할렐루야’ 합창으로 마무리된다. 전능한 주가 다스리는 세상의 꿈이 유장하게 펼쳐지면서 기쁨은 절정에 이른다.
제3부
제3부의 시작곡인 제45번은 소프라노가 부르는 아리아이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내 구원자가 살아 계신다. 나를 돌보시는 그가 땅 위에 우뚝 서실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내 살갗이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욥기 19:25-26)
영문을 알 수 없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현전 앞에 서리라는 욥의 간절한 마음이 곡진하게 표현된 곡이다. 이해를 넘어서는 신앙은 현실의 부조리 속에서도 절망의 심연에 빠져들지 않게 해준다. 사도 바울은 현실의 온전한 이해 불가능성을 받아들이면서 완성된 세계를 내다본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죽임을 당한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부활은 유일회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예수는 부활의 첫 열매이지만 그가 열어젖힌 생명의 세계는 모두에게 열려 있다. 이어지는 곡에서 합창은 그러한 진실을 장엄하게 고백한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1-22).
에덴 이후를 사는 이들이 불안이라는 보편적 운명에 사로잡혀 살았다면,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세상은 영생에 대한 희망에 붙들려 살게 되었다.
발터 벤야민은 “역사는 메시아가 언제라도 올 수 있는 일종의 대기 상태”라고 말한다. 메시아적 시간은 더 이상 균질적이고 텅 빈 시간이 아니라 세상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시간이다.
제52번 소프라노 아리아는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라고 노래한다. 시련과 슬픔과 고통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의 온갖 부정성 속에서도 생명의 궁극적인 승리에 동참하는 이의 기쁨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메시아’의 마지막 곡은 요한계시록 5장에 등장하는 보좌에 앉으신 분 곁에 있는 상처 입은 어린양에 대한 찬양이다. 수많은 천군과 천사들, 그리고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온갖 피조물들이 어린양에게 영광을 돌리는 장면은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
영국 출신의 인도 선교사인 스탠리 존스는 “기독교는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 죄값을 지불하는 사랑, 희생적인 사랑이 우주 안에 있는 힘의 중심이라고 말한다”고 말한다.
죄는 사람들이 서로 등을 돌리게 만든다. 죄는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마음이다. 그 마음에는 타자들에 대한 사랑이 깃들 여지가 없다. 예수는 오직 사랑과 타자들에 대한 책임 하나로 그 죄의 거대한 흐름을 끊고 생명과 평화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 사랑은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를 마주보게 한다. 나뉘었던 이들을 연결시킨다.
헨델의 ‘메시아’는 유장하기 이를 데 없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를 아름답게 들려준다. 이 노래가 끊이지 않는 한 세상에는 희망이 있다. 작은 물줄기가 시냇물에 합류하고 시냇물이 강물과 합류하고 강물이 바다에 합류하듯, 레치타티보가 이끌고 아리아를 통해 풍부해지고 합창을 통해 종합에 이르는 오라토리오 ‘메시아’는 역사의 굴곡 속에서도 역사가 정의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아름답게 증언해준다.
김기석/ 청파감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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