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룩한 불복종의 길: 하나님의 뜻과 국가명령
기독교인은 두 시민권을 가진 존재다. 하나는 발을 딛고 사는 이 땅의 국가며, 다른 하나는 영원한 하늘나라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위로부터 나지 않은 권세가 없음을 천명하며, 기독교인이 국가의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선량한 시민이 될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국가의 명령과 하나님의 요구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위기의 순간은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다. 국가가 하나님의 공의를 저버리고 신앙의 자유를 억압할 때, 또는 설교자의 입을 막아 진리를 외치지 못하게 하거나 왜곡하려 할 때, 기독교인은 과연 누구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하는가?
성경은 이 딜레마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슬 퍼런 국법보다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을 우선시했던 거룩한 불복종의 발자취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히브리 산파들의 생명 경외로부터 시작해, 사자굴 앞의 다니엘과 죽음을 무릅쓴 에스더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인물들은 국가의 실정법이 하나님의 통치와 어긋날 때 기꺼이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 사도 베드로가 공회 앞에서 선포한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라는 고백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선택의 기준을 요구한다.
성경 속의 여러 사례는 국가 권력의 한계과 정의롭지 못한 명령 앞에서 기독교인이 지켜내야 할 신앙적 결단과 그 영광스러운 순종의 가치를 말한다.
1. 생명을 살리는 불복종: 히브리 산파들과 모세 부모의 사례
국가 권력이 휘두르는 가장 잔인한 칼날은 무고한 생명을 향할 때다. 출애굽기 초반, 이집트의 파라오는 히브리 민족의 번성을 막기 위해 '남아 학살'이라는 반인륜적인 국법을 선포한다. 이는 당시 국가가 내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그러나 이 서슬 퍼런 명령 앞에서 권력의 공포를 이겨낸 이들이 있었다. 바로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다.국 가의 부당한 명령에 맞서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낸 이들이다.
성경은 그들이 왕의 명령을 어긴 이유를 단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 “산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출 1:17).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절대 권력자인 파라오(바로)보다, 보이지 않는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이 더 두려운 존재였다. 이들의 불복종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국가의 법보다 상위에 있는 하나님의 법, 곧 생명 존중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신앙적 결단이었다.
이 거룩한 불복종의 바통은 모세의 부모에게로 이어진다. 그들은 아기를 강에 던지라는 국법을 어기고 석 달 동안 모세를 숨겨 키웠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의 행동을 가리켜 “믿음으로...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히 11:23)라고 기록한다. 국가가 죽음을 명령할 때, 신앙인은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생명을 선택했다.
하나님께서는 국법을 어긴 이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고 모세를 거쳐 민족 구원의 역사를 시작했다. 이는 국가의 실정법이 인간의 기본권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할 때, 기독교인이 취해야 할 최우선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신앙인의 일차적인 충성은 국가가 아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향해야 함을 이들의 사례는 웅변적으로 말한다.
2. 우상숭배와 기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다니엘의 결단
성경은 생명의 위협뿐만 아니라, 개인의 신앙적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국가 권력에 대해서도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가르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이라는 거대 권력 앞에 섰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다.
국가가 개인의 양심을 지배하고 신앙의 대상을 강요할 때, 기독교인은 가장 첨예한 갈등에 직면한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거대한 금 신상을 세우고 모든 백성에게 절할 것을 명령했다. 이는 단순한 국가 행사가 아닌, 국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우상숭배의 강요였다. 이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용광로의 불길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가 왕의 신들에게 절하지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라고 선포했다. 풀무불은 그들을 삼키지 못했다. 국가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계명을 앞세운 이들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은 결국 왕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찬양하게 만드는 영광을 낳았다.
이러한 신앙적 절개는 페르시아 시대의 다니엘에게서도 발견된다. 왕 외에 그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도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금령이 선포되었을 때, 다니엘은 국가의 법을 피하려고 하거나 비겁하게 숨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평소와 다름없이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하루 세 번 기도했다. 이는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국가의 실정법이 하나님과의 소통(기도)을 막을 수 없다는 침묵의 항거였다. 사자 굴이라는 가혹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국가가 정한 법적 금지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의무를 더 무겁게 여겼다.
하나님께서는 사자 굴과 풀무불 속에서 이들을 보호함으로써, 당신의 통치가 세상 권력보다 우위에 있음을 증명했다. 이들의 결단은 국가가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특정 이데올로기 및 우상을 숭배하도록 강요할 때, 기독교인이 지켜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기독교인은 국가에 순응하는 시민이어야 하지만, 그 순응의 경계는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영광과 예배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까지다.
3. 민족과 메시아를 위한 선택: 에스더와 동방박사들의 행보
국가의 법과 명령이 때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돌변하기도 한다. 성경은 민족의 멸절 위기와 메시아의 탄생이라는 중대한 역사적 분기점에서 국법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웠던 이들의 행보를 소개한다.
국가의 법이 악한 의도에 이용될 때, 신앙인은 자신의 안위를 뒤로하고 거룩한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왕 시절, 하만의 계략으로 유다 민족 전체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다. 당시 왕의 부름 없이 왕 앞에 나아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엄격한 국법이었다. 그러나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라는 결단으로 그 실정법의 담을 넘었다. 그녀가 왕의 명령보다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선택했을 때, 한 민족은 멸절의 위기에서 구원받았다. 에스더의 불복종은 개인의 반항이 아니라, 불의한 법에 맞서 하나님의 백성을 보존하려는 숭고한 헌신이었다.
이러한 선택은 신약의 서막을 여는 아기 예수의 탄생 사건에서도 발결된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으려고 헤롯 왕을 예방했다. 헤롯은 아기를 찾거든 자신에게 보고하라는 엄중한 국가적 명령을 내렸다. 이는 메시아를 죽이려는 가증한 음모였다. 박사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고,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마 2:12)라는 기록처럼 왕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들이 국가 권력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았기에, 인류의 구원자이신 아기 예수는 헤롯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
에스더와 동방박사들의 사례는 국가의 명령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정면으로 배치될 때, 기독교인이 취해야 할 태도를 보여준다. 국가의 행정적 명령이나 법적 절차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생명의 보존이다. 이들은 세속 권력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국가의 법령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충돌할 때, 두려움 없이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4. 정의롭지 못한 국가 권력에 맞서는 설교자와 그리스도인의 자세
성경의 역사적 사례들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엄중한 질문을 던진다. 국가의 명령이 하나님의 공의와 부딪힐 때, 우리는 과연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에 대한 현대적 응답이 필요한 시점이다.
기독교인은 본질적으로 국가를 존중하며 법을 준수하는 선량한 시민이어야 한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올라 정의롭지 못한 일을 명하거나, 신앙의 자유를 제한하고, 복음의 진리를 왜곡하려 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특히 설교자의 입을 틀어막아 권력의 불의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다. 이때 기독교인과 설교자가 선택해야 할 길은 자명하다. 권력에 대한 맹종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과 신앙의 정로(正路)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공회의 서슬 퍼런 위협 앞에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고 말했다. 이는 실정법보다 상위에 있는 신적 권위에 대한 확신이며,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최후의 보루다. 국가가 정의를 저버릴 때 교회는 침묵하는 방관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성경적 가치관에 따라 예언자적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그것이 국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바로 세우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당신의 뜻을 따랐던 이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을 높여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했다. 이는 그들이 무법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의 법보다 더 크고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국가의 명령이 신앙의 양심을 짓밟을 때, 비굴한 타협 대신 거룩한 용기를 선택해야 한다.
기독교인에게 국가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도구이지,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국가를 위해 기도하고 법을 지키지만, 우리의 영혼과 양심만큼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매여 있어야 한다. 정의롭지 못한 명령 앞에 당당히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어떤 불이익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결단이야말로 이 시대 교회가 회복해야 할 진정한 신앙의 야성이다. 우리는 땅의 법을 존중하는 시민인 동시에, 하늘의 법을 완성해가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代使)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에스더기도회 설교 초록 (2026.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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