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판장의 선택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는 누구도 쉽게 언성을 높일 수 없다. 더구나 법복을 입고 평생 법과 양심 사이를 걸어온 한 판사의 마지막이라면 더욱 그렇다. 생명은 무엇보다 귀하다. 한 인간이 스스로 삶의 문을 닫는다는 것은, 그 영혼 안에 이미 오래전부터 깊은 균열과 침묵의 절망이 스며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그 죽음 앞에서 숙연해져야 한다. 정치적 해석보다 먼저, 한 인간의 생이 꺼졌다는 사실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러나 어떤 죽음은 단순히 개인의 비극으로만 남지 않는다. 시대의 어둠이 한 사람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어 있을 때, 그 죽음은 사회 전체를 비추는 음산한 거울이 되기도 한다. 이번 서울고등법원 항소심 재판장을 밭은 어느 판사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다만 한 법관의 죽음을 본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법부 깊숙한 곳에 드리운 침묵과 피로, 양심의 가책과 권력 구조, 그리고 무너져 가는 신뢰의 풍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전 대통령 운석열의 부인 김건희 여사는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과 알선수재 등 혐의에 대한 1심 재판에서 징역 1년 8개월을 선고받았다. 당시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혐의는 주식 거래에 대한 인지 없음과 공모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단을 받았다. 모 종교 그룹의 금품 수수 등 다른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어 실형 징역 1년 8개월의 형을 받았다. 그러나 항소심(2심) 재판부는 2026년 4월 28일 김건희의 주가 조작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여 징역 4년으로 형량이 늘어났다.
김건희의 항소심 재판을 맡은 서울고등법원 재판장이 2026년 5월 6일 죽음을 선택했다. 55세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시신은 새벽 1시 경 법원 청사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 1심에서는 무죄를 선고 받은 건을 유죄로 판단한 것이다. 그는 “죄송하다, 스스로 떠난다”는 취지의 유서를 남겼다,
경찰이 이 재판장의 죽음의 원인을 조사 중이다. 유서 전문을 공개를 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만약 유서 내용이 현 정치권력이나 재판 압력과 관련된 것이면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 그의 자결 선택이 김건희 여사 건 때문인지, 법 왜곡죄 제도에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지, 권력이 바뀌면 법 왜곡죄로 처벌받을 것을 예상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얼마 전의 어느 현직 검사가 이와 비슷한 이유로 자살을 시도한 바 있다. 진정으로 권력의 압박을 받아 비양심적인 판단을 내렸기 때문인지, 평소에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기 때문인지, 다른 무슨 까닭 때문인지 알 수 없다. 하필이면 자신이 근무하는 법원 건물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
법원 청사는 본래 인간의 욕망과 권력을 절제하는 마지막 울타리다. 거리에서는 분노가 소리치고, 정치권에서는 계산이 난무해도, 법정만은 조용히 사실과 증거와 양심을 붙들어야 한다. 판사는 시대의 유행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도 끝내 중심을 지키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국민은 판결문 속에서 단지 법률 조항만 읽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마지막 도덕적 체온을 확인하려 한다.
하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사법부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오래된 겨울 하늘처럼 차갑고 무겁다. 누구는 판결을 정치라 말하고, 누구는 재판의 지연 속에서 권력의 냄새를 맡는다. 법정은 중립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판결 이전에 정치적 진영을 먼저 떠올린다. 이것은 다만 한두 사건의 문제가 아니다. 사법부 전체에 대한 신뢰가 서서히 붕괴되고 있다는 신호다.
어쩌면 자결한 판사 역시 그런 시대의 한복판에 서 있었는지 모른다. 법과 현실 사이에서, 양심과 압박 사이에서, 침묵과 외침 사이에서 오래 흔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그의 내면을 알 수 없다. 죽은 자의 침묵을 살아 있는 자의 자기 확신으로 함부로 채우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죽음이 수많은 국민으로 하여금 “대한민국 사법부는 과연 건강한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개 하고, 의심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판사는 칼을 들지 않는다. 그는 문장을 쓴다.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한다. 그러나 그 문장은 때로 사람의 운명을 바꾸고, 한 시대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렇기에 판사의 양심은 단순한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떠받치는 마지막 기둥 가운데 하나다. 만일 판사들조차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어려운 시대라면, 그 사회는 이미 깊은 균열 위에 서 있는 셈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승리만 있고 성찰은 없는 시대를 지나고 있다. 정치도, 언론도, 시민도 서로를 향해 돌을 던지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침묵의 시간은 잃어버렸다. 사법부 또한 예외가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판결은 법률보다 진영 논리로 해석되고, 법관은 헌법보다 정치적 색깔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묵묵히 법전을 넘기던 사람들의 고독은 점점 깊어졌을 것이다.
한 판사의 죽음은 그래서 섬뜩하다. 그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얼마나 거칠고 잔인한 긴장 속에 들어와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생명을 지키고 인간의 존엄을 보호해야 할 국가 시스템 안에서, 오히려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사람이 절망 속에서 무너졌다면, 우리는 이 현실을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분노의 함성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죽음을 정치의 도구로 소비하는 것도 위험하고, 반대로 아무 의미 없는 개인적 사건으로 축소하는 것도 무책임하다. 중요한 것은 이 비극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을 외면하지 않는 일이다. 사법부는 과연 독립되어 있는가? 법관은 정말 양심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가? 국민은 법원을 신뢰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언제부터 정의보다 승패에 더 집착하게 되었는가?
밤이 깊을수록 작은 불빛 하나가 더 또렷이 보인다. 어쩌면 한 판사의 비극적인 마지막은, 이미 오래전부터 금이 가기 시작한 대한민국 사법의 벽면을 드러낸 어두운 불빛인지도 모른다. 생명은 귀하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더욱 무겁다. 그리고 그 무게만큼, 우리의 사회는 이제 법과 양심, 정의와 권력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법부가 마지막 희망이어야 하는 자유민주주의 나라에서, 국민이 법원을 두려움이나 냉소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정의는 거대한 구호 속에서 살아남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한 사람의 양심, 한 줄의 판결문, 그리고 침묵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으려는 인간의 내면에서 가까스로 숨 쉬기 때문이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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