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자신과 중국삼자교회 신학
어떤 신학이 교회를 지배하느냐가 결국 교회의 운명과 국가 권력의 자리까지 결정한다.
조자신(趙紫宸, Tsu Chen Chao, 1888–1979)은 자유주의·자연신학과 민족주의, 공산혁명에 순응하는 정치신학을 결합함으로써, 중국 교회의 공교회성을 붕괴시키고 국가 권력이 제단을 점유하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수저우 대학, 미국 밴더빌트 대학에서 교육을 받으며 미국 자유주의 신학과 사회복음, 성서비평의 영향을 깊이 수용한 20세기 중국 개신교의 대표적 신학자였다.

그는 연경대(燕京大學) 종교학과 학장으로 26년간 봉직하고, 서구와 동아시아를 오가며 강연·저술을 통해 “중국적 조직신학”과 기독교의 중국화를 추구함으로써 지성계와 교계 모두에서 높은 명성을 누렸다.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WCC 제1차 총회에서 중국 대표로 참석해 6명의 회장단(공동의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고, 동아시아 교회를 대표하는 인물로 국제 무대에 부상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그는 공산당의 종교정책을 교회 안에 선전하는 선봉에 섰고, 1949년 중국 기독교 대표 5인 중 한 명으로 정협 제1차 전국위원회에 참가하는 등, 공산정권과의 정치적 밀착을 택했다. 1950년 그는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기독교와 미국 제국주의의 결별을 선언하고, 자치·자립·자전의 ‘삼자’ 원칙에 따라 국가에 협력하는 기독교를 공인하는 성명과 운동을 주도했다.이 과정에서 “교회는 시대에 맞게 변할 수 있는 도구”이며, “많은 교리적 요소는 미신적이므로 제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교회와 복음의 본질을 국가 이데올로기에 종속시킬 수 있는 신학적 토대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의 열렬한 협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1950년대 반우파 운동, 이어진 ‘삼·오 반’ 운동과 문화대혁명에서 혹독한 비판과 박해를 겪었고, 말년에 이르러서야 1979년 “재평반(rehabilitation)”을 받았다. 그가 죽은 뒤, 홍콩 성공회는 성 요한 대성당에서 추모예배를 드렸으나, 중국 내부에서는 그를 둘러싼 신학적·정치적 평가가 끝까지 엇갈렸고, 상당수 연구자들은 말년의 그가 실질적으로 기독 신앙을 상실했다고까지 평가한다.
조자신은 초기 저술에서 “참된 자연신학”을 구축하겠다며 수십 편의 논문과 『기독교 철학』, 『예수의 생애 철학』, 『예수전(Life of Jesus, 1935)』 등을 내고, 기독교를 “중국적 사유”와 자연적 이성 위에 재정초하려 했다. 그 결과 그는 계시·기적·교리를 과학 시대에 맞지 않는 “야사와 미신”으로 보거나 축소·비신비화하고, 기독교 메시지를 철학적·윤리적 사유 체계로 환원하는 경향을 강화했다. 『예수전』에서 그는 성경 본문을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하면서, 초자연적 요소를 가능한 한 제거하고 기적을 자연주의적으로 설명하거나 아예 생략하는 방식으로 예수의 생애를 그렸다. 연구자들이 지적하듯, 이 작업의 중심 축은 “예수는 이상적 인간이며, 완전한 인류성의 구현”이라는 테제이고, 그는 공관복음이 증언하는 초자연적 메시아보다는 도덕적 이상형으로서의 예수를 강조했다.
그는 공적으로 동정녀 탄생과 성육신 교리를 거부하고, “예수가 철저히 인간이었기 때문에 내 관심을 끌었다”고 말하면서, 그 인성의 충만함이 곧 신성의 실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신성을 인성의 연장선으로 환원함으로써,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 가운데 들어오신 사건으로서의 성육신을 상실하고, “이상적 인간”의 도덕적 모범이라는 인본주의적 그리스도론으로 기울었다. 마태복음 5장 17절의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라”는 말씀도, 그는 “인류 문화의 완성”이라는 방향으로 해석하며, 특히 유교 도덕의 이상을 예수 안에서 완성된 것으로 보았다. 이런 해석에서 예수님은 죄인을 위한 대속적 구세주라기보다, 공자적 도덕 이상을 실현한 성인으로 제시되고, 기독교는 중국 청년들을 위한 윤리적 자기수양의 길로 재구성된다.
조자신의 신학에서 구원 개념은 점점 개인의 죄 사함과 하나님과의 화해에서, 사회 개혁과 민족 재건으로 이동했다. 그는 중국 현실에서 “개인적 구원의 메시지”는 “사회적 교의”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중국의 구원은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와 민족적 각성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 나라”와 “메시아”의 초월적·종말론적 의미는 희미하게 되었고, 민중의 각성과 사회적 해방의 상징으로 재해석되었다. 연구자들은 이 점을 두고, 그가 “인간이 하나님 나라 도래의 유일한 행위자”라는 인본주의적 종말론을 펼쳤으며,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도덕적 모방과 사회봉사로 대체했다고 평가한다.
이런 신학은 표면적으로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를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죄·심판·은혜·대속이라는 복음의 중심을 주변으로 밀어내고, 복음을 국가·사회 프로젝트를 위한 종교적 자원으로 도구화한다. 그 결과, 교회는 하나님 앞에 서는 거룩한 공동체라기보다, 시대정신과 국가 과제를 수행하는 윤리·봉사 단체로 기능 정의가 바뀌게 된다.
1949년 이후 조자신은 중화인민공화국 아래서 기독교가 생존하려면 혁명과 국가에 순응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삼자애국운동의 사상적·조직적 구축에 핵심 역할을 했다. 그는 중국 교회는 중국인이 스스로 구성한 세계관과 철학을 가져야 한다며 서구 선교사와 근본주의적 교리를 비판하고, 다수의 전통 교리를 시대에 뒤떨어진 미신으로 간주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삼자애국운동은 자립·자치·자전이라는 표어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국가가 인정한 교회만의 합법성을 공고히 하면서, 복음주의·자유교회 전통을 “반혁명”과 “미제와의 내통” 혐의로 몰아가는 데 이용되었다. 그 결과 왕밍다오, 워치만 니 등 지도자들과 재래 교회들은 투옥·강제노동·지하화로 내몰렸고, 공식 삼자교회와 비공식 지하교회의 구조적 분열이 고착되었다.
조자신의 신학은 여기서 결정적으로 작동했다. 교회를 시대에 따라 변형 가능한 도구로 보고, 많은 교리를 제거 가능한 미신으로 규정하는 관점은, 국가 권력이 교회의 신앙내용에 개입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했다. 교회의 본질을 사회주의 건설에 기여하는 애국 조직으로 재규정한 삼자 신학은, 복음의 고유성·교회의 보편성을 약화시키고, 국가 이데올로기에 비판적 거리를 두어야 할 교회를 체제의 종교 부속기관으로 만들었다. 결국 삼자체계 안에서 살아남은 교회는 제도적 안전을 얻는 대신, 설교·교육·인사 전반에서 공산당의 통제를 수용하는 구조로 정착했고, 많은 경우 기본 교리와 성경 해석마저 정치 지침과 “애국 교육”에 종속되었다. 반대로, 지하교회는 복음과 교회의 자유를 보존하려 했지만, 불법·암장 공간에서 끊임없는 박해와 감시를 감수해야 했고, 이중 구조는 지금까지도 중국 기독교의 상처와 긴장으로 남아 있다.
조자신의 생애와 사상은, 성경의 초자연적 계시와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대화하고, 복음을 문화·철학·민족주의·혁명 이념에 종속시키는 신학이 결국 교회를 국가 권력의 도구로 전락시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자연신학과 사회복음, 민족주의·사회주의와의 융합 시도가 복음의 중심(은혜에 의한 칭의, 십자가의 대속, 부활의 객관적 실재)을 약화시키자,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대정신과 권력의 눈치를 보는 제도로 변질되었다. 역설적으로, 그가 끝까지 충성하려 한 공산당은 그를 “우파”, “미제와 내통” 혐의로 숙청하고, 문화대혁명 동안 혹독하게 대우했으며, 생애 말기에야 형식적 명예회복을 허락했다. 그의 생애는 “어떤 신학이 교회를 지배하느냐가 결국 교회의 운명과 국가 권력의 자리까지 결정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김요셉 목사(페이스북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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