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저항 이론
원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저항 이론의 해석학적 전회: 텍스트의 구속력과 논리의 확장성 사이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 저항 이론이 앤드류 멜빌(1545–1622)에서 사무엘 러더포드(1600–1661)로 이행한 과정은 정치적 대응 수위의 변화가 아닌, 개혁신학의 핵심 원리인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Scriptura sacra sui ipsius interpres)’는 해석학적 규범이 현실 정치의 위기 속에서 어떻게 재구성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신학적 이벤트였다. 두 사람 모두 왕권의 제한과 교회의 독립이라는 언약적 목표를 공유했으나,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성경 텍스트를 대하는 방법론에서는 유의미한 차이를 보였다.
멜빌은 성경 텍스트의 명시적 진술이 갖는 구속력을 최우선으로 삼는 신학적 방법론을 채택했다. 그는 1570년대 후반 '제2치리서'와 1596년 제임스 6세와의 대면을 통해 "두 왕국론"을 설파하며 왕권의 절대성을 부정했다. 그러나 멜빌에게 로마서 13장의 복종 명령은 여전히 넘어서기 힘든 주석적 방파제였다. 그는 왕의 부당한 간섭에 대해 치리권 발동과 말씀 선포라는 영적 수단으로 강력히 저항했으나, 물리적 무력 행사나 혁명적 전복을 교리화하는 단계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1606년 투옥과 1611년 추방이라는 고초 속에서도 그가 견지한 태도는, 성경이 명시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영역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는, 철저히 계시 의존적인 절제였다.
그러나 1625년 찰스 1세 등극 이후 발생한 예배서 강요와 1639년 주교전쟁이라는 물리적 위기는 이러한 멜빌식의 방어적 인내만으로는 교회의 존립을 보장할 수 없다는 현실적 딜레마를 스코들랜드 장로교회에 안겨주었다. 이 시점에서 사무엘 러더포드는 《법과 군주(Lex, Rex, 1644)》를 통해 기존의 해석학적 틀을 확장하여 저항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시도했다.
물론 러더포드 역시 성경을 이탈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로마서 13장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본문을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바른 직분(Office)에 대한 복종"으로 정교하게 재해석함으로써 텍스트와의 정합성을 유지하려 했다. 그는 개혁파 내부에서 인정되던 자연법과 이성을 성경 해석의 보조적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여, 직분을 파괴하는 인격(Person)인 폭군에 대한 저항은 성경적 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구축했다. 이는 그가 무질서한 혁명이 아니라, 헌법과 언약에 근거한 질서 있는 저항을 모색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비판적 관점에서 볼 때, 이 과정에서 외부 논리의 개입이 성경 텍스트의 단순한 의미를 압도하는 해석학적 긴장이 발생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러더포드는 저항의 논리적 필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스콜라 철학적 구분법과 사회계약론적 추론을 성경 해석의 결정적 열쇠로 사용했다. 이는 멜빌이 성경의 침묵 앞에서 멈춰섰던 것과는 달리, 러더포드는 이성적 추론을 통해 그 침묵의 공백을 메우고 정치적 실천의 근거를 마련했음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그의 해석은 텍스트가 텍스트를 해석하는 전통적 방식보다는, 정치철학적 논리가 텍스트의 적용 범위를 규정하는 방식에 가까워졌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1649년 찰스 1세의 처형은 이러한 러더포드의 논리가 현실 역사에서 구현된 결정적 장면이었다. 비록 1660년 왕정복고와 함께 그의 저서는 금서가 되었으나, 그가 남긴 유산은 양면적이다. 그는 폭정에 맞설 수 있는 신학적 무기를 교회에 제공했지만, 동시에 정치적 목적이 정당할 경우 성경 텍스트를 외부의 논리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해석학적 선례를 남겼다. 이는 후대 기독교 정치 담론에서 성경이 현실 정치의 이념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호출될 때마다 반복되는, 텍스트의 권위와 이성의 논리 사이의 위태로운 줄타기의 기원이 되었다.
김요셉 목사, 페이스북 글 2025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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