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 안으로 걸어가는 영혼: 교만 극복의 길
―교만에 대한 한 편의 묵상(칠거지악, 1-6)
인간 영혼의 뜰에는 뱀처럼 은밀하고 교활한 손님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이름은 교만이다. 교만은 스스로를 높이려는 끊임없는 욕망이며, 눈을 가린 채 낡은 허상만을 끌어안고 사는 어둠 속의 삶을 연출한다. 거대한 자기애의 성벽을 허물고 진정한 겸손에 이르는 길은, 인간의 얄팍한 노력이나 윤리적 대응만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오직 은총의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영혼의 여정이다.
1. 베일을 벗기는 거룩한 거울
교만을 버리고 덕을 입는 것은 논리적인 순서로 동시에 일어나는 영혼의 작업이다. 그러나 이 작업의 첫 단추는 스스로 자신을 내려놓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실상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데 있다. 난관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스스로를 의롭고 지혜롭다 여기며, 세상의 오염된 기준에 비추어 자신을 판단하는 우매함 속에 갇히는 것이다. 우리의 얼굴에는 두꺼운 위장이 덧칠되어 있어, 자신의 추함과 누추함을 결코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다.
이 자기기만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유일한 길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창조주, 절대자의 거룩한 광채 앞에 설 때, 비로소 인간은 수건을 벗은 본래의 얼굴을 볼 수 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동전의 양면처럼 연결되어 있다. 오직 그분의 지혜와 의와 권능의 절대적인 완전함이 기준일 때, 그 이전에 우리가 자랑스럽게 뽐내던 것들, 정의와 지혜, 덕스러운 열심이라 불렀던 모든 것이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 오물이었는지 낱낱이 밝혀진다.
마치 한 줄기 빛이 어둠 속의 먼지를 생생히 드러내듯이, 하나님의 순결하심 앞에 선 인간은 자신이 한갓 지렁이와 같은 미천하고 누추한 존재임을 깨닫고 한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천상의 어전 회의를 목격한 이사야가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고백했듯이, 밤새도록 허탕을 친 어부 베드로가 기적 앞에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면서 엎드렸듯이, 우리는 거룩한 분 앞에서 비로소 우리의 죄인 된 실체를 깨닫는다. 하나님을 만난 그 순간 자체가 우리의 모든 불만과 질문에 대한 유일하고 압도적인 대답인 것이다.
2. 말씀이라는 정화의 샘터
이처럼 자신의 정직한 모습을 노출시키는 핵심적인 통로는 바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 곧 성경이다. 말씀은 하나님의 의를 선명히 드러내는 거울의 기능을 한다. 이 거울은 율법이라는 엄격한 프레임을 통해, 의에 이를 수 없는 인간의 무능과 불의를 동시에 비추어 절망하고 낮아지게 하는 복된 기능을 수행한다.
초기 사막 수도사들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침묵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했던 ‘렉치오 디비나‘(Lectio Divina)의 전통이 이를 증명한다. 그들은 수도 생활이라는 경건의 이면에서 숨 쉬고 있는 자신의 이기적이고 옹졸한 내면, 남을 쉽게 판단하고 조금의 불편도 참지 못하는 교활한 자아를 말씀의 빛 앞에서 선명히 보았다. 자신의 더러운 실상을 치열하고 생생하게 들여다볼수록, 그들의 겸손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져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많은 말 대신, 오직 주의 은혜와 도움을 간구하는 짧고 반복적인 기도,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더럽고 형편없는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를 붙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깨달은 영혼만이, 이처럼 전적인 자비와 긍휼을 간절히 구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겸손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복된 기회를 얻는다.
3. 공동체라는 겸손의 용광로
깨달음만으로는 교만을 극복할 수 없다. 겸손은 사색의 결론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의지적인 행동으로 몸에 새겨지는 덕이다. 그리고 이 겸손을 단련하는 가장 실제적이고 최적의 장소는 다름 아닌 신앙고백공동체, 곧 교회이다.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은 자기만의 방식을 내려놓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겠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중세 수도원에서 베네딕트가 수련생들에게 ‘순명’(順命)과 겸손을 필수적으로 가르쳤던 이유와 같다. 수도원의 질서와 규율에 따르는 공동생활은,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며 타인의 행동을 함부로 판단하는 교만이야말로 공동체의 결속을 깨뜨리는 최고의 적임을 깨닫게 한다. 다양한 배경과 성품을 가진 지체들과 부딪히는 그 불편한 공간이야말로, 인내하고 양보하며 서로에게 자기를 맞추는 훈련을 통해 교만을 녹여내는 용광로이다.
기독인들이 신앙고백 공동체에서 친교하며 지내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이다. 심지어 함께하기 싫은 자들과, 원수와도 함께 생활할 수 있다. 교회라는 유기적인 한 몸 안에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의 고립된 삶을 떠난다. ‘우리 안’의 섬김과 상호 복종의 삶으로 들어간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공동체의 하나 됨을 위해 스스로를 훈련하는 그 자리에서, 교만은 힘을 잃고 자기를 부인하는 겸손이 꽃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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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십자가를 향한 비움의 자세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헷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 말씀은 겸손이 단순한 미덕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인 원리임을 보여준다. 교만의 반대인 겸손은 가난하고 낮은 마음을 지닌다.
진정으로 마음을 낮추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 의식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가 없이는 심판을 피할 수 없는 피조물이며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탁월함이나 선한 것이 있다면, 그 영광은 온전히 본래의 주인인 하나님께 있다. 겸손을 배우는 자는 지혜를 거두시면 무지몽매한 짐승과 같을 뿐이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을 늘 가슴에 새긴다.
둘째, 겸손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자는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낮은 자리를 찾아 앉도록 의지적으로 노력한다. 생각이 행동을 낳지만, 때로는 행동이 의식을 낳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모범이다. 바울은 그분의 겸손을 빌립보서에서 노래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말구유를 택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십자가를 지는 자기 ‘비움’(Kenosis)의 자세야말로 교만을 극복하는 길의 완성이자 실천이다.
삶 속에서 박수받는 자리를 피하고, 남을 낫게 여기는 의지적인 노력을 반복하면, 조금씩 어깨 힘이 빠지고 허리가 유연해져 섬기는 일에 더 빨라진다. 자신을 낮추면 하나님이 높인다. 높임은 세상의 영광 이전에 ‘평안’이라는 값진 보상을 가져온다.
겸손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을 창조하고, 우리로 하여금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것 같은 고요와 평온을 누리게 한다. 교만을 극복하는 길은, 결국 이 절대적인 평안과 고요 속에서 참된 자기를 발견하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겸손의 여정이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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