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만의 어두운 계단: 우월감
―교만에 대한 한 편의 묵상(칠거지악, 1-5)
인간의 영혼은 깎아지른 절벽과 같아서 늘 추락의 위험을 안고 산다. 그 추락을 유혹하는 가장 달콤하고도 단단한 땅이 바로 교만이다. 권력의 비탈에서, 명예의 높은 봉우리에서, 또는 재물의 넉넉한 들판에서 피어나는 세속적 교만은 우리 눈에 쉽게 포착되는 악덕이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두로 왕처럼, 찬란한 황금과 빛나는 외모가 가져다준 순간의 우쭐거림은, 덧없는 세상의 장식에 취한 자의 어리석음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겉으로 드러나기에 그 위험을 경계하기 쉬운, 다소 정직한 형태의 몰락이다.
경건이라는 얇은 베일 뒤에 숨어, 가장 순수한 영혼마저 타락시키는 그림자가 있다. 그것이 바로 ‘영적 교만’이다. 권력과 지성의 교만이 외적인 성취에 대한 자부심이라면, 영적 교만은 내적인 고결함, 곧 스스로 쌓아 올렸다고 믿는 도덕적 성취와 신앙적 깊이에 대한 오해에서 싹튼다.
삶의 모든 순간을 자기 수양에 바치는 경건한 자일수록 이 덫에 걸리기 쉽다. 그들의 일상이 율법의 연구와 기도로 채워질 때, 그들은 자신의 행위가 만들어 낸 빛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혜와 혼동하기 시작한다.
바리새인들의 비극은 이 미묘한 착각을 가장 잘 보여준다. 율법을 가까이하고, 금식과 구제를 성실히 이행했으나, 그 성실함의 결론은 자비가 아니라 상석에 앉아 문안받기를 좋아하는 우월감이었다(눅 20:46). 그들의 마음속에는 ’나는 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당연히 존중받아야 할 거룩한 자‘라는 냉랭한 계산이 자리 잡았다.
자신의 노력이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큰 몫을 했다고 믿는 순간, 그들의 도덕성은 가장 견고한 교만의 갑옷이 되어버린다. 영적 교만은 도덕적 교만에서 발전한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도덕적 깨끗함이 하나님께 호의를 얻는 통행증이라 착각한다.
우월감이 쏘아올린 교만은 화살과 같다. 이것은 악덕의 은밀함과 치명성을 서정적으로 표현한다. 화살은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떤 경로로 날아왔는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심장에 박힌다.
남다른 영적 체험이나 성직을 수행한다는 자부심은, 스스로를 특별한 은혜를 받은 거룩한 존재로 여기게 만든다. 이미 화살을 맞았음에도, 상처의 존재조차 모른 채 더욱 높이 날아오르려 하는 모순. 그레고리우스의 탄식처럼, 무수한 작은 악들을 피하려고 고군분투했지만, 그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큰 교만이라는 괴물은 피하지 못한 셈이 된다. 의식하지 못한 상처는 가장 깊은 곳에서 썩어간다.
이 교만은 개인의 영혼을 넘어 공동체의 연합까지 파괴한다. 자신이 속한 교회, 학교, 신학 전통에 대한 감사는 종종 다른 전통에 대한 폄하와 함부로 판단하는 어리석음으로 변질된다. ’승리주의적 태도‘라는 교만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찢고 상처 입힌다.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확보한 진리의 조각을 가지고, 전체를 재단하려 드는 오만함에서 벗어남이 필요하다.
일상 속에서 가장 흔히 마주치는 영적 교만의 그림자는 ‘사려 깊지 못한 조언’의 형태를 띤다. 기도를 많이 하거나 경건의 시간을 오래 가졌던 신자들이, 고난 속에 있는 이에게 “기도가 부족해서 그렇다,” “하나님이 더 기도하라고 요구하시는 것 같다”는 식의 단순한 종교적 해법을 제시할 때, 그 이면에는 자신의 영적 우월 의식이 똬리를 틀고 있다.
욥의 세 친구처럼, 신학적으로 ‘바른’ 것처럼 보이는 조언일지라도, 타인의 고난을 재단하고 그 원인을 단정하는 태도 자체가 교만의 소치다.
인간의 고난 중에는 이해하기 어렵고, 오로지 하나님의 소관에 속한 심연의 비밀들이 있다(신 29:29).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는 나라의 비밀을 나타내시고, 세상의 지혜로운 자에게는 숨기시는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마 11:25-27), 스스로 해결 방법을 아는 양 나서서 조언하는 것은, 내가 감히 하나님과 같은 높이에 서 있거나 그분의 비밀을 완전히 해독했다고 믿는 오만함이다.
가장 위험한 교만은 세상의 티끌이 아니라, 신앙의 맑은 거울 속에 비추어지는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는 데서 시작된다. 진정한 경건은 자신을 가장 낮은 곳에 두는 겸손에서만 꽃피울 수 있다. 영적 교만이라는 화살을 경계하면서, 끊임없이 스스로의 마음을 성찰하는 고요한 투쟁이 필요하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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