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서부법원 복도에 걸려 있던 그림
단테와 일곱 가지 죽음의 죄 — 사랑이 잿빛으로 변한 자리
―일곱가지 죽음에 이르는 죄에 대한 묵상 (칠거지악 1-1)
1. 단테, 어둠의 숲에서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 그의 『신곡』(La Divina Commedia)은 단순한 시집이 아니다. 인간 영혼의 지도이며 신학적 탐사선이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아직 아침 안개 속에 있을 때, 단테는 시로써 인간 정신의 새벽을 열었다. 그에게 시는 단어로 쓰는 신학이었고, 그 신학은 하늘을 향한 시였다.
『신곡』의 『지옥편』(Inferno)은 인간이 사랑의 중심을 잃었을 때 어디로 떨어지는지를 그린 서사이다. 단테는 서른다섯의 나이에 “인생의 한가운데서 나는 올바른 길을 잃었다”고 고백한다. 이 문장은 인간의 근원적 체험, 곧 길을 잃은 영혼의 탄식을 담는다. 죄는 그에게 단순한 위법이 아니라 ‘길을 잃는 사건’이었다.
단테가 만나는 밤의 숲은 인간의 내면이다. 그 숲에서 단테는 두려움과 욕망, 기억과 회한의 그림자를 마주한다. 신학자들이 죄를 ‘하나님에게서의 분리와 이탈’이라 부른다면, 단테는 그것을 ‘길의 상실,’곧 사랑의 방향을 잃은 방황이라고 노래한다.
2. 지옥의 원들 — 사랑의 뒤틀림이 만든 동심원
단테의 지옥은 구체적이다. 그는 지옥을 아홉 개의 원(圓, circles)으로 구분한다. 각 원은 죄의 본질과 깊이에 따라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간다. 그 가운데 일곱 원은 기독교 전통의 ‘칠죄종’(Seven Deadly Sins)과 맞닿아 있다. 죄를 고립된 행위가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 뒤틀린 결과로 설명한다.
(1) 교만 — 하늘을 대신해 자신을 세운 탑
교만은 모든 죄의 근원이다. 단테는 지옥에서 무거운 돌을 짊어지고 고개를 숙인 영혼들을 본다. 돌은 그들의 자아의 무게, 스스로 신이 되려 했던 욕망의 잔해이다. 하늘을 보지 못하는 자들, 스스로 빛이 되려다가 어둠이 된 자들. 단테는 그곳에서 루시퍼, 바벨탑의 사람들, 아담을 떠올린다.
단테는 “가장 높이 오르려 한 자가, 가장 깊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교만은 하늘을 향한 사랑이 자신을 향한 숭배로 변질된 모습이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교만은 모든 죄의 뿌리이며, 루시퍼의 타락에서 비롯된 인간의 첫 죄다(사 14:12–15). 단테가 본 영혼들은 무거운 돌을 짊어진 채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 돌덩이는 스스로의 ‘자기 신격화,’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창 3:5)의 무게다.
교만은 하나님 중심의 우주에서 인간 중심의 우주로 이동한 내적 혁명이다. 인간이 자기의 중심에 앉을 때,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주변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은 역설적으로 낮아짐의 높이(빌 2:8–9)다.
단테의 교만의 원은 결국 겸손의 필요성에 대한 신학적 반성이다.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은 자기부인(self-denial) 없이는 시작되지 않는다.
(2) 시기 — 타인의 빛을 훔치려는 어둠
시기의 원에 있는 영혼들의 눈꺼풀이 철사로 꿰매져 있다. 타인의 기쁨을 보지 못했던 자들이다. 그들은 타인의 축복을 자신의 결핍으로 받아들였다. 단테는 그들의 침묵 속에서 “주여, 우리에게 자족함을 주소서”라고 하는 기도를 듣는다.
시기는 사랑의 빛을 차단한다. 타인의 빛을 질투하다가, 스스로의 눈을 멀게 만든다. 단테는 시기의 죄를 ‘사랑의 뒤틀림’이라 부른다. 타인을 사랑하기보다 비교하는 사랑, 그것이 시기다.
야고보서는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약 3:16)고 말한다.
시기는 아벨을 향한 가인의 분노(창 4:5–8)로 시작된 인류 최초의 살인이다. 시기는 사랑이 이웃을 향한 축복이 아니라 비교의 렌즈로 바뀐 상태다. 바울은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고전 13:4)라 선언했다. 시기는 사랑의 반대말이다.
시기는 타인의 빛을 끄려다 자기 빛마저 잃는 어둠이다. 복음적 시선은 비교가 아니라 축복이다.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롬 12:15)라는 말씀은 시기의 영적 해독제다. 단테가 그들의 철사로 꿰맨 눈을 묘사한 것은, 영혼이 타인의 빛을 빼앗으려다 자기 시력을 잃는다는 진리를 상징한다.
(3) 분노 — 불의 강에서 끓는 영혼들
분노의 강은 피처럼 붉게 끓는다. 그 강물은 인간이 흘린 피와 복수의 열기로 만들어진 것이다. 단테는 그 속에서 알렉산더 대왕, 디오니시우스 같은 폭군들을 본다. 분노는 언제나 정의를 자처한다. 그러나 그 불길은 타인을 태우기 전에 자신을 먼저 삼킨다.
단테는 말한다. “분노는 정의의 옷을 입은 자기 연민이다.” 그 강의 표면에서 들려오는 비명은, 타인을 향한 함성이 아니라 자기 파괴의 메아리다.
야고보서는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고 한다. 분노의 강은 피와 불로 끓는다. 단테는 폭군들의 얼굴을 보며 깨닫는다. “분노는 정의의 가면을 쓴 자기 연민이다.”
모세가 돌판을 깨뜨릴 만큼의 거룩한 분노도 있지만(출 32:19), 인간의 분노는 대부분 자기중심적이다.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엡 4:26)고 명령한다. 분노 자체보다 그 방향과 지속성이 문제다.
하나님 없는 분노는 정의를 가장한 폭력이다. 종교개혁 신학자 존 칼빈은 “의로운 분노는 인간의 손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단테의 붉은 강은 결국 자기의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인간의 피로 만들어진 강이다. 복음적 분노는 회개로, 세속적 분노는 파괴로 흘러간다.
(4) 나태 — 움직이지 않는 시간의 늪
나태는 단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죄였다. 그는 고요한 늪을 본다. 그러나 그 고요는 평화가 아니라 죽음이다. 이곳의 영혼들은 선을 알았으나, 행동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으나, 그 사랑의 열정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태 죄로 지옥에 떨어진 자들을 보고서 단테는 말한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말처럼, 나태는 신앙의 냉기이며, 열정의 결핍이다. 사랑이 불길이라면, 나태는 그 불이 꺼진 잿더미다.
잠언은 “게으른 자는 자기의 길에 가시덤불이 무성하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잠 15:19)라고 말한다. 단테는 지옥 늪 속의 영혼들이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본다. 그들은 선을 알고도 행하지 않은 자들이다(약 4:17).
나태는 단순히 일하지 않는 죄가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죄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2:17)이라는 말은 구원의 조건을 말함이 아니라 나태의 본질을 드러낸다.
나태는 열정이 식은 신앙의 냉기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은 움직이는 수레를 인도하신다”고 말했다. 복음적 순종은 머무름이 아니라 움직임이다. 단테의 늪은 ‘행동하지 않는 신앙’의 종착지이며, 그 고요는 은혜의 부재다.
(5) 탐욕 — 금빛 사슬에 묶인 자들
단테는 황금빛이 번쩍이는 원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것은 빛이 아니라, 탐욕의 불길이다. 영혼들은 서로의 재산을 끌고, 밀치고, 부딪힌다. “내 것이다” “우리 것이다” 하는 그 외침은 천둥처럼 울리지만, 허공에서 사라진다.
단테는 그곳에서 교황과 주교(감독)들의 그림자도 본다. 그는 성직자들을 향하여 외친다. “너희는 금화로 천국의 문을 닫았다.”
탐욕은 단순한 물질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방향이 하늘에서 금속으로 떨어진 비극이다. 금속은 거울처럼 인간의 욕망을 비춘다. 그들은 그 거울 속에서 ‘자기 신’을 본다.
단테가 탐욕의 원에서 교황들의 얼굴을 본 것은, 교회조차 세속적 부를 욕망할 수 있음을 고발한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탐욕은 은혜의 적수이다. 청교도 리처드 백스터는 말했다. “탐욕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증거다.” 금빛은 단순한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안전을 보증하려는 인간의 허위 신앙이다.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 6:10)라고 말했다. 탐욕의 원에서는 영혼들이 금화를 서로 끌어당기며 다투고 있다. 그들의 입은 “내 것”이라는 말로 가득하다.
탐욕은 우상숭배이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예수는 탐욕의 허망함을 폭로한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6) 식탐— 끝없는 허기의 들판
지옥의 한 구석에는 차가운 비가 끝없이 내린다. 진흙 속에 잠긴 영혼들은 끝없는 허기에 시달린다. 케르베로스가 그 위를 지키며 짖는다. 세 개의 입은 식욕, 탐욕, 쾌락의 삼두(三頭)다.
단테는 탄식한다. “그들의 입은 천국의 언어를 잃었다.” 먹고 마시는 것은 본래 감사의 예식이었지만, 하나님 없는 식탁은 욕망의 제단이 된다. 그들은 더 많이 먹을수록 더 깊이 굶주린다.
“그들의 신은 배요 그들의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느니라”(빌 3:19), 단테가 본 지옥의 탐식자들은 비에 젖은 진흙밭에서 끝없는 허기에 시달린다. 케르베로스의 세 입은 삼중의 욕망—맛, 향락, 자기 위안—을 상징한다. 케르베로스는 탐식자들이 갇힌 지옥을 지키는 세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 저승사자이다.
탐식은 음식 그 자체보다 만족의 근원을 잘못 찾는 죄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마 4:4)라 말씀하셨다.
탐식은 육체적 배고픔보다 영혼의 공허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교제를 잃은 자가 음식을 신으로 삼는다. 단테의 진흙은 하나님 없는 풍요의 잔해다. 진정한 만찬은 성찬, 곧 감사의 회복에서 시작된다.
(7) 색욕 — 사랑이 신을 잃을 때
단테는 거센 바람의 원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그는 헬레네, 프란체스카와 파올로의 영혼을 본다. 이들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비극적인 금지된 사랑의 상징들이다. 프란체스카는 결혼 전에 알았던 파올로와 사랑에 빠져 간통했으며, 남편에게 발각되어 살해당했다. 그들은 바람에 휘말려 끝없이 떠돈다. 사랑이 욕망으로 변했을 때, 인간은 방향을 잃는다.
프란체스카는 단테에게 속삭인다. “사랑이 우리를 불태웠고, 이제 우리는 영원히 불타고 있습니다.”
단테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린다. 그는 그들의 고통 속에서도 한 줄기 자비의 불빛을 본다. “사랑이 시작이었으나, 신이 없던 사랑이었다.”
그 문장은 인간의 모든 비극의 정의다. 사랑이 하나님을 잃을 때, 그것은 지옥의 바람이 된다.
“음행을 피하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8–19). 단테가 본 색욕의 원에는 끝없이 몰아치는 바람 속의 영혼들이 있다. 사랑이 욕망으로 타락할 때, 인간은 방향을 잃고 떠돈다.
색욕은 단지 육체의 타락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죄다.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는 그 비극을 보여준다(삼하 11장).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성(性)은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이다. 색욕은 언약 없는 사랑이다. 단테가 프란체스카의 말을 듣고 눈물 흘린 것은, 그 안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향한 그리움을 본 까닭이다. “사랑이 우리를 불태웠고, 이제는 영원히 불타고 있다.” 그 불은 욕망의 형벌이지만, 동시에 잃어버린 진정한 사랑에 대한 미련의 불씨이기도 하다.
3. 왜곡된 사랑 — 죄의 신학
단테는 지옥을 둘러보고서 깨닫는다. 지옥의 죄들은 도덕의 문제 이전에 사랑의 문제라는 것을 파악한다. 교만은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이다. 시기는 타인을 질투하는 사랑, 분노는 질서 잃은 정의의 사랑이다. 탐욕은 피조물에 매인 사랑이다. 식탐은 욕망으로 타락한 감사의 사랑이다. 색욕은 신 없이 홀로 선 사랑이다.
단테에게 지옥은 어긋난 사랑의 지도다. 루시퍼조차 하늘을 사랑했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날개를 펼쳤다. 죄는 사랑의 그림자이며, 구원은 그 사랑의 방향을 바로잡는 행위다.
4. 지옥의 밑바닥 — 배신자들의 얼음
지옥의 마지막 원은 불 구덩이가 아니라 얼음 구덩이이다. 사랑의 불이 완전히 꺼진 차가운 곳이다. 배신자들이 그곳에 갇혀 있다. 루시퍼가 중심에 서 있고, 그의 세 입에는 세 배신자가 물려 있다. 가룟 유다와 로마제국의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공범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이다. 이 배신자들은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서 마왕 루키페르에게 씹히는 고통을 받고 있다. 단테는 배신을 매우 큰 죄악으로 여겼다.
루시퍼의 날개가 퍼덕일수록, 그 바람은 자신을 얼린다. 그는 스스로 자유를 얻으려다, 스스로를 결박한 존재다.
단테는 그들을 보며 깨닫는다. “지옥은 불의 장소가 아니라, 사랑이 부재한 냉기의 세계다.”
단테는 얼음 속에 위를 향하여 본다. 위에는 별이 있다. 단테는 속삭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별들을 보았다.” 이 말은 인간 영혼의 마지막 희망인 사랑의 회복을 시사한다.
5. 별빛 아래서 — 단테의 신학
단테의 『지옥편』은 결국 절망의 기록이 아니라, 회복의 서사다. 인간의 죄는 사랑의 방향을 잃은 사건이며, 회개는 그 방향을 다시 찾는 행위다.
그는 지옥의 끝에서 고백한다. “사랑이 세상을 움직인다.” 지옥은 끝이 아니라, 회개의 출발점이다. 죄의 심연 속에서도 단테는 하늘의 빛을 본다. 인간의 타락조차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임을 본다. 사랑이 사라진 곳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으로 존재하신다.
단테의 『신곡』은 인간의 죄와 구원을 그린 서사시이자, 신학적 시학이다. 지옥의 원들은 인간이 얼마나 멀리 빛에서 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얼마나 다시 별빛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증언한다.
단테가 남긴 마지막 문장은 여전히 시대를 넘어 울린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별들을 보았다.” 그 별은 하늘이 아니라, 회복된 사랑의 불빛이었다
단테의 지옥 신학은 ‘사랑의 방향’을 묻는다. 『신곡』의 지옥편은 인간 영혼의 어둠을 다룬 시학적 신학이다. 죄를 단순한 도덕의 위반이 아니라, 사랑이 잘못된 대상을 향한 운동으로 본다.
단테의 이 관점은 어거스틴의 명제, 정위된 사랑(amor ordinatus)와 무질서한 사랑(amor inordinatus)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인간이 자신, 세상, 피조물을 더 사랑할 때, 사랑은 어그러지고, 그 어그러짐이 곧 죄의 본질이 된다(롬 1:25).
단테가 말하는 ‘지옥의 원’(圓)은 신학적으로 사랑의 무질서가 단계적으로 심화된 구조이다. 그의 지옥은 불의 형벌보다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불은 하나님의 사랑이 왜곡될 때 남는 잿빛의 흔적이다. 단테가 본 일곱 죄의 원은 결국 사랑이 실패한 형식들이다.
단테는 죄의 심연에서 은혜의 별을 본다. 단테의 지옥 신학은 ‘사랑의 방향’을 묻는다. 『신곡』의 지옥편은 인간 영혼의 어둠을 다룬 시학적 신학이다. 죄를 단순한 도덕의 위반이 아니라, 사랑이 잘못된 대상을 향한 운동으로 본다. 불은 하나님의 사랑이 왜곡될 때 남는 잿빛의 흔적이다. 단테가 본 일곱 죄의 원은 결국 사랑의 실패한 형식들이다.
단테가 말하는 지옥의 일곱 원은 결국 “사랑의 질서가 무너진 세계”의 도표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고백,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별들을 보았다”라는 이 한 문장은 복음의 핵심과 맞닿아 있다.
성경의 별은 은혜의 상징이다(빌 2:15). 지옥의 밑바닥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시선을 들어 올려 볼 수 있다.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단테의 지옥은 절망이 아니라, 회개의 지도다. 모든 죄는 하나님 없는 사랑의 결과이지만, 모든 회개는 하나님을 다시 사랑하는 시작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시기하는 자에게 자족을, 분노한 자에게 평안을, 나태한 자에게 사명을, 탐욕한 자에게 만족을, 탐식한 자에게 절제의 은혜를, 색욕한 자에게 거룩한 사랑을 주신다.
단테가 지옥의 문 앞에서 깨달은 것은 복음의 역설이다. 그는 “사랑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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