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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자와 피억압자

 

왜 우리는 어떤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정의를 외치고, 어떤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에는 침묵하는가?  우리는 정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억압받는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어 하고, 힘없는 사람의 곁에 서고 싶어 한다. 불의한 권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용기를 귀하게 여긴다. 고통받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인간다운 삶의 시작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때때로 내 마음에 조용히 물어본다. 우리는 정말 모든 사람의 고통 앞에서 같은 마음으로 아파하는가? 아니면 어떤 사람의 눈물에는 쉽게 마음을 열면서도, 다른 사람의 눈물에는 알 수 없는 침묵으로 응답하는가?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국가폭력과 인권침해에는 분노하면서도 우리의 동포인 북한 주민의 고통 앞에서는 쉽게 침묵한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중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빼앗긴 그리스도인들의 아픔에는 무관심하다. 전쟁과 폭력을 반대한다고 말하면서도 러시아의 침공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눈물보다 국제정치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먼저 이야기하기도 한다.

 

왜 우리의 연민은 때때로 국경 앞에서 멈추는가? 왜 우리의 정의감은 어떤 사람에게는 따뜻한 손길이지만,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차가운 침묵으로 남는가? 나는 이 질문을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무기로 삼고 싶지 않다. 오히려 이 질문 앞에서 내 마음부터 살피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자신이 옳다고 믿는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정의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우리를 눈멀게 한다. 눈앞의 불의를 보지 못하게 한다.

 

인간의 마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어둠이 있다. 우리는 사랑을 말하면서도 사랑할 사람을 선택한다. 평화를 외치면서도 자신이 속한 진영의 폭력에는 너그러워진다. 정의를 위해 싸운다고 믿으면서도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는 마음의 문을 닫는다. 어쩌면 우리가 가장 경계할 것은 불의를 행하는 사람만이 아닐 것이다. 자신이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확신하는 우리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받은 해방신학은 고통스러운 역사 현장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리고, 권력자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짓밟고, 소수자들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던 시대였다. 그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물었다. 하나님은 이 고통의 현장에서 어디에 계시는가? 가난한 사람들이 신음할 때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는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복음의 호소가 담겨 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울부짖음을 듣는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과 버림받은 사람에게 다가가셨다. 세상이 외면하는 사람을 품으셨고,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사람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 억압받는 사람의 신음 앞에서 귀를 막을 수도 없다. 고통받는 이웃을 향한 사랑은 우리의 신앙이 살아 있다는 중요한 표지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사랑과 정의의 차이를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가난한 자의 모든 행동을 옳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사안이다. 억압받는 사람을 보호하는 것과 그에게 도덕적 무죄를 선언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고통은 우리의 연민을 요청하지만, 그 자체로 모든 행동을 정당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성경은 놀라울 만큼 분명하게 말씀한다.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출 23:3).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하라”(레 19:15).

 

이 말씀들 앞에 서면 우리는 잠시 말을 멈추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힘 있는 사람의 편에 서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빈자의 모든 주장을 옳다고 인정하라고 말씀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깊고 어려운 길을 보여 준다. 그것은 사람의 사회적 위치가 아니라 진실과 공의에 따라 판단하는 길이다.

 

하나님의 공의에는 국경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이념의 울타리가 없다. 하나님은 어느 한 진영의 소유가 아니다. 나는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을 경계한다. 그러나 이 신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억압받는 사람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인다는 사실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들의 외침은 때로 안락한 교회가 잊고 있던 이웃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그러나 이 신학 사상이 억압자와 피억압자라는 구도를 모든 현실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을 때, 또 다른 위험이 시작된다.

 

세상을 억압자와 피억압자로 나누는 일은 때로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그 구도가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지배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그의 얼굴보다 그가 속한 집단을 먼저 보고, 그의 고통보다 그가 서 있는 정치적 위치를 먼저 살핀다. 그때 사람은 더 이상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다. 그는 어느 진영을 대표하는 존재로 바뀐다. 그리고 우리는 아주 조용히, 때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통받는 사람을 외면하기 시작한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에게는 이름이 있고, 가족이 있고, 돌아가고 싶은 집이 있을 것이다. 그 역시 사랑받기를 원하고, 자유롭게 숨쉬기를 원하며, 두려움 없이 내일을 맞이하고 싶어 할 것이다. 중국에서 신앙 때문에 고통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가? 그들에게 예배는 단순한 종교 활동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을 열어 놓는 시간이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믿음의 고백일 것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크라이나의 마을을 생각해 보라. 무너진 집 앞에 서 있는 어머니와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기다리는 아이가 있다. 그들에게 국제정치의 복잡한 논쟁은 자신의 고통을 대신 설명해 주지 못한다. 그들은 오늘 밤 몸을 누일 곳과 사랑하는 사람의 무사한 귀환을 바랄 뿐이다.

 

이 사람들의 얼굴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먼저 말할 것인가? 미국의 책임과 서유럽 제국주의의 역사를 비판할 수도 있다. 국제질서의 모순을 분석할 수도 있다. 그러한 질문은 때로 필요하며, 역사에 대한 성찰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모든 설명이 지금 고통받는 한 사람의 얼굴을 가려 버린다면, 우리는 아주 중요한 무엇을 잃어버린 것이다. 고통받는 사람은 우리의 이념을 증명하기 위한 자료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한 사람의 인간이다.

 

나는 여기에서 기독교 신앙의 가장 깊은 진실 가운데 하나를 발견한다. 성경은 인간을 억압자와 피억압자라는 두 종류의 사람으로만 나누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들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죄로 말미암아 상처 입은 존재라고 가르친다. 부자도 죄인이며 가난한 사람도 죄인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권력에 억압받는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는 서로 다른 자리에 서 있지만 모두 하나님의 자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 진실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나는 억압받는 사람이라고 하여 언제나 선한 것은 아니며,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여 그가 행하는 모든 일이 악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물론 권력에는 더 큰 책임이 따른다. 힘을 가진 사람은 그 힘으로 다른 사람을 보호할 수도 있고, 상처 입힐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권력이 저지르는 불의를 더욱 엄중하게 살펴야 한다.

 

그러나 어제의 피해자가 오늘의 가해자일 수 있다. 한때 자유를 위해 싸웠던 사람이 권력을 잡은 뒤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을 수도 있다. 억압에 저항했던 나라가 어느 날 이웃 나라를 억압할 수도 있다. 인간의 죄는 어느 계급이나 민족이나 국가에만 머물지 않는다. 죄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는 회개가 필요하다.

 

나는 내가 속한 신앙고백 공동체가 정의롭다고 믿고 싶다. 내가 지지하는 사람들이 선한 목적을 위해 일한다고 믿고 싶다. 나의 믿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 앞에서도 진실을 말하는 용기를 갖는 것이다.

 

우리가 미국의 불의를 비판할 수 있다면 북한의 불의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가 저지르는 잘못을 지적한다면 중국 정부가 침해하는 신앙의 자유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과거의 제국주의를 비판한다면 오늘날 러시아가 행하는 침략 역시 불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어느 나라를 미워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 진영에 속하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공의 앞에 함께 세우자는 이야기다. 우리는 나라를 사랑하면서도 그 나라의 잘못을 비판할 수 있다. 한 민족의 아픈 역사를 이해하면서도 그 국가가 오늘날 저지르는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을 수 있다. 가난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면서도 그가 행하는 불의를 불의라고 말할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진실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어렵다. 우리는 친구를 사랑하는 일조차 힘겨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사랑할 사람의 경계를 허물라고 한다.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 우리가 두려워하는 사람까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바라보라고 한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악을 선하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다. 불의를 용납하거나 폭력 앞에서 침묵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악을 미워하면서도 악을 행한 사람의 인간성까지 부정하지 않는 사랑이다. 또한 내가 속한 편의 잘못을 감추지 않는 용기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이 사랑을 배운다. 십자가는 인간이 얼마나 쉽게 의로운 사람을 정죄하고, 자신의 확신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지를 보여 준다. 동시에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는지를 보여 준다.

 

십자가 아래에서는 누구도 자신이 완전히 의롭다고 자랑할 수 없다. 억압자도, 피억압자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그곳에서 우리의 자랑은 무너지고, 우리의 이념은 자신의 한계를 드러낸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우리가 정의를 말할 때 조용히 말하기를 바란다.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자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빨리 판단하기 전에 한 사람의 고통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마음을 갖자는 뜻이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해결할 수 없다. 모든 전쟁을 멈출 수도 없고, 모든 감옥의 문을 열 수도 없다. 그러나 적어도 누구의 눈물은 귀하고 누구의 눈물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닐 수 있다. 우리의 손길이 모든 사람에게 닿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양심까지 어느 한 진영의 울타리 안에 가두지는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가 지지하는 나라의 국경에서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외면하는 사람의 신음도 들으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마음에 묻는다. 내가 쉽게 분노하는 불의는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애써 외면하는 불의는 무엇인가? 내가 기꺼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내가 아무런 감정 없이 지나치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정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확신을 사랑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나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할 뿐이다. 내가 속한 진영의 깃발보다 고통받는 사람의 얼굴을 먼저 보게 하소서. 내가 옳다는 확신보다 진실을 향한 겸손을 더 사랑하게 하소서. 다른 사람의 불의에는 분노하면서 자신의 불의에는 관대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무엇보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나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우리는 세상을 억압자와 피억압자로 나눌 수 있다. 때로는 그러한 구분이 역사의 아픔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 구분이 인간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지막 시선이 되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마지막 시선은 언제나 십자가를 향해야 한다. 그곳에는 모든 인간의 죄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가 있고,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있다.

 

 

정의는 내가 속한 편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일이 아니다. 정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잘못까지 하나님의 빛 앞에 드러내는 용기다. 그리고 사랑은 내가 선택한 사람의 눈물만 닦아 주는 일이 아니다. 내가 외면했던 사람의 눈물 속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일이다. 어쩌면 진정한 정의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누구의 편에 서 있는지를 묻기 전에, 지금 누구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지 묻는 그 자리에서 말이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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