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와 개신교인
중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선교사는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이다. 영국인 모리슨은 1807년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소속으로 중국 광저우에 도착하여 27년간 선교 활동을 했다. 당시 중국은 외국인 선교 활동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에 신자를 얻기 보다는 중국어 성경 번역과 중영사전 편찬 등 중국 선교의 초석을 다지기에 큰 공헌을 했다. 모리슨에게 전도를 받은 최초의 중국인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누구인가?
모리슨이 중국에 입국한 당시 중국은 쇄국 정책을 펴고 있었고, 강력한 선교 금지령을 발효했다. 모리슨의 선교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모리슨이 직접적으로 신자를 얻기 어려웠던 배경에는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했다. 그는 직접적인 전도보다는 선교 기초를 다지는 작업에 집중했다. 당시 중국은 외국인이 선교 활동을 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사형에 처할 만큼 강력한 법률을 시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리슨은 선교사 정체를 숨기고 동인도 회사의 통역관으로 일하며 선교의 기반을 마련했다.
모리슨의 그의 주요 업적은 세 가지였다. 첫째, 중국어 성경을 번역했다. 모리슨은 중국어 성경 번역에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그는 신약성경과 구약성경 전체를 번역하여 1823년에 '신천성서(新天聖書)'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다. 이는 중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이후 중국 선교의 밑거름이 되었다. 둘째, 중영사전을 편찬했다. 모리슨은 중국어 학습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선교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방대한 양의 '중국어-영어 사전'(A Dictionary of the Chinese Language)을 편찬했다. 이 사전은 유럽인들이 중국어를 배우는 데 있어 획기적인 도구가 되었고, 서구와 중국 간의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셋째, 인쇄 기술을 중국에 도입했다. 중국어 성경과 문서를 인쇄하려고 유럽의 활판 인쇄 기술을 중국에 도입했다. 이는 선교 문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출판물 제작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모리슨은 오랫동안 신자를 얻지 못했다. 그 까닭은 그의 개인적인 능력 부족이라기보다는 당시의 특수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환경 때문이다.
첫째, 강력한 선교 금지 정책: 당시 청나라는 엄격한 쇄국 정책으로 인해 서구의 종교와 문화를 배척했다. 선교 활동은 불법이었으며, 발각될 경우 선교사 본인뿐만 아니라 개종한 중국인에게도 가혹한 처벌이 내려졌다. 이러한 극심한 박해는 중국인들이 개종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제한적인 활동 범위: 모리슨은 통역관 신분으로 위장하여 광저우의 제한된 지역에서만 활동해야 했다. 공개적인 설교나 대규모 전도 집회는 상상할 수 없었으며, 소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만 비밀리에 접촉해야 했다.
둘째, 언어 및 문화적 장벽: 모리슨은 중국어를 배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깊이 있는 문화적 이해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서양의 기독교 교리가 중국의 전통적인 유교, 불교, 도교 사상과 충돌하면서 중국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조상 숭배 금지 등 기독교의 가르침은 중국인의 효 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되어 심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셋째, 선교 방식의 한계: 모리슨의 선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직접적인 전도보다는 선교의 기반을 다지는 준비 작업에 가까웠다. 그는 성경 번역, 사전 편찬, 인쇄 기술 도입 등 장기적인 관점에서 중국 선교의 초석을 놓는 데 주력했다. 이러한 간접적인 선교 방식은 당장 신자 수를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후 중국 선교의 폭발적인 성장을 위한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로버트 모리슨은 비록 생전에는 소수의 신자만을 얻었지만, 그의 헌신적인 노력은 중국 선교 역사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성경 번역과 사전 편찬을 통해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접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었으며, 그의 뒤를 이은 선교사들이 보다 효과적으로 선교 활동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모리슨은 중국 선교의 '선구자'이자 '개척자'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모리슨에게 세례를 받은 중국 최초의 개신교인은 차이 가오(蔡高)이다. 중국 최초의 개신교인은 차이 가오(蔡高, 1788-1818)이다. 모리슨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은 중국 최초의 개신교 신자이다. 그는 중국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개종은 19세기 초 중국 내 개신교 확산의 중요한 이정표이다. 차이 가오의 신앙 여정은 개인의 영적 탐구를 넘어, 가족의 경제적 필요, 형의 강력한 반대와 역설적인 조력, 그리고 유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던 사회적 압력 등 복잡한 가족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다.
첫째, 신앙의 토대와 관련하여, 그의 가족의 위기와 로버트 모리슨과의 만남이 중요했다. 본래 차이 가오의 집안은 무역선을 소유한 부유한 가문이었으나, 부친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돌아오던 중 배와 함께 남중국해에서 실종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부친은 막대한 빚을 남겼는데 그것이 가족에게 큰 부담이 되었고, 10여 년 후에는 맏아들인 차이 쉬안(蔡軒)이 부친이 남긴 빚 때문에 고발당해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때 중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던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이 지역 현감과의 친분을 이용해 차이 쉬안의 보석 석방을 도왔다.
한편, 모리슨은 1807년 중국에 도착한 후 광저우의 13행(十三行)에 정착하였다. 영국에서 부터 알던 롱샌더(容三德)가 차이 형제를 모리슨에게 소개하였다. 롱샌더는 이전 영국 유학 시절 모리슨에게 중국어를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그가 광저우로 돌아와 모리슨과 재회하여 차이 형제를 소개했다.
1808년 3월, 차이 형제는 아딩(阿丁)과 귀유니(桂有霓, Kwei-Une)와 함께 모리슨 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맡은 일, 차이 쉬안은 중국어 성경 필사와 모리슨의 광둥어 교사로, 차이 가오는 식료품을 담당했으며, 귀유니는 모리슨에게 중국어를 가르쳤고, 아딩은 요리사로 일하기로 했다.
둘째, 신앙의 여정과 관련하여 그가 당한 해고와 지속적인 복음 접촉이 중요했다. 모리슨은 자신의 피고용인들에게 매일 가정 예배와 주일 예배 참석을 의무화했다. 이 모임을 통해 차이 가오는 중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기독교 가르침을 접했다. 그러나 차이 가오는 동료 귀유니(桂有霓)와 자주 다투어서, 9월 말에 결국 그 둘은 해고 되었다.
그러나 차이 쉬안은 계속 모리슨을 위해 일했다. 이 덕분에 차이 가오는 모리슨과의 관계를 유지했으며, 모리슨의 가정 예배에 계속 참여할 수 있었다. 형 차이 쉬안은 비록 자신은 기독교를 반대했지만, 그가 모리슨의 일을 계속하였기에 동생 차이 가오가 모리슨이 인도하는 예배에 지속적으로 참석하여 의도치 않은 다리 역할을 한 셈이 되었다.
셋째, 가장 큰 장벽은 형의 유교 사상과 비밀 세례였다. 차이 가오의 개종에 가장 큰 장애물은 그의 형 차이 쉬안의 확고한 유교적 신념이었다. 차이 쉬안은 오랫동안 모리슨을 위해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물론 불교와 도교까지 거부하며 오직 유교만이 올바른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형의 완고한 반대는 차이 가오에게 엄청난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했다. 1812년, 차이 가오는 개종을 결심하고 모리슨에게 세례를 요청했으나, 모리슨은 그의 신앙 이해가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거절했다. 그 후 2년간 차이 가오는 꾸준히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와 성경 연구에 매진하며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는 등 신실함을 보였다.
1814년 6월과 7월, 채가오는 다시 한 번 세례를 받고 싶다는 소망을 표하며 친필로 신앙고백서를 아래와 같이 썼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이는 기쁜 소식입니다. 말과 생각으로는 예수님의 자비와 친절을 조금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제 저는 예수님을 깊이 믿으며 그분께서 제 죄를 속죄해 주시기를 의지합니다. 저는 죄를 지었고 부족함을 느꼈으며, 예수님께서 제 죄를 속죄해 주시기를 믿지 않는다면 저는 영원히 비참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속죄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분의 사역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도 선하지 않습니다. 저는 종종 제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저는 무능하고, 덕이 없고, 교육받지 못했습니다. 올해 스물일곱 살이 된 저는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부모님과 친척, 친구들의 은혜에 보답하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불평해야 할까요? 내 선행을 믿어야 할까요?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진심으로 믿으며, 성령의 은사를 위해 영원히 기도합니다."
마침내 모리슨은 그의 세례를 허락했지만, 차이 가오는 비밀리에 세례받기를 원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형의 뜻을 거스릴 용기가 없었다"는 점이 분명한 요인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 사회에서 형의 권위는 막중했으며, 가족의 화목과 효도를 중시하는 유교적 가치에 따라 형의 신념을 거스르는 것은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1814년 7월 16일, 모리슨은 마카오 해변의 한적한 장소에서 차이 가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는 모리슨이 중국에서 7년간 사역한 끝에 맺은 첫 결실이었다.
넷째, 세례 이후의 삶과 영향은 인상적이었다. 세례 후 차이 가오의 믿음은 더욱 깊어졌다26. 1817년, 그는 광둥 관리들의 단속을 피해 말라카로 피신하여 선교부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중국으로 돌아와서도 매일 저녁 모리슨의 집을 찾아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신앙의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는 심각한 폐 질환을 앓다가 1818년 10월,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28. 훗날 마카오의 신도들은 그를 기념하여 '차이 가오 예배당' 건립을 위한 헌금을 모았다.
다섯째, 형, 차이 쉬안(蔡軒)의 변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생의 개종을 완고히 반대했던 차이 쉬안(蔡軒)은 놀랍게도 1822년, 모리슨에게 편지를 보내 세례를 요청했다. 모리슨은 그의 요청에 크게 놀랐으나, 현존하는 기록에 그의 세례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는 기독교에 장기간 노출된 것이 완고한 전통주의자에게도 미묘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여섯째, 동생 차이 윈(蔡运)의 행보가 궁금하다. 차이 윈(蔡运) 역시 선교사와 함께 말라카에 가는 등 기독교와 교류가 있었고, 관청의 추적을 받을 때 모리슨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후 행방과 기독교 신자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사례는 가족 내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노출이 반드시 개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며, 당시 신앙을 갖는 데 따르는 실제적인 위험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차이 가오의 개종 이야기는 그의 가족 관계와 상황에 깊이 얽혀 있었다. 가족의 영향은 이중적이었다. 첫째, 부친의 사망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은 기독교와의 만남을 이끈 촉매제가 되었다. 둘째, 형 차이 쉬안의 유교적 신념은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제약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형이 모리슨과 고용 관계를 유지하고 가족 전체가 모리슨의 지원을 받으면서 차이 가오가 기독교와 지속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차이 가오의 삶은 개인의 신념이 뿌리 깊은 문화적, 가족적 가치와 충돌하며 겪는 내적 갈등과 외부적 압력을 보여준다. 이러한 압력은 모든 중국 성도들이 겪었던 축소판인 샘이다. 중국 사회의 근간인 가족은 그의 신앙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통로이자 가장 강력한 장벽으로 동시에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위 글의 후반부 최초의 중국 프로테스탄트 신자에 대한 이야기는 페이스북 친구 장석의 글을 큰 폭으로 참고했다. 장석은 북경대학교에서 근대 중국문화사를 전공했고, 북경에 거주하고 있다. (페이스북 글 2025.08.10).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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