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르만다

 

김린희 전도사 이야기 (신사참배거부운동 인물)


김린희 전도사는 1905년 1월 17일(음) 평북 선천 시내에서 15리쯤 떨어진 선천군 태산면 인암동 배모리 475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네 살에 모친을, 열 네 살에 부친을 여의고 할아버지와 형수님의 손에서 자라났다. 할아버지는 이런 손자가 애처로워 귀하게 키우셨고 일찍부터 공부를 시켜 어려서부터 천자문을 다 떼었다.

1923년인 18세에 선천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보성 중학교 입학하여 재학 중 방학 때 집에 왔더니 어른들이 정한 규수와의 혼담이 무르익어 있었다. 아직 정이란 것도 모른 채 신부될 처녀에게 말하기를 '난 개학이 되면 공부하러 서울로 가야 하는데 그 사이에 나 없는 것도 괜찮으면 시집 오라'고 했다. 그랬어도 성사가 되어 곧 결혼하고 개학을 맞아 신혼 살림과 신부를 남겨두고 서울로 가고 말았다.

시집온 새댁은 가난한 집에서 자라나 부잣집 농가로 와서는 일밖에 몰랐다. 그런데 방학이 되어 돌아온 학생 신랑은 신식 신랑인지라 새댁이 온갖 일에 싸여 바쁘게 돌아가는 것을 붙잡고서는 '일은 나 없을 때나 하고 나 돌아오면 하던 일 다 치우고 당신은 나하고 둘이서 산책합시다' 하고 데리고 나간다. 그래서 신랑이 돌아와 있는 방학동안 한 달하고 열흘은 신혼 맛에 즐거운 단꿈에 젖어 지내곤 하였다.

그러는 사이 신랑 신부는 때가 되어 딸을 하나 낳았다.

새신랑의 손은 일하지 않고 공부만 하던 손인지라 가끔 돌아와서 만나는 어린 딸은 오랜만에 만나는 아버지를 반기며 '우리 아버지는 손도 곱고 발도 곱고 손가락도 곱고 눈도 곱고 입도 곱고…' 품에 착착 감기면서 종알종알 새어 나오는 소리를 들으면 정이 폭폭 들게 만들었다.

김린희씨가 서울 보성 중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그의 형님이 노름으로 많던 재산을 탕진하기 시작하여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 보성중학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고 일본 동경으로 가서 사립 국민중학회 예비회에 들어가 고학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한 번은 학비를 벌기 위해 빌딩 유리 닦는 일을 하다가 오층 높이에서 떨어졌지만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은 정말 기적도 있었지만 일본 유학도 1년만에 폐결핵으로 인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병을 고치려고 별별 약도 다 써보고 좋다는 것은 다 해보았지만 백 약이 무효였고 약을 써봐도 병세는 더하였다. 급기야는 밥도 먹지 못하고 3년을 죽을 먹으며 병과 씨름하였다.

결국에 김린희씨는 자기 병 고칠 의사는 세상엔 없고 이대로 병에 시달리며 죽겠구나 하는 절망에 직면하였다. '예수 믿으면 좋은데 간다는데…'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갈구하는 마음이 생길 무렵 마침 일찍 예수를 믿어 교회 권사였던 김린희씨의 작은 어머니가 이런 측은한 모습의 조카를 보고 '너는 생명 끝났구나! 가자, 평북 의주 고관면에 가면 성신 권사라고 병 고치는 능력을 은사로 받으신 권사님이 계신데 병 고침을 받으러 찾아 가보면 어떻겠느냐?'고 권하자 이미 속음에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마음이 무르익어 있어 바로 따라 나섰다.

고관면으로 성신 권사 댁을 찾아가 아예 기거하면서 성신권사와 함께 기도하기를 두 달 되자 몇 년 먹던 죽밖에 못 먹었으나 밥을 먹고 병세를 점점 회복하면서 병이 차츰 나아가서 활동할 수도 있게 되자 그곳에서 학생을 가르쳐보라는 부탁을 받고 학교도 없는 시골에서 선생이 되었다. 학부형들이 고맙다고 월사금 대신 현물로 곡식과 한 달에 조 두말을 받게 되었고 채소도 갖다 준다.

이렇게 몸도 회복되고 일도 하면서 사는 동안 그 곳 교회에서 집사로 세움 받고 가끔 설교도 하였는데 담임 목사님이 '오늘 저녁엔 김집사가 설교합니다' 하면 간증과 말씀에 은혜가 넘쳐서 교인들이 평소보다 더 많이 나왔다고 한다.

이렇게 고향집을 떠나 오래 있는 동안에 집안 소식이 궁금해서 편지로 안부를 묻곤 했는데 어린 딸이 아버지를 보고 싶어 찾는다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돌아오는 답장엔 몇 달이 지나도록 그런 말이 없었다. 그 사이에 어린것은 호흡기 질환으로 단명하고 이미 세상에 있지 않았다. 부인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남편의 병이 악화될까봐 안심시키누라고 가정은 편안하니 맘 편히 가지고 병 고치시라고 안부를 물을 적마다 다 편안하다고만 전하였다.
그러나 사실을 오래 묻어둘 수 없는 법인지라 숙모인 계권사가 몇 달만에 성신 권사에게 사례도 할 겸 찾아와 이런 사실을 다 말했다. 이미 김전도사는 딸 죽은 줄 이미 알고 있었다. 편지로 영숙이 잘 있냐? 아버지 찾냐? 어머니 찾냐? 고 묻고 물어도 다 편안해요 편안해요라는 대답만 전해오는 것으로 무슨 변고가 생긴 까닭이 틀림없었던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김전도사는 드디어 들을 것을 듣고서 다윗이 죽어가는 아기를 위해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듯이 산에 올라가서 울며 금식하고 슬퍼하였다.


성경학교와 신학 수업


당시 선천은 평북에서 제일 가는 기독교 도시로서 그 당시 주일에는 장이 서지 못할 정도였다. 이곳 선천에는 선천 성경학교가 있었다. 이 성경학교는 당시 조선에서 제일 큰 성경학교였고 교장은 선교사였는데(이 학교에서 공부하였던 이형록 목사는 말하기를 당시 교장의 이름은 남현리, 한가룬 선교사 두분 중 한 사람이 분명하다고 하며 이 분위기를 전한다)

신사 참배 거부로 폐쇄되기 전의 학생 숫자가 약 80여명이었고 교사진을 구성하는 목사 선교사들은 약 5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공부하던 성경학교 학생들은 구령 열정도 뜨거워 이 학생들이 공부하는 목표는 일치되게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복음 일선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김린희씨는 여기에 입학하여 함께 공부하였다.

성경학교 시절에는 박의흠 전도사, 김윤섭 전도사, 이용희 전도사, 김양순 전도사 그리고 외국 선교사 몇몇 분이 신앙의 동지로 결속되어 그렇게 많은 기도를 하면서 도무지 네 것, 내 것을 가리는 법이 없이 막역하였고 방학이 되어 고향에 돌아오면 해가 넘어가는지도 모르고 성경 연구와 토론에 몰두하곤 하였다. 그리고 광목 천에 연구한 말세도를 크게 그려 붙여놓고 교인들을 가르쳤다.

이후 전심전력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뜻을 정하고 평양 신학에 입학하였다. 이 때 하나님 앞에 약속하기를 하나님이 죽을 사람 살려 주셨으니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겠습니다하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말씀만 전하여 신학교에 다니면서 틈틈이 선천을 위시하여 인근 농촌과, 고향 배모리 등에 교회를 열 세 군데 세우고 그 교회들을 순방하여 돌보면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일본의 제국 야욕이 치밀하고 조직적인 계획 하에 신사참배를 학교에서도 행하게 되었다. 큰 딸(현 재건동산교회 김신일 권사)이 일곱 살이 되자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교과서도 다 준비해 두었다가 신사참배가 학교에까지 들어오게 되므로 입학시키기를 포기하였다.

평양 신학교까지 신사참배가 들어와 강요되자 신학교를 자퇴하고 김전도사는 신사참배 반대 투쟁할 준비를 위해 얼굴들을 환히 잘 아는 고향을 떠나 압록강가 신의주로 이사를 갔다.


신사참배 반대투쟁


김린희 전도사는 박의흠 전도사와 함께 신사 참배 강요에 항거하고 싸우기 위해 이미 생명을 내걸고 누구보다도 선봉에 서기로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때 한국 교계에서 매우 유명했던 신의주 제일교회, 제이교회 교인들에게도, 그리고 그 밖의 어디든지 뜻이 통할만한 교인들이 있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가 성경을 펴고 가르쳐 신사참배가 죄 됨을 가르쳐 주어 따로 모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 당시 윤모 목사의 그 신의주 제일교회와 한모 목사가 맡아보던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많은 교인들이 갈라져 나왔다.

청년 이형록씨가 예수 믿기 시작한 무렵은 신사참배가 교회에 들어와 성도들이 박해를 당하고 있을 때였다. 이 때에는 성경대로 바로 믿으려고 하는 성도들 사이에서는 만나고 모이기가 매우 힘들었다. 신앙생활도 숨어서 피해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도라고 해도 쉽게 믿지 못할 시대였다. 오직 숨은 성도들끼리 소문 듣고 찾아가고 만나고 할 뿐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평소 신앙의 어머니처럼 따르던 성신 권사가 아무 아무데에 신앙 좋은 사람 있다고 하여 신의주 양씨 통로에 임시로 거처를 정하여 살고 있는 김린희 전도사를 만났다. 눈이 커다랗게 생긴 사람을 소개해 주는데 그분이 바로 김린희 전도사였다. 당시 열 몇 살 된 큰 딸이 옥수수밭 김을 매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생활이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형록씨가 몇 사람 비밀리에 모이는 가정 교회에서 김린희 전도사의 설교를 처음 들었는데 그 설교 내용은 신사참배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성경으로 조목조목 찾아 가르치며 강조하는 것이었다. 듣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깊은 감화를 받았는데 그 감화력은 단지 학문 이론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실천 생활 속에서 나온 힘있는 것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그를 만나자 '이 사람은 하나님이 남겨두신 교회의 참된 일꾼이로구나'하고 생각하였는데 처음 만난 자기에게 '참교회를 찾으라'고 하더라고 그는 증언한다.

그렇게 양무리를 찾아 헤매는 목자의 심정으로 다니다가 어디서든지 신사 참배하는 교역자를 만나면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고, "사람의 영혼은 죽이며 다니는 이 밥목사! 회개하라!"고 한마디씩 꼭 외쳐 주었다.

이미 신앙의 기가 꺾여 양심을 깔아뭉개고 일제의 권력에 빌붙어 지내는 목사나 교역자들은 회개는 고사하고 마음이 더욱 강퍅해져서, 김린희 때문에 교회를 운영할 수가 없고 교역자 노릇도 못해먹겠다고 마구 투정을 하면서 당국에다가 김린희 잡아가라는 투서를 넣는데 그런 투서가 여기 저기서 날아들었다.

신의주 경찰서 최형사라는 이를 누가 찾아갔다. 박의흠 전도사의 처조카로 일본 헌병하던이었다. 그가 고숙 박전도사의 고생을 덜어줄 양으로 신의주 경찰서를 찾아가 직접 듣기를 목사 장로 전도사들이 넣는 그런 투서가 신의주 경찰서 고등계실에 무더기로 쌓이게 되므로 당국자들도 가만 있을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고등계 형사대가 총 출동하여 김린희 전도사와 박의흠 전도사를 잡으려고 온통 혈안이 되어 있었다.


체포


당시 김전도사네는 하도 가택 수색을 많이 당했기 때문에 가정에서 사용하는 성경 찬송가도 성한 것은 숨겨놓고 수색으로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을 낡은 것만 놔두고 사용하였다.

일제의 신앙탄압이 그 강도를 더하면서 성경 찬송가의 출판까지 통제하여 찬송가엔 '내주는 강한 성'이나 '세상 나라들은 멸망 받으나 예수 교회 영영 왕성하리라' 등등 일본 제국주의와 이념에 조금이라도 대치된다고 생각하는 가사엔 까만 먹칠을 해서 출판하게 하였다.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성경 찬송가를 구할 수 없게 되었지만 압록강을 건너 만주 땅 안동(지금의 단동)에서는 아직 온전한 책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김전도사는 성경을 구하러 김양순 전도사, 한명상 장로(당시는 집사)등 몇분과 함께 신의주에서 안동으로 건너갔다.

교인들에게 부탁 받은 성경을 신약전서, 신구약전서 등 9권을 사 모으고 박의흠 전도사와 함께 종일 신앙 지키는 성도들을 심방하였다. 저녁이 늦어 밖에서 저녁을 때우고는 밤 열시나 되어서야 모두 함께 박의흠 전도사 댁으로 돌아왔다. 이 때 전도사들 세 분 외에도 몇 몇 성도들이 같이 있었다.

한참 신앙 지키는 성도들의 안부 얘기를 서로 주고받았는데 한동안 그렇게 얘기를 나누다가 모두 한자리에서 예배를 드린 후 이 집 안방 천정 바로 위에는 전에 살던 중국인이 무엇을 밀조한다고 만들어 놓은 비밀실이 있어서 박의흠 전도사는 김린희 전도사와 함께 그 날밤도 밖으로 집을 삥 돌아서 사다리로 올라가게 되어 있는 그 비밀 기도실로 올라가고 남은 분들을 아직 누울 생각도 않고 얘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밤 열 두시쯤 되어 조선 땅 신의주에서 어떤 여자 분이 찾아와서는 누가 돌아가셔서 김전도사를 데리러 왔다고 하면서 찾는다.

그래서 아는 성도들끼리니까 아무도 모를 그 밀실을 가르쳐 주었다. 사다리 세워 놓고 올라와서 기도하는 김전도사를 빨리 내려오시라고 부른다.

그런데 어째선지 이날은 내려가기가 싫은 생각이 들지만 억지로 내려왔다고 한다. 사둔 9권의 성경책 묶어 가지고 가야 하겠으니 방으로 들어가서 성경책을 챙겨 나오는데 누군가의 밀고를 받은 형사들이 바로 이 때 들이닥쳐 둘러싼다. 방에 남아 있던 이들을 모조리 붙잡았다. 그리고는 먼저 김린희 전도사를 보고 물었다.

"당신 누구요?"

김린희 전도사는, 이미 올 것이 왔구나 하고, 마음 속으로는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고 있다가

"예, 제가 바로 김린희외다."

"아! 네가 김린흰가? 야! 이놈을 여기서 잡았구나!"하며
댓명이나 되는 형사들이 쾌재를 올리면서 한꺼번에 와락 달라붙어 정신 없이 때리고 차고 밟고 하였다. 그러다가 쓰러지면 다시 일으켜 세우고는 또 때리고 차고 다시 쓰러지면 다시 일으켜 세워놓고 하면서 사람을 거반 죽게 만들어 놓는 것을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날 그렇게 갑자기 들이닥쳤던 형사들은 신의주에서 안동 다리를 건너 온 신의주 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었다.

그 때에 김린희 전도사는 피부 색깔이 희고 젊어서 외모도 괜찮았는데 그렇게나 몹쓸 매를 맞으시니까 대번에 코피가 터지고 얼굴에는 시펄시펄하게 피멍이 드는 것을 보니 나이 어린 박의흠 전도사의 자녀들은 방 한구석에 쭈구리고 앉아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고 거기에 모였던 이들도 모조리 꽁꽁 묶이워 가고 말았다.

이렇게 신의주 형사들은 박의흠 전도사를 잡으려고 들이닥쳤다가 김린희 전도사를 체포해 간 것이었다.

그 날 밤에 박의흠 전도사는 다락에 앉아서 김전도사가 그렇게 두들겨 맞고 발길에 채이고 고통을 당하다가 잡혀가시는 것을 다 듣고 있으면서 마음이 심히 아프고 괴로웠다.

김전도사가 자기 때문에 저렇게 매 맞고 붙들려 가신 것을 생각하니 속에서는 당장에 '나 여기 있수다'하고 쫓아 내려가 같이 붙들려 가고 싶은 생각이 불같이 일어 났지만 '그런데 왜 이 시간에 하나님이 하필이면 나만을 저 원수들의 손을 벗어난 이 자리에 와 있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다 붙들려 가고 난 다음에도 몇 시간을 그 자리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를 하였다.

그러자 마음 한 복판에서 '지금은 그런 인정에 얽매일 때가 아니니 내려가지 말고 도피해야 한다!' 하는 생각이 주님의 명령과도 같이 강력하게 솟아 올라온다. '그렇다. 밑에서도 그렇게 내가 없다고 했으니 지금은 내려갈 때가 아니고 만주 봉천이나 하얼빈 같은데로 가야 하겠다.'이렇게 마음을 정하고는 기도를 간곡히 드린 다음, 문을 가만히 열고 중국집 기와 지붕들을 넘고 넘어 일단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한편 형사들은 김린희 전도사와 신의주에서 데리러 온 여자 성도 등 몇 명이 택시를 타고 안동에서 신의주 경찰서에 일단 구금하였다. 김전도사는 고등계 형사들에게 취조 심문 당할 때에 매를 셀 수 없이 많이 맞았고 박의흠이 어디 있냐 대라고 하는 때문에 더 많이 맞았다.


가족들의 면회


일단 체포가 되고 구금된 동안에는 형무소로 식구들 외엔 아무도 면회 올 사람이 없었거니와 식구들조차 면회할 기회를 마음대로 허락 받지를 못하였다. 그러니 옥중 성도들은 성도의 교제에 더욱 목마른 고통을 당했다.

김전도사가 체포되고 두 달 정도 지난 후에 면회 기회가 열려서 사모님이 찾아가 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김전도사는 구금 두 달 사이에 벌써 살은 다 어디 갔는지 없고 바짝 말라서 예수 믿기 전에 앓아서 다 죽게 되었던 때의 모양 같이 되어 있었다.

당시 양력설이 되면 당국에서는 수감자들에게 특별 음식을 들여보낼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음식을 장만하여 수감 죄수들이 있는 구치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수감된 이들이 성도들을 알아보고는 고문 악형에 상한 몸 때문에 모기만한 목소리로 할렐루야-하고 힘없이 인사하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리곤 하였다.

이렇게 몇 번 찾아간 구치소에서 수감 죄수들을 아무 아무 날에 모두 다른 곳으로 이감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날이 되어 수감자를 둔 가족들이 신의주 역전에 다 나가 기다렸다가 호송되어 오는 죄인 아닌 죄수들을 만났다. 형사들은 수감자들과 가족들이 만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서로 말도 못하게 하기 때문에 저만큼 떨어진 곳에서 서로 바라만 보고 손짓 몸짓 시늉만으로 의사를 서로 통하곤 하였는데 남쪽으로 가리키는 것을 보고 남쪽 어디로 가는 줄로 알 수 있었다.

이 날 옥중 성도들은 평양 본 경찰서와, 대동강 건너 선교리 경찰서, 그리고 다른 어느 곳, 이렇게 세 곳으로 각각 분산 수감 되게 되었다. 그런데도 수감된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 그러니 가족들은 남편이, 아버지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어서 세 군데를 다 헤매 다니면서 찾게 되었다.

창씨 개명된 김전도사의 이름, 가네모도 긴링끼를 대며 찾아다니며 알고 보니 평양 선교리에 구속 중이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애 써 찾아야만 겨우 알아도 수감된 죄수와는 면회도 잘 시켜주지 않아 우겨가며 사정해야만 잠깐 만날 수 있을 정도였다.

김린희 전도사는 아직 재판을 거치지 않은 미결수로서 경찰서니까 형무소와는 달리 음식을 좀 들여 줄 수 있었다. 아무래도 관식보다는 사식 음식이 더 좋기 때문에 기초 생존도 이어 나가기 힘든 옥고 속의 주의 종을 좀 더 가까운 곳에 살면서 옥바라지하기 위하여 가족들은 평양 선교리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다.

이리하여 아무도 찾는 이 없는 가운데 오직 가족들만 겨우 면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음식도 매일은 해 올 수 없고 이틀에 한 번씩 점심 식사를 해 들일 수 있었다. 또 애들도 데려와서 좀 만나 봐도 되는지를 물어 보았다. 한번씩 데려 오라고 허락을 해 준다. 그래서 맨 처음으로 맏딸만 데리고 면회를 할 수 있었다.

김신일 권사는 이 때를 회상하기를 부친 수감 이후 이 때 처음 만났는데 잡혀 들어가서 지금까지 한 번도 깍지 못한 머리카락이 길게 자라나 여자들 머리카락보다 더 길게 자란 것이 인상 깊이 남았다고, 그리고 부친이 면회 장소로 가시면서 맏딸인 자기를 툭 치시면서 많이 컸다고 하는 말이 생생하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엔 사모님이 둘째를 데리고 들어가서 면회를 하였고, 또 한참 지나서 두 번째 모친 따라 갔을 땐 중머리처럼 삭발한 모습의 부친을 보았다고 한다.

당시에 평양 형무소로 면회 가려면 일본 사람들은 여간 까다롭게 하지 않았다. 내선일체 미명 때문에 몬베를 입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기차도 못탔고, 면회할 때 쓰는 말도 반드시 일본말로만 하게 하였다. 사모님은 일본어를 모르는 고로 면회는 해야 하겠고 집안 조카 중에 6년제 중학교 다니는 아이를 찾아가서 면회용 일본말을 적어달라고 부탁하곤 하였다.

그동안 안녕하십니까? 애들은 잘 있습니다. 이번에 차입(식사대금) 들였습니다. 이번에 옷을 들였습니다. 등 한 예닐곱 가지 요긴한 말을 일본어로 번역해서 적은 종이 쪽지를 지니고서 면회 접수해 놓고 차례를 기다리면서 암송도 하고 기도도 하였다. 당시 30대 나이로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끈기도 있었다. 사모님은 원래 조실부모하고 네 살 때 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운 분이었다. 김린희 전도사는 일본 유학한 분이시라 일본말이 청산유수였다. 그러나 사모님이 어떤 면엔 더 영리하고 총명했던 고로 기다리면서 다 외웠던 것이다.

이렇게 적어 외운 일본말로 면회를 하는 동안 김전도사는 듣기만 하고 써간 말 따라 한 페이지 외운 것 말하려면 일분도 안걸렸다.

이렇게 곧 잠자코 있는다면 안타깝고 한스러운 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간수에게 사정을 해본다 내가 살림도 하고 옥바라지도 하느라고 아무리 일본말을 배우려고 해도 많이 못배웠다고 그러니 조선말 조금 하게 해달라고. 그러면 간수도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던지 한 오분동안 하고싶은 말 다 하고 끝내게 허락해 주었다.

그런데 어떤 시골서 온 목사님 가족들은 면회하러 들어오면 들어오자마자 아들 본 할머니, 남편 본 아내는 대성통곡 왕왕 울면서 한국말로 주절주절 푸념식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 뱉아 놓는다. 이런 꼴을 일인 간수가 보고 듣고는 '돌아서! 뒷통수나 보고 나가!' 하고 내쫓아 버린다. 쫓겨 나가면서도 가족들은 이놈의 일본이 안 망하나 봐라! 하고 퍼붓고 돌아선다. 이런 식의 면회도 있었다.


적군에 의해 고발 당한 죄상은 뒤집어 보면 훈장감, 영예로운 일이된다. 마찬가지로 일제 검찰측이 작성한 예심 종결서대로 일본 당국에 의해 고발된 성도들의 죄상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흐려지지 아니할 영광이 될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일제 말기 신사 참배 반대자들을 대상으로 작성된 이 예심종결서에 총 21명 중 제일 먼저 기록된 이기선 목사 다음 순서인 김린희 전도사를 일본제국에 얼마나 위험한 인물로 경계하는지가 잘 드러난다.


{피고인은 품고 있는 사상이 앞의 이기선과 같아 결국 성경의 독선적 해석으로 여호와 신을 절대유일의 신으로 믿는 반면 일본의 신궁신사는 모두 다른 신 내지 우상으로 생각하여 이를 참배하는 것은 기독교 계명 위반이라고 하여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여 일본의 천황폐하라도 아담 하와의 자손으로 여호와의 신에게서 통치권을 받은 것에 불과하니 하나님 허락 아니하면 뺏길 수도 있어 우리 일본제국의 존망도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그리스도께서 불원간 지상에 재림하시어 우리나라를 포함한 모든 나라를 멸망시키고 그리스도 독재의 천년왕국을 건설하는 것으로써 기독교도는 계명을 엄수하고 신사참배같은 정책에는 극력 반대하여 널리 위의 독선적 교리만 전파에 노력하고 이에 함께 하는 동지를 다수 얻는 방법에 의하여 천년왕국 건설에 협력함으로 일본 제국 국체 변혁을 필연 초래할 천년왕국 실현을 추구하고 이 실현 준비 협력할 목적으로 그 주의 사상 선포에 광분한 자로서.....(중략)}


그 고발된 소위 죄상이라는 것을 추려 살펴보면


⑴ 1936년 12월 평양에서 이주원을 방문하여 박의흠과 3명이 회합하여 이주원에게서 한상동을 중심한 경남지방의 신사불참배 운동상황과 이 운동은 경남지방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듣고 지금까지 개인적 차원의 불참배 운동을 상호 협력하여 더욱 매진하도록 협의하고

⑵ 동월 상순 평양에서 박의흠과 함께 평북 선천 사람 친척을 방문하여 박신근이 평양에서 이주원을 만난 상황을 이야기하고 이주원에게 앞의 죄를 범하게 할 목적으로 이주원을 전보로 불러 다음 날 도착한 이주원에게 400원을 불참배 운동 자금으로 주었고

등등 1936년부터 1939년 4월 24일까지 신의주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평북 만주 방면의 신사불참배 운동을 모의한 것,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죽음으로 반항하라고 한 것, 신사참배하는 교회에 출입하지 말라고 한 것, 신사참배하는 학교에 자녀를 보내지 말라고 한 것,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기에 힘쓰게 한 것, 궁성요배를 단연코 금함으로 감히 천황의 존엄을 모독하고 이에 필요한 활동 자금을 주고 받은 일, 신사불참배 교회와 노회 재건을 도모한 것,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려고 맹세한 것과 주기철 목사를 방문 위로한 것, 이 운동의 동지를 얻기 힘 쓴 것, 현 교회 조직을 와해키에 진력할 방법을 연구 토의한 것 등 등, 조목조목 캐내어 천황을 모독할 뿐 아니라 일본 국가 체제 존립에 위협을 주는 극히 위험한 인물이라고 고발하고 있다. 과연 믿음 하나에 목숨을 건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인 모양이다(히 11:38).

당시에 가정이 좀 부유하여 평양에 집을 하나 장만하여 가지고 있었던 이례희 전도사가 있었다. 이전도사도 수감된 형편이어서(후에 6.25때 아들 영복과 함께 나란히 공산당에 의해 순교하였다) 이 댁에서 옆방을 김린희 전도사의 가족들에게 빌려주어 함께 살게 되었고 여기에는 평양 형무소에 수감된 성도들을 옥바라지하기 위해 모여든 가족들이 많았다.

옥바라지를 하고 차입금을 대기 위해 가내 공업 같은 일을 집에서 하기도 하고 수공 일감 받아다가 푼푼이 벌기 위해 수고들이 많았다.

감옥 안은 옥고를 치르는 종들에게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국립 기도실이었지만 밖에서 이들의 가족들이 모여서 도와가며 함께 생활하면서 함께 생명을 내어놓고 두려움 없이 예배와 기도도 함께 하는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이들은, 참으로 일본 당국으로서도 말리기도 힘들고 곤란하기도 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김전도사의 가족들은 여기서 생계 잇기가 어려워 고향 선천군 태산면 집으로 들어가서 농사를 짓기로 하였는데 이곳엔 김전도사의 할아버지께서 지켜 물려주신 옥토 전답 1,500평이 있었다. 토질이 좋아서 무엇이라도 심으면 수확이 많았기 때문에 열심히 농사해서 사식 들여 드리려고 들어가서 힘써 농사하였다.

그리고 틈틈이 형무소를 찾아 한 달에 한번씩 면회하였다.
한 해는 사모님께서 목화 농사를 잘 지어서 두꺼운 솜옷 만들어 평양 형무소로 면회하여 전달하였는데 옷이 얼마나 두꺼운지 바지저고리 한 벌 쌓아놓은 것이 이불 쌓아 놓은 것 같았다.

평양 감옥이란 곳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난방 없이 혹독히 추운데 그것도 여럿이 있으면 훈기가 있어 견딜만 했겠지만 김전도사는 주동자요, 또 모아놓으면 전도하고 다른 사람들 물들인다고 주로 독방생활을 많이 했기 때문에 고생이 더욱 심하였다.


옥고


당시 옥중에 갇혀 있다는 것만이 고생이랴? 김린희 전도사는 죄수 중에서도 주동자로 분류되어 자주 불려 나가 일본 순사들의 혹독한 형벌을 당하면서 지냈다.

심문에 취조에 각본대로 자백을 받아내려고 고문과 매질을 하도 많이 당해서 감방에 들어오면 맞고 터진 몸에 아무 감각이 없을 정도라 땅에 누웠는지 공중에 떴는지 분간을 못할 정도였고 게다가 맞은 상처에 덧나지 말라고 소금을 비벼놓았다 하니 얼마나 쓰라렸겠는가?

한번은 이 고통스러운 때에 김전도사의 귀에 '강하고 담대하라'는 음성이 들렸다. 이렇게 자주 하나님이 친히 위로해주시고 격려할 때가 많았다.

사모님이 면회를 갈 때마다 부쩍 부쩍 마르는 것이 뚜렷했다.
한 번은 무서울 정도로 바짝 말라있는 김전도사를 보고 왜 그리 말랐소? 하고 물었더니 취조실 바로 옆에 가둬 두고 낮이나 밤이나 고문 심문 당하는 사람들 매 맞고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두었다고 한다.

취조 고문하는 일인들은 술에 만취되어 짐승처럼 사람을 때리고 고문한다. 직접 매 맞기도 못 견딜 노릇이지만 남 매맞는 소리를 옆에서 듣고 있기도 역시 감당 못할 고통인지라 취조 죄수 고문하는 소리를 듣고 잠을 못 자게 하는 석 달 동안 제대로 자지 못해서 바짝 말라 있었다.

같이 잡혀 들어간 동역자들 중에 금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홍순경 목사(당시는 집사)는 차마 예수님만큼 할 수 없어서 39일을, 홍득표 목사의 형님되시는 홍수표 전도사는 45일을 금식하였다.

이렇게 장기 금식을 하면 사람이 뼈만 남게 되어 수감생활을 견딜 수 없으니까 병보석으로 풀어주어 나오게 되곤 하였다. 그러나 일경들은 김린희 전도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억지로 먹게 하고 금식도 못하게 해서 하고싶은 금식도 못했다.

김린희 전도사는 신사참배 반대의 주모자의 혐의를 입고, 그리고 피신중의 김전사를 체포해달라는 교계의 투서가 많이 들어와 잡혔기 때문에 옥중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고문도 더 많이 당하였다.

무엇보다도 독방에 주로 갇혀 있으면서 더 많은 옥고를 치뤘지만 옥중 생활 중에 동역자들이 많았다. 부산 쪽의 최덕지 선생, 박광주 장로, 이례희 전도사, 형락 영수, 한상동 목사, 안이숙 선생 등이 비록 한 방에 같이 거하는 것은 아니지만 옥 속은 옥 속의 세상이 있는지라 소문에 짐작에 서로들의 안부를 알고 격려를 받으며 지냈던 것이다.

현재 재건안양교회 손태화 권사님은 이즈음에 7-8년 위로 맏오빠이신 손응태 씨를 통해 김린희 전도사 감옥에 들어간 다음 성도들의 십일조를 모아 간식 넣어 드리고 와서 전하던 옥중 이야기를 듣고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손응태씨는 옥중 성도들을 은밀히 돕기 위해 감옥 식당 종사하는 사람들을 사귀었다. 그가 사귄 사람들은 믿을만하여서 조심스레 그들과 접촉하면서 가끔 그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본대로 들은 대로 전해주곤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 식당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형사들이 김린희 전도사를 고문에 악형을 하는데 거꾸로 매달고 소금물을 코에 들이 붓곤 하였다는 것이다.

또 옥중에서도 수갑을 차는데 밤낮으로 푸는 일 없이 뒷수갑 찬 채로 지내는 동안에 수갑자리의 상처에서 여름엔 구더기가 기어 나와 바닥에 기어다녀 발로 눌러 죽이곤 하였으며 식기도 발로 끌어당겨 발로 붙잡고 꾸부려 식사한다는 것이다.

그런 끔찍스런 평양 형무소에서 감옥에 있으면서도 견딜힘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모세의 친구 되신 것처럼 날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심 이었다.

아침이 되면 하나님께서 그 날 하루 될 일을 영화장면처럼 좍 - 보여주신다. 하루는 배가 만삭이 되어 잔뜩 부른 여자를 보았다. 의아했다. 이건 또 뭘까?

그런데 그때가 양력 설 무렵. 감옥에도 이것, 저것, 과일 등 여러 가지 별식이 들어왔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나온 국은 배불러서 나중 먹으려고 놔두고 있으려니 양은 그릇에 작은 구멍이 나서 국물이 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시간이 지나면 남을 수 없겠기에 배부르지만 할 수 없이 아까워서 억지로 다 마셔버렸다. 그랬더니 배가 너무 불러서 감당 할 수 없게 되었는데 아! 아침에 내가 본 것이 무슨 뜻인가 했더니 바로 이렇게 될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

감옥의 어렵고 배 고픈 형편이라면, 빈대가 너무 나와서 밥풀로 빈대 구멍 막았다가 너무 배가 고프면 구멍 막았던 밥풀 다시 떼먹었다고 할 정도였다.

하루는 꿈인지 생신지 어떤 목사님이 신작로 넓은 길을 걸어가시는 모습을 보았다. 그가 가는 길 양쪽에는 허다한 증인들(히 12:1)이라는 말씀처럼 수많은 구경꾼들이 늘어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전도사 자신이 밴드 지휘자처럼 뒷걸음질로 환호와 갈채 속에 그 목사님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9월 15일 아침에 그 목사님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박의흠 전도사는 내 동역자들 다 잡혀갔는데… 하면서 나중에 피할 수도 있는 것을 구차히 면치 않고 순순히 잡혀 결국은 순교하였다. 김린희 전도사는 그 분 순교하실 것도 옥중에서 보아 알았고, 식구들이 면회 오려면 면회 올 것도,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할 것도, 45년 우리나라가 해방 될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세심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보여주셨기 때문인데 하나님은 별식이 들어올 것도 들어올 식단까지도 보여주시곤 하시는 것이다.

하루는 하나님이 비몽사몽간에 음식을 보여주시는데 가위 같은 음식이 들어온다. 그런데 그 날 꽃게가 들어왔는데 생긴 모습이 정말 가위같이 생겼다고 하였다.

하루 아침 환상에는 어떤 팔 부러진 사람이 나타났다. 이건 무엇일까? 하고 의아해 하고 있었는데 작은 아들이 작은집 가서 나무에 올라가 삭은 가지 붙잡았다가 떨어져서 보여주신 꼭 그대로 팔이 부러졌던 것이다.

그 때는 다치거나 병나면 병원이나 의사를 찾기보다 민간요법으로 나뭇껍질 벗겨 묶던지 믿음으로 기도하여 치료받던지 이런 식으로 살 때였다. 김전도사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면회 온 사모님이 말하며 부탁한다.

"여보 경도가 팔이 부러졌는데 당신 기도 좀 하시라요." 이런 식으로 다 알고 있었다.

옥중에서 극한의 고난 속에서 로마서 8장의 말씀대로 고난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누릴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위로 받으면서 힘을 얻어 살았다.

하루는 사모님이 면회 갔다 오면서 빨랫감을 가져 와서 솜바지 저고리 뜯었는데 그걸 밖에서 뜯노라니까 작은 종이조각이 떨어졌다. 편지였다. 글은 숯으로 써서 뚜렷하지도 않고 간신히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다음과 같이 씌여 있었다.
- 김신일이 보아라. 야고보서를 암송하라. 내가 나갈 때는 그것을 암송하면 상을 주겠노라.-

옥중에서도 자녀 교육을 위해 애쓰는 면모가 함께 읽어진다.

그런데 김권사는 부친이 출옥하신 다음에야 그것이 외워졌단다. 그 때를 회상하면서 어릴 때 배운 그대로 줄줄 꿴다. '야고보서는 실천 주의인데 다섯 장 다 합하면 108절인가 되는데… 다 외운 다음엔 우리 아버지가 너무 좋아하시더라'고.

일인들은 전세가 기울어 점점 망해가니까 처음엔 죄수들에게 허용했던 성경도 압수하고 옥중 생활을 더욱 옥죈다. 성경책을 어디 숨길 덴 없고 요한 계시록만 다 외워 버리려고 떼어 천장 뒤에다 감춰 두고 몰래 꺼내 읽었다.


김전도사는 성경 말씀에 하나님이 하라는 것은 해야 되는 법, 하지 말라는 것은 하면 안되는 법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금식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오로지 하나님한테만 매달리시니 영이 맑으신 분이신 것을 식구들도 피부로 느꼈다.

오직 하나님 명령에 순종할 줄 밖에 몰라서 자녀의 눈에 비치기에도 오직 골똘한 하나님 팬(하나님 마니아라고나 할까?)이실 뿐이었다.

그런데 이 팬이 환자를 위해 기도하면 환자가 낫고 기도하고 일하면 이뤄주시는 것이었다.

김전도사는 하나님 앞에는 무엇이나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는 것이 법이었다. 가정예배를 드릴 때에는 사모님 한 분 앉혀 두고도 설교를 한시간씩 하기도 하였다. 사모님이 좀 간단히 합시다 라고 한 마디 하면 하나님께는 정성을 다해야한다고 일축한다.

한 번은 간수가 주일 새벽에 와서 감방 문을 차례대로 열어보는데 김린희 전도사를 보고는 자네는 머리가 왜 이리 긴가? 오늘 이발하라고 한다. 김전도사는 평소에도 주일성수에 엄격하여서 집안에서 빗자루 들고 방 쓰는 것도 좋아하질 않았다고 한다. 억지로나 큰소리 쳐가면서 무엇을 금하거나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기분 나쁘지 않게 배려하여 방은 내일 쓸지, 지저분해도 몇 가지 줍기만 해도 안되나? 라고 하곤 하였다. 그런데 이 옥중에서 간수가 주일에 이발하자고 하는 것이다.

"난 오늘 주일이 돼서 이발 안 해요."

감옥 안에서, 특히 죄수에게 주일이 어디 있는가? 말로 통하질 않으니 억지로 끌어내려고 한다. 이 지경이 되어 끌려나가는데 복도에서 있는 힘을 다 해서 비명을 지른다. 그 소리를 간수장이 듣고 무슨 사람 잡는 소린가 하고 나와봤다.

나 오늘 머리 안 깎으려는데 이 사람이 억지로 깎자고 해서 그런다고 김전도사가 간수장을 보고 하소연하였다. 그럼 언제 깎겠는가고 묻는다. 별 생각도 없이 일주일 뒤에 깎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감방에 들어와 다시 생각해보니 일주일 뒤면 그 때도 주일인데 잘못된 약속을 했던 것이다. 그 때 가서 안하겠다면 부질없는 사람되고…. 하나님 이름에 욕을 돌릴 것이니 일주일 후엔 뭐라고 말 할 것이며 이 노릇을 어찌할 것인가? 그 때부터 하나님께 기도로 빌었다. 하나님 내가 1계명 말씀 지킨다고 들어와서 4계명 어기게 되었습니다하고 얼마나 기도를 했는지… 날이 지나가는 줄도 모르게 기도를 하였다.

그런데 토요일이 되자 느닷없이 감방 문이 열리더니 간수가 자네 이발하라고 한다. 가서 이발하고 감방에 들어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얼마나 감사한지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심에 뛸 듯이 기뻐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음식 반찬으로 새우젓이 들어왔는데 새우젓 속에 조그만 깡통 조각이 섞여 들어왔다. 건져서 무슨 요긴한 일에 쓰일 데 있을까 하여 창문 모퉁이에 끼워두었는데 간수가 감방 검사하고 돌아다니다가 이 깡통 조각을 발견하였다.

이것 어디서 났냐고 묻는 말에 다급한 상황이어선 지 새우젓의 일본말이 얼른 생각이 나질 않아서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때문에 벌은 없었지만 이것도 거짓말을 한 셈인지라 하나님께 회개했다고 한다.


출옥


김린희 전도사는 수감 후 미결수로 복역하던 중 고문과 열악한 감옥 환경 등으로 인해 건강이 더욱 쇠약해지고 마른 가죽만 뼈에 붙었고 게다가 짙어진 폐결핵으로 산 송장처럼 되었으니 수감생활을 감당키 어렵다 하여 해방되기 전에 병보석으로 출감케 되었다. 수감 6년만이었다.

사모님과 김린희 전도사의 동생 김성희 전도사가 모시러 가서 피골이 상접한 김전도사를 만났다. 출옥한 김전도사는 돌아갈 교회는 물론 집도 없었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일본이 망할 것이니 고향으로 돌아가서 기다리자고 해서 기차를 타고 선천으로 가기로 하였다.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들어올 이 때는 전쟁 마지막 발악을 하던 때로 일제는 전쟁 준비에 급급해서 긴 화물칸에 무기며 석탄이며 전쟁물자만 가득 실었지만 객차는 서너 칸 조금만 붙어 있어 객차엔 사람이 콩나물시루처럼 틈도 없이 빼곡했다.

그런데 평양 조금 지나 어느 강둑을 따라 끼고 도는데 기차가 폭격을 맞았다. 앞서 가던 기관차는 놀라 전쟁 물자만 단 채 도망치듯 달려갈 때 버리고 간 객차 고삐 한 두 량이 떨어지면서 둑 아래로 몇 바퀴 굴러 바퀴를 하늘을 향해 쳐들고 멈춰 누웠다.

이 사고로 사람이 20여명 사망하고 부상자도 부지기로 생겼는데 함께 가는 세 사람 중에서 동생 분은 쇄골이 골절되고 사모님은 가슴뼈를 다쳤어도 김전도사는 다친 데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고향에 도착하여 몸이 쇠약한 김전도사가 꼼짝 못하는 아내를 도와줄 형편이 되었지만 그래도 모든 식구들은 얼마나 좋은지도 모를 일이었다.

특히 자녀들이 아버지의 출옥을 보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김전도사의 건강은 이미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있고 몸은 마르고 좁은 옥중에서 오랜 세월 먼 거리를 볼 일이 없이 가까운 것만 보면서 살았기 때문에 오랜 옥중 생활에 지독한 근시가 되어버렸다. 앞에서 누가 다가와도 누군지 알아보지 못해 누군가고 항상 물어보실 정도였다. 나중에 몸이 회복되면서 시력이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출옥 후엔 곯았던 위가 감당 못할테니 죽보다 더 묽은 미음식을, 다음엔 죽을, 된죽을 들다가 진밥 들고 그리고 얼마 지난 후에 밥을 조금씩 들었다. 본인은 한참 굶주린 터라 떡이나 아무것이나 이것, 저것 다 먹고 싶어하였지만 어떤 출옥 성도들 중엔 6년 만에, 7년 만에 출옥해서 음식 맛이 돌아왔다고 떡 해달래서 먹다가 속에서 감당 못해 돌아가신 분들이 많았다. 김전도사는 사모님이 제재하여 이런 일을 면했다.

출옥한 김전도사는 목소리도 겨우 나올만큼 음성이 작았고 병자처럼 기운도 없었으며 온 몸이 졸아 붙어 키도 난장이처럼 작아진 듯 하였다. 발이 몸에 오그라 붙어서 밤에 잠을 자도 발을 펴고 자지를 못한다. 추운 옥중에서 항상 몸을 움츠리고 오그려 붙여 생활한 것이 거의 그대로 굳어버린 상태다. 식구들과 함께 자려고 하는데 누워도 사람 앉은키만큼의 자리를 잡고 난 요만큼만 있으면 된다고 하였다.
출옥 후에 집으로 돌아와 몸조리하면서 편히 누워 주무시는 것을 자녀들이 보지 못하였다. 항상 무엇인가를 뒤집어쓰시고 기도하시다가 쓰러지면 쓰러진 방향 그대로 주무시는 것이다. 저녁엔 맏딸에게 필기구를 갖다 달라고 한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 무언가를 가득 써놓곤 하였다.

해방 직후 김린희 전도사를 방문하여 이듬해까지 밤낮을 함께한 김정태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이 때 출옥한 김전도사는 산에 올라가서 소나무 뿌리 뽑히도록 기도하였고 하나님의 응답하심과 긍휼로 몸이 회복되었다고 한다.

나중 북한 공산 치하에서 순교한 이창환 전도사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산에서 숨어 신앙 지키다가 김린희 전도사의 출옥 소식을 듣고 산으로 산으로 해서 산만타고 산밑에 있는 김전도사의 집 뒷문으로 가만히 들어와 서로 얼싸안고 눈물과 감격 어린 해후를 했다.

김전도사가 출옥한 때는 아직 일본 학정의 기세가 숙일 줄 모르는 일제 말기였다. 옥중에서도 성도의 교제에 굶주렸지만 아직 일반 성도들은 일경의 눈이 무서워서 김전도사를 찾아 만나는 일을 다 조심했다. 그러나 이처럼 몰래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서울 동산교회 이계한 권사(고 김취훈 장로 부인)의 친정 어머니이신 배신항 권사와 이계한 권사의 숙모 이분들은 자주 찾아 왔다. 앞의 김취훈 장로의 부친 김지성 전도사, 백순범 권사 백화선 권사 박 모 권사 백순탄 권사 등등 몰래 찾아오는 분들이 많았다.

이 분들에게 김린희 전도사는 잠깐만 더 참으라고 권면하곤 하였다. 잠깐만 참으면 된다고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늘 그렇게 말씀하였으니 곧 해방이 올 것을 알고 있었던 듯 하다.


해방


드디어 삼천리가 환호에 들끓고 옥문이 터져 죽음 직전까지 몰려갔던 옥중성도들도 나오고 무엇보다도 예수 믿는 일에 자유를 누리는 해방이 되었다.

산에 숨어 지내던 이창환 전도사는 좋아서 혼자 산에서 신나게 춤을 추다가 그렇게 춤추면서 내려왔다.

김린희 전도사는 출옥이 해방 전이었기 때문에 그동안에 기력을 꽤 회복하여 찾아오는 사람마다 만나 간증과 권면에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상대방의 어려운 사항은 다 들어주고 함께 기도해 주곤 하였다.

앞의 김정태 목사의 증언이 이하 계속 이어진다.

선천 배모리에 있던 김린희 전도사의 고향 교회는 일제 말기 7, 8년 간 비워두어 쇠락하기가 형편없었다. 전쟁 물자에 대려는 일제의 쇠붙이 공출을 피하기 위해 종도 떼 내 버리고 빈 나무 종각만 을씨년스럽게 교회 앞에 서서 비바람을 맞으며 수년간 지켜왔다.

그런데 해방되는 바로 그 날 김린희 전도사는 땅에 묻어 숨겨 두었던 종을 파내 아직 철거되지 않은 나무 종탑에 걸어 얹어 뎅그렁 뎅그렁 하고 종을 쳤다. 이 종소리를 들은 동네 사람들은 기독교의 부활 소식을 듣는 듯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해방과 함께 즉시 그의 나라를 회복케 하시기를 위해 일꾼들을 숨겨도 놓으시고 준비도 해 놓으셨던 것이다.


김린희 전도사는 해방이 되자 평북도내 숨어 있던 성도들을 찾아서 평양에서 신의주 쪽으로 정주 철산 동림면 등지를 찾아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하며 신앙의 불을 지피고 다녔다. 45년 8월 해방 이후 50년 6.25전까지 고향을 지키고 있었던 유한규 목사(당시는 집사)등이 활동한 이북에는 이 때 재건교회가 개척교회까지 80여 교회가 되었다고 한다.
줄곧 함께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다닌 사람들은 사모님과 함께 박신근 집사, 김정태 집사 이렇게 넷이었다.

이들 중에 박신근 집사는 기골이 장대하여 장수같은 체격에 우렁찬 목소리로 찬송도 잘하여 김린희 전도사의 설교보다 찬송이 더 은혜롭다고 할 정도였다.
박신근 집사는 평북 철산이 고향으로 신사참배 반대하는 것을 자기 교회 목사가 고발해서 체포된 사람이었다. 붙잡혀 간 경찰서에서도 뒷자리에 앉힌다고 항의하여 앞에 앉아서 매도 먼저 맞고 심문도 먼저 받았던 사람이다. 그의 용모는 얼굴빛은 검고 옥중에서 옴이 올라 손도 얼굴도 흉터가 말도 못할 정도였고 모습은 완연한 막노동꾼 차림이었다. 이런 사람이 집회 시작 전에 강단에 올라가서 찬송을 인도하는데 제비같이 가쁜 가쁜 날 듯이 춤추며 부르는 찬송은 보는 사람들 얼이 빠지게 하였다. 그가 이렇게 찬송 인도할 때는 사람이 아니고 천사 같았다고 김정태 목사는 말하면서 그 때 이후 60년 지난 지금껏 그렇게 감동적인 찬송을 부르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박신근 집사의 찬송으로 사람들 마음이 다 열리고 난 다음에 김린희 전도사가 나서서 설교를 하면 그 설교를 듣고 녹아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김린희 전도사의 당시 설교는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설교요 당시 설교의 주제는 신사참배, 국기요배 행한 죄를 회개하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상문제와 가정 화목에 대한 설교를 많이 했다.

집회를 마치면 마음의 찔림은 받은 사람들이 강사 방에 들어가서 부르짖으며 회개하여 선천바닥이 들썩들썩할 정도로 굉장했다. 일 주일 중 월요일에서 토요일, 주일까지 부흥회를 하루도 안 빼고 다녔다.

평북 정주 어느 촌에서는 부흥회 도중 마을 사람들 중에 신사참배 한 채로 해방을 맞고 교회 재건운동을 싫어하는 일부교회 사람들이 핍박하여 교회당 함석으로 된 지붕에 돌을 던져 집회 중에 와장창거리기도 하였다. 가끔 이런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 때문에 충돌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한편 45년 8월 16일. 해방과 함께 평양 감옥에서 고생하던 종들이 출옥하자 숨어서 신앙을 지키던 신자들과 평양 선천 등에서 모여든 수진 종들이 함께 오정모(주기철 목사의 사모)씨 댁에서 첫 감사 예배를 드렸다.

이튿날인 17일 평양 감옥에서 출옥한 14인과 이들을 만나러 많은 성도들이 모여 한상동 목사 인도로 함께 예배하였다.

이 때 모인 사람들은 성도들뿐 아니라 출옥한 수진 종들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겠다고 찾아온 일반인들까지 합해 인산인해라, 너무 많이 모임으로 노천에서 예배드리고 정기적으로 새벽 부흥 집회로 전환하여 집회하기로 하자 감옥에서부터 출옥 때까지 하루 4번(새벽, 오전, 오후, 저녁) 예배하였던 최덕지 선생의 제의에 따라 하루 네 번씩 예배하되 강사는 출옥 성도들의 간증을 포함한 말씀중심으로 예배하기로 하였다.

해방 후 셋째 날 새벽 집회 시간에 안이숙 선생의 간증이 있었다. 그녀는 증언하기를 평양 감옥에서 생활은 그야말로 지옥 같은 곳인데 그 중에도 일반 죄수들보다 신사참배 반대자에 대한 악형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다고 간증하면서 신사참배 반대자에 대한 박해도 극심했지만 그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같이 감옥에서 고난도 당하는 이들 중에 특별 박해를 받는 이광록, 박신근, 최덕지 선생 등의 고난을 목도하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이 세 분은 신사참배 뿐 아니라, 동방요배, 묵도, 국기배례, 황국 신민 서사낭독 등도 죄라고 주장하여 감옥에서도 끝까지 굴하지 아니하므로 매일 끌려가 무지하게 맞고 고문도 당하였다. 그러고도 돌아와서 또 큰소리로 찬송하면 간수들이 쫓아와 때리고 찬송 못 부르게 걸레로 입을 틀어막고 하는 일이 반복되었으나 그래도 굴복하지 않자 일반 신사참배만 반대하는 죄수(?)들은 감옥 안에서 손발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반면 신사참배, 동방 요배, 호국 영령에 대한 묵도, 국기 배례, 서사낭독까지 거부한 박신근, 이광록 집사는 같은 이들도 감옥 안에서 손을 뒤로하여 수갑을 채우고 수감생활을 하게 하였고 최덕지 선생은 독방에서 수감 생활하게 하였다.

이들이 해방되어 출소할 때까지 수갑을 뒤로 채우고 밥을 먹게 하여 개처럼 핥아먹는 모습을 볼 때 너무 괴로웠고 최덕지 선생의 감옥을 울리는 찬송소리는 너무 은혜로와 자기도 최덕지 선생과 이광록 박신근 집사처럼 신사참배 외 4가지 모두 죄라고 했더니 무지하게 자신을 구타하므로 견디지 못하고 신사참배만 죄라고 하여 수갑을 풀어 편안한 감옥살이를 하고 나왔는데 이렇게 모두를 천사처럼 대접하니 부끄럽다고 죄를 자복을 하면서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박신근 집사님은 감옥에서 수갑을 뒤로 채워져 나오던 날까지 있었는데 그 손목과 겨드랑이에 벌레(구더기)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고, 지금도 이들의 손목에서는 구더기가 기어 나오건만 진짜 그 고난을 알아주어야 할 이 분들은 외면당하고 우리가 영광 받으니 부끄럽다 하므로 모두 숙연하여졌다.

이 간증으로 말미암아 다음 날에는 최덕지 선생이 간증을, 다음날에는 이광록 집사의 간증을, 그 다음날에는 오정모(주기철 목사 사모)사모의 간증으로 새벽마다 간증을 듣게 되었다.

8월 30일 출옥한 한상동 목사 측과 이광록 집사와 박신근 집사 최덕지 선생 등은 신사참배 외 4가지를 죄로 규정하는 문제와 기성교회당 사용 및 인정 여부 문제로 말미암아 의견이 분리되었다. 이 때 신사참배를 깊이 회개하여 모인 일반 신자들이 의견 대립되는 것을 지켜보다가 하는 말들이 출옥 성도라는 것도 별 것 아니구나, 우린 다섯 가지 죄를 지었으면 저들도 네 가지 죄를 지은 것이고 저들은 옥중에서 고생했다 하지만 우린 밖에서 양심 아파 가면서 교회 지킨다고 고생했으니 그 별반 차이가 무엇이냐 라고 하면서 회개할 필요가 없다 했다고 고(故) 유한구 목사는 증언했다.


재건교회라는 명칭


평양 서문 밖 교회 근처에 거주하는 고 집사라는 여성도가 있었다. 당시 약40여 세로서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었던 분이다. 투옥 전 임신한 몸이었는데 감옥에서 만삭이 되어가므로 해산을 위해 가석방 받아 김린희 전도사를 만나 신앙재건운동에 적극 가담 한 후 해방을 맞이한 분이었다. 9월 25일 이 고집사의 집에서 김린희, 이광록, 박신근, 최덕지, 이원칠 등 진리를 지킨 종들 약 3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재건교회가 태동하게 되었다.

이 모임에서 김린희 전도사의 인도로 예배한 후 각자의 의견을 나누던 중 최덕지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우리와 뜻을 같이 할 줄 기대했는데 고집을 꺽지 않고 신사참배 외 4가지 죄지은 것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니 우리는 더 이상 저들과 같이 할 수 없으며,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신사참배가 시작될 처음부터 지금까지 신사 참배한 예배당에는 나가지 말라고 증거하였고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개인 집에서 모여 의논하는 것인데 저들은 이제 해방 된 마당에 비록 어제에는 신사참배를 했다 할지라도 오늘에는 신사를 다 치웠고 없앴으니 이 예배당에서 모여 예배하고 의논하자 하나 우리는 이 집은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와 기둥과 터라 말씀 하셨는데 어찌 어린 양의 신부 된 거룩한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집이 음녀 같이, 창기처럼 정조를 더럽히고 거룩을 상실하고도 회개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떠난 것도 깨닫지 못하고 교회라고 부르면서 그 더러운 곳에서 우리와 예배하자 하는가? 우리는 결코 그곳에서 예배할 수 없다.

하나님을 버림으로 하나님이 떠나신 곳은 교회가 아니다. 그곳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귀신의 처소가 되였으니 예배당이 아닌 마귀의 당이다. 어찌 귀신의 처소 되였던 마귀당에 가서 예배 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곳에서 예배하는 자들을 불러내어 따로 예배하여야 한다.

또 한가지 한상동 목사 등은 물에 빠진 자를 구하기 위하여 물에 들어가는 것처럼 그곳에 들어가서 그들을 바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이론일 뿐이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을 받지 말라 하셨으니 저들의 말과 주장이 옳다고 생각되는 이 있으면 기도 해보고 결정하라. 다 들어간다고 결정해도 나 최덕지는 마귀당에 안 들어간다." 하자 옆에 있던 이광록집사가 "나도 마귀당에 안 들어간다." 하고 이구동성으로 모두 다 안 들어간다고 소리쳤다.

이에 뜻을 모아 합심 기도하고 성명하기를,

그곳은 이미 하나님이 떠나셨고 그들의 예배는 절대 하나님이 안 받으신다 하였다.
다시 여러 의견이 있은 후 최덕지 선생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는데 일치하고,

1. 우리는 팔도 어느 곳에서나 우상 섬긴 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다.

2. 우리는 한상동 목사가 죄 자복하고 회개 한 후 만족할 만한 증거를 얻을 때까지 저들과 교제하지 않는다.

3. 우리는 팔도에 흩어진 잃은 양 전부 찾을 때까지 그곳에서 예배하는 자를 불러내는 일에 남은 생명을 바쳐 주님께 충성한다. 이상과 같이 결의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온 정성을 쏟았으나 이제는 해방이 되었고 그동안 우리의 권유로 산지 사방에서 교회도 이름도 없이 신사참배 한 예배당 안 나가고 숨어서 예배한 자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일본 순사와 그들의 앞잡이 목사들의 눈을 피해 숨어서 예배해야 하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광명과 자유를 주셨으니 숨어 예배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므로 저들이 우리를 숨은 교회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나 이제는 해방도 되고 승리한 종들도 모셨으니 숨은 교회가 아닌 정식으로 우리의 색깔과 신앙의 정신을 나타낼 교회 명칭을 정할 때가 되었다는데 의견일치를 보게 되었다.

이에 김린희 전도사가 그때가 오늘이라고 말하자 모두 동감하므로 교회 명칭을 정하기로 하였다.

이에 각자의 의견을 제시하였는데 어떤 이는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음부 권세에 승리하여 교회를 세우게 되였으니 승리교회로 하자고 하였고, 어떤 이는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좁은 길이요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좁은 길인즉 좁은 길 교회로 하자 하였고, 어떤 이는 환란 날에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사 구원선으로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선으로 인도할 사명을 주신 것이니 구원선 또는 방주교회로 하자 하였고, 어떤 이는 이 길은 거룩한 자만이 가야 할 길 좁은 길이니 거룩교회, 어떤 이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자고 영광교회, 어떤 이는 죽도록 충성하자고 충성교회로 하자는 여러 의견이 나왔으나 김린희 전도사는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로 말미암아 신앙이 무너졌으니 느헤미야가 재건한 것처럼 한국교회도 재건해야 되므로 재건교회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의견이 있었으나 결정을 보지 못하므로 김린희 전도사가 말하기를, 가장 많이 거론된 이상의 몇 가지 명칭, 승리교회, 좁은길 교회, 방주교회, 거룩교회, 충성교회, 영광교회, 재건교회, 등 일곱 가지 이름을 써서 통 속에 넣고 제비뽑아 제일 먼저 뽑힌 명칭을 우리들의 교회 공식 명칭으로 결정하되 결정된 교회 이름을 제안한 분이 기도하면 그때부터 교회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기로 할 것이며, 또한 이 명칭은 다같이 천국 가서 주님 앞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다시는 못 바꾼다고 하자 모두 좋다고 찬성하여 제비 뽑으니 재건교회가 뽑히게 되였다. 발표를 듣는 순간 김린희 전도사가 아멘 하였다. 이윽고 결의한대로 김린희 전도사가 대표기도하므로 다같이 아멘하였고 그때부터 재건교회라고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이 자리에 참석하였던 청년 이창환 전도사는 기도가 끝난 후 감격하여 당석에서 신앙혁명가를 개사하여 재건운동가로 작사하였다.

이 가사를 받아 든 이원칠 전도사가 독창하니 장시간의 의논과 금식 중인데도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눈물을 흘리며 기쁨이 넘치며 힘이 샘솟듯 하여 이상히 생각하며 서로 이 노래를 필사한 후 힘차게 함께 합창하니 서문 밖이 진동하였다 한다.

어떤 사람은 멀리서 그 집에 불이 붙은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불이야! 하고 달려가 가까이 가보니 찬송 소리만 가득하였다고 한다.

45년 10월 30일 평북 선천군 남산면에 있는 백신현(김정윤, 김정준씨의 모친, 김익렬씨의 조모)씨가 자신의 곡간을 교회로 내어주므로 재건 교회 교인들이 모여 예배하며 곡간 교회로 불리 울 때, 김린희 전도사가 부흥회 인도차 참석하여 곡간교회로 하지말고 재건교회라고 부르라고 하므로 최초로 재건교회 공식 명칭이 사용되었다.

북한 지역에는 겨울이 일찍 찾아온다.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자 곡간교회에서 모이기가 어려워 선천 황금동에 있는 적산 가옥으로 이주하여 예배드리게 되었다. 그 후 김린희 전도사와 이원칠 전도사가 다니는 곳에는 사람들이 재건운동가를 불렀고 곳곳에 재건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45년 11월 1일 평양 신양리 재건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젊은 청년 이창환 전도사는 재건우승가와 재건군병가를 작사하여 보급하였다.

그리고 12월, 같이 한국교회 재건운동하던 최덕지 선생은 이남도 재건 할 일이 시급하다 하면서 재건교회 명칭과 재건운동가, 재건우승가, 재건군병가 등을 가지고 월남하였다.

46년 1월 최덕지 선생이 월남 한 직후 평북 차령관에서 김린희 전도사를 강사로 사경회를 마치고 재건교회 교역자 대회를 모이고 재건교회 신앙지침과 행동강령으로 삼대 권위와 사대 성별을 결의하여 선포하고 지키도록 하였다.

이 3대 권위와 4대 성별이란 다음과 같다.

3대 권위

(1) 음부권세승리(마 16:18)
(2)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요 4:24)
(3) 이 집은 하나님의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요,

4대 성별

(1) 신앙 성별
(2) 성전 성별
(3) 혼인 성별
(4) 주일 성별이었다.


평양 재건교회에서의 활동


해방 후 평양에 신사 참배하지 않은 교인들이 모여서 김린희 전도사를 청해 교역자로 모시게 되어 평양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김린희 전도사와 박신근 집사 두 분이 함께 평양시내에 한 50평 되는 창고를 마련하여 가마니 깔고 앉아 집회를 시작하였다. 거기서 밤낮으로 부흥집회를 하였다. 사람들이 소문에 소문을 듣고 찾아와 실내가 꽉 찰 정도로 모였다.

이 때 고흥봉 목사도 함께 하였다. 그러나 고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수감되어 평양 감옥에서 고생했으면서도 다른 몇 가지 - 서사낭독 궁성요배 등 - 까지는 승리하지 못한 목사라고 스스로 예배당 뒷자리에 서서 날마다 그 많은 신발을 정리하였다. 그는 그만큼 겸손하고 덕스러운 분으로 뭇 사람들이 다 그의 겸손함을 인정하였다고 김정태 목사는 증언한다.

평양 시내에서 아주 큰 엿 공장을 차리고 엿을 만드는 어떤 집사님이 있었다. 그에게 스물 서너 살 된 정신 흐린 딸이 있어 사람들이 일컫기를 사이렌 마귀 들었다고 했는데 낮 열두시를 알리는 사이렌만 불면 밖으로 나가기 때문이었다. 그냥 돌아다니게 놔둘 수 없으니 사람들이 벽에 박아놓은 큰못에 가는 밧줄을 둘러 묶어 놓았는데 김린희 전도사가 찾아가 기도한 후 사이렌 마귀가 나가 정신이 온전케 되었다.

또 귀신 들린 18세 처녀가 있어 그녀의 모친과 김정태 선생은 처녀의 팔 다리 붙잡고 김린희 전도사가 기도하니 발작을 시작하는데 잡은 사람들이 당할 수 없었다. 그러더니 한 5분 안되어 나가겠다고 고함을 지르더니 귀신이 떨어져버린다. 요즘엔 볼 수 없는 이런 역사가 굉장하였다.


서울의 재건교회에서 활동


한편 서울에 있는 재건교인들이 서울 회현동에 있는 한경애 권사님 댁에서 처음 모이다가 점점 불어나 더 넓은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생겨 성도들이 소지품을 팔아서 돈을 모아서 덕수궁 바로 옆에 태평로 2가 364번지 2층 가옥을 구입하였다. 북한에 있는 재건 교회 교인들이 이 태평로 교회 소식을 듣고 이곳을 목표로 모여들었다.

46년 7월 서울에도 재건교인이 모인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원칠 전도사가 교섭하기 위해 월남하였다.

이 해 10월 월남한 이원칠 전도사는 북아현동에 거주하던 재건교인 김대순씨(최찬호, 최은순씨의 모친, 김병환 장로 장모) 집에서 월남하는 재건 교인 7∼8명과 함께 모여 예배하였고 이어 고흥봉 목사가 월남하였다. 이 때 김린희 전도사는 이남에도 재건교회가 새워지고 있다는 소식 듣고 평양교회는 이창환 전도사를 담임교역자로 세우고 46년 10월 월남하였다.

김린희 전도사가 월남할 때 평양교회는 그의 가족들까지 다 서울로 가면 김전도사는 다시 안 돌아 올테니 식구들을 볼모처럼 붙잡아 두므로 김전도사 내외와 등에 업은 어린 아이 하나만 데리고 내려왔다.

이 무렵 김창인 전도사도 월남하여 태평로 교회에서 김린희 전도사와 함께 교회를 인도하였는데 이 두 전도사가 아래 위층으로 번갈아 가며 동시에 설교하였다. 이 때 월남해서 이곳을 찾은 이들 중에 이형록 집사도 김린희 전도사와 태평로 교회에서 얼마간 마당을 함께 하고 같이 살았다.

태평로 교회에 고흥봉 목사가 함께 있었지만 재건교회의 지도자는 김린희 전도사였다. 이 때 교인들은 김린희 전도사가 고흥봉 목사를 통해 목사 안수 받았어야만 했었는데 교회 행정권에 대해서는 추호의 뜻도 없으므로 번번이 거절만 하는 김린희 전도사 앞에선 말도 더 꺼낼 수 없었다면서 많은 이들이 지금까지 아쉬워한다.

태평로 교회도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서 감당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충무로, 원효로, 돈암동, 금호동, 해방촌, 영등포 등지에 교회가 서게 되었다.


재건학교


당시 안효상씨가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내면서 각급 학교에서 국기 경례를 시행하게 되었다. 재건교회 교인들은 일제 치하에서 국기 배례에 전율한지 얼마 안되었고 이젠 자유로운 세상이 되었다고 기뻐하고 있었는데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가 국기에 경례하게 되는 것을 당연히 싫어하게 되었고 이 문제 때문에 김린희 전도사는 국민학교 과정과 중학교 과정의 학교를 원효로에 창설하여 세웠다.

반 편제는 국민학교 1, 2, 3학년 반과 4, 5, 6학년반 과정, 그리고 중학교 1, 2학년 과정의 반이었다. 학생 수는 국민학교 학생이 20, 30명이었고 중학교 과정의 학생이 10, 15명 정도였다. 넉넉한 가정에서 자라 일본 유학한 박형채씨가 교장을 맡았고 김동철씨, 독고성씨, 김상협씨 조선생 등이 교사로 가르쳤다.

약 2년간 계속되던 이 재건학교는 6.25 사변 후에 피난지 부산 영주동에서 계속하였다. 이후 재건학교 출신으로 정규 대학을 진학하여 졸업한 이들도 있었다.


납북


6.25 사변이 일어나고 한 보름정도나 되었을까? 한강교는 끊어지고 서울 시내는 폭격이 심할 때 김린희 전도사의 인솔 하에 모인 약 백 수십명의 교인들이 좀 더 안전한 곳을 찾아 자하문 밖에 정릉 쪽에서 그 전쟁통에도 예배를 드렸다.

어느 날 김린희 전도사가 맏딸에게 "야 밥 좀 일찍 해라 오늘 시내로 빨리 내려가야겠다"고 하며 말하기를 꿈에 누가 총을 들이대길래 손을 들었다고 한다.

김전도사는 딸이 끓인 조반을 들고는 교인들 피난할 장소 물색차 소문을 따라 이기태 전도사와 함께 피난민 많이 가는 곳을 보러 가본다고 가더니 돌아오지를 않았다. 이틀이 지나자 궁금한 다른 교인 두 사람이 가본다고 갔는데 그들도 돌아오지 않는다. 이리하여 모였던 교인들은 목자 잃은 양떼처럼 모두 흩어지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부산까지 피난하였다.

나중 알게 된 것은 이 때 누가 김린희 전도사가 자하문 밖에 있다고 밀고하였던 것이고 김전도사는 내려가는 길에 공산당원들을 바로 만났단다. 그들이 당신 이름 뭐냐고 물었다. 김린희외다 하고 대답하자 쾌재를 부르며 체포했다고 한다.

후에 함께 잡혔다가 도망쳐 나온 김전도사의 사돈 되는 이를 통해 전해 들을 수 있던 안부로는 이 때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국군 수복이 가까워오자 열 명씩 수갑이나 끈으로 묶어 낮엔 폭격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밤이 되면 의정부 쪽으로 하여 북으로 이동하였는데 인민군들은 묶인 열 명중에 한 사람이 도망가면 남은 아홉도 함께 죽이므로 김전도사는 도망칠 기회가 있었는데도 도망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진리를 위해, 예수를 위해 생명 바치기로 각오하고 목숨 바쳐 살았던 그의 사명의 길이 이젠 다하였는가? 또 다른 생명을 싹틔우기 위해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한 알의 밀알처럼 어느 땅에 떨어뜨려 썩게 하실 제물로 필요하셨던가? 아직 할 일 많고 한참 일할 나이 마흔 여섯의 김린희 전도사는 벧세메스로 향하는 소처럼 울며 북으로 향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아직 모세의 결국과 함께 그의 결국을 알지 못한다.


면담
독고성 장로 / 서울 재건남서울교회
이계한 권사 / 서울 재건동산교회
김신일 권사 / 서울 재건동산교회
오득화 목사 / 대구 재건삼덕교회
이형록 목사 / 부산 재건견일교회
김정태 목사 / 전북 재건정읍교회
손태화 권사 / 안양 재건안양교회 등

 

▶ 아래의 SNS 아이콘을 누르시면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습니다.


  1. notice

    사도행전 30장 운동이란 무엇인가?

    사도행전 30장 운동이란 무엇인가? <리포르만다>가 펼치는 ‘사도행전 30장 운동’(ACTS 30 MOVEMENT)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은혜로 주어진 구원에 감격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기쁜 소식 전파에 전력하는 생명(zoe) 운동이다.  사도 바울은 "나는 복...
    Date2020.03.27 Byreformanda Reply0 Views2536 file
    read more
  2. No Image

    순교자 김윤섭 전도사 이야기

      순교자 김윤섭 전도사 이야기   “순교의 길을 자청한 순교자” 생년월일 : 1905년 출생지 : 평안북도 선천 순교일 : 1942년 순교지 : 만주 봉천형무소 직분 : 전도사 교단 : 장로교   김윤섭 전도사는 선천 태생으로 20세에 입신하여 평북 성경학교를 졸업했...
    Date2026.04.26 Byreformanda Reply0 Views2 new
    Read More
  3. No Image

    김린희 전도사 이야기 (신사참배거부운동 인물)

      김린희 전도사 이야기 (신사참배거부운동 인물) 김린희 전도사는 1905년 1월 17일(음) 평북 선천 시내에서 15리쯤 떨어진 선천군 태산면 인암동 배모리 475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네 살에 모친을, 열 네 살에 부친을 여의고 할아버지와 형수님의 손에서 자...
    Date2026.04.26 Byreformanda Reply0 Views2 new
    Read More
  4. No Image

    윤석열 전 대통령 최후진술 전문

    □ 윤석열 전 대통령 최후진술 전문 존경하는 재판장님, 재판부 판사님 1년 가까운 긴 시간 공정하고 현명한 소송지휘로 충실한 심리를 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불과 몇 시간의 계엄을 내란으로 몰아 국내의 모든 수사기관들이 달려들어 수사했고, 이후에 ...
    Date2026.01.14 Byreformanda Reply0 Views151
    Read More
  5. No Imag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Q.1. What is the chief end of man? A. Man’s chief end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 ever. 1 Cor. 10:31; Rom. 11:36; Ps. 73:25-28. Q.2. What rule hath God given to direct us how we may glorify and...
    Date2025.12.09 Byreformanda Reply0 Views190
    Read More
  6. No Image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Text and Scipture Proofs     Q.1. What is the chief and highest end of man? A. Man’s chief and highest end is to glorify God, and fully to enjoy him for ever. Rom. 11:36;1 Cor. 10:31;Ps. 73:24-28;John 17:21-23. Q...
    Date2025.12.09 Byreformanda Reply0 Views169
    Read More
  7. No Image

    윤석렬 탄핵의 진실

    윤석렬 탄핵의 진실 (Peter Kim, 페이스북 글, 2025.11.30)   한덕수는 위증을 실토했다. 곽종근은 통화기록 공개로 박살이 났다. 홍장원의 지렁이 메모는 원본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의 세 기둥이 모두 무너졌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내란재...
    Date2025.12.01 Byreformanda Reply0 Views226
    Read More
  8. No Image

    내란 공작이 드러났다

    내란 공작이 들어났다   윤석렬 전 대통령에 대한 법정 심문을 통해 드러난 것은 내란이 아니라, 윤 대통령 법정 심문을 통해 드러났다. 내란이 아니라, "내란 공작"이 있었다. 윤 대통령이 내란 재판에 출석하여, 핵심 증인인 곽종근에 대한 심도깊은 질문을 ...
    Date2025.11.06 Byreformanda Reply0 Views232
    Read More
  9. No Image

    손현보 목사,

      일반칼럼 손현보 목사, 교회와 예배 수호 활동과 이로 인한 탄압·구속 과정 (1) | 크리스천 투데이, ㅇ기사 입력 : 2025.10.1 '예배 회복을 위한 자유시민연대(예자연) 사무총장 김영길 건국대학교 교수·변호사 황도수 본 기고는 손현보 목사님의 구속 사태...
    Date2025.10.20 Byreformanda Reply0 Views252
    Read More
  10. 고신애국지도자연합 성명서

    맥코이  기사 코닷   맥코이 목사는 설교 중 “한국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일어서야 한다”며, 손 목사 사건을 “표현의 자유와 종교 자유를 억압하는 심각한 신호”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미국 교회는 한국 교회와 함께 설 것”이라며 한미 교회...
    Date2025.09.24 Byreformanda Reply0 Views418 file
    Read More
  11. No Image

    고명길, 정교분리

    2025 가을총회 자료모음(퍼가기 금지)   교회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원칙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서론 제74회(2024년) 고신 총회는 차별금지법 등 악법들의 발의 및 통과 가능성과 관련하여 정교 분리의 성경적 원칙에 관한 설명을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Date2025.09.17 Byreformanda Reply0 Views351
    Read More
  12. No Image

    합동 총회장 김종혁 목사의 메시지

      합동 총회장 김종혁 목사의 메시지   [총회장 메시지] 종교자유 수호와 손현보 목사 구속철회 촉구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전국 12,000여 교회와 약 230만 성도로 이루어진 한국교회의 최대 교단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한국교회와 사회를 향해 책임...
    Date2025.09.17 Byreformanda Reply0 Views227
    Read More
  13. 지리산의 천년고찰 실상사 불상의 복장

        지리산의 천년고찰 실상사 불상상의 복장     지리산의 천년고찰 실상사 불상의 복장에서 라틴어로 된 성무일도가 발견된 이야기   페이스북 석현장 (승려로 추정)의 글 2025.09.03   성무일도서는 로마가토릭 교회의 라틴 전례에서 사용되는 기독교 전례...
    Date2025.09.03 Byreformanda Reply0 Views265 file
    Read More
  14. No Image

    임은정 서울 동부지검장 취임사 전문

      임은정 서울 동부지검장 취임사 전문 사랑하는 서울동부지검 동료 여러분, 2018년 2월, 「검찰 내 성추행 사건 진상규명 조사단」에 조사를 받으러 처음 서울동부지검에 출석하며 늦겨울 한기에 마음이 시리고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수사구조 개혁의 해일...
    Date2025.07.05 Byreformanda Reply0 Views445
    Read More
  15. No Image

    플립 러닝 시대

      플립 러닝(Flipped Learning) 시대     펜실베니아대학교의 와튼스쿨(상경대학)의 이선 몰릭 교수는 말한다. “우리의 대학은 AI 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AI로 집에서 강의가 가능해진 시대이다. 교실에서 공부를 한다면 그곳은 더 ‘풍부한 상호작용...
    Date2025.06.29 Byreformanda Reply0 Views417
    Read More
  16.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공동대표의 후원요청

      위 사진은 아래의 글과 함께 기윤실 홈페이지에 게시된 것이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공동대표의 후원요청 아래의 글은 기독교윤리실천운동 홈페이지에서 옮겨 온 것이다. 한국교회사 2025 집필에 필요한 자료로 활동할 목적이다. 이 단체가 말하는 '복음'...
    Date2025.06.23 Byreformanda Reply0 Views406 file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Next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