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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미국 교회의 대체 복음

 

마이클 호튼, 서울: 부흥과개혁사, 2009

 

최근 저서를 통해 한국 교회에 많이 알려진 마이클 호튼 목사님의 책으로, 기독교의 핵심 사상인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셨고 이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된다’는 ‘복음’의 내용이 사라져가는 현대 교회의 실상에 대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복음 없는 현대 교회의 충격적 실상’,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에 대한 내용이다.

 

아래는 추천의 글이다.

 

‘여러분,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에서는 누구도 피를 흘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교회에는 구속이 없습니다. 왜냐고요? 구속할 죄가 없기 때문이죠. 이런 식으로 죽은 상태가 지속되는 것입니다’ - 플래너리 오코너, ‘현명한 피’

 

“예수로 귀납되는 이 시비 거는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 되새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는 복음, 이 위대한 지적 유산을 팔아 치우고, 겨우 심리학으로 물들고 실용주의적이며, 공리주의적인데다가 자기계발이라는 잡동사니를 사들인 우리를 용서하신다”

 

문 : 사탄이 한 도시를 완전히 장악하면 어떤 모습일까?

답 : 교회는 매주일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선포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는 사탄이 만들려고 하는 교회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리스도로 충만한 교회인가, 아니면 ‘그리스도 없는 교회’인가? 호튼은 이 물음에 대해 오늘날 미국 기독교의 현실을 한 마디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고 진단한다.

 

미국 교회의 ‘영성 탐구’에 대한 열광적 분위기에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의 증상을 발견한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그리스도 없는 중세 교회를 ‘바벨론의 포로 된 교회’라 불렀듯이 호튼은 ‘그리스도 없는 미국 기독교’를 ‘미국 문화의 포로된 교회’로 생각한다.

 

호튼은 ‘개신교 자유주의에서 나온 일종의 부드러운 도덕주의가 로버트 슐러를 통해 복음주의의 주 메뉴가 되었고’ 조엘 오스틴은 ‘입으로 시인하고 믿음을 얻으라’는 형통주의 철학을 주류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이라 말하면서 오스틴의 신학은 ‘펠라기우스주의의 자기계발과 영지주의의 자기 신성화가 접목된 형태’라고 진단한다.

 

오스틴과 요즘 활동하는 다른 많은 설교자들이 약속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리스도가 없어도 된다. 유명한 자기계발 강사 토니 로빈스처럼 성경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복음서들에 약속된 구속과 같은 것도 필요 없다. 삶을 좀 더 긍정적으로 전망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하나님이 필요한 데가 어디 있을지 분명하지 않다... 미국인들에게는 더 나은 가정, 재정, 건강 혹은 나아가서 도덕성을 함양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예수가 필요 없다.

 

펠라기우스주의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로 귀착된다. 구세주가 아니라 좋은 모범이 필요할 뿐이기 때문이다.

 

펠라기우스주의건 영지주의건 이 모든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복음이 없다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고, 결국 각기 독특한 복음 없는 율법을 주장한다. 호튼은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것은 타락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며, 전혀 기독교라고 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는 어떤 형태의 자력 구원을 가정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호튼은 교회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것이라고 한다.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말한다... 율법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을 말한다. 이 둘은 아주 다른 말이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는 증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복음과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모른 채 율법과 복음을 혼동한 것이며, 결국 교회가 복음을 복음답게, 율법을 율법답게 선포하지 못하고 복음 없는 율법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통해 교회사의 모든 이단이 사실 이 복음과 율법의 의미를 혼동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자유주의와 복음주의를 막론하고 오늘 우리 시대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만든 가장 중요한 뿌리요 원인이 ‘복음과 율법의 혼동’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아래는 책의 주요 내용이다.

 

1장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사탄이 한 도시를 완전히 장악하면 어떤 모습일까? 반세기도 더 전에, 장로교 목회자인 도널드 그레이 반하우스는 CBS를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되기도 했던 주일 설교에서 자신이 그려 본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반하우스의 상상은 이랬다.

 

사탄이 필라델피아를 장악한다면, 술집은 모두 문을 닫을 것이고, 도색물들은 자취를 감출 것이다. 깨끗해진 거리는 서로 웃음을 머금은 보행자들로 가득 찰 것이다. 저주 악담도 사라질 것이다. 아이들은 “예, 선생님” 혹은 “예, 부인”하고 공손하게 말할 것이며, 교회는 매주일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을 것이다.

 

죄인들의 유일한 희망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다른 데로 눈을 돌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에 의해 만사가 헤아려지는 곳, 우리가 죄인이라는 자각이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슬며시 뒤로 밀리는 그런 곳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가 길을 잃기는 했어도 적절한 지침과 동기부여로 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착한 사람들이라면, 우리에게는 구속자가 아니라 인생의 스승만이 필요하다.

 

이 땅에 있는 사탄의 제자들을 부추겨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일은 물론이나 (전 세대의 어떤 시기보다 근자에 전 세계적으로 더 많은 순교자들이 나오고 있다) 사탄은 이단의 씨앗을 뿌리고 책략을 부리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지만, 세상과 비슷해진 교회는 증언 자체를 침묵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성공 혹은 실패가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세대와 전형적인 교회 사역에서 나타나는 무시 못 할 차이들은 분명히 있지만, 결정적인 유사성을 덮어 버릴 정도는 아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 우리와 우리의 행위에 여전히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모든 접근들을 보면, 하나님의 구속 드라마에 등장하는 새로운 인물이 되려 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위리의 인생에서 동기를 부여해 주는 조연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미국에서 “신성한 것에 대한 탐색”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역사 안에서 이미 하신 일이 아니라, 대략 우리 안에서 일어난 일,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을 향하도록 방향 지어져 있다. 심지어는 세례와 성찬도 진보적인 복음주의자들은 물론이고 상당수 보수주의 현대 조직신학에서도 “은혜의 수단”이 아니라 “헌신의 수단”으로 기술되고 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신에, 오늘날 노래 부름의 목적은 자기 연민, 경험 그리고 헌신을 표출하는 기회에 더 쏠려 있는 듯 보인다. 우리는 교회에 나간다. 그러나 복음에 의해서 변혁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변혁을 기뻐하고 우리 자신과 세상의 변혁을 위해 전진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받기 위해서다.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고 신뢰하기보다는 하나의 개인적인 자원 정도로 활용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구원을 이미 이루신 구세주가 아니라 우리의 승리를 위한 좋은 작전을 세워 주는 코치에 불과하다. 구원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하나님 자신에 의해 건져 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 최선의 삶을 사는 문제로 돌려진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되기 위해서 필요한 능력을 접속해 얻어 가는 전기 콘센트다. 이러한 새로운 복음은 기독교라기보다는 훨씬 더 미국제 종교에 가깝다.

 

이 책에서 내 초점은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말하는 자들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나라에서 과연 그리스도가 널리 선포되고 있는가에 맞춰져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신의 명분과 입장을 위해 헛되게 부르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갖가지 모습으로 사소하게 만들면서도, 영화에서 그리스도가 희화화 되거나, 기독교인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기만 하면 격분을 쏟아 낸다.

 

나는 하나님이 미국 문화에서 너무 천박하게 다뤄진다고 염려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신앙과 실천에서 도대체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는 것을 염려한다.

 

이 책에서 내가 주장하는 것은 복음주의가 신학적으로 자유주의가 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공백 상태에 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부드럽게 죽이는 것은 이단보다 어리석음이다.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으나 사소한 것으로 취급한다. 즉 하나님을 영접하고 예배하고 즐거워하기보다는 우리 인생의 프로그램에 활용한다.

 

그리스도는 능력의 근원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서 과연 무기력한 자들을 구속하시는 원천으로 간주되고 있는가? 그리스도는 도덕적으로 민감한 자들이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우신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경건하지 않은 자들 – 기독교인들을 포함해서 –을 구원하시는가? 그리스도는 부서진 삶을 치유하신다. 그러나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을 다시 일으키시는가? 그리스도는 단지 우리의 아담적인 존재를 개선해 주기 위해 오셨는가, 아니면 그것을 종식하고 우리를 자신의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는가? 기독교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개선인가, 아니면 죽음과 부활 – 철저한 심판과 철저한 은혜 –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원하고 필요해서 이미 결심한 것을 이루어 주는 하나의 원천인가, 아니면 우리의 종교, 도덕성 그리고 경건한 경험에 대한 하나님의 생생한, 유효한 판결인가? 달리 말해 보겠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사역에 중심을 둔, 우리의 이야기를 완전 개작하는 하나님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우리의 이야기를 좀 더 흥미진진하고 구수하게 만들기 위해 활용하는 그 무엇인가?

 

사람들은 예수에게 온갖 종류의 옷을 입혔다. 회사의 최고 경영자, 인생 코치, 문화 전사, 정치적인 혁명가, 철학자, 부조종사, 아픔의 동지, 도덕적인 모범, 그리고 우리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꿈을 함께 이루는 파트너와 옷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방식으로 우리는 구속 드라마의 주인공을 우리 자신의 연기를 위한 소품으로 축소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메시지를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것은 우리의 증거에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예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가 아니라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 것인가?”가 초점이 되면, 상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수주의자들 역시 최근 몇 십 년 동안 전자가 아니라 후자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짙어졌다.

 

2장 찰스 피니의 펠라기우스주의와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이 하나님은 - 우리가 한 초자연적인 신을 믿는다고 한다면 -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 조지 바나

 

“이들은 성경이 중요한 이야기들과 교훈으로 가득 찬 좋은 책이라고 믿는다. 또한 종교는 자신들의 삶에서 소중하다고도 믿는다. 하지만 바로 이런 사람들이, 더구나 스스로 신앙을 고백하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으며, 우리의 일차적인 목적은 가능한 한 삶을 즐기는 것이라고 믿는다” - 조지 바나

 

82%의 미국인 (이 비율의 대부분은 복음주의자들이 차지하고 있다)은,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격언이 성경의 인용이라고 믿는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든 사람은 같은 신 혹은 영에게 기도드린다. 이 영적 존재에 어떤 이름을 갖다 붙이든 상관없다” 나아가 “어떤 사람이 한평생 착하게 살아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선한 일을 많이 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줄여 말해서, 미국의 영성은 명목상으로만 기독교적이다... 우리는 지식보다는 경험을 갈망한다. 절대적인 것보다는 선택의 가능성을 선호한다. 진리보다는 기호에 기울어진다. 성장보다는 안일함을 찾는다. 신앙도 우리의 조건에 맞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거부한다” - 조지 바나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귀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당신은 독특합니다”라는 말이 들린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기대에 닿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당신의 감정이 당신을 이끈다는 걸 믿으세요. 절대적인 원리들을 의지하면 비현실적인 제한만 떠안게 됩니다. 오직 당신만이 그 어떤 순간, 어떤 환경에서 당신에게 무엇이 옳은지 혹은 최선인지 알 수 있어요” 여기가 압권이다. 그리고 이런 말로 마무리를 장식한다.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세요... 즐기세요... 건강을 유지하세요. 당신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힘차게 달려 나가세요” - 조지 바나

 

“칼빈이나 루터가 ‘신 중심’의 사고를 한 것은 적절하다. 하지만 지금은 저울추를 정반대로 놓아야 할 때다. 인간의 필요에 대해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고전적인 신학은 신학이 ‘신 중심’이고 ‘인간 중심’이어서는 안 된다고 고집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죄는 ‘나 자신 혹은 다른 인간 존재에게서 자존심을 박탈하는 어떤 행위 혹은 생각’으로 규정할 수 있다. ‘지옥’이란 무엇인가? 지옥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자존심의 상실이다. 자존심이란 우리 영혼의 자기 존중감의 궁극적인, 결코 마르지 않는 원천이다... 지옥에는 자존심을 잃은 사람이 들어간다. 십자가는 자아로 향하는 길을 신성하게 닦아 준다” - 로버트 슐러 목사

 

그리스도의 증인인 우리 앞에 놓인 도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자아도취적인 강박관념을 풀어 주는 열쇠냐, 아니면 우리를 그런 죄와 권세로부터 해방시키는 구속자로 제시할 것이냐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자아를 더 부풀리기 위해 오셨는가, 아니면 우리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오셨는가?

 

C. S. 루이스는 우리에게, 우리의 욕망이 너무 강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보잘 것 없는 것이 문제임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원하시지만, 우리는 기껏해야 마케팅 문화가 우리 안에 심어 놓은 것일 뿐인 경박한 욕구의 사소한 만족에 주저앉아 버린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와 은혜를 역기능과 회복이라는 심리치료 용어로 바꾸어 놓는 것은 “목회자들이 저지르는 잔혹”이다.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가 정말 죄인이어서가 아닐까, 주체를 바꾸거나 이 상태의 심각성을 줄여 말하는 것은, 복음이 가져오는 해방의 소식을 사람들이 못 듣도록 하는 처사와 다를 것이 없다.

 

여가와 오락이라는 약처럼 가벼운 기독교도 사람들을 잠시 기분 좋게 만들 수 있지만, 죄인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지는 못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 태어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간은 즐겁게 되기 위해서 태어난다” - 필립 리프, ‘심리요법의 개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죄를 속하는 예수의 속죄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제공된 영생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누릴 수 있겠는가?

 

기분 좋은 것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보다 중요하다. 아니 자아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규범적인 판단은 아예 들어설 자리가 없다. 어떤 사람은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실제로 죄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율법이 개입하여 하는 바로 그 일, 즉 우리에게 율법이 있기나 한 양 가장하는 모습을 발가벗겨 버리는 일은 자존심의 핵심 가치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야만적인 공격으로 간주할 수밖에는 없다.

 

자기실현, 자기완성 그리고 자기계발은 오래 된 이단을 현대적으로 변형시켜 놓은 것에 불과하다. 바울은 이 이단을 공로를 통해 얻는 의라고 이름 붙였다.

 

복음주의 교회에서 자라 신앙이 “매우 중요하다”며, 자신의 삶에서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고 말하는 대부분의 십대들이 신앙의 실제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기겁하리만치 무지” 함을 발견했다.

 

최소한 성경과 기본적인 기독교 교리에 대하여 남아 있는 지식이나마 가지고 있던 전 세대들에 비해서, 자신의 신조를 진술, 반성 혹은 검증할 진지한 능력이 거의 없고 그것을 실생활과 연결시키기에는 한참 부족해 보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대중적인 종교가 주는 느낌은 하나님은 좋은 분이고, 우리도 좋은 사람들이니, 우리 모두는 좋은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메시지이다.

 

종교적이라는 것은 멋지게 되는 것이지, 용서에 대한 것은 아니다. 보수적인 개신교 십대들의 상당 비율이 은혜와 칭의 같은 복음의 기초 개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은 차마 믿기 힘들다. 심지어 교회에 적극적인 루터파 젊은이들조차 은혜 혹은 칭의라는 용어를 정의하지 못했다.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죄의 고백은 옳고 그름에 대한 것이다. 실제적인 죄는 우리의 일상에 살갑게 관여하시는 그런 하나님에 의해서 용서받는다. 심리요법의 세계관에 의하면, 하나님이 용서해야 할 죄와 죄책은 없고, 오직 자신 혹은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한 기대만큼 살 수 없도록 막는 부담감과 죄책감이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해서, 기독교에서는 객관적인 죄책과 정의를 말하는 반면, 도덕주의적인 심리요법에서는 주관적인 죄책감과 단지 다른 누군가에게 이를 털어놓기만 하면 되는 카타르시스적인 해소만이 있을 뿐이다.

 

고백이 하나님에 대한 거슬림으로 인해 마음이 산산조각 나고 그분의 용서를 받는 문제가 아니라, 평균보다 더 나쁘지 않은 자신을 정당화하는 문제가 되었음을 보여 준다.

 

죄를 그토록 추악하게 만드는 사실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슬러 저질러졌다는 데 있다. 우리가 고백을 이웃(도덕론) 혹은 우리의 내적 자아(심리치료) 라는 수평선적 행동으로 축소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과의 이 수직적인 관계 때문이다.

 

4세기에 살았던 영국 수도사 펠라기우스는 기독교 국가의 중심지인 로마에 도착해서 그 타락상을 보았을 때 경악했다. 아프리카 주교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의 전적무능력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강조가 문제의 뿌리라고 추측하면서 펠라기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원죄를 부인했다. 죄는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선택이다. 우리는 자유의지로 아담의 악한 사례를 따를 수도, 예수의 좋은 모범을 따를 수도 있다.

 

16세기 후반에 출현하여 칼빈주의를 배격한 네덜란드 신학자의 이름에서 유래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확신에서 한 걸음 이탈해서, 은혜의 필요를 인정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여전히 구원이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적인 노력이라고 주장한다.

 

복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정당한 진노가 충족되었고 보상을 바라지 않는 특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부여되었다는 선언보다는, 개인적이고 공적인 삶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으로 격하된다.

 

미국 기독교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펠라기우스주의적 경향은 종교개혁에 역사적 뿌리를 둔 교회들에서조차 드러나고 있다.

 

로버트 슐러도 그렇지만, 노만 빈센트 필이 미국 개혁교회에서 안수 받은 목사였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은혜에 대한 개혁주의자들의 증언이 16세기보다 현재 더 절박하게 필요하다. 지금은 개혁교회들에서도 펠라기우스주의가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 브라이언 게리쉬

 

사도들은 그들 스스로가 증인이 된 역사적 사건들을 증언한 반면에,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들에서 “간증해 주시지요”라는 말은 더도 덜도 없이 자신의 내면적인 경험과 도덕적인 변화에 대해 말해 달라는 뜻이다. 종교는 한 번 사적 영역으로 후퇴하고 나면, 상대화 과정을 밟는다.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 너의 진리다.

 

능력과 거룩함의 초월적인 하나님이 가벼운 친근함으로 전락한다. 열 명의 미국인 중 오직 한 명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해 보았다고 말하는 반면, 대부분은 하나님을 왕이 아니라 하나같이 친구로 보고 있고, ‘아주 적은 소수’가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느껴 보았다고 한다.

 

종교가 심리요법적인 유용함이라는 개인적 영역으로 졸아들면, 죄와 구속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범주로 옮겨 간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적의 혹은 죄책의 상태가 아니라, 나쁜 기분을 해소하는 답이 된다.

 

더 이상 그리스도의 성육신, 삶, 죽음 그리고 부활 안에서 역사로 들어오신 하나님의 독특한 개입을 주장하는 순교자 -증인-는 없으며, 우리는 예수와 우리의 개인적인 관계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개선하였는지 간증하는 만족스러운 소비자들이 되었다.

 

실용주의와 심리요법이 득세한 상황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그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는, 예수를 논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 차라리 그리스도를 인생의 도전에 맞닥뜨릴 때 개인적으로 도움이 되고 의미를 부여해 주는 존재쯤으로 여기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미국의 칼빈주의적인 종교 관행의 뿌리”는, 인간이 “자신의 구원에 기여할 바가 없다는 견해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는 견해를 내세움으로써, “자력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실용주의라는 인기 높은 이념들”에 의해 점점 갉아 먹혔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공평, 거룩 그리고 공의를 그렇게 쉽게 외면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참담한 낭비로 보인다.

 

하나님을 우리 자신의 경험 그리고 행복과 동일시하는 인간 중심의 접근 방법을 따를 때, 세상은 더 이상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다. 세상은 마치 하나님처럼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안녕을 위해서 존재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소비되기 위해 거기 있다.

 

모든 강조점은 축제와 행복에 있다. 어떤 설교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죠”하고 외친다.

 

이런 설교들에서 재차 강조되는 또 하나의 강조점은 인간이 희생자이고 잃어버린 영혼으로, 더 이상 저주받은 존재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을 잃었을 뿐인 존재라는 것이다.

 

초기에는 자기 사랑이 원조의 뿌리로 여겨졌으나, 부흥사들은 자기 사랑을 회심의 동기로 호소했다. 인간의 능력을 좀 더 광범위하게 신뢰하는 분위기, 그리고 “자유의지라는 아르미니우스 교리의 강조”로 말미암아, 죄는 “행동의 실수, 적절한 도덕 교육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개념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은혜는 점점 사적인 것, 즉 개인의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기회와, “흔하게는 감정주의로 장식되는” 믿음의 언어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밖으로부터 한 사람에게로 다가오는 그 무엇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솟아나는 그 무엇으로 보는 경향이 짙다. “따라서 구원의 열쇠는 자아 안에 있다. 개인을 추동하는 힘은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죄는 크게는 실수 혹은 무지로 간주되기에 (인간의 본질적인 신성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적인 신념에 동조하여), 행동의 변화가 윤리적인, 도덕적인 주제에 관련한 교육을 통하여 나올 수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로써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현실 세계의 요구들과 관련하여 사람들을 돕는 일종의 심리요법”으로 이해하는 심리학적인 이해에 문이 열리게 됐다.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신학을 심리학과 통합하는 일과 관련하여 구체적인 질문들을 놓고 논쟁을 할 수도 있지만, 양편 모두 신조의 심리학적인 해석을 두드러질 정도로 당연시하고 있다. 회심은 기본적으로는 자기성취다.

 

회심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얻기 쉽다. 회심은 “정서적인 자기발견, 개방성 그리고 수용성”만을 필요로 한다.

 

자유의지에 대한 강조다. 자유의지보다 자아에 더 본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주제가 되풀이 된다.

 

하나님을 찾아라. 겸손해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왜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야” 하는지 말해주는 이유가 “참된 자아실현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없다.

 

단지 길을 잃은 것이라면 방향이 필요하다. 그저 아픈 것이라면 약이 필요하다. 약해서 그런 것이라면 힘을 북돋우면 된다. 그러나 근본적인 은혜는 근본적인 죄성 - 단지 도덕적인 실수, 열성의 부족 혹은 영적인 무기력증이 아니라, 성경에서 정죄 받았다 규정하는 상태, 즉 “진노의 자식”,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 대한 응답이다.

 

“대중적인 개신교 신인협력설 (은혜 그리고 자유의지 이 모두를 통한 구원)이 가톨릭 사상에서보다 훨씬 더 만연하였고, 신앙의 표준을 결정하는 일과 관련하여서 성경보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이 훨씬 더 우세하게 내세워지는 상황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도널드 블로슈

 

개혁과 회개가 진정으로 일어난다면, 반드시 죄가 무엇인지 다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G. K. 체스터턴이 관찰한 대로, 원죄는 “실제로 입증될 수 있는 기독교 신학의 유일한 주제이다” 훗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종교에 대한 모든 실제적인 논증은 뒤집어진 상태로 태어난 인간이 언제 제대로 될 때가 오는지 말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질문에 달렸다. 기독교의 가장 큰 역설은 인간의 일반적인 상황이 제 정신인 혹은 지각 가능한 상황이 아니고, 정상이란 바로 비정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살벌한 심판뿐인 율법을 선포하는 설교와 느끼할 정도로 단맛뿐인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가 합쳐져서, 더 성취하는 인생을 향한 부드러운 권면뿐인 이상한 메시지를 양산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지도, 어떻게 잔치에서 신나게 즐길 수 있는지도 모른다.

 

체스터턴은 원죄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쉽게 독재자와 방종자 모두의 무기력한 인질로 떨어지기 쉽다고 말한다.

 

3장 조엘 오스틴의 형통복음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미국인들이 가장 원하지 않는 것은 지금까지 겪은 혹은 앞으로 겪게 될 가장 심각한 문제들로부터,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을 듣는 것 –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다 –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종교적인 상품은 기적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러한 ‘할 수 있다 정신 (can-do spirit)’에 효과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우리의 거드름 떠는 자아를 당혹스럽게 할 수도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가능한 한 멀찌감치 치워 버리는 것이다. 궁극적인 답을 구할 때 우리는 우리 내부로 들어간다. 우리 밖에서 하나님의 외적인 말씀을 찾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경험을 신뢰한다.

 

복음주의자들은 종교를 세속문화에 순응시키는 일에 있어 자유주의적인 경쟁자들을 따라잡았을 뿐만 아니라 이제 분명히 앞서 가고 있다. 어떤 세속적 자기계발 스승도 복음주의 진영의 경쟁자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믿음의 말씀 운동 (Word of Faith movement)으로 알려진 적극적 사고방식의 오순절주의적 버전이 땅 끝까지 형통복음 (prosperity gospel)을 확산시키고 있다.

 

상당수 신학자들이 이러한 형통의 메시지와 고대 영지주의 사이에 놀랄 만한 유사성이 있음을 지적하곤 한다.

 

보이지 않는 영역의 비밀스러운 원리를 습득함으로써 인간이 처한 외적인 환경들을 지배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 (“자연”이라고 흔히들 부르는) 창조 세계 자체는 타락했지만, 내적 자아는 신성하다고 이 교설의 교사들은 주장한다.

 

조엘 오스틴의 메시지는 그것이 어떤 신학을 조금이라도 반영하고 있다면, 펠라기우스주의의 자기계발과 영지주의의 자기 신성화가 접목된 형태를 보여 준다. 개신교 자유주의에서 나온 일종의 부드러운 도덕주의가 슐러를 통해 복음주의의 주 메뉴가 됐다면, 오스틴은 케니스 코플런드와 베니 힌의 “입으로 시인하고 믿음으로 얻으라”의 철학을 주류의 반열에 올려놓는 의아한 성공을 거뒀다.

 

선언만 하라. 그러면 형통이 당신을 따라온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일하는 구매 대리인이다.

 

오스틴의 메시지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율법을 지키지 못한 데에 따르는 정죄가 일체 없다. 그런가 하면 칭의도 없다. 이 두 메시지 대신에, 이 두 메시지의 중간 어디쯤 있는 낙관주의 도덕주의가 있다. 즉 최선을 다하라. 내가 말하는 지침들을 따르라.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실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존재하는 친구이자 파트너다. “당신이 해야 할 몫을 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 몫을 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잘못했습니다” 그는 말한다.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무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렸다. 그런데도 쉽다. 오스틴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들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아주 편안한 방안을 주셨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공하지 못한 인생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 보는 것 같다.

 

마치 이것이 좋은 소식이라도 되는 양 오스틴은 말한다. “당신이 절박한 그 순간에, 당신이 행한 선행 때문에,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움직이셔서 당신을 돌보아 주십니다”

 

하다가 잘 안 되면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은 당신이 최선을 다하기만을 바라실 뿐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신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 그리고 하나님의 가슴 벅찬 은혜라는 두 중력 모두가 사라진 것이다. 이 메시지에 의하면,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죄인, 경건하지 않은 자, 그래서 일방적인 하나님의 구출이 필요한 자들이 아니다. (미국인, 그 중에서도 베이비부머들은 나쁜 소식을 잘 받아들이질 못한다) 아니, 우리는 약간의 훈계와 동기부여가 필요한 선량한 사람들일 뿐이다.

 

죄는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잠재력을 최대한 계발해서 살지 않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은 ‘죄’고, 이러한 죄의 삯은 현실에서 최고의 인생을 놓쳐 버리는 것이다.

 

“어쨌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라는 거짓 복음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 이것이다. 하나님은 그다지 거룩하지 않으시고 우리 또한 그다지 도덕적으로 뒤집어져 있지도 않아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야 할 만큼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그저 우리가 행복해지길 원하신다.

 

이 메시지가 나온 경로를 보면 아무리 좋게 말해도 신앙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심하게는 신앙과 정면 배치되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다. 불신자의 비위를 거스르게 하는 말은 한 마디도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에게는 훨씬 더 그렇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우리의 정죄 혹은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그 정죄를 짊어지심에 대한 말은 전무하다. 오스틴의 메시지에는 삼위일체 혹은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오는 세상에 대한 말은 전혀 없다. 사실은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도 아주 드물다.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감각을 상실할 때, 죄는 그것이 가리키는 바를 잃어버리고 만다. 죄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이 아니라, 자아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상태다.

 

오는 세상에서 차지하게 될 우리의 위치는 더 이상 문제가 안 된다. 지금 여기서 인생의 최선을 어떻게 뽑아내느냐 만이 문제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곤경에 대한 어떤 진지한 언급도 결여됐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개인적인 관계가 이룰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오스틴의 책 어디서도 (최소한 지금까지는)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의 중보자로 나오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는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 인생에서 되어 주었으면 하는 그런 존재가 된다. 나의 가장 큰 문제가 외로움이면 믿을 만한 친구 예수가 복음이다. 가장 큰 문제가 불안이면 예수는 우리를 안정시켜 준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수 있을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보다 내 행복이 주요 관심사가 될 때는 더 이상 문제가 안 된다. 조엘 오스틴은, 선천적으로 자기 부양에 목을 매는 미국인들에게 먹혀들 만한 숱한 자기계발 복음 전도자 가운데 가장 최근의 한 사례에 불과하다. 구원은 이 세상에 임하고 있는 심판으로부터 하나님의 구출을 받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최고 인생을 지금 살기 위한 자기개선의 문제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정의로 열리는 재판에서 우리의 마음이나 인생의 기록을 면밀히 살핌으로 어떻게 해서든 우리에게 유리한 판결이 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착각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이 아니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허를 찌른 안셀름의 말이 자꾸 생각난다.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죄가 얼마나 큰지 모르고 있다” 오스틴의 시각은 자력 구원이라는 펠라기우스 이단을 정서적으로 버무려 놓은 것에 푹 빠진 미국인들에게 잘 먹힐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이후의 하늘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행복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느냐 안 되느냐는 당신에게 달렸다. 특정한 일들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복이 당신의 것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죄를 이렇게 사소하게 만드는 두 번째 움직임은 죄를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도록 무기력하게 만드는 하나의 조건이 아니라 훈계로 간단히 극복할 수 있는 행동들 (부정적인 행위들)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오스틴은 죄가 우리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포괄적인 상태가 아니라 좋은 교훈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특정한 행동이라고 전제한다.

 

가장 큰 죄들은 성공을 위해 하나님의 원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이다.

 

오스틴의 견해로는 죄는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아니다. 그가 죄가 아니라 우리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이 되지 못하게 하는 실수 혹은 실패를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성경에 의하면, 어떤 태도들과 행동들을 죄로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도발이다.

 

오스틴과 같은 설교자들의 메시지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죄는 나 자신의 기대를 실현하지 못하도록 하는 나 자신에 대한 잘못이 되었다. 이것은 자아도취 현상이다. 즉 나는 나의 잠재력을 펼쳐 내지 못했으며, 하나님이 내 인생에 바라시는 최고를 뽑아내지 못했으며, 혹은 바람직한 삶으로 이끌어 주는 지침들을 따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오스틴은 자신이 위에서 밝혔듯이 죄 혹은 죄인이라는 말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분명히 실수와 비슷한 단어들이다.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없다. 지금 최고의 삶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죄다.

 

오스틴은 대답한다. “내게는 재미있는 일입니다. 기쁨과 행복이 깃드니까요... 어떤 규칙 같은 것을 따르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냥 내 인생을 사는 것이죠”

 

의가 아니라 재미가 기준이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이 아니라 자아 앞에서 행복한 삶이다.

 

좋지 않은 율법 설교의 해독제는 바른 율법 설교이지 율법의 제거가 아니다.

 

나쁜 율법 설교는 우리 중 일부를, 오스틴의 율법 누락 설교는 우리 중 그 누구도, 성경적인 율법 설교는 우리 모두를 더러운 걸레로 만든다.

 

오스틴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무튼 유일무이하고 중요한 분임을 인정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오스틴은 그리스도가 명확하게 하신 점, 즉 그리스도가 닥쳐오는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하신 점을 무시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한복음 3장 18절)고 잘라 말한 분은 예수이시다. 우리를 위해 심판을 견디심으로 우리를 그것으로부터 구하러 오신 그 심판은, 나와 내 일시적인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이 기준이 되는 것으로 예수께서는 보셨다.

 

오스틴에게 복음은 심판 날에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보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그것은 정말 나쁜 소식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마음,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을 보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것이 복음이다. 값싼 선물이 아니라 무료 선물인 것이다.

 

“기억하라. 하나님은 승리하는 인생을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당신 안에 허락하셨다. 그것을 꺼내는 일은 이제 당신에게 달렸다” - 오스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모든 사람에게는 그 안에 이러한 ”위대함의 씨앗“, 이러한 신적인 DNA가 심겨 있다. 모든 것이 당신 안에 있다. 당신은 잠재력 덩어리다. 그러나 당신의 몫을 하고 그것을 풀어 놓아야 한다... 당신 안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씨앗이 있다... 그 잠재력이 펼쳐질 모습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 오스틴

 

오스틴은 초기 저서에서, 죄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잠재력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사실 오스틴은 ‘잘되는 나’에서 좀 더 노골적으로 형통복음으로 기울어졌다. 오스틴은 마치 타락 같은 것은 있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한다. 비록 승리를 성취하는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지만, “하나님은 승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당신 안에 심어 놓으셨다”

 

오스틴은 성경을 해석하지 않고, 자신의 형통 메시지에 도움되는 인용집으로 이용한다. 이 책은 형통복음의 요설로 도배질이 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선언하고, 형통을 말하며, 건강, 부, 그리고 행복이 우리 삶에 찾아오도록 예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통의 법칙에 맞도록 모든 것을 마련하셨으니, 이제 공은 우리 코트로 들어왔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과 복을 받고 못 받고는 우리의 태도, 행동 그리고 순종에 달려 있다.

 

헛갈리지 말라. 이 미소 뒤에는 노력을 통해 획득하는 의라는 고단한 종교가 도사리고 있다.

 

보라. 하나님이 첫 번째 동인을 제공하시고 다음 움직임은 우리에게 맡겨 놓으신다는 정도가 아니다. 은혜는 우리 행동에 주어지는 보상이다. “당신이 한 걸음을 떼기 전까지 은혜는 없다. 당신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 기억하라. 인생에서 얼마나 높이 올라가느냐는 얼마나 순종하느냐와 직결돼 있다.

 

“내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다. 내가 숙면을 취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평안 속에서 쉴 수 있는 이유도 이것이다. 내 얼굴의 미소는 이것 때문이다. 여러분도 양심을 늘 부드럽게 하라. 그러면 삶이 형통하고 더 형통하게 될 것이다” - 오스틴

 

내가 밤에 두 다리를 뻗고 잘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내 마음은 여전히 타락해 있고,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지만, 하늘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사랑하시는 아들,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 하셨을 뿐더러 나를 위해 내 자리에서 모든 의를 이루신 분이 계시다는 것이다.

 

오스틴은 전 세대의 율법주의를 버리지 않았다. 아니, 율법주의를 더 강화하고 있다.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뿐 아니라 우리의 건강, 부 그리고 행복이 우리의 결심과 노력의 정도에 달려 있다는 말은 듣기에 편하지만은 않다.

 

예레미야는 마음이 다른 무엇보다 교활하게 속인다고 말하는 반면 (예레미야 17장 9절), 오스틴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확신은 자기 마음의 의라고 호언한다. “완벽하게 모든 것을 다 행하지는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 마음이 옳다는 것은 안다... 당신도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옳은 일을 하려는 열망이 있다면, 하나님이 당신을 기뻐하시리라고 확신해도 좋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 개선되길 원하시지만, 또한 우리 모두가 약하다는 것도 아신다” 죄는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지 못하는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높은 이상을 찌리는” “인간적인 약점과 불완전함”으로 축소된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한, 실수를 하거나 실패를 해도 정죄감 속에서 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다. 나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컨디션이 안 좋은 날뿐 아니라 좋은 날에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경에 따르면 우리가 기울인다는 최선은 “더러운 의복” (이사야 64장 6절)이다. 오스틴이 제시하는 조건은 사실은 정죄로 가는 길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의 소행대로 심판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보고 판단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스틴은 하나님이 우리를 내재하는 선량함과 최선의 노력을 바탕으로 판단하시며, 끊임없이 인정해 주신다고 그치지 않고 주장한다. 오스틴은 그리스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완벽하지는 않아도 “내 마음이 옳다는 것을 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그분을 기쁘시게 할 만한 일들을 하고 있다... 솔직히 이것은 당신이 무엇을 했거나 하지 않았다는 데 달린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자신의 속성 때문에 사랑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으신다고 믿고 있다.

 

오스틴의 하나님은 단순하다. 오로지 한 가지 속성 (사랑)만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용서는 쉽게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공평, 거룩 그리고 의로우심과 평형을 이루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자비로운 사랑이 아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자들에게 보여 주시는 긍휼이 아니다.

 

정반대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흥미의 대상이 아니라 위엄에 가득 찬 분이시다. 죄인들을 사랑하시기에 자신의 거룩한 성품을 깨뜨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초점이 있다. 그것도 하나님의 거룩을 배제한 우리의 행복에 초점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역사를 받아들이는 입장이 아니라 도덕적인 노력으로 더 높이 올라가는 데 초점을 둔다.

 

성경에 하나님이 우리의 선행만을 기록하셔서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의 은총과 복을 가져오고 우리의 죄는 전혀 다루지지 않는다고 말한 구절이 한 구절이라도 있는가?

 

대사들은 할 말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 복음의 사역자들로서 우리의 은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사도행전 20장 27절) 전파하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 10장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올라가지 않는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로 내려오신다.

 

대사는 자기가 자신을 파송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심부름으로 파송받는다.

 

지금 영광을 거머쥐라. 십자가, 저주, 심판은 없다. 되고 싶은 대로 되어라. 우리는 타고난 자아도취에 호소하는 시대의 문화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하나님이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가장 훌륭한 기독교인이 최선의 노력을 다 하되, 가장 컨디션이 좋은 날, 가장 좋은 마음과 생각, 최선의 동기로 일했으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진정한 의와 거룩함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공평을 스스로 만족시키시고 자신의 아들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우리를 자신에게로 화해시키셨다는 것이 좋은 소식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로마서 6장 23절) 죽음을 부르는 것은 이런저런 죄들 (특히 행동들)이 아니라 죄 (어떤 한 상태)라고 말하고 있음에 유의하라. 지금 이 순간, 심지어 지금 최고 인생을 누리고 있는 순간조차도 우리는 죽음을 향해 굴러가고 있다.

 

그리스도는 증상을 다루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근원으로 곧장 가셨다.

 

첫 아담이 죄를 가져왔다면, 마지막 아담은 영원한 생명을 가져왔다.

 

오스틴을 비롯한 요즘 활동하는 다른 많은 설교자들이 약속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리스도가 없어도 된다. 성경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복음서들에 약속된 구속과 같은 것도 필요 없다. 삶을 좀 더 긍정적으로 전망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하나님이 필요할 데가 어디 있을지 분명하지 않다.

 

십자가로 나온다는 것은 회개한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드라마에, 빠지면 허전하지만 아무 말이나 한마디 내뱉고 마는 조연 정도로 예수를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코칭과 개선이 아니라 죽음과 부활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왜 왔는지 아셨다. 사람들이 삶에서 조금 더 행복해지고 성공을 거두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예수께서 먼저 영광을 구하지 않고 십자가를 받아들인 후 자기 영광으로 들어가신 것을 감사해야 한다.

 

오스틴이 전파하는 건강과 부의 복음은 고난을 다룰 수 없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는 세상 왕국을 제공하는 영광의 신학이다. 이 길을 택하는 자들이 지금 최상의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전형적인 미국 종교에는 현재에도 우리의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 혹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우리의 고난 등 고난이 없다.

 

“당신은 거룩하고 성별된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총을 경험하지 못한다. 이것은 당신이 그것을 선언하지 않아서다. 믿는다고 외침으로 자신의 믿음에 활력을 주어야 한다” - 오스틴

 

“나는 늘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기분을 좋게 하려고 종교를 찾아다니지는 않았다. 그런 것은 한 병의 술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종교를 얻어 진정 편안해져 보려고 한다면, 진정 기독교를 권하지는 않는다” - C. S. 루이스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친히 내려오셔서 불편이나 이 세대에서 인류 전체에게 일반적인 질병들에서 우리를 구하신 것이 아니라 죄와 죽음의 형벌에서 구하셨다고 말한다.

 

4장 이머징 교회 운동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예수는 더 나은 삶으로 향하는, 아니면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은 분명 아니다. 사람은 예수 없이도 체중을 줄이고, 담배를 끊고, 결혼생활을 개선하고,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

 

기독교를 구별시켜 주는 핵심은 기독교의 도덕적인 계율이 아니라 기독교의 이야기다. 즉 자기 형상으로 창조한 자들에 의해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자기 아들을 통해 자기와 화해하도록 스스로 낮아지신 창조주의 이야기다. 기독교는 개인이 하늘로 올라가는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육신, 속죄, 부활, 승천 그리고 다시 오심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것이 지닌 풍성한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 복음 즉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과 화해시켰다는 좋은 소식이 있다.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권면이 아니라 복음이다.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구원하셨는가를 아는 지식이다. 당신에게 복음이 있는가? 나는 이것을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이 주는 권면은 나를 도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구원하기 위해 어떤 일이 행해졌다면, 그 사실을 내게 말해 주지 않겠는가?” - 그레셤 메이첸

 

문제는 오늘날 사역의 목표가 우리의 무화과 잎 옷을 찢어 버리고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인가 아니면 나뭇잎을 몇 장 더 얹는가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중심 메시지는 세계관, 처세 방법 혹은 개인과 사회 개혁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이다. “좋은 소식”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전형적으로 승전보로 쓰였다.

 

이 구속의 이야기가 좋은 소식이라 불리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만약 이것이 자기계발을 위한 정보 혹은 프로그램 정도라고 한다면, 좋은 충고나 좋은 개념 또는 좋은 계몽이라 불렸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이미 성취했다는 어떤 일에 대한 선언이기에 이것은 좋은 소식이다.

 

초점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 하나님의 이야기와 전략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와 전술에 놓이게 된다. 이 말은, 오늘날 우리가 하는 사역의 상당 부분이 “예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가 아니라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에 강조를 둔 복음 없는 율법, 소식 없는 권면, 선언 없는 지침, 교리 없는 행위라는 뜻이다.

 

우리는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지 못하고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최고를 상실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지를 범한 자들로 정죄 받는다.

 

하나님의 율법의 지엄함과 우리가 범법자들로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희석하는 것은 더 친절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사실 그것은 잔인한 짓이다. 자기신뢰 가운데서 하나님에게 맞서려는 모든 시도를 종식하고 사람들에게 우리를 구출해 내기 위해 모든 것을 성취하신 구세주를 소개하는 대신, 이런 부류의 듣기 편한 율법주의는 끊임없이 불안한 생활을 고착시킨다.

 

최근에는 이머전트 교회 운동 (Emergent Church movement)이, 굳이 말을 하자면, 어떤 경우 심지어 복음을 수정하면서도 제자도를 무척 강조하고 있다.

 

이머전트 교회 운동도 우리가 기억하는 바,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이 전하는 교훈을 똑같이 강조하고 있다. 즉 더 노력하라. 따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리더가 되라. 하나님을 위해 놀라운 일들을 이룩하라. 교리가 아니라 제자도 (“학생”이라는 뜻의 제자와, “가르침”이라는 뜻의 교리가 마치 상반되는 것처럼)를 강조한다.

 

율법과 복음이 각기 단순히 십계명과 요한복음 3장 16절을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도덕적 기대를 보여 주는 성경의 모든 것이 율법이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목적과 행동을 보여주는 성경의 모든 것이 복음이다. 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복음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많은 권면, 명령, 그리고 명령법들이 있다. 이런 것들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이것들이 복음은 아니다.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이 복음은 아니다. 우리는 또한 지침도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알아야 깨끗해질 수 있고, 우리의 죄를 인정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에게로 도피할 수 있다. 또한 그래야만 이것들이 우리를 감사가 넘치는 순종으로 이끌어 줄 수 있다. 무엇을 하는 것이라면 우리를 율법에 부응하고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믿는 것에 대해서라면 복음 (믿음)에 부응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을 얻는 수단으로 착각함으로써,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을 거슬리는 가장 공격적인 죄가 되고 만다.

 

심지어는 좋은, 거룩한 그리고 적절한 것들조차 복음과 섞여 있을 때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즉 끝없이 펼쳐지는 드라마 안으로 우리를 끌어들이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오늘날에는 좋은 조언을 통해 괜찮은 사람들을 더 좋은 사람들이 되도록 돕는 것에 비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반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헤아려 보는 일은 뒷전이다.

 

산상수훈이 사랑이라는 일반 윤리로 축소되고 교리가 뒷전으로 밀려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그리스도는 심지어 다른 종교의 추종자들이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단순한 모범이 된다.

 

오스틴은 구원을 전적으로 지금 여기에서의 형통이라 말하는 반면 맥클라렌은 주로 지금 여기에서의 평화와 정의라고 말한다. 두 경우 모두에서 이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씨앗을 심음으로써 이 일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복음을 “지금의 길에서 돌이켜서 새로운 길을 따르라”고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초대(맥클라렌)라고 규정하든, 혹은 “더 나은 자신이 되기”(오스틴)라고 하든, 우리는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고 있다.

 

“나는 당신들의 그리스도를 좋아한다. 그러나 당신들 기독교인은 좋아하지 않는다. 당신들 기독교인들은 당신들의 그리스도와는 다르다” - 마하트마 간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성적 부도덕, 위선, 분쟁 그리고 교만 등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편지를 써야 했을 때, 복음을 완전히 다시 선포함으로써 포문을 열었다. 그는 복음을 전제하지 않았다. 사실은 교회가 특정한 윤리 문제로 혼란을 겪고 있다면, 복음 메시지를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일 수 있다고 전제했다. 다시금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를 전파하고 나서야,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고상한 부르심에 맞게 살라는 실천적인 권면으로 들어가곤 한다.

 

우리 모두를 위한 질문은 교회가 복음이 비기독교인뿐 아니라 기독교인에게도 정기적으로 선포되어 인정받는 곳이라고 우리가 믿느냐 안 믿느냐는 것이다.

 

내가 예수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데려가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에 기독교인이다. 나는 복음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음이다.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나를 의롭다 할 뿐 아니라 나를 자신의 부활 생명 안으로 세례 주심으로 나를 구한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감 (성화)은 자아에 대해 죽고 (죽임) 하나님에 대해 살아나는 (살림) 과정이다. 이 일들은 그리스도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복음 이야기에 정기적으로 잠길 때에 나오는 결과다. 달리 말하면 탈출 (아담과 죄 그리고 죽음의 통치로부터)과 정착 (그리스도 안으로)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좋은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는 세계 (그리고 교회)에 좋은 소식은 우리의 삶보다 우리가 전파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도 안다. 왜 그리스도가 필요한지도 정확하게 안다.

 

이머전트 교회 운동에서 대형 교회 모델을 결정적으로 비판할 때, 그 강조점은 사람들을 지금까지 나온 가장 위대한 이야기에 젖어들게 하는 일이 아니라 아직도 우리의 열정과 활동의 수준을 측정하는 데 맞춰져 있다.

 

기본 메시지는 복음 (이런 일이 행해졌다) 없는 율법 (이 일을 행하라)의 형식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은혜에 들어왔는데, 이제는 다양한 규칙, 지시사항, 그리고 실천목록을 지켜야 (아니면 최소한 일등, 잘 나가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순복한 기독교인이 되어야만) 그 안에 머물 수 있다. 짧고 찬란한 은혜의 순간이 있었지만, 이제 기독교인의 나머지 삶은 우리의 경험, 감정, 헌신 그리고 복종에 대한 것이다.

 

뻔한 죄들에 빠져들어 가는 것만큼이나 우리는 자기신뢰를 향해서 너무나 쉽게 이탈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실하지 못한 기독교인들도 구원하기에 충분한 복음이다. 우리는 복음을 결단코 당연시할 수 없다. 복음은 언제나 선한 일에 열심인 생활을 위해 믿음의 순풍을 불어주는 놀라운 선언이다.

 

복음은 도덕적 방탕이 아니라 경건한 삶으로의 초대다.

 

하나님은 상대평가를 하지 않을뿐더러, 내게 더 노력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한 의도가 아니라 완벽한 의를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벌거벗은 내 모습을 가리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나는 하나님을 더 미워하고 하나님의 두려운 임재에서 자기기만으로 더 도망치게 된다.

 

좋은 소식은 그리스도의 의가 내 죄보다 크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전적으로 명령법이다. 반면 기독교는 승리의 분위기가 나는 서술법으로 시작한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의지에 호소하고, 기독교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을 선언한다... 자유주의는 그리스도를 모범과 길잡이로 간주하나 기독교는 구세주로 받는다... 자유주의는 종교적인 경험을 토대로 움직이지만, 기독교는 우리 밖에서 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한다.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것이다. 율법을 부드럽게 할 때, 우리의 걸레와 같은 “의”를 하나님 앞에 내놓으려는 시도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복음을 요구사항으로 만들어 버릴 때,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하시는 구속의 말씀이 더 이상 아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복을 받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타락 이후 하나님의 영원한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용서를 통해서만 안전하게 받을 수 있다. 구세주를 주시겠다는 이 약속은 타락 이후 아담과 하와,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다윗에게 하신 일방적인 맹세였다.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이 안고 있던 문제는, 지상의 땅을 조건 아래 상속하는 일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죄인들을 조건 없이 선택하고 구속하는 일을 혼동했다는 것이다.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것은 타락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기독교라고 전혀 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는 어떤 형태의 자력 구원을 가정한다. 구원이 인간의 결단 혹은 노력이 아니라 자비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로마서 9장 16절)는 말을 들으면, 우리 인간은 화들짝 놀라고 본능적으로 거리끼면서 심지어는 화가 난다. 우리는 사람들이 바르게 행동하길 원하면, 해야 할 일을 말해 주고 충분한 열정과 효과적인 방법으로 그 일을 하라고 권면해 줘야 한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율법은 우리의 가식을 벗긴다. 명백한 죄는 고사하고 우리의 최선의 노력과 의도에 붙어 있는 자긍심에 하나님의 심판이 마땅함을 보여 준다. 율법은 명령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조건을 충족시킬 능력은 주지 않는다. 더 많은 조언 (법칙, 명령, 권고)은 속성상 우리를 자기 의 아니면 절망, 둘 중 하나로 이끌 뿐이다.

 

더 이상 지옥에도 떨지 않고 하늘나라에도 위안을 받지 않는 새로운 율법주의는 무대 뒷면에서 경쾌하게 재잘거리는 콧노래다.

 

강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가? 충분히 기도하고, 충분히 말씀을 보고, 충분히 전도하는가? 교회에 충분히 충성하고 다른 사람들을 충분히 사랑하는가? 이러한 명령법은 구식 율법주의만큼이나 인간 보위의 짐이 되고 만다. 그것은 도수를 조금 줄인 가벼운 율법주의에 불과하다. 한 프로그램에 시들해지면, 언제나 또 다른 베스트셀러, 운동 혹은 계획이 코앞에 기다리고 있다.

 

율법은 복음이 아니다. 이 차이를 자각하고 나면, 복음은 복음, 율법은 율법으로 대접할 수 있을 것이다. 율법은 율법, 복음은 복음이 되게 하자.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바른 반응이다. 우리에게 복음을 살아내라고 하신 적이 없고,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비의 관점에서 율법을 따르라고 하셨다.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말한다.

 

한 일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 거룩과 구속”이 되어 주셨다는 것이 복음이다. 율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을 말하지만, 복음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한다.

 

더러운 우리의 얼굴을 보여 주면서도 깨끗하게 해 주지 못하는 거울처럼, 율법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의지를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성취할 힘을 주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 자신을 구해 내는 일, 혹은 하나님과 협력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출 작전이다. 심지어 우리의 성화도 우리를 의롭다 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에 성령으로 우리를 묶으시는 하나님의 행동에 기초를 둔다.

 

따라서 세상에는 단 두 가지 종교가 있을 뿐이다. 경건한 일, 감정, 태도 그리고 경험을 통해 신에게로 올라가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인간 종교와,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로 내려오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좋은 소식이다.

 

율법은 선하지만 나는 선하지 않다. 율법은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과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를 완벽하게 드러낸 불변의 기준이다. 무엇보다도 율법은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온다. 개선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담 안에 있는 우리의 생명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우리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온다.

 

율법은 먼저 나를 죽이는 기능을 한다. 나 스스로를 선전하는 문안을 만들고 내 성격을 고쳐 보겠다는 모든 시도인 나의 자기확대를 종식시키려고 한다.

 

율법은 의롭다고 할 수도 없지만 거룩하게도 할 수 없다.

 

율법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만을 말할 뿐이다.

 

양심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하기 위해서라면, 율법에서는 도움을 얻을 수 없다. 아니, 내 양심을 더욱 죄악 된 상태로 몰고 가는 것이 바로 율법이다.

 

따라서 율법이 생래적이고 직관적인 반면, 복음은 외부에서 오는 선언임을 유념하는 것이 너무도 중요하다.

 

인간들이 죄를 짓고 심판 외에는 어떤 것도 바랄 것이 없게 된 이후에 인간을 구하시려고 결정하신 하나님에 대한 좋은 소식이기에, 복음은 우리의 양심 밖에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에 맞지 않는다.

 

평생 기독교인이라도 다른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이룩해 준 구원을 받기보다는 스스로를 구해 줄 무엇인가를 하는 데 발 빠르다.

 

우리에게 설정되어 있는 기본값은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다. 서술법 (믿어야 할 것들)이 아니라 명령법 (해야 할 혹은 느껴야 할 것들)이다.

 

율법은 안내한다. 그러나 수여하지는 못한다.

 

율법의 적절한 선포로 인해 우리는 자신에 대해 절망하지만, 그래야 우리 밖을 드디어 내다보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된다.

 

하나님의 율법은 장난질을 할 수 없는, 이웃집 아저씨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우리를 재고 비교하는 정확한 저울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저울에 올라가 보는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벌거벗고, 맨발로 올라갔다가, 침묵하고 내려오는가?

 

칼빈은 많은 로마 가톨릭 교인들 역시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면서 자신들이 어린 시절에 받은 규칙과 규례에 반감을 표시하는 모습을 보았다. 칼빈은 이렇게 외쳤다. “그것이 더 쉬운 줄 아는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줬는가? 이것이 예수께서 율법을 정의하신 방법이고, 사람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이 모든 것들을 지켜오지 않았음을 깨닫게 하려고 애쓰시는 점이다. (마태복음 19장 20절)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교인의 생애는 신실함과 신실하지 못함의 롤러코스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언제나 자기확신의 승리주의 (베드로가 부인하기 직전에 “나는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하고 호언장담 했음을 기억하라)를 향해 표류해 가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 우리 의에 내리는 하나님의 판결과, 복음 안에서의 확실한 사면을 들어야 한다. 예수께서 보이신 모범은 좋은 소식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것을 따를 수 없는 나의 무능에서 나를 건져 주는 분이 아니시라면, 무시무시한 짐인 것이다.

 

“단지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슬프게도 이것은 바로 우리가 지키지 못한 율법의 거룩한 요구다.

 

하나님의 율법은 제안서가 아니다.

 

율법의 일차적인 존재 이유는 우리의 행복이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품의 표현이다.

 

율법과 복음 사이에는 균형 같은 것은 없다. 율법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을 말한다. 이 둘은 아주 다른 말이다. 이 말을 들을 때는 전면적인 심판과 전면적인 사면이라는 각각 다른 말로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사랑에 밀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공의는 상호적으로 충족된다. 사실 우리는 완전한 사랑과 순종에 의한 행위로 인해 구원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지닌 확신의 기초로 작용하는 것은 우리의 행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동이다.

 

상대평가는 없다. 좋은 행동 혹은 좋은 의도를 기다려 주는 유예 시간도 없다. 율법은 우리가 무릎을 꺾고 전적인 무능함을 고백하게 하든지, 아니면 우리의 자기 의를 북돋든지 한다. 후자라면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끌어내서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율법의 고상의 역할은 기대할 수 없다.

 

물론 그리스도는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지만, 세상을 구하라고 보내지는 않으신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주로 증거하고 우리의 세속 직업 가운데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하신다. 악은 우리 밖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 밖에서 온다.

 

교회는 죄인들을 위해 살고, 죽고 또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이미 충분한, 단번의 영원하고도 완벽한 일을 연장하거나, 완벽하게 하거나 혹은 완성할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영감을 불어넣으신 구속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구해 내신 죄인들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증언의 내용이다. 이것은 왜 우리가 좋은 조언의 유포자가 아니라 좋은 소식의 전령인지 말해 준다.

 

그리스도를 배제하면 성경은 닫힌 책이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읽으면,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 중 가장 위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성경은 처세술로 축소될 때 하찮아진다.

 

구약 성경의 성도들은 믿음과 순종의 영웅들이 아니라, 그들의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에 붙어 있도록 믿음을 부여받은 죄인들일 뿐이다.

 

구약 성경 자체가 오직 믿음을 통하여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값없는 칭의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리스도를 부인해도 그렇지만 초점을 흐려도 그리스도를 쉽게 놓칠 수 있다. 우리는 자유주의자들이 실책을 저지르길 계속 기대하지만, 보수적인 교회들은 이번 주에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누군가 혹은 어떤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듯 보이는 경우가 잦다.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 주 혹은 구세주라는 말이 없는 종교 혹은 영성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 이름들과 칭호가 채택되는 방식이, 인간의 반역과 하나님의 구출이라는 플롯의 역사적인 전개 그리고 세례와 성만찬과 같은 실천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할 그 위치에서 옮겨졌다는 뜻이다. 인생 코치, 심리치료사, 친한 친구, 중요한 누군가, 서양 문명의 창시자, 정치적인 메시아, 파격적인 삶의 모범 그리고 다른 숱한 이미지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는 거침돌과 미련함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한다.

 

‘기독교와 다른 무엇’이라는 말은 이미 기독교 자체에는 별 흥미가 없음을 전제하는 구도이다. 그러나 다른 것들을 수식하는 형용사로 쓰일 때 (기독교인의 에어로빅, 기독교인의 가치관, 기독교인 뮤직 등) 이것은 그저 재산 가치가 나가는 상표일 뿐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사로잡힘으로써 권태에서 유발된 중독과 죄악 된 생활유형들을 끊어 버린 젊은이들을 수도 없이 만나 보았다. 마약이 나쁘다고 새삼 말해 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율법 선포로 죄악 된 상태, 즉 죄의 결과가 아니라 그 뿌리를 진단한다면, 복음은 근원적인 해결책이다.

 

오늘날 먹힌다는 설교들은 현대적인 적용에 도달하기 위해서 본문을 해석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듯한 모습이 많이 눈에 띈다. 현대적인 적용이라는 것도 설교자 자신의 취미생활과 최근에 읽은 책 혹은 본 영화에서 나오기가 일쑤다. 일반적으로 적용은 율법, 즉 해야 할 일들의 목록과 일치한다.

 

교회의 기본 메시지가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그리고 우리를 위해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무엇을 하셨는지, 나아가 우리는 누구이며 그리스도의 생명 (아울러 우리의 생명)을 문화에 적합하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미치지 못할 때는, 그 “적합”하게 만들어진 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주 부르지만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 것인가?”로 변질된 종교는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목회자들이 경제, 통상, 법률 그리고 정치학의 전문가가 되도록 훈련받을 필요는 없다. 사람들은 굳이 목사가 아니더라도 현명한 친척 친지 혹은 비신자인 이웃들로부터 건강한 재정, 결혼 그리고 자녀 양육에 대한 충고를 많이 얻을 수 있다. 사실 목회자는 성경에 지혜롭도록 훈련을 받아야 한다. 성경은 구속 드라마에 중심을 두고 있다. 목회자는 스스로 정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와 죽음이 넘실거리는 세상으로 보내신 대사요 사자들이다. 가장 중요하고 시대에 적합한 선언, 다른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선언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성경은 처세서가 아니다. 물론 성경은 우리의 생활에 하나님의 도덕적인 의지를 드러내 말하기는 하지만, 그 중심을 놓고 볼 때는 구속 이야기다.

 

성경은 도덕적인 원리로 끝나는 짧은 이야기들의 모음인 이솝우화와 다르다.

 

다윗은 치세 기간의 폭력 때문에 성전을 짓도록 허락받지 못했고, 그의 가문에서는 끔찍한 왕들이 이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유다의 왕좌에 다윗과 같은 한 왕을 앉히시겠다는 약속을 일방적으로 지키셨다.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웅이셨다. 내가 다윗을 닮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적법한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요점이다.

 

“영웅들의 전당”이라 불리는 히브리서 11장도 잘못 명명되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이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극복했노라고 초지일관 말한다.

 

도덕적인 설교는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신학과는 무관하게 (보수주의든 자유주의의 독이든 똑같이) 우리가 구출 받아야 할 무기력한 죄인들은 아니고 좋은 모범, 권유 그리고 지침이 필요한 번듯한 사람들이라고 전제한다.

 

“우리가 변화된 삶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변화된 삶은 구원받은 결과이지 구원의 기초가 아니다. 구원의 기초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바친 삶과 죽음의 완전성이다” - 그래엄 골즈워디

 

성경을 우리의 내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쓰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자신의 말씀을 통해 발언하시느냐, 우리 밖에서 우리를 불러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구속자를 향하게 하시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 있음을 본다.

 

복음은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우리와 우리가 한 일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공 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복음은 삶을 변화시킨다. 복음은 우리의 변화된 삶이 아니다.

 

바른 교리와 바른 실천은 떼려야 뗄 수 없고 메시지를 이루는 상호 의존적인 요소다. 따라서 신조 없는 행위는 복음 없는 율법을 의미한다.

 

율법의 실행자가 되기에 앞서 복음의 청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의 감정과 열정이 사그라질 때, 하나님의 은혜의 동산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사방에서 가시덤불에 둘러싸이고 말 것이다.

 

5장 영지주의 영성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유럽의 허무주의가 신을 부정했다면, 미국의 허무주의는 약간 다르다. 우리의 허무주의는 모든 것 그리고 어떤 것도 한꺼번에 믿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다. 모든 것이 다 선하다” - 커티스 와이트

 

“우리의 종교적인 콘텐츠는 경제적인 콘텐츠, 오락 콘텐츠 그리고 스포츠 콘텐츠와 떼려야 뗄 수 없게 된다. 짧게 말해서 믿음이 문화 상품이 되는 것이다. 경쟁하는 여러 종류의 믿음 중에서 쇼핑을 한다” - 커티스 와이트

 

신성함에 대한 탐구는 정녕 미국의 정통주의처럼 보이는 이단의 또 다른 모습이다. 무에서 무로 떠나는 고독한 영혼의 비행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관성의 포로다. 우리 자신의 제한된 경험, 기대 그리고 절박한 필요라는 독방에 갇혀 산다.

 

미국인들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책 혹은 어떤 다른 외부의 권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 안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건의 초점은 개인주의적이고, 내향적이며 친근한 예수와의 개인적인 관계에 놓인다. 나는 홀로 와서 “다른 사람은 알 길이 없는” 기쁨을 맛본다. 내가 예수와 맺은 개인적인 관계는 나의 것이다. 교회와도 관계없다. 신조, 고백, 목회자 그리고 교사, 그리고 아마도 성경도 나 홀로 예수와 하는 유일무이한 경험의 확신을 흔들 수 없다.

 

도덕주의가 펠라기우스 이단 (최소한 반 펠라기우스주의)으로 표류해간다면, 열광주의는 영지주의로 알려진 이단이 지닌 한 얼굴이다. 고대교회를 심각하게 위협한 2세기 운동인 영지주의는 그리스 철학을 기독교에 섞으려는 시도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역사와 교리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신비주의의 계단을 오르려는 의욕만으로 가득했다.

 

어떤 변형판에서든지 사람이 구원받을 필요는 없다. 도움을 얻고, 길을 안내받고, 계몽을 받을지언정, 구원받을 필요는 없다. 최소한 피가 뚝뚝 흐르는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을 필요는 없다.

 

영광이야기의 두 변형판은 모두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로 더 깊이 몰아간다. 우리를 우리 밖으로 불러내기보다는 하나님을 우리의 내면적 자아와 동일시한다.

 

예일대학의 리처드 니부어는 개신교 자유주의의 설교를 비난하는 글을 남겼다. “진노하지 않는 하나님이 죄 없는 사람을,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심판 없는 세상으로 데리고 갔다” 십자가 이야기와 영광 이야기는 강조점이 다를 뿐 아니라 완전히 다른 종교이다.

 

종교는 우리의 타고난 하나님 인식을, 천국을 강탈하고 그것을 우리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기도로 변질시키는 또 하나의 길일뿐이다. 펠라기우스주의는 실천의 행동으로, 영지주의는 신비한 영성의 사다리를 오름으로써 그렇게 한다. 우리를 다스리는,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주권자 하나님은 오간 데 없고, 영지주의의 하나님은 언제나 친근하고 친숙하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내면적인 자아 자체가 신이기 때문이다.

 

펠라기우스주의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로 귀착된다. 구세주가 아니라 좋은 모범이 필요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에 이르는 영지주의의 길은 선한 창조주, 죄를 부른 타락,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처참한 죽음 그리고 육체의 부활 이야기를 한 악신, 물질을 악하게 한 타락, 내면적인 계몽으로 인한 구속이라는 신화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을 위해서 우리 밖을 보도록 하는 반면, 펠라기우스주의와 영지주의는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 안을 들여다보도록 한다. 이 둘이 결합해 미국제 종교라는 완벽한 기습 작전을 성공시켰다.

 

영광의 신학에 대해 논하면서 루터는 하나님에게 올라가기 위해 헛되이 내딛고 있는 또 다른 사다리를 언급했다. 그것은 이성적인 추론, 신비주의적인 경험, 그리고 도덕적인 투쟁이다.

 

우리 시대에 영지주의는 눈에 띄게 번창하고 있다. 상아탑과 대중문화, 하버드 신학대학원에서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까지가 그렇다.

 

영지주의가 죄와 악에 대한 책임 소재를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에게로 비껴가게 한다는 것이다. 영지주의는 우리에게 진리를 왜곡하고, 우리 자신의 상상력으로 우상을 창조하여 우리가 조작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우리 안을 보게 한다.

 

매튜 폭스는 영지주의적 심리학자인 칼 융의 경고를 되풀이하면서, 이 정서를 아주 잘 표현했다. “영혼을 망치는 한 가지 방법은 당신 밖에 있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고대 영지주의에서도 그랬지만 미국의 종교에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무관심,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위엄, 주권, 자존 그리고 거룩함이라는 감각이 거의 없다. 하나님은 내 친구, 내 최고의 경험, 혹은 지금 최상의 삶을 살게 하는 힘의 근원이다. 하나님은 낯설지 (즉 거룩하지) 않다. 하나님이 심판자일 리가 없다. 하나님은 두려움, 경외감 혹은 질리게 하고 방향 수정을 요하는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게다가 피흘리는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는 속죄로 쏠려 있는 모든 초점은 영지주의자들에게는 잔인하고 영적이지 않게 보인다.

 

영지주의는 낯설고 피곤하게 만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결코 심판하지 않고 따라서 결코 용서하지 않는 우상과 바꿨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믿음과 실천을 스스로의 경험 위에 놓고 정당화하고 있다. 교회에서 무엇을 가르치건 상관없다. 심하게는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지도 상관없다. 미국 종교에서 감히 공격할 수 없는 한 권위는 자아의 내면적인 경험이다.

 

신조가 아니라 행위 지향의 미국 부흥주의는 신앙보다 행위 (펠라기우스주의)를 선호할 뿐 아니라, 공적이고 교리적이며 개인의 영혼에 대해 외부적인 모든 것에 반하여 은밀하고, 신비주의적이고, 게다가 내향적인 예수와의 개인 관계를 선호하는 영지주의에 의해 추진력을 얻는다.

 

영지주의자들은 죄와 죽음의 현실에 대한 말만 꺼내도 두드러기 반응을 보인다. 죽음 대신 “지나감 (passing away)”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영지주의의 주요 특성들로는, “교리보다 경험을 우위에 둔다. 공적 제도가 아니라 사적이다. 인식의 문제를 피하고 신화적이고 몽환적이다. 부드럽고 마음 써주는 신관을 가지고 있다” 등이다. 창조자, 구속자, 주 그리고 심판자로서 하나님의 이미지보다는 심지어 “여성적이고 양성적인” 이미지조차 띠고 있다.

 

신학적 교리인 구원이... 단순한 단계, 쉬운 절차 그리고 심리학적인 보상을 가져다주는 공식으로 축소돼 버렸다.

 

이제는 신자에게 무엇이 도움이 되는지, 그리고 도움이 되는 그것을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지 더 주관적이고 더 도구적으로 이해하는 일만 남았다.

 

고대 영지주의처럼 우리 시대 미국인들이 영성에 접근하는 방법은 전형적으로 개인적인 관계의 축으로서 내면의 영을 강조한다.

 

필립 리의 영지주의와 칼빈주의 대조는 오랜 세월 다양하고 넓은 범위에서 기독교인들이 정확하게 짚어 낸 것이었다. 고전적인 칼빈주의가 기독교인의 구원확증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수단을 가지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서만 보증된다고 주장해 온 반면, 이제 확증은 거듭났다는 개인적인 경험 안에서만 발견된다. 이것은 근본적인 변화다. 왜냐하면 칼빈은 ‘회심을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 귀속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경멸받아야 할 로마 가톨릭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리는, 사실 개혁자들에게 신생은 “새롭고 더 사랑스러운 자아”와는 반대가 되는 것이었다고 덧붙여 말한다. 신생은 옛 자아의 죽음과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의 새로 태어남이다.

 

고대 영지주의처럼 미국적인 영성은 하나님 혹은 신적인 존재를 일종의 에너지원에 가까운 무엇으로 사용한다.

 

19세기 복음주의적인 경건을 근본적으로 형성한, 영국과 미국의 복음주의 권에서 주목받는 케직 (Keswick)의 “고결한 삶” 운동조차도 더 이른 시기에는 워필드에게 그리고 좀 더 최근에는 제임스 패커에서 비판을 당했다. 이 운동이 믿음을 거의 마술적인 시각으로 보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마치 사람의 목적과 의지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전기마냥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외면적인 규범에 앞서 내면적인 경험, 성도의 교제보다는 개인, 물질세계보다는 비물질,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 모두의 성숙을 위해서 제공하신 은혜의 일반적인 수단보다는 즉각적인, 자발적인, 언제나 새로운 그리고 언제나 독특하고 개인적인 경험으로 향하는 길을 내 줄 뿐이다. 우리가 피조물이며 또한 죄인으로서 하나님과는 다르다는 깊이 있는 자각, 그리고 성경적인 믿음은 중재의 필요를 강조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세계를 자신의 가면으로 사용함으로써 우리를 만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 그 가면 뒤에 숨으신다. 이와 반대로 영지주의자들은 중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아의 외부에 계시지 않는다. 인간 영혼과 하나님의 영은 이미 통일을 이루고 있다.

 

대중적 경건이라는 면에서는, 복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그들이 경건주의의 공통적인 유산을 공동 상속하고 있다고 보일 만큼)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보다는 우리가 예수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차원을 자주 강조한다. 이렇게 되면 이런 교의들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방어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하기는 해도, 그리스도의 인성은 부수적인 역할밖에는 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속에 이미 계시다면 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나타나실 것을 고대해야 하는가?

 

그리스도가 오늘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어떻게든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예수가 2천 년 전 육체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는지 아닌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도들에게는 간증이란 역사 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인격과 사역을 증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간증은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과 도덕적인 개선을 늘어놓는 것이다.

 

고대 교회에서 영지주의의 창궐은 크게는 그리스 지혜를 모호한 기독교의 개념들과 뒤섞으려는 시도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 기독교와 정반대가 되는 사상이 출현했다.

 

영지주의는 하나님을 내면적 자아와 동일시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모든 것을 우리 밖에 계시며 우리를 완전한 개인과 집단적인 존재로 창조하시고, 다스리며, 심판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다. 영지주의적인 관념에서 내적 자아는 외형적인 교회뿐 아니라 설교와 성례, 권징과 정치, 교리와 성찬이라는 외적인 사역의 위에 설 수 있다. (아니, 이것들을 반대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영지주의자들의 관심은 공적인, 역사적인, 가시적인 그리고 뒤죽박죽인 세상이 아니라, 은밀하고 영적이며 보이지 않는 그리고 내적 영혼이라는 통제 가능한 세상이다.

 

6장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바르게 전하는 방법

 

강조점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행동에 있다. 즉 아버지의 은혜로운 계획, 아들의 구원하는 삶, 죽음 그리고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마른 뼈들의 골짜기에 생명을 가져오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그것이다. 전파의 초점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구속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에 놓인다. 그리고 죄인들은 이 대하드라마에 휩쓸려 들어간다. 하나님 백성의 유익을 위해서 성경의 부요함을 캐내는 일에 훈련되고 안수 받은 목회자들은 자신의 현안, 의견 그리고 인품을 뒤로 밀쳐 내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명하게 선포되도록 한다. 이런 설교를 들을 때 백성은 다시 한 번 진짜 청취자, 즉 은혜의 수혜자가 된다.

 

구속 역사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한 광대한 이야기를 잘 듣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을 늘어놓거나 혹은 일정한 표어 혹은 설명이 안 되는 공식을 되풀이하는 것 외에는 비신자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지 잘 모른다.

 

친구를 교회에 데려온다고 해도, 과연 그 친구가 복음을 들을지 확신할 수 없다.

 

로마 가톨릭은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미사를 “사람들의 일”이라고 규정했는데, 이 가정이 현대 교회의 전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설교는 주로 더 하라는 권면이었고, 세례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헌신을 표시하는 행동이었고, 성찬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을 되살리는 수단에 불과했다. 이뿐인가, 많은 찬송가들은 구속 역사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자비를 되새기는 것보다는 우리의 경건의 표현이었다.

 

유명한 대형 교회 목사인 릭 워렌은 지난 수년 간 제2의 종교개혁을 누차 호소했다. 이번에는 “신조가 아니라 행위”, 제1의 종교개혁이라고 했다. 우리 대부분은 “신조가 아니라 행위”, “교리가 아니라 생활”, 그리고 좀 더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역보다는 좀 더 많은 헌신이 강조되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모든 강조는 자기 백성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활동이 아니라 자신의 실천과 섬김에 놓인다.

 

맥클라렌이나 다른 이머전트 운동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더그 패깃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아가는 삶 자체를 복음이라 생각하도록 부추긴다. 맥클라렌은 성경은 “내가 진리를 뽑아내는 수동적인 책이 아니라 대화”라고 말한다. 패깃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밖에서 오지 않는다. 신자들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사실 “모든 사람은 경험, 이해 그리고 관점을 가지고 있다. 진리를 결여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러한 솔라 스크립투라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의 상실이 위험한 것은 결과적으로 솔로 크리스토 (solo Christo, 오직 그리스도), 솔라 그라티아 (sola gratia, 오직 은혜), 솔라 피데 (sola fide, 오직 믿음), 솔리 데오 글로리아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의 영광)도 상실 되기 때문이다.

 

전달 방법은 내용에 맞춰진다.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가 어떻게 지금 여기에서 최선의 삶을 살 것인가 또는 더 개선된 내가 될 것인가를 다룬다면, 사자보다는 인생의 코치, 영적인 방향 설정자 그리고 동기부여 강사가 우리에게 필요할 것이다. 좋은 조언은 사람의 계획을 요구한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메시지를 지닌 사람을 찾는다. 우리에게 좋은 조언 혹은 계획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의 존재와 사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둔 하나님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라는 말일 뿐이다.

 

코치는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지만, 대사는 공증된 선언문을 가지고 있다.

 

복음이 복음 전도를 규정한다. 내용이 전달 방법을 규정한다. 교회의 표지 (설교와 성례)가 사명 (복음 전하는 것, 세례 주는 것, 가르치는 것 그리고 성찬하는 것)을 규정한다.

 

이머전트 교회 운동은 교회를 세상을 변혁시키는 제자들의 공동체로 생각한다. 이들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델 하나하나는 하나님의 사명이 말씀 선포와 성례전이라는 표지를 통해 우리를 섬기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세워질 것이며, 교회는 자신의 증거와 선행을 이 세상의 이웃들에게 전할 것이라는 핵심을 무시한다.

 

물론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섬김으로 우리는 찬송이 우러나오고, 선행의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나 은혜의 수단이 봉사의 수단 앞에 온다.

 

사람을 섬기는 일차 무대는 교회 안에서의 봉사가 아니라 세상이다.

 

루터는 “당신의 선행은 하나님이 아니라 당신의 이웃에게나 필요한 것이다”는 말로 내가 말하고 있는 요점을 멋지게 잡아냈다.

 

반면 “행위로 말미암은 의”는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려고 한다. 우리의 봉사를 하나님께 드려 우리가 복을 받으려고 한다. 개혁자들이 지적했듯이, 하나님은 감동받지 않으시고, 우리는 구원받지 못하며, 우리의 이웃은 섬김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이런 것은 누구에게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

 

선물로는 하나님께로 올라갈 수 없다. 선물은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고 받고 되돌려야 할 어떤 의무도 지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피니가 말하는 “새로운 방안”은 은혜의 수단을 대체한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수시로 회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사람들이 더 높은 단계의 헌신과 활동으로 움직이도록 “새로운 자극”이 언제나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제 교회의 과업은 세상은 변혁시키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죄를 버리게 하는 것이다” 피니는 이렇게 주장했다.

 

구원이 만약 우리 손에 달려 있다면, 수단 또한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피니는 교회를 “도덕적 변혁자의 사회”로 규정한다.

 

종교개혁의 기독교가 참된 교회를 은혜의 수단들을 통한 하나님의 행동으로 알아보는 데 반해, 피니는 참된 교회를 그 방법이 우리가 생각할 때 가장 효과적인 것에 의해 결정되는 우리의 대행 기관으로 본다.

 

우리 시대에 장로교인들은 이론상으로는 칼빈주의자이지만 실천면에서는 반 펠라기우스주의자인가 아닌가를 놓고 양분된 상태이다.

 

개인주의와 도덕주의의 논리는 마침내 “자급자족자들”과 “변혁자들”이 교회와 은혜의 수단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이론으로 귀결되기에 이르렀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은혜 가운데 아래로 내려오심은 실용주의적인 열정으로 위를 향해 올라가는 우리의 노력으로 역전되었다. 우리는 점점 목자 없는 양 떼가 되어 가고 있다.

 

그리스도가 왕이 아니신 곳에서는, 선지자 또는 제사장도 아니시다.

 

말씀, 성례 그리고 치리를 신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사명이다. 밖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 끝까지 이 좋은 소식을 실어 나르려 하지 않는 교회는 이미 모여 있는 그리스도의 양 떼에게 이 소식을 진정으로 퍼 나르지 않는다. 참된 복음주의적인 교회는 복음 전도적인 교회일 것이다. 즉 복음이 말씀과 성례를 통해 전달되는 장소이며, 복음을 세상에 증거하는 사람들이다. 신자와 비신자들 모두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듣는 곳이 될 것이다. 우리는 율법과 복음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지내고 부활하기 위해 교회에 온다.

 

더 많이 용서받은 자들이 더 많이 사랑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온갖 선물들의 수혜자일 때만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일부가 된다. 그리스도의 증인이요 이웃의 종이 되는 것이다. 표지 없는 사명은 눈이 멀었으며, 사명 없는 표지는 죽은 것이다.

 

교회는 사명에 뛰어들지 않는다. 교회가 사명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이다.

 

복음은 우리가 실어 날라야 할 선언이지 동료 시민들과 협상해야 할 의제가 아니다.

 

제발이지 “복음”과 “복음주의적”이라는 말을 공공선을 달성하는 데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 그리고 모든 것에다 찍어 붙이지 마라!

 

우리에게는 좋은 교회들과 건전한 정부가 필요하지만, 이 둘은 다르게 움직인다.

 

사회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필요로 하든, 교회는 문화적인 변환이 아니라 우리의 안건에서 하나님의 안건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기독교 봉사 단체가 아니라 양들을 돌보되 종업원, 고용주, 자원봉사자, 친구 그리고 가족의 일원으로서 비신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파송할 더 많은 교회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기독교 예술, 철학, 정책 그리고 비즈니스가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기독교 선포, 그리고 진정으로 변화된 사고와 그로부터 나오는 삶이 필요하다.

 

사람으로서의 교회 - 주중에 소금과 빛으로서 흩어져 있는 -에는 여러 소명이 있다. 그러나 장소로써의 교회(매주일 하나님의 소환을 받아 공적으로 모이는)는 단 하나의 소명을 가지고 있다. 설교와 성례전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전달 (그리고 받음)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들릴 수 없는 왕국을 선사받아 감사하는” 사람들로서 모이고, 그래서 “경외와 두려움으로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 드린다.

 

교리 (하나님의 행위들)에서 찬양 (우리의 감사 예배)을 거쳐 의무 (우리의 합당한 봉사)로의 이행은 하나님의 말씀이 밟아가는 전형적인 순서다.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성취하라는 부름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끊임없이 지치게 만드는 허위과장 광고 가운데 하나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위대한 일들에 대해 말하는 것,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업적을 죄인들에게 날라다 주는 것이 교회의 진정한 사명이다.

 

우리가 교회의 주요 사명이 아담 안에 있는 인생을 개선하라는 것이고 이 사위어가는 악한 세대에 도덕적인 힘을 조금 더 보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파격적인 해결책이 되시는 파탄 난 상황을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구원의 유일한 작용자라면, 교회는 무엇보다 먼저 수혜자, 그 구원을 받아들이는 자들의 집단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구원이 우리 손에 달려 있다면, 구원을 획득하기 위한 최상의 운반 수단을 찾아야 한다.

 

바로 똑같은 정책을 로비하기 위해서 현존하는 세속 비정부기구들이 숱하게 많은데, 왜 교회가 이 영역이 자신의 전문 분야라고 믿는지, 왜 자신의 공식적인 위임에는 등한히 하는지, 왜 이런 현안들에 대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언하는 일에 게으른 것인가? 왜 교인들이 이러한 일반 은총적인 제도들을 통하여 비신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공공의 정의에 대한 인간적인 부름을 추구하도록 등 떠밀어 주지 않는가? 왜 교리와 예배라는 화급한 주제에 대해서는 모호하고 유야무야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지나치게 구체적인 정책에 대해서는 교단들이 발을 벗고 나서려고 하는 것인가?

 

노예무역의 폐지는 정녕 고상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영국에서 제도적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사역으로 세계관을 형성하고 정부에서 공직을 맡은 기독교인들이 이 제도를 폐지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윌리엄 윌버포스가 존 뉴턴을 찾아가서 목사를 해야 할지를 물었을 때, 뉴턴은 목사 대신 정치인이 되라고 권유했다. 윌버포스가 사랑하고 이웃으로 섬긴 자들은 의원들이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율법과 복음을 선포했고, 교회의 자녀들은 세속적인 직업 안에서 그들에게 맡겨진 문화적인 위임을 추구했다. 뉴턴이 목사였고 윌버포스가 아니었던 것이 어찌나 감사한지!

 

나는 종종 남부의 교회들이 노예들을 잡고 있던 교인들을 권징했더라면 미국의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스스로에게 묻는다. 달리 말해서 남부의 교회들이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전을 시행하며, 권징을 베풀고 양 떼의 안녕을 위해 돌봄의 일을 했더라면 하고 묻는 것이다. 그래도 교회가 교회 외부인들에게조차 도덕적인 신뢰를 잃었을까?

 

미국은 기독교 국가였던 적이 한 번도 없다.

 

변질된 설교자들이 많다. 교회의 일꾼들 중 신자가 아닌 사람들 또한 너무 많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으로 나가서 ‘이것이 옳은 것이오’ 하고 말하라” 하지 않으셨다. 복음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아니, 복음은 세상과는 정반대다“ - C. S. 루이스

 

아타나시우스가 깨달은 것처럼, 교회는 반드시 세상을 위하여 세상에 맞서야 한다. 기독교 국가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다.

 

행위로 얻은 의는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하늘의 사다리를 열심히 기어 올라가는 도덕적인 상승을 요구한다. 그리스도가 아주 멀리 계신 양,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우리에게라도 달린 양, 혹은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진지함으로 불러내 주기를 기다리며 아직도 무덤에 누워 계시는 양한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하나님이 자비 가운데서 우리에게로 내려오셨음을 알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에게로 올라갈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로 내려오셨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전파된 만큼이나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시다.

 

설교가 중심이다. 이는 감정과 의지를 배제하고 지성을 우위에 놓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을 완수하신 하나님은 이제 그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신다. 따라서 설교의 강조는 지성주의로 기울었다는 주장은 한참 빗나간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특정한 인간의 능력 (지성, 의지 혹은 감정)에 우선순위를 두느냐 두지 않느냐가 아니라, 우리를 훌쩍 넘어서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에 우선순위를 두느냐 두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설교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들려오는 말씀을 듣는다. 우리는 책임자의 자리에 있지 않다.

 

우리는 그저 그리스도를 추억하거나 이 식사를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재헌신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빵인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성령께서 설교와 성례전이라는 창조적인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전달하시고, 이로써 승천하신 머리 (그리스도)는 그의 몸을 잃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애써서 이루려는 방법이 아니다. 섬기기 전에 섬김을 받는다. 무엇을 하기에 앞서 우리를 향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가 행해진다.

 

하나님의 이 은혜의 수단이 하나님께로 올라가기 위한 우리의 수단으로 전용되고 나면, 이 잔치의 획득을 위해 이것들 외에도 다른 많은 수단이 있다고 결론짓게 되기가 참 쉬워진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교회와 교회의 공적 사역을 우리가 취하거나 버릴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자연스럽게 간주하게 된다. 인터넷에서, 커피 한 잔 하면서 기독교인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텔레비전에서, 콘퍼런스에서, 기독교 음악을 들음으로써, 아니면 개인적인 독서와 영적 훈련을 통해 좋은 조언을 찾을 수 있다면, 교회가 필요한 사람이 누구일까? 이렇게 되면 교회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 하나님의 아들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경건하지 않는 자들에게 보내 주시는 곳이 아니라, 회심한 행동주의자들의 총합으로만 규정된다.

 

그러면 자력 구원의 신학과 신적인 행동이 아니라 주로 인간의 중심으로서의 교회 사이에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성립된다. 우리는 더 이상 공식적으로 훈련받은 말씀 사역자를 필요로 하지 않고 행동주의적인 운동을 일으켜 줄 카리스마적이고 사업가적인 지도자들을 필요로 하게 된다.

 

종교개혁자들은, 사람이 홀로 구석에 앉아 있을 때는 어떤 영을 받게 될지 말해 줄 수 없지만 하나님은 말씀이 선포되는 곳 어디에나 성령의 임재를 굳게 약속하셨다고 힘주어 말했다. 루터는 “교회는 펜의 집이 아니라 입의 집이다”라고 말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초안자들은 성령께서 “말씀을 읽고 특히 말씀을 선포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신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때의 말씀은 은혜의 수단이다.

 

복음주의적인 경건주의는 종교개혁의 교회들 안에서 갱신 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점점 신앙을 주관적인 내면의 경험으로 축소하는 경향을 띤다. 진정한 행동은 개인의 경건 시간이든지 집회소 혹은 거룩한 모임 (오늘날에 소그룹이라 불리는)에서 일어난다. 미국의 부흥주의는 훨씬 더 과격하다. 기독교를 형성하는 진정한 행동이 교회의 일반적인 사역 밖에서 일어난다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우리 밖 역사 안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어난 일에 믿음의 초점을 맞추면, 나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어떤 밖에 있는 말씀이 아니라 사적인 경험과 도덕적인 개선을 위한 좋은 자료들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게 된다.

 

선포는 개인적인 협박 혹은 유용한 제안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성령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오심에 대한 것이다. 세례는 우리의 결단에 기초를 두고 헌신을 다짐하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에 의하여 우리에게 헌신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하나님의 주장은 우리의 헌신을 전제하기보다는 헌신을 만들어 낸다. 성찬은 우리가 기억하고 재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을 우리의 음식으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초점을 두는 일이다. 우리가 은혜의 언약 안으로 편입되었음을 인증하고 비준하는 일인 것이다.

 

“내 양을 먹이라”(요한복음 21장 7절) 하나님이 자신의 일꾼들에게 주신 임무가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양 떼가 알아서 먹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거룩한 도성에까지 이르는 순례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야 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시는 분이다. 어느 날엔가는 스스로 음식이 되고 하객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영원한 기쁨 가운데 교제를 즐기실 것이다.

 

교회는 전파된 복음과 시행된 성례전을 통해 성령께서 모으신, 그리고 좋은 소식을 들고 잃어버린 자들에게, 사랑으로 이웃들에게 다가서는 죄인들의 언약 공동체다.

 

이 말은 교회가 비슷한 문화적인 취향, 정치적인 견해, 인종적 배경 그리고 도덕적인 기호를 지닌 사람들이 결성한 클럽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들은 영성이라는 취미가 같아서, 혹은 문화 변혁의 비전이 같아서 모이지 않는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정기적으로 재정비되기 위해 모인다. 모여서 그리스도를 그들의 살아 계신 머리로 받는다. 그들 자신이 주도권을 잡고 모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세우신 은혜의 수단을 통해 성령께서 모으신다.

 

스스로를 그리스도 중심이라고 말하는 교회들에서조차 지금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경험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전반적인 강조점이 은혜의 수단이 아니라 봉사의 수단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지쳐 있으면서도 그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겪은 많은 경우들에서, 그 이유는 복음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신자들에게는 끊임없이 요구가 쏟아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인 제사장설과 만인 사역자론 (the ministry-hood of all saints)을 혼동하고 있다.

 

사역을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모든 양 떼가 목자가 되어야 한다. 양 떼에게 자급자족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렇게 빈약한 사고를 한 결과다.

 

교회에 지워진 짐은 그렇게 많지가 않다. 교회에서 대안적인 이웃, 친구들의 모임, 정치적인 행동 위원회, 사교 클럽 혹은 공공 봉사 단체가 되라고 하신 적이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명확하고 온전히 전달하여 신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세속의 임무들을 수행하는 소금과 빛이 되도록 준비시킨다.

 

아주 오래전 옛날 저 아득히 보이는 언덕 위에서 뿐 아니라 매주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섬기러 오신다. 우리도 항변할 수 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들은 우리이지, 하나님이 어찌 우리를 섬기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예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그것은 사실은 모독이요 일종의 교만이라고 하신다. 목욕하고 새 옷을 갈아입고 음식을 취해야 할 사람은 우리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사역자들은 말씀의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전달한다. 잘 준비한 설교뿐 아니라 봉사의 일 전체를 통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사실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내면적인 경험, 경건 그리고 열성을 표출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라는 말씀대로 서로 섬기기 위함이다.

 

우리에게 모았던 초점을 다시 그리스도에게로 옮긴다면 (성경을 적합하게 해석하는 일은 고사하고), 우리에게 너무 많은 신뢰를 거는 일을 반드시 그쳐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구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구속받는다. 성육신 (아들이신 하나님이 육체가 되심)은 우리와 이 세상에서의 성육신적인 삶과 사명에 원형적인 사건이 아니다. 성육신은 한 유일무이한 인격의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한 한 협조자가 아니라 증인이다.

 

교회는 언제나 구원받은 죄인들의 공동체다. 교회는 자신의 거룩성 혹은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로마서 4장 5절) 그리스도에게 이르려는 열정을 자랑하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이 죄인들의 입과 혀를 그분을 위하여 성결하게 하시려고 스스로를 낮추시어 죄인들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도록 하신 단 한 번의 특혜적 사건이다” - 칼빈

 

우리의 믿음은 결코 충분히 강하지 않고, 우리의 소망은 밝아야 할 만큼 밝지 않으며, 우리의 사랑은 알아서 먹는 자가 될 만큼 그렇게 온기 있지는 않다.

 

교회의 사역은 목사, 교사, 장로 그리고 집사를 통하여 우리를 섬기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세우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받는 무엇이다 (히브리서 12장 28절). 교회의 주께서는 “내 교회를 세워라” 하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이라는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아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장 18절)고 말씀하셨다.

 

복음이 우리 뒤에, 우리 앞에,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가는 것이다. 교회는 무엇보다 먼저 복음에 의해 창조되어 의롭다 함으로 받고 새로움을 입은 백성으로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다시 세상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존재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창설한, 그리스도가 세례, 설교 그리고 성찬 안에서 죄인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역사적인 조직이면서 동시에, 믿음을 통해 살아 계신 머리에 연합해 있는 영적인 유기체다. 이 말은, 복음이 다른 모든 인간 활동에 앞서 우위를 갖는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교회도 그리스도가 그분의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셔야만 진정한 교회라는 뜻이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 자신의 유산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유산을 골고루 나눠 주는 것이다.

 

7장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에 저항하라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 치하의 독일로 돌아가 강제 수용소에서 처형되기 직전 미국을 순회 강연하면서, 미국 종교를 “종교개혁 없는 개신교”라고 잘라 말했다.

 

마르틴 루터는 자기 시대에 나타나는 이러한 경향을 관찰하고 “교회의 바벨론 유수 (On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라는 글을 썼다. 이 글에서 루터는 교회가 자기 주님의 손에 의해 선하고 희망적이라고 보고 있는 바로 그것들의 속박에서 하루속히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은 ‘대 형 (Big Brother)’이 지배하는 사회, 즉 전체주의적인 사회를 예견했다. 최소한 미국에서는, 오웰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자축한다면, 전혀 다른 시나리오의 하나인 알더스 헉슬리의 좀 더 오래된 ‘용감한 신세계 (Brave New World)’를 잊고 있는 것이다. 오웰이 외부에서 가해지는 억압을 예견했다면, 헉슬리는 자기 스스로 부과한 포로 상태를 상상했다.

 

“그는 보았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선호하게 될 것이고 생각하는 능력을 무효화하는 기술들을 숭배할 것이다. 오웰이 두려워했던 것은 금서령을 내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헉슬리가 두려웠던 것은 책을 읽으려는 사람이 없기에 금서령을 내릴 이유가 없어지는 사회였다. 오웰은 우리에게서 정보를 차단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너무나 많은 정보를 줘서 우리를 수동적이고 자아중심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자들을 두려워했다. 오웰은 진실이 우리에게서 은폐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진리가 고리타분함의 바다에 익사하는 일을 두려워했다. 오웰은 우리가 문화에 예속될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헉슬리는 우리가 사소함의 문화에 빠지고 감각적인 예술 작품, 흥청망청 거리는 성 그리고 목적 없이 이어지는 카드 게임에 사로잡힐 것을 두려워했다” - 닐 포스트맨, 뉴욕 대학교 커뮤니케이션 학과 교수

 

만약 우리가 노예라면, 우리의 주인은 외부적인 억압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사소한 욕망이다. 우리는 자청한 포로들이다.

 

더 이상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객관적인 죄책이 없다. 사람들은 이 주제를 좀 가볍고 경쾌한 그 무엇으로 바꿈으로써 부인해 버리는 일종의 죄책감 혹은 수치심 등을 느낄 뿐이다. 더 이상 저주 - 깊은 불안을 느끼게 하는 원천 -로부터의 구원은 없다. 사람들은 지금 불쾌한 느낌으로부터 구원받을 뿐이다.

 

우리는 걸어다니는 시체들이고, 우리가 최고급 의상인 양 뽐내는 종교와 도덕적 사실은 수의임을 잊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풀어 설명하자면 우리는 립스틱을 바른 시체와 같으며, 우리의 개과천선이 화장술에 불과하다는 점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무화과 나뭇잎은 좀 더 세련됐다. (그리고 비싸다)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의 벌거벗음을 감추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

 

우리의 죄뿐 아니라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이사야 64장 6절) 같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곤궁과 헐벗음을 깊이 자각한 교회는 모든 것을 지닌 구세주에게 떨어지지 않게 붙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확신에 빠져 있고 내재하는 죄성을 상대적으로 무디게 인식하고 있는 교회는 편리한 대로 종교와 도덕에 손을 내밀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모든 사람이 올바른 규칙을 따르게 되면, 메시아의 왕국이 도래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메시아 자신이 오셨을 때, 그들은 자신의 불의와 무기력함에 맞부딪치게 됐다. 그리스도는 괜찮은 사람들이 더 나아지도록 오신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누가복음 19장 10절) 오셨다. 이것이 우리의 자존심을 짓뭉개는 것이라면, 또한 이것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희망적이고 놀라운 소식이기도 하다. 구원은 획득하는 것 (자기의 의를 쌓으려 하는)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 (로마서 10장 3절)를 선사 받는 것이다.

 

우리는 세속주의를 세속주의자들이 만든 것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세속주의자들의 상당수가 교회에서 양산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제다. 대다수 교회 출석자들이 그들에게 의미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거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창조, 원죄, 속죄, 칭의, 성화, 은혜의 수단, 영광의 소망 등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면, 세속적인 인본주의자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날릴 수는 없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펠라기우스 추종자가 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율법과 복음을 덜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은혜의 수단 (말씀과 성례)을 경시하고, 우리 자신과 우리 세상을 변혁하는 우리의 수단들을 선호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설정된 기본 값은 자기신뢰이기에, 진정 복음을 이해하고 이제 우리 자신의 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다고 절대로 추정할 수 없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를 말하는 순간에도, 그것은 행위가 아닌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교회가 교리 (‘가르침’을 뜻하는 어휘)에 관심을 잃을 때,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종교와 도덕적인 전제들로 표류하는 것은 놀랄 일이 못 된다.

 

경건주의가 신조보다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면, 자유주의는 결국 신조를 완전히 무시한다.

 

“교회 안에 팽배한 무지, 성경에 기록된 단순한 사실들에 관련한 점증하는 무관심에 대한 질문들이 우리를 현상의 핵심으로 이끌고 들어간다... 감정 혹은 의지를 치켜세우고 지성을 무시하는 경향은 현대의 삶에서 기본이다. 이 경향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교리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사람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또 상관할 바도 없다는 식으로 급속히 흘러간다. 참으로 통탄할 만한 지성의 몰락이다” -그레셤 메이첸

 

이미 살펴봤지만 미국인들은 반 지성주의적인 경향을 대놓고 드러낸다. 우리는 믿는 자들이 아니라 행동하는 자들이다. 사색가가 아니라 실용주의자다. 지루한 연구와 묵상에 능하지 못하고, 대신 장애물을 극복하고 자연을 정복하며, 자연을 관조하기보다는 어떻게든 활용하는 쪽이다.

 

그러나 만일 도덕주의-자력 구원-가 우리의 기본적 성향이라면, 우리는 이러한 도덕주의에서 벗어나도록 정규적으로 설교와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다. 세례, 성찬 그리고 설교는 모두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자기신뢰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고,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라고 촉구한다. 메이첸은 “기독교 운동은 출발에서부터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인생관이 아니라 메시지 위에 세워진 인생관이다. 기독교는 단지 행위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실의 진술에 기초를 두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기독교는 교리를 기초로 하고 있다”

 

앤 더글라스는 이렇게 관찰했다. “19세기 후반의 개신교회는 떠오르는 소비 사회에 일원이 되고자 필사의 노력을 했다. 이 교회만큼 인기에 영합하고 지성의 문제들을 외면한 기관은 어디에도 없다” 전체 문화적인 정경을 내다볼 때, 오로지 한 가지 남은 법칙이 있다면 “가볍게 갑시다” 인 것 같다. 교회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면 (달리 말해서 더 넓은 시장에 우리의 상품을 팔려면), 뾰족한 끝과, 사람들을 찌르거나 움츠러들게 하는 모든 것을 다 없애야 한다.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 아니라 상품에 붙은 지침들을 따름으로써 구원받은 소비자로서 하나님에게 나오는 것은 인간 죄의 핵심일 뿐 아니라 약속하는 것처럼 우리를 해방으로 이끌지도 못한다. 오히려 우리를 더 깊이 자아에로 빠져들게 하여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자기 확신, 갈망, 절박한 필요, 경험의 감옥에 갇히게 한다. 우리보다 더 큰 분 혹은 우리 자신의 업적보다 더 놀라운 것에 의해 변화되지 못하도록 막는다.

 

칼 바르트는 ‘교회 교의학’ 4권에서, 태만은 교만만큼이나 죄의 핵심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했다. 신실하지 않기 위해서 꼭 이단이 될 필요는 없다. 너무 게으르면 물결을 거슬릴 수 없다. C. S. 루이스는 이 점을 기억하기 쉽게 표현했다. “우리는 해변에서 휴일을 보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빈민가에서 흙으로 케익을 만들려고 하는 무지한 아이와 같다”

 

우리 교회가 복음을 당연시 여기거나 구호로 축소시키거나, 도덕주의와 혼돈할 때, 결국 우리가 다시 빠지게 되는 영성이 도덕적, 심리요법적 이신론이라는 것은 놀랄 것이 못 된다. 심리요법 세계관에서, 자아는 언제나 주권자다. 이런 거짓 종교를 수용하는 것은 사랑 - 하나님 혹은 이웃을 향한 -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진정한 해방을 박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합당한 영광을 찬탈하는 태만이다. 자아는 왕좌에서 쫓겨야 한다. 이것만이 유일한 탈출구다.

 

메시지만이 아니라 복음을 전달하는 방법 자체도 좋은 소식이다. 하나님은 성육신에 대해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시는 어떤 일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하여 일반적인 원리로서 성육신에 대해 말씀만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실제로 육체가 되셨고, 모든 의를 이루셨으며, 죄와 죽음을 정복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부활로써 전체 추수의 첫 열매인 새로운 창조를 정식으로 발효시키셨다.

 

관용, 친절 그리고 서로 덕을 세우는 다른 은사들이 부족한 교회는 건강하지 않다. 그러나 말씀이 부족한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복음 메시지 자체를 경험과 도덕적 행동주의 사다리로 올라가라는 권고로 바꿀 뿐만 아니라, 은혜의 수단을 행위의 수단으로 바꿈으로서, 거의 전적으로 우리의 섬김에만 초점을 맞추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섬김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때 그렇게 된다.

 

율법과 복음의 내용을 혼동하는 결과는 교회의 실천에도 영향을 미친다. 모든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일 (지금 하시는, 또 앞으로 하실 일)을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메시지가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신조가 아니라 행위를 강조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에 있어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에게로 주어지는 선물의 흐름이 바뀌게 된다.

 

그리스도는 복음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방법도 정해 놓으셨다.

 

만일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하고 구속하며 재창조하고 거룩하게 하며 끝까지 보전하시는 은혜로 말미암는다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모든 은혜를 전하도록 선택한 방법은 행위의 수단 (우리가 하나님을 섬김)이라기보다 은혜의 수단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심)일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행위나 우리의 섬김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고 섬김을 받을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 소식과 사랑의 봉사를 다른 사람에게 하시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많은 설교가 전하고 있는 메시지가 이미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로부터 우리와 우리의 활동으로 옮겨 왔다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왜 공적 예배에서 설교가 필요하냐고 의아해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신자는 성도인 동시에 죄인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정하신 이 은혜의 수단들을 통해 복음으로 먹어야 하는 필요 이상으로 자라날 수가 없다. 회심시뿐 아니라 순례 기간 내내 복음만이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다.

 

말씀과 성령을 통해 외부인은 내부인이 된다. 사람들을 외부인으로 만드는 낯선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이 제정하신 낯선 메시지와 낯선 방법으로 하나님의 강력한 일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설교와 성례라는 표지를 통하여 교회의 사명이 성공적으로 수행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자아도취의 해결책은 우리에 대해 더 많이 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건에 나무 압도되어 자신들의 영적 전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 열중하지 못했다. 사도들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것은 그리스도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자신들의 증언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들의 내적 변화 혹은 경험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지만, 이것조차도 복음의 결과로 돌렸다. 그들이 중생한 것은 어떤 단계에 이르는 공식을 따랐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 (베드로전서 1장 23절, 25절)으로 되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했다.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시대에 많은 개혁자가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컵의 바깥을 씻으려 했다고 지적한다.

 

종교개혁의 독특한 점 - 그리고 독특하게 효과적이었다 -은 루터가 지적한 것처럼, 문제의 핵심인 교리를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종교개혁은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으로부터 나오라고, 죄뿐 아니라 선행으로부터도 도망치라고 했으며 오직 믿음을 통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붙잡으라고 했다. 전체 예배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선명한 우선순위를 두도록 개혁되었다. 이제 예배는 더 이상 교회가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희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베푸시는 구속의 섬김이 되었다. 이제 백성은 자신의 일상적인 부르심을 통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예배를 마치고 일어서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감사와 찬미의 제사는 있지만, 죄를 위한 제사는 없다. 그리고 감사와 찬미의 제사조차도 하나님의 복음에 믿음으로 아멘 하는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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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단순 비교

      오늘날의 도르트리히트 모습(네덜란드)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단순 비교   하나님의 인간 구원에서 하나님의 예정과 은혜가 선행한다는 의견과 인간 자신의 믿음과 결단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의견이 오랫 동안 첨예하게 대립해 왔다. 신학적인 ...
    Date2024.06.01 Byreformanda Reply0 Views440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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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이단과 성경의 자의적 해석

        이단과 성경의 자의적 해석   원제: 이단 이해와 대책     진리를 위하여 평생을 헌신하며 정진했는데도 도달한 곳은 저주의 지옥불이라면 이보다 더 허망하고 참담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단의 폐해가 바로 이런 것이다. 오늘날 이단은 교회와 사회 속에...
    Date2024.05.12 Byreformanda Reply0 Views410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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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성직을 떠난 목사는 목사직을 내려놓아야

        성직을 떠난 목사는 목사직을 내려놓아야   목사(牧師)를 성직자라고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한 직임을 부여받은 것이다. 이는 이름이나 명칭이 아니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약 10년 정도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신학대학(일반대학 4년)을 졸업하고 신...
    Date2024.01.31 Byreformanda Reply0 Views642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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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변호사 정광진의 인생 이야기

          변호사 정광진의 인생 이야기     서울의 삼풍백화점이 굉음을 내던 날은 1995년 6월29일이었다. 당시 정광진(64) 변호사는 네 딸 중 세 명을 한꺼번에 잃었다. 시각장애를 딛고 미국 버클리대를 졸업하고 모교인 서울국립맹학교 교사로 일하던 윤민(당...
    Date2024.01.07 Byreformanda Reply0 Views2387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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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전영창 교장의 십계명

          전영창 교장의 십계명     전영창 선생(全永昌, 1917~1976)은 거창고등학교 교장으로 봉사했고, 예장 고신교회와 관련을 가진 분이며, 현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설립에 이바지한 분이다. 전영창의 감동적인 교훈은 '십계명'이다.     첫째, 월급이 적은 ...
    Date2024.01.04 Byreformanda Reply0 Views634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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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고백록 2.1] 청년기의 죄

        청년기의 죄   이제 나는 지나간 나의 추잡한 잘못들과 육체로 떨어졌던 내 영혼의 타락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오, 하나님, 그것은 내 과거가 좋아서가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서 입니다.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기 위한 자기 성찰의 쓴 괴로움을 지니...
    Date2023.11.16 Byreformanda Reply0 Views439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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