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혼의 그림자 드리운 왕좌: 자기 높이기
― 교만에 대한 한 편의 묵상 (칠거지악, 1-2)
인간의 마음속에는 웅장한 왕좌가 하나 있다. 본래 그 자리는 만물의 근원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지성소였으나, 타락 이후 그림자가 드리워진 채 비어 있거나, 가장 위험한 찬탈자인 ‘나’로 채워지곤 한다. 이 어두운 충동, 곧 ‘자기 높이기’는 인간 역사의 가장 오래된 비극이며, 영혼의 최초 균열에서 피어난 치명적인 꽃이다.
자기 높이기는 하늘을 향한 오만과 영적 반역이다. 교만을 뜻하는 라틴어 ‘수페르비아’(Superbia)가 ‘위(supra)에 자신을 둔다’는 의미를 내포하듯, 자기 높이기는 본질적으로 수평적 관계가 아닌 수직적 침범의 죄이다. 이는 피조물로서 감당해야 할 한계를 잊고, 창조주의 권위에 도전하는 우주적인 오만이다.
태초에, 빛의 천사 루시퍼가 "내가 나의 보좌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높이리라" 선언했을 때, 그는 가장 아름다운 창조물에서 가장 추악한 반역자가 되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향해 손을 뻗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욕망은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어" 스스로 진리의 기준이 되고자 하는 마음, 곧 자기숭배였댜.
자기 높이기는 영혼의 제단 위에서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자신을 올려놓는 행위, 스스로를 절대적인 존재로 둔갑시키려는 고독한 시도이다. 이 죄는 우리 안의 '나'를 우상으로 섬기게 만들며, 세상 모든 것을 나의 영광을 비추는 도구로 전락시킨다. 그 마음의 독배를 마시는 순간, 영혼은 창조주와의 교감을 잃고 고독한 절벽 위에 선 채 허공을 향해 소리치는 존재가 되고 만다.
쟈기높이기는 무거운 짐을 진 자의 고독이다. 자기 높이기는 타인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냉기이기도 하다. 교만한 자의 눈에는 타인이 더 이상 사랑과 섬김의 대상이 아닌, 내가 얼마나 뛰어난지 증명해 줄 '비교의 거울'이거나, 내가 딛고 올라설 '경쟁의 계단'이 될 뿐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다른 이들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탁월함을 확인하려 애쓰지만, 그 높은 자리는 곧 고독한 요새가 된다.
중세의 시인 단테가 『신곡』에서 교만했던 영혼들을 등 뒤에 무거운 바위를 지고 천천히 걷게 한 형벌은 이 죄의 본질을 섬뜩하게 보여준다. 세상에서 마음과 눈을 높이고 다른 이들을 얕잡아보던 그들은, 연옥에서 고개를 들 수조차 없게 만드는 자부심의 무게에 짓눌려야 했다. 이 무거운 짐은 교만이라는 것이 결국 자기의 의(義)와 공로를 스스로 짊어지는 고독하고 무거운 형벌임을 상징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기에, 자신의 힘으로 그 무게를 감당하다가 결국 좌절하고 만다.
파멸로 이끄는 자기 높이기의 길에 맞서 성경이 제시하는 유일한 해독제는 바로 겸손(謙遜)이다. 그리고 이 겸손의 가장 완전한 형상은 나사렛 예수에게서 발견된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경이로운 '자기 비움‘(Kenosis)을 노래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빌 2:6-7). 우주에서 가장 높은 분이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굴욕까지 감수하셨다. 이 극단적인 낮아짐이야말로 자기 높이기에 대한 영원한 반명제이자 승리의 선언이다.
예수님은 선언하셨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눅 14:11). 이 말씀은 역설적 진리이다. 인간의 영광은 스스로 왕좌에 앉으려 할 때 사라지지만, 주님 앞에서 무릎 꿇고 자신을 비울 때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에 의해 채워진다.
진정한 자유와 완성은 자기 높이기를 포기하고, 나의 모든 영광을 창조주께 되돌려 드리는 겸손의 자세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우리의 왕좌를 비울 때, 비로소 우리의 영혼은 무거운 바위의 짐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가벼운 멍에를 지고 평안을 얻는다. 가장 낮은 곳, 흙먼지가 쌓인 순종의 자리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참된 높임과 영원한 안식을 발견할 수 있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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