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거부운동은 독립운동인가?
일제말기의 신사참배거부운동은 순전한 기독교 신앙운동인가, 항일독립운동인가? 광복 80주년 신사참배 거부운동 재조명 제4회 국회 학술세미나가 8월 21일 오후 국회 대한민국헌정회 회의실에서 개최됐다. 최덕성 총장은 신사참배거부운동이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계명을 지키는 순전한 신앙운동이었지만, 역사는 동기만으로 평가되지 않으며, 결과에 의해서도 평가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국가차원의 서훈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래는 <크리스천투데이>(이대웅 기자)가 보도한 이날의 행사 보도문 전문이다. 이날 최덕성 박사의 발제 영상은 아래에 연결되어 있다.
한상동 목사 등, 신앙 동기로 신사참배 거부
역사는 동기뿐 아니라 결과에 의해서도 평가
우상숭배 항거 개혁운동, 분리주의 폄하하나
한상동과 주기철 목사, 교회론 다르지 않아
‘다시 써야 할 한국교회사,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독립운동이다’라는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는 최덕성 총장(브니엘신학교)이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 무엇이 다른가’, 오일환 교수(보훈교육연구원 전 원장)가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왜 독립운동인가’를 각각 발표했다.
“신사참배 거부, 마지막 항일운동이자 배교 교회에 대한 항거”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2025.08.21
광복 80주년 신사참배 거부운동 재조명 제4회 국회 학술세미나가 8월 2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 대한민국헌정회 회의실에서 고신포럼·인천대독립운동사연구소 공동 주관으로 개최됐다.
‘다시 써야 할 한국교회사,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독립운동이다’라는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는 최덕성 총장(브니엘신학교)이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 무엇이 다른가’, 오일환 교수(보훈교육연구원 전 원장)가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왜 독립운동인가’를 각각 발표했다.
한상동 목사 등, 신앙 동기로 신사참배 거부
역사는 동기뿐 아니라 결과에 의해서도 평가
우상숭배 항거 개혁운동, 분리주의 폄하하나
한상동과 주기철 목사, 교회론 다르지 않아
최덕성 총장은 “한상동 목사님께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독립운동이었는지 물어봤다면, ‘글쎄?’라고 답하실 것이다. ‘우리는 신앙운동을 했지,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긴 곤란하다’고 하실 것”이라며 “하지만 역사는 동기뿐 아니라 결과에 의해서도 평가되는 것이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그 결과가 항일 투쟁이었고, 이 땅에서 전개된 마지막 항일 운동이기도 했다. 그래서 보훈부가 조사 후 이들을 예우해야 한다. 이 참에 보훈부가 직접 연구비를 들여 평가·발굴해서 서훈을 해줄 것을 공식 요청한다. 한국인들뿐 아니라 선교사들도 동참했던 운동”이라고 말했다.
최 총장은 “그러므로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일제에 항거한 정치운동인 동시에 배교한 한국교회에 항거한 신앙운동·교회운동이었고, 그 자체로 공교회성-보편성(catholicity)을 지닌 완전한 교회였다”며 “이는 사도들이 전수해 준 보편적 기독교 신앙을 계승·고백하면서, 유일신론과 십자가 구속 사건에 대한 감격과 신앙의 정조를 가진 교회였다. 우상숭배를 하고 배교하는 교회에서 축출·면직·제명을 당한 교역자들은 신도주의(神道主義)화된 한국교회에 대항해, 기독교 보편 신앙과 장로교회 본래 신앙고백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전제했다.
최덕성 총장은 “그러나 교회사학자 민경배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주도한 한상동 목사를 고대 교회 도나투스주의 같은 분리주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역사적 정통신학에 충실했다며 둘의 교회론이 달랐다고 주장한다. 주기철은 우상숭배를 행하던 당시 한국교회와 자신을 동일시했고, 한상동은 그에 항거하면서 신사참배 거부운동 공동체와 자신을 동일시했다는 것”이라며 “신사참배 거부운동자들이 우상숭배를 하는 당시 교회를 파괴하려 한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고 소개했다.
최 총장은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배교와 우상숭배 이단 집단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기존 한국교회에 항거한 교회개혁운동이었다. 이들이 평양에서 ‘신사불참배 노회’ 조직을 시도한 것은 개혁신앙 운동이 지닌 교회관의 결과”라며 “이를 분리주의 성향으로 말하는 것은 성경과 개혁신학, 개혁교회론을 무시한 것이자, 일제 말기 한국교회의 배교성과 이단성에 대한 신학적·교회론적 성찰이 결여된 판단이다. 여기서 친일파 시각과 개혁주의 신학 전통에 충실한 역사 평가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고 풀이했다.
그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배교하는 교회에 항거해 새로운 장로회 조직을 시도한 것은 고대 도나투스주의 또는 분리주의 결과가 아니라 올바른 교회관의 결과이자 정당한 시도였다”며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운동과 궤를 같이 하는 개혁교회 운동이었다. 나치 치하의 고백교회들이 독일 기독교에 항거해 고백교회 조직을 갖춘 것과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최덕성 총장은 “무엇보다 한상동과 주기철이 다른 방향을 가고 있었다거나, 서로 다른 교회론을 갖고 있었다고 판단할 다른 근거가 없다. 주기철의 아내 오정모의 활동과 신념, 주기철의 아들 주영진의 활동, 한상동과 주기철이 남긴 문헌들은 오히려 두 사람의 신앙 방향이 일치했음을 입증한다”며 “한상동을 분리주의자로 단정하는 것은 친일파 그룹을 대변하는 교회사가의 편벽된 판단이자, 성경적 기독교 신앙과 개혁교회관에 충실했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심대한 폄하”라고 반박했다.
주기철 목사, 신사참배 거부운동에는 소극적
희생자 많을 것 걱정해서, 신앙고백은 같아
나치 항거 고백교회 조직에는 찬사 보내면서
신사참배 거부운동 못마땅? 사대주의 발상
최 총장은 “주기철은 신사참배에 반대했지만, 신사참배 거부운동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동지 획득 노력을 하지 않았고, ‘정치운동’으로의 확대도 반기지 않았으며, 희생자가 많을 것을 걱정해 신속한 새 교회 조직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다”며 “주기철의 의사와 무관하게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정치운동화와 새 노회 조직운동은 진행되고 있었다. 주기철을 순교로 이끈 신념 체계와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신앙고백은 다르지 않았다. 주기철의 지도를 받은 산정현교회도 신사참배 거부운동에 적극적이었고, 이는 광복 직후 한상동 목사를 담임으로 청빙한 데서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제 말기 과거사 문제를 성경대로 하자고 하면 독선적이라고 비난하고, 교회 헌장과 신앙고백대로 하자고 하면 율법주의라고 비판하고, 양심적으로 하자고 하면 바리새주의라고 질책해 온 배교자 또는 친일파 전통의 대표적 예”라며 “한국교회 지성인들 일부는 나치 정권에 항거한 독일 고백교회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신사참배 거부운동자들이 새로운 장로회를 조직하려 시도한 것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데, 사대주의적 발상이자 자가당착적 판단”이라고 일갈했다.
또 “교회가 배교를 하고 이단적 신앙을 고백할 뿐 아니라 그것을 강요해 우상숭배를 행하고 있는데도 그것에 대항해 새로운 교회 조직을 시도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노력을 잘못으로 보거나 분리주의로 폄하하는 것은 한국교회와 한국교회사를 주도하는 친일파 전통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말해 준다”며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다는 주장의 몰지성적 기만성은 출옥성도들을 분리주의자로 단정해 한국 장로교 1차 분열의 책임을 고신계 출옥성도들 탓으로 돌리려는 시각과 직결돼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오일환 박사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독립운동으로 공식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운동이 신앙의 자유와 전통을 지키려는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어서, 종교 내부의 신앙 운동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일제가 이들을 민족주의자로 규정하고, 여느 독립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치안유지법 및 보안법 위반죄에다 천황 불경죄를 뒤집어 씌워 중형을 부과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정치범이고 독립운동가로 ‘인정’했음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오일환 박사는 “일제는 신사참배 강요, 언론·출판·교육 탄압, 민족말살 정책을 통해 민족 정체성을 말살하려 했다. 이에 맞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곧 민족 사랑, 나라 사랑으로 여기고 각 분야에서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저마다 민족의 자존을 찾고 나라를 회복할 길을 모색했다”며 “신사참배는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한국인의 정신적·정치적 예속을 강화하는 식민지 통치 수단이었으므로, 이러한 종교 탄압과 사상 통제에 공개적으로 저항했다는 점에서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비폭력·비타협 항일 독립운동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정리했다.
오 박사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전국적 현상이었지만, 주로 평양·서북 지역과 영남 지역, 특히 부산·경남을 중심으로 이뤄진 데다 광복 후 남북 분단과 기독교 교파 분리로 총괄적·체계적 연구를 수행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며 “앞으로 역사학계 차원에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독립운동사나 민족운동사 영역에서 제대로 다루는 풍토가 자리잡아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그는 “정부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독립운동인지 여부를 정치적·사회적·역사적 차원에서 세밀히 검토해, 이 운동의 성격을 분명히 밝힌 다음 독립운동 여부를 공식적으로 명확히 밝혀야 할 것”이라며 “이 운동이 독립운동 영역에 속한다면, 지체없이 참여한 사람들의 공로의 경중을 따져본 후에 격에 맞는 대우를 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패널 토의에서는 오지원 소장(한국침례교회연구소), 전정희 전문위원(종로문화원), 최수경 대표(모닝포커스) 등이 토론에 나섰다. 최수경 대표는 “한상동 목사는 한글학자 김두봉,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국회부의장 김약수(김두전)의 조카사위다. 한 목사의 사모 김차숙의 부친이 김두천이고, 무장여성독립운동가 박차정의 외할머니 김맹련과 사촌지간”이라며 “특히 김차숙 사모는 명문 독립운동 가문의 올곧은 정신과 투철한 신앙심으로 5년 넘게 부산에서 평양을 오가며 옥중에 있는 남편 한상동을 비롯한 수십 명의 옥중 성도들을 뒷바라지했다. 이런 놀라운 발자취를 한국교회가 재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선 1부 예배에서는 고신포럼 사무총장 이상선 목사 사회로 예장 고신 총회장을 지낸 권오헌 목사(서울시민교회)가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사람(마태복음 5:10-12)’이라는 주제로 설교한 후 오성재 목사(고신포럼 상임고문)가 축도했다.
권오헌 목사는 “한상동 목사님을 비롯한 신사참배 거부운동에 나선 선배님들에 대해 우리가 그동안 충분한 존경과 대가를 지불하지 못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한 목사님께 이미 큰 상을 수여하셨을 것”이라며 “그러나 의를 위하여 핍박받은 사람을 우리가 존경하고 국가가 기리는 모습을 보여야 앞으로도 다음 세대들이 이를 본받을 것이다. 말씀대로 사는 것은 옳을 뿐 아니라 유익하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축사를 전한 이주영 전 국회부의장은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정당한 역사의 평가가 내려지고 보훈을 통해 상응하는 국가적 인정을 받는 것은 너무 당연한데, 국회에서 벌써 네 번째 세미나를 열어야 한다는 것은 통탄할 일”이라며 “저는 조수옥 여사님과 각별한 친분이 있다. 당시 조 여사님은 20대 젊은 나이에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를 할 수 없다며 신사참배 거부운동에 앞장서다 평양까지 끌려가서 옥살이를 하신 분이다. 종교적 신념에서 출발했더라도, 민족 정체성을 수호한 애국운동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김대식 의원(국민의힘)은 영상 축사에서 “한상동 목사님은 일제 군국주의 침략과 식민 지배에 맞서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전국 연결망을 만들어 주도하셨을 뿐 아니라, 경상도 특유의 신앙적 의리감으로 일제의 온갖 회유와 탄압에 굴하지 않으셨다”며 “뿐만 아니라 항일 여성 독립운동가들인 최덕지 목사와 조수옥 전도사, 안이숙 사모 등의 공적이 재평가되고 올바른 서훈 평가가 이뤄지길 소망한다”고 전했다.
고신포럼 대표 김경헌 목사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고 일제시대 헌신적으로 애국운동에 동참했다. 그 와중에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것이 한상동 목사님을 비롯한 아직 서훈되지 못하고 있는 여러 애국 신앙 선각자 분들의 독립유공자 추서”라며 “이들을 재조명하고 명예를 회복시켜 후손들에게 알리는 것은 바람직한 우리의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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