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혼의 그림자 드리운 왕좌: 자기 높이기
― 교만에 대한 한 편의 묵상 (칠거지악, 1-2)
다른 죄들은 벼룩에 물린 자국에 불과하다. 그러나 교만은 영혼을 태우는 불이다.
고대의 신화에 나오눈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불을 훔쳤다. 그는 인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하늘의 불을 주머니에 숨겨 내려왔다. 불은 따뜻함이었고, 문명이었으며, 지혜였다.
그러나 그 불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신의 힘이었다. 제우스는 분노했고, 프로메테우스는 바위에 묶인 채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았다. 간은 다시 자라고, 독수리는 다시 돌아왔다. 불을 훔친 인간은 결국 불에 삼켜졌다.
이 오래된 신화의 그림자는 오늘의 세계에도 남아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실리콘 밸리의 연구소에 앉아 유전자를 재편집하는 과학자의 얼굴로 돌아왔고, 인공지능을 훈련시키며 신의 언어를 해독하려는 프로그래머의 손끝에 깃들어 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불빛 아래에서 점점 어두워지는 자신의 영혼을 모른 채, 그 불꽃을 ‘진보’라 부른다.
교만은 단순히 자신을 높이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밀어내고 스스로 신의 자리에 앉으려는 욕망이다. 하늘을 향해 탑을 쌓던 바벨의 사람들처럼, 인간은 ‘더 높이’라는 주문 아래 살아간다. 더 높은 빌딩, 더 강한 권력, 더 큰 영향력. 그러나 탑이 높아질수록 마음의 평지는 사라진다. 그때부터 인간은 자신이 만든 탑 아래 깔려 산소를 잃은 존재로 전락한다.
성경은 교만을 모든 죄의 뿌리라 말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이 말씀은 마치 천둥처럼 귓가에 울린다. 교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인간 자신을 폐허로 만든다. 신의 자리를 탐할 때마다 불은 다시 타오르고, 독수리는 다시 날아온다.
오늘의 젊은 세대는 자기 확신의 시대를 산다. 자기계발, 자기표현, 자기실현이 인생의 표어가 되었다. 그러나 ‘자기’의 중심에 하나님이 사라질 때, 그 확신은 교만으로 변한다. 교만은 처음엔 향기로운 향수처럼 느껴지지만, 끝내 숨을 막히게 한다. 반면, 겸손은 처음엔 무색무취 같지만, 그 향은 오래 남는다.
잃어버린 진짜 자유는 ‘내가 중심이 아님’을 아는 데서 시작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간을 인간으로 인정할 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다워진다. 교만은 불을 훔쳐 스스로 신이 되려는 길이지만, 겸손은 불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 빛에 감사하는 길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묻고 계신다. “누가 너에게 그 불을 맡겼느냐?” 그 물음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순간, 독수리의 날개가 멎고, 타오르던 불은 빛으로 변한다. 그때 인간은 더 이상 신을 흉내 내지 않고, 신의 형상으로 회복된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웅장한 왕좌가 하나 있다. 본래 그 자리는 만물의 근원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지성소였으나, 타락 이후 그림자가 드리워진 채 비어 있거나, 가장 위험한 찬탈자인 ‘나’로 채워지곤 한다. 이 어두운 충동, 곧 ‘자기 높이기’는 인간 역사의 가장 오래된 비극이며, 영혼의 최초 균열에서 피어난 치명적인 꽃이다.
자기 높이기는 하늘을 향한 오만과 영적 반역이다. 교만을 뜻하는 라틴어 ‘수페르비아’(Superbia)가 ‘위(supra)에 자신을 둔다’는 의미를 내포하듯, 자기 높이기는 본질적으로 수평적 관계가 아닌 수직적 침범의 죄이다. 이는 피조물로서 감당해야 할 한계를 잊고, 창조주의 권위에 도전하는 우주적인 오만이다.
태초에, 빛의 천사 루시퍼가 "내가 나의 보좌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높이리라" 선언했을 때, 그는 가장 아름다운 창조물에서 가장 추악한 반역자가 되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향해 손을 뻗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욕망은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어" 스스로 진리의 기준이 되고자 하는 마음, 곧 자기숭배였댜.
자기 높이기는 영혼의 제단 위에서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자신을 올려놓는 행위, 스스로를 절대적인 존재로 둔갑시키려는 고독한 시도이다. 이 죄는 우리 안의 '나'를 우상으로 섬기게 만들며, 세상 모든 것을 나의 영광을 비추는 도구로 전락시킨다. 그 마음의 독배를 마시는 순간, 영혼은 창조주와의 교감을 잃고 고독한 절벽 위에 선 채 허공을 향해 소리치는 존재가 되고 만다.
쟈기높이기는 무거운 짐을 진 자의 고독이다. 자기 높이기는 타인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냉기이기도 하다. 교만한 자의 눈에는 타인이 더 이상 사랑과 섬김의 대상이 아닌, 내가 얼마나 뛰어난지 증명해 줄 '비교의 거울'이거나, 내가 딛고 올라설 '경쟁의 계단'이 될 뿐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다른 이들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탁월함을 확인하려 애쓰지만, 그 높은 자리는 곧 고독한 요새가 된다.
중세의 시인 단테는『신곡』에서, 교만한 영혼들 등 뒤에 무거운 바위를 지고 천천히 걷게 한 형벌을 언급한다. 교만 죄의 본질을 섬뜩하게 보여준다. 세상에서 마음과 눈을 높이고 다른 이들을 얕잡아보던 그들은, 연옥에서 고개를 들 수조차 없게 만드는 자부심의 무게에 짓눌려야 했다. 이 무거운 짐은 교만이라는 것이 결국 자기의 의(義)와 공로를 스스로 짊어지는 고독하고 무거운 형벌임을 상징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기에, 자신의 힘으로 그 무게를 감당하다가 결국 좌절하고 만다.
파멸로 이끄는 자기 높이기의 길에 맞서 성경이 제시하는 유일한 해독제는 바로 겸손(謙遜)이다. 그리고 이 겸손의 가장 완전한 형상은 나사렛 예수에게서 발견된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경이로운 '자기 비움‘(Kenosis)을 노래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빌 2:6-7). 우주에서 가장 높은 분이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굴욕까지 감수하셨다. 이 극단적인 낮아짐이야말로 자기 높이기에 대한 영원한 반명제이자 승리의 선언이다.
예수님은 선언하셨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눅 14:11). 이 말씀은 역설적 진리이다. 인간의 영광은 스스로 왕좌에 앉으려 할 때 사라지지만, 주님 앞에서 무릎 꿇고 자신을 비울 때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에 의해 채워진다.
진정한 자유와 완성은 자기 높이기를 포기하고, 나의 모든 영광을 창조주께 되돌려 드리는 겸손의 자세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우리의 왕좌를 비울 때, 비로소 우리의 영혼은 무거운 바위의 짐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가벼운 멍에를 지고 평안을 얻는다. 가장 낮은 곳, 흙먼지가 쌓인 순종의 자리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참된 높임과 영원한 안식을 발견할 수 있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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