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복음주의 개신교의 기원과 특징
유대영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의 가장 중요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바로 교파와 크기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교회들이 자신을 “복음주의자”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단순히 자신들의 신학적 보수성에서 복음주의자로 불리길 원할 뿐 아니라, 그들의 전통과의 연속성에 있어서도 그렇게 주장되길 원한다. 이 논문은 미국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미국적 복음주의적-부흥주의를 20세기의 여명기에 한국이라는 토양에 이식시키고자 했다는 것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소개한 개신교의 신학적, 윤리적, 영적 본성을 보여 줄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종교가 한국에 정착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이러한 성격이 지속적으로 한국 개신교회의 기본적인 기질을 결정하게 되었는지를 제시할 것이다. 특별히 선교사들과 그들의 종교뿐 아니라 한국의 독특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상황과 한국인들의 정서도 중요하게 다룰 것이다. 이 시기 한국의 개신교회는 직간접으로 미국 선교사들의 종교와 세계관에 영향을 받음으로, 그 서사의 중심에는 선교사들이 있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의 기독교를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들의 신학과 행동은 오늘날까지 한국 개신교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1. 미국 선교사들의 “복음주의적” 종교관
1.1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의 대부분은 미국 개신교 선교사였다. 미국은 1882년에 한국과 조약을 맺었고, 그로 인해 선교사들은 한국 내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서양인 공동체를 세울 수 있었다.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미국의 주류 교단(북장로회, 남장로회, 북감리회, 남감리회)에서 파송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브라질을 제외하고는 어떤 선교지도 한국처럼 미국의 주류 교단이 들어온 지역은 없었다. 한국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의 특징은 그들이 미국 중산층의 가치와 “복음주의적인”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 1.2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은 압도적이었다. 남장로교 선교부의 서기였던 아더 브라운(Arthur J. Brown)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토착] 교회들이 선교사들을 지배했지만, 한국에서는 선교사들이 교회를 지배했다.” 한국에서 발행된 선교월간지 <한국선교현장>에 따르면,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우리의 기준이 그들의 기준이 될 것이다. 우리의 행동이 그들의 행동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성경이다.” 이 시기 한국 개신교회의 신학은 실제로 미국 선교사들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교회의 설립자요 목사요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1.3 미국 장로교회는 19세기까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자신들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였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감리교는 웨슬리의 25개 신조를 받아들였다. 미국 선교사들은 모국에서의 신앙고백을 한국에 이식시켰다. 첫 번째 한국 감리교 신조(1890)는 25개 신조의 한국어 번역본이었고, 최초의 한국 장로교회 신조(1907) 역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요약한 것이었다.
1.4 초기 한국교회의 신조는 보수주의를 그래도 보여주고 있다: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와 진리,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의 대속적 죽음과 육체적 부활은 공통적인 요소였다. 그러나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적 기준은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논쟁이 발생하기 이전의 미국 개신교의 전통적인 신학적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한국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은 19세기 후반에 교육을 받았고, 아직 그때까지는 “복음주의 제국”이 사그라들기 이전이었다. 따라서 복음주의라는 말이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미국 선교사들의 신학은 19세기라는 맥락 안에서의 복음주의였다.
1.5 미국 선교사들의 “복음주의적” 성격은 1905년에 설립된 ‘한국복음주의 선교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를 통해 그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모임에는 복음주의의 목적과 내용에 공감하는 대부분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참여했다. 여기서 “복음주의”라는 말은 실제로 “개신교”라는 말과 동의어였다. 이 공의회의 공식적인 목적은 다양한 개신교 선교사들의 협력을 도모하고 궁극적으로 한국에서 “하나의 개신교 기독교회”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에큐메니컬 정신이 선교현장에서의 독특한 경험이라 할지라도, 이는 개신교 연합운동이 20세기의 전환점에서 “복음주의”의 아주 중요한 구성요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대로, 1940년대에 발생한 신복음주의는 근본주의로 성장했고, 신학적 보수주의로 대변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일반적인 의미의 “복음주의”이다.
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은 19세기 복음주의의 폭넓은 신학적 스펙트럼 안에서도 특별히 보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찰스 클락(Charles A. Clark)은 한국에서 개신교 선교가 성공적일 수 있었던 첫 번째 비밀은 “처음부터 거의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특별히 보수적인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Clark 1934:56). 이들의 보수적인 신학은 인간의 죄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하고, 성경의 초자연적인 사건들과 기독교의 최종적인 종말에 대한 믿음을 포함하고 있다. 아서 브라운에 따르면, “근대적인 관점”의 신학과 성서비평은 한국에서 극히 소수였고 이후에도 “매우 험난한 여정”을 겪어야 했다.
1.7 조선이 문화를 개방한 이후 한국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의 특징은 그들이 전형적인 청교도 유형이었다는 것이다. “청교도 유형”의 종교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의 신도들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매우 엄격한 종교-윤리적 기준으로 예화시켜 드러냈다. 선교사들에게 한국은 그야말로 “황무지”였다. 선교사들은 권력을 가진 자들로써 한국에 왔다. 그들의 부, 치외법권, 그리고 교사로서의 역할은 그들에게 모든 점에서 우위를 점유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한국 사람들은 가난과 무지 속에 침몰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안전하고 순전한 삶을 보장받는 “사막의 오아시스”에 살았었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 선교사들은 어느 정도 인종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고, 그들이 보기에 한국은 인종적으로 열등하고, 이상하고, 아직 개발이 덜 된 나라로 비쳤다.
2. 미국 선교사들의 종교-윤리적 엄숙주의
2-1 미국 선교사들의 “유별난 보수주의” 신학과 “청교도 유형”의 도덕은 다양한 방식으로 가시화되었다. 처음부터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 사람들이 회심해서 교회 멤버로 가입될 때 매우 엄격한 기준을 세웠다. 한국 선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흔히 회자되는 풍문으로는 선교사들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회심시켰다는 것인데, 사실 선교사들은 상당히 조심스럽게 회심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장로교 감리교 모두 한국 사람들이 만약 세례를 받기를 원할 때에는 먼저 교리교육을 받도록 했다. 회중 모임에서 교리문답은 공적으로 그들의 기독교 신념을 선포하는 행위였고, 최소 6개월간의 세례 입후보자로 들어가는 과정이었다.
2-2 이 기간 동안에 교리문답자는 다양한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기준들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리곤 이들이 한국교회의 첫 지도자들이 되었다. 후보자들은 성경을 읽고 기본적인 기독교교리를 학습해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자신들의 회심의 진정성을 복음전도의 열매로 보여주어야만 했다.
2-3 이들에게 요구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책무는 주일성수를 완벽하게 준수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을 배우기 위해 노동과 직업을 완전히 포기해야 했다. 장로교에서 발간한 <기독신문>에 의하면, 심지어 주일성수를 위해서는 일요일에 자신의 사적인 생활에 대해서 말해서도 안 되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고 경고한다. 주일날 음식과 옷은 토요일에 미리 준비해야 했다. 감리교의 <신학월보>에서는 일요일에 관광을 가거나 소풍을 가는 것, 화를 내거나 싸우는 것도 주일성수를 어기는 것이라고 기록했다. 미국 선교사들에게 주일성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가늠하는 척도와 같았다. 존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한국 사람들이 주일을 지킨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그리스도인 아니라고 거의 확신할 수 있다.”
2-4 또한 세례 후보자들은 제사나 그와 유사한 어떠한 예식도 해서는 안 되었다. 일반적으로 제사는 종교적 의례라기보다는 유교의 지식인층에서 행해진 도덕적 책무였다. 몇몇 선교사들은 이러한 제사가 부모님에 대한 뿌리 깊은 효심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한국 사람들이 제사를 통해 축복을 받고 귀신을 위로한다고 보았다. 미국 선교사들은 제사상 앞에 놓인 영정 앞에서 기도한다는 행위 자체를 싫어했고, 이는 영적인 예배라 생각했다. 따라서 그 어떠한 사람도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은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2-5 보다 흥미로운 점은 세례자들에 대한 윤리적 요구들이었다. 이들은 종교적인 요구도 받았지만 사회적으로 보다 높은 수준의 자격을 수행해야 했다. 세례 후보자들은 게으르면 안 되고 도박을 끊어야만 했다. 어떤 이도 세례 교육 중에는 성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되었다. 또한 술과 관련된 어떠한 행위(복용, 제조, 판매)도 해서는 안 되었다. 선교사들은 음주가 건강에 해롭고, 비윤리적이고, 비경제적이라는 언급은 하지 않고, 단지 그것은 죄라고 강력하게 교육했다.
2-6 특별히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 성도들에게 담배 피우는 것을 강력하게 제제했다. 선교사들은 건강과 경제적인 이유로 최초의 금연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흡연이 “하나님의 성전”인 성도의 몸을 더럽힌다고 말했다. 흡연에 대한 반감은 특별히 감리교 선교사들에게 강했는데 존 웨슬리나 프란시스 애즈버리의 비흡연 전통을 물려받은 것이다. 감리교 선교사였던 아펜젤러는 흡연, 춤, 노름, 주류 판매, 다양한 사회적 부정의가 “악마의 일”이라고 여겼다.
2-7 담배에 대한 이러한 전향적인 적개심은 한국 성도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남겨 주었다. 한국 교회는 금연 조직체로 구성되었다. 사실 흡연이 법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다음 세대에 이르기까지 법처럼 지켜졌다. 조상숭배, 음주, 노름, 첩을 두는 행위는 “이교적”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한국 이외에서 활동한 미국 선교사들에게서 이처럼 흡연에 대해서 혐오했다는 증거를 찾기는 아주 어렵다. 선교사들이 흡연을 금지했던 기준은 그들의 종교-윤리적 기준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건강상의 문제에 대한 실천적인 관심 때문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흡연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보편적으로 퍼져 있어서 건강상으로도 해로웠기 때문이다.
2-8 미국 선교사들의 종교-윤리적 엄숙주의를 고수했던 것은 교회의 순결성을 보장하기 위한 그들의 욕구와 관련되어 있다. 애초부터 한국 선교사들의 우선적인 관심은 “교회의 크기가 아니라 순결함”이었다. 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교회의 완전한 멤버로 승인되기 전까지는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 장로교회의 경우 1901년에 거의 5천 명의 성인 성도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지도자로 세워진 인원은 고작 4명이었다. 목회와 행정은 오직 선교사들의 몫이었다. 실제로 목사는 선교사만이 할 수 있었다. 1907년에 이르러야 첫 번째 한국인 목사가 세워졌다. 감리교회는 1901년에 두 명의 지역 감독을 임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설교와 세례를 집례할 수 있었을 뿐, 성만참을 집전할 수는 없었다. 세례를 받은 한국 그리스도인은 장로교 선교사들이 1907년에 장로회를 세우기 전까지, 감리교 선교사들이 1908년에 한국 연례회의가 조직되기 전까지는 교회의 멤버가 아니었다.
3. “교사” 선교사와 한국인 개종자들
3-1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높은 수준의 기준을 부과한 것은 그들이 그에 걸맞은 권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윤치호에 따르면, 한국 설교가들은 선교사들에게 “의견과 양심의 자유를 양도”해야만 할 만큼 선교사들은 한국 설교가들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미국 선교사들은 필요할 때면 언제라도 옳고 그름을 가르쳐 주고 훈계할 수 있는 “유아기” 한국 교회의 부모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다행스럽게도) 선교사들은 이교적인 황무지 속에서 교회를 부화시킨 것이다.
? 3-2 한국 선교에서 특별한 현상은 한국 사람들이 서양인들에 대해서 압도적일 만큼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서양인들을 “매우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해 주었다. 외국인이 길을 몰라서 물어보면, 누구라도 즉시 발걸음을 멈추고 친절하게 길을 안내 주었으며, 외국인들의 실수에도 매우 관대했기에, 릴리아스 언더우드(Lillias H. Underwood)는 한국 사람들은 “친절함과 정중함의 표본과 같다”고 말했다. 중국을 다녀온 선교사들은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중국과 한국에 너무나 다르다고 보고한다. 중국에서 서양인은 “외국인 악마들”로 취급을 받았다. 반대로 한국 사람들은 서양인들을 매우 존경했다. 사무엘 모펫(Samuel A. Moffett)은 “선교사들을 포함한 모든 외국인들은 ‘대인’이라 불리었다”고 회고한다.
3-3 선교사들은 한국 사람들이 예의 바른 사람으로 자랐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이런 습성은 한국에서 (비록 강제적이기는 하지만) 오랜 시간 형성된 문화였다. 한국에서는 기본적으로 학자나 선생이 존경을 받았고, 한국 사람들은 선교사들을 주로 “교사”라고 불렀다. 제임스 게일(James S. Gale)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의 마음속에 선교사들은 “책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었고, 영적인 문학가였으며, 교사이자, 안내자이자, 모델이었다.” 배우기를 좋아하고 학자를 존경했던 문화는 미국 선교사들을 한국의 다른 이웃들과 구별하는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중국인들에게 선교사는 상인이었고, 일본인들에겐 전사였다면, 한국 사람들의 관념 속에서 선교사들은 학자로 각인되었다.
3-4 하지만 완고한 유교 문화의 영향 속에 있는 한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권위로 문화를 타협하기를 싫어했고, 이를 불명예로 여겼다. 한국 사람들은 유교 전통주의에 대한 자긍심이 강했고, 그들의 전통에 대한 다른 해석은 그 어떤 것이든 저주를 받았다. 사실상 새로운 생각들은 금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어른의 생각을 존중하고 오래된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좋은 학문은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잘 전통적인 권위를 알고 변호하느냐에 달려 있었으며, 새로운 사유는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럼으로 한국 사람들이 회심을 했을 때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받고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선교사에 의해서 한국 신도들이 복음주의 신학과 실천들을 전도 받았을 때, 그것은 “유일한” 전통이 되었고, 기존의 전통에 대한 새로운 발전이 되었다. 그러니 환영받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3-5 신앙이 좋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기독교적 서약을 성실하게 지키고자 했지만, 이러한 종교-윤리적 원칙들을 유지하는 것은 개종자들이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상당한 충돌과 핍박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었다. 특별히 제사를 포기하는 것은 그들의 가족과 친척, 그리고 사회적 관계 전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3-6 유교 의례의 근간이었던 제사는 단순히 한국에서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중국 선교사들에게도 동일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문제의 난감함을 인지하면서 중국에서 몇몇 선교사들은 그저 쉽게 중국 개종자들이 알아서 행동하도록 내버려 뒀다. 1890년 상하이 선교대회에서 미국 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마틴(William A. P. Martin)은 선별적으로 제사를 허락했다. 존 로스(John Ross) 역시 마틴의 제안을 수용해서 제사는 예배라기보다는 의례라 생각하기로 했다. 로스는 스코틀랜드 선교사로 처음으로 한국에 복음을 번역하고 출판한 한국 선교의 선구자였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한국에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온 이후에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한국 선교사들에게 조상 의례는 이교적인 행동이었다. 그들은 제사가 매우 위험하고 악마적인 것이라 결론 내렸고 그럼으로 그것은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으며 “가장 심각한 우상”이었다.
3-7 첩을 두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였다. 제사가 국가적인 문화였다면 첩을 두는 것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기독교적인 결혼 원칙뿐 아니라 여성의 존엄성에 있어서도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았다. 감리교에서는 1894년에 첩을 거느린 신자에게 세례를 주지 않기로 결정했고, 장로교도 곧 이를 따랐다. 선교사들은 일부다처인 사람들이 교회에 참석하고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규범적인 결혼 관계를 갖고 교회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세례 받는 것을 보류하도록 권고받았다. 이 원칙은 남자나 내연녀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었다.
3-8 미국 선교사들의 윤리적 요구는 교회에서의 훈육과 나란히 진행되었다. 필요하다면 선교사들은 교회에서 윤리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을 견책하고, 훈계하고, 자격을 정지시키거나, 심지어는 출교시키기도 했다. 세례를 받은 자들 가운데 의도적으로 세상일을 하느라 주일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교제의 식탁에 참여할 수 없었다. 제사의 오랜 습관으로부터 돌이키지 않은 자들은 출교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음주자나 내연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린이와 결혼을 하거나 믿지 않는 자들과 결혼을 하는 것 역시 훈육의 대상이었다. 미국 선교사들이 이렇게 엄격하게 한국 사람들을 훈육했던 이유는 그들이 한국 개종자들의 진정성을 어느 정도 의심했기 때문이다.
3-9 세계 어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한국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와 동기가 있었다. 물론 이들은 일반적으로 서양 종교의 가르침에 관심이 있었고 영적인 능력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 선교사들이 소개해 준 기독교는 한국의 민중들에게 돈과 권력의 종교 널리 인식되었다. 그럼으로 미국 선교사들의 인상적인 집과 상대적으로 호화스러운 삶, 그들의 치외법권, 그들이 가르친 서양 학문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3-10 많은 수의 한국 사람들이 음식과 돈, 그리고 의료 혜택을 위해 교회에 참여했다. 이들의 공통된 질문들은 “거기에는 먹을 것이 있나요?” 혹은 “내가 예수를 믿으면 당신들이 나에게 얼마를 줄 수 있나요?” 같은 것이었다. 이사벨라 비솝(Isabella B. Bishop)은 선교 보고서에서 한국 사람들이 과연 “복음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돈에 대한 갈망 때문에 교회에 온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몇몇 한국 사람들에게 선교사들의 종교는 영향력 있는 외국인들과 부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훌륭한 철학이었고, 그들에게 쉽게 고용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어떤 이들은 선교사들이 제공했던 서양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뭔가 이익을 챙기기 위해 교회에 왔던 이들, 즉 “밥을 얻어먹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은 선교사들이 실제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고 종교적인 메시지를 전해 주었을 때, 금방 관심이 사그라들었다.
4. 부흥운동, 성경 중심 기독교
4-1 미국 선교사들은 19세기 복음주의 개신교의 후손들이었다. 19세기 미국 복음주의의 핵심 요소는 부흥운동이다. 한국 개신교회가 미국 선교사들의 탄생과 성장, 그들의 감정적이고 성경을 중시했던 복음주의적인 특징을 그대로 본받고 이어받은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한국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과 부흥운동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 관계를 고찰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한 것은 바로 해외 선교를 위한 학생 자원 운동이다. SVM에 대한 이해는 한국 선교사들을 이해하는데 특별히 중요하고, 그들이 세운 한국교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하다.
4-2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SVM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대부분이 SVM의 회원이었다. 1905-1909년 동안 한국에 온 미국 선교사들 135명 중에서 81명이 SVM 헌신자였다. SVM에 소속된 모든 미국 선교사들은 4개의 주요교단 소속이었다.
4-3 남장로교 선교의 시작은 대학생들 사이에서 해외 선교를 진척시키기 위해서 모인 SVM이 어떻게 한국 선교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SVM의 신학적 자매기관인 ‘해외선교를 위한 대학협력기구’(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s)에서 1891년에 네쉬빌에서 열린 대회에서 호레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가 연사로 초대를 받았고, 밴더빌트 대학의 신학생이었던 윤치호도 연설을 했다. 언더우드는 열정적으로 한국 선교의 필요성에 대해서 연설을 했고, 윤치호 역시 모국의 복음화를 위해 강력하게 호소했다. 이 대회에 대의원이었던 맥코믹 신학교의 루이스 테이트(Lewis B. Tate), 유니언 신학교의 윌리엄 준킨(William M. Junkin), 캐머론 존슨(Cameron Johnson), 윌리엄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은 두 연사의 뜨거운 연설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남장로교회에서는 잘 알려지지도 않은 새로운 선교지에 후원을 할 만큼 관심도 없었고 지원할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굳게 결심한 젊은 대학생들은 선교회를 설득하기 위한 캠페인을 발족시키고 호레스의 형제였던 존 언더우드(John T. Underwood)의 후원을 받아 결국 한국에 들어온다.
4-4 이렇게 수천 명의 대학생들이 이 기간 동안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고 SVM은 1880년대 후반까지 해외선교의 전초기지로 큰 역할을 했다. SVM이 해외선교의 강력한 기구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미국 중산층 청년들의 영혼에 호소했기 때문이다. SVM의 지도자들은 드와이드 무디(Dwight L. Moody)에 의해서 미국 중산층 사이에서 대중화된 성결 운동(케직-노스필드 버전)의 주제들을 강조했다. 이러한 중산층 영성운동의 핵심에는 성경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헌신과 성령충만, 성결한 삶에 대한 헌신이 있었다. 또한 SVM 대회는 감정적인 부흥운동으로서 당시 정서적으로 예민한 중산층 젊은이들의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근심을 자극하고 충동질했다. 그 결과 SVM의 선교사들은 대부분 부흥운동을 강조하고 성경을 강조하는 개신교인들이 되었다.
4-5 SVM 대회와 헌신자들의 성격은 일반적으로 한국 선교회와 선교사들에게서도 발견된다. 미국 선교사들의 전형적인 유형은 신학적 보수주의와 개인구원과 사회적 향상운동이 결합된 형태로 드러나는데, 사실 이는 SVM의 기본적인 전략이었다. 특별히 SVM의 영향은 미국 선교사들이 개인적인 회심과 성경공부를 강조하고, 개인적인 경건과 복음전도를 강조한 것에서 그들이 부흥운동에 깊게 의존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처음부터 성경은 한국 선교에서 아주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다른 선교지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한국에서 성경의 보급은 기록적이었다. 1910년도에 전 세계에 성경을 가장 많이 보급하던 영국 성서공회에서는 중국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나라보다 한국에 성경을 가장 많이 판매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의 인구가 선교지 30개국 가운데 가장 적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상당히 인상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은 한국교회의 탄생과 성장에 가장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의심할 것 없이 선교사들은 한국 기독교를 “성경 기독교”라 부를 수 있었고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다.
4-6 어떤 학자는 한국에서 선교사역의 초석은 “성경을 공부하는 모임 속에 놓여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 선교 초창기에 조직된 이런 독특한 모임들은 정규적인 주일 성경공부가 아닌, 연례 사경회를 통해 약 10일간 진행되는 형태였다. 선교사들은 성경과 기도, 그리고 복음전도를 강조하는 케직과 노스필드 사경회를 그대로 옮겨 놓았다. 거대한 성경 사경회가 열리면 수 천명의 신자들이 자신의 돈을 들여가며 먼 곳에서 모여들었다. 이런 모임에서 주로 언급되는 내용들은 죄에 대한 승리,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성령세례,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섬김, 그리고 복음전도였다. 이런 내용은 선교사들이 SVM에서 반복적으로 들었던 내용이었다.
4-7 미국 선교사들의 이러한 부흥운동의 요소들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주었는데, 특별히 20세기 초 몇 년 동안 보다 강력한 운동으로 드러났다. 선교사들 사이에서 부흥운동은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강력한 기대와 기다림의 상태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조건과 자신들의 사역이 직면하고 있는 수많은 난관들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첫 번째 관심은 한국 그리스도인의 종교에 대한 것이었다. 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선교사들은 보다 깊은 영적 체험을 위해서 특별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선교사들 사이에서 부흥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귀중한 경험을 나누길 원했다.
4-8 서로 경쟁하는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몰락한 조선인들의 삶은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늘 불안전하고 위험한 삶일 수밖에 없었다. 민족이 비극적인 몰락을 경험할 때, 국민들은 비로소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러한 불안과 결핍의 요소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선교사들이 약속한 구원과 그들의 가르침으로 돌이키게 만들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이렇게 무르익은 들판에서 엄청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웨일즈와 인도에서의 대부흥의 소식을 접한 이후,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감성을 자극하는 부흥집회를 시작했다.
4-9 이러한 집회에서 선교사들의 설교는 대부분 양심의 가책을 지적하거나 영혼을 동요시키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들의 메시지의 핵심은 죄의 고백과 회개로의 부름이었다. 이러한 집회의 현상과 결과는 미국의 대각성운동이나 심지어 오순절 운동에 비견될 만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집회에서 이들은 특별한 신체적, 영적 체험을 수반했다. 한국 부흥운동의 특별한 점은 죄를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과 죄를 뉘우치면서 대부분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07년 평양 대부흥에서는 “소리치고, 신음하며, 격렬하게 눈물을 흘리며, 땅에 엎드려지고, 입에 거품을 물며, 다양한 방식으로 발작을 일으키고, 인사불성의 절정에 이르기도 했다.” 때로 공적인 참회가 일으킨 동요는 매우 격정적이었는데, 선교사들도 놀라서 이를 자제시킬 정도였다. 장로교 선교사 베어드(Annie Baird)는 “그것은 마치 지옥을 폭로하는 것 같았다”고 평양 대부흥을 보고한 바 있다.
4-10 부흥운동의 강력한 현상이었던 죄의 공적 고백과 회개는 부흥 집회가 한국 청중들에게 자신들의 감정을 쏟아 내고 몰락한 왕국에 대한 정신적 비통함을 쏟아 내는 장소를 제공했다.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것과 한국 민중들 사이에서 증가하는 패닉 상태와 부흥운동이 병행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1905년 한국에서 일본의 섭정 기구가 설립되고 난 이후, 국내에 거주하는 군대에 강력하게 저항하던 고종 황제는 1907년에 왕권을 포기하고, 자신의 허약한 아들을 꼭두각시 왕자로 세운다. 결국 일본의 침략은 1910년 8월 29일에 절정에 이르고, 선종은 일본의 압제 정치에 그의 왕권과 나라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민중들은 격분했고,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안식처를 갈망했다. 이것이 부흥 집회와 복음전도의 관념적인 분위기였다.
4-11 개인구원을 위해서 “가슴에 호소하는” 종교 관념은 유교적 세계관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 신유학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종교가 아니라 모든 것을 포괄하는 보편적인 원리로 인식되었다. 하나님과 개인 사이에서 초합리적인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기독교와 다르게 신유학은 국가 시스템, 공적 질서, 한국 사회의 사회적 규범과 동일시되었다. 이성적이고 공적인 성격이 강한 신유학의 세계 속에서 초합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종교가 차지할 자리는 없었다. 신유학이 지배하던 오백 년 동안 합리주의와 도덕주의가 지배적이었고 감정적이고 초합리적인 종교성은 억압을 받았다. 자신들의 종교적 필요를 채우고자 샤머니즘과 불교에 의존하던 문맹자들이나 여성들이 부흥운동에 더 깊이 빠질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독교는 여성들과 특권을 가지지 못한 이들을 주로 받아들였다. 부흥 집회는 선교사들의 종교가 책을 중시하는 지적인 종교이면서 동시에 감정을 중시하는 종교라는 사실을 보여주었고, 한국에서 기독교가 불교나 다른 ‘비합리적’ 종교들의 배경 속에서 서로 교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4-12 합리적이고 공적인 세계관이 관습화된 유교 사회 속에서 한국의 개종자들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신앙’과 ‘구원’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보다는 교리를 받아들이고 선교사 교회의 가르침을 받고 기독교적인 윤리를 지킴으로 기독교 공동체에 소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흥 집회에 참석했던 대다수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청했으나, 실제로 “그들이 자신의 죄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고 감리교 선교사는 기록했다. 선교사들은 죄를 공적으로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을 그들이 가르치고 경험했던 복음주의 기독교에서 “완전한 구원”이라 생각했고, 한국 신자들이 이를 실천했을 때, 비로소 그들을 검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부흥운동에 대한 격정적인 반응이 선교사들로 하여금 한국 사람들도 서양인들처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존 무어(John Z. Moore)는 “나는 결코 한국 사람들이 서양에서처럼 종교적인 경험을 할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라고 말했지만, 부흥을 경험하고 난 이후 그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도 근본적으로 “서양의 형제일 수 있다”고 말했다.
4-13 평양에서의 부흥 현상은 한반도 전 지역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선교사들과 한국의 설교가들은 선교 센터를 순회하면서 부흥 집회를 열었다. 거대한 부흥이 전 지역을 휩쓸었고, 수 천명이 회심을 했다. 1907년에만 3만 명이 세례를 받았다. 부흥운동은 교파를 초월해서 발생했다. 북쪽에서만큼 남쪽에서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는 모든 지역에 퍼졌다. 이 부흥 운동은 심지어 만주와 중국의 일부 지역에까지 퍼졌다. 지금까지 한국은 선교 대상국으로 무시해도 괜찮을 만큼 아주 작은 나라였지만 갑자기 가장 주목할 만한 국가가 되었다. 1908년 미국의 선교 지도자였던 존 모트(John R. Mott)는 “가까운 미래에 한국은 비기독교 국가 중에서 첫 번째 기독교 국가가 될 것이다”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2년 후에 한국의 고대 왕국은 일본의 지배 아래 사라지게 되고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국왕숭배와 제국적인 신토이즘 아래 존재하게 되었다.
4-14 36년간의 일본의 식민통치(1910-1945)는 한국 개신교가 윤리적-신학적 보수주의와 부흥주의-복음주의적 실천들을 고착화시키는 환경을 만들었다. 미국 선교사들이 전한 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개인주의적 영성과 신앙의 타계성이었다. 일본의 통치자들은 이런 종교가 그리 해롭지 않다고 여겼다. 미국 선교사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한국 국민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었지 국가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그 어떠한 정치 세력이든 비난하거나 나무라지 않고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권력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미국 선교사들은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에게 승리를 거둔 것을 기뻐했다. 일본은 선교사들의 활동을 위해서 “새롭고 더 좋은 날”을 준비해주는 안내자와 같았다. 대부분의 미국 선교사들에게 일본은 적어도 한국보다 더 문명화된 나라였고 그럼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는 보다 창조적이고 만족스러운 조건들을 제공해 준다고 생각했다. 선교사들은 그들의 제자들이 일본의 통치를 받아들이길 원했고,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회개하고, 기독교인의 바른 품행으로 그들에 대한 분노와 민족적 감정, 그리고 다른 세상으로 도피하고자 하는 희망을 극복하길 원했다. 그리고 죽어버린 국가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의 에너지를 집중하기를 원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주의적” 종교는 부흥 운동 기간 동안 선교사들의 바램을 그들 속에 채워 넣음으로 내면화되었다.
5. 결론
5-1 지난 세기에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 토양에 이식시키고자 애썼던 기독교는 아마도 미국 개신교가 황혼기에 접어들던 시기 복음주의 전통이 전해준 가장 명백한 잔여물이었다. 미국에서 온 복음주의 선교사들은 한국이라는 “황무지”에 복음주의적-부흥주의 본질을 가진 교회를 성공적으로 세웠다. 이러한 성공은 “사명을 가지고 황무지”로 들어간 선교사들의 헌신과 수고, 그리고 자비심을 통해 이뤄진 것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소망이 없는 한국 사회의 혼란과 강압적인 일본의 왕권 강탈, 그리고 그 결과로 말미암은 영적인 갈망이 없었다면, 한국 선교사들은 일본이나 중국에서 사역하던 동료 선교사들보다 훨씬 사역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환경들이 미국 선교사들의 성공적인 사역과 이후에 한국 기독교에 미친 영향을 충분히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결국 종교가 사람들의 확신과 실천을 구성한다.
5-2 한국 역사의 격동기에 경험한 부흥 운동은 마치 역사의 가장 비판적인 시기라 여겨지는 미국의 대각성 운동과 유사하게 발생했고, 이는 한국 개신교의 성격을 형성하고, 한국 국민들에게 이식된 경건을 만들어 주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미국 개신교의 빠른 성장과 내면화는 역설적이게도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감소시켰고 한국 개신교의 탄생을 부추겼다. 그 결과 한국 개신교는 미국 선교사들이 전한 종교와 상당히 유사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로 만들어졌다. 미국 선교사들의 전통과 초기 한국교회는 20세기 초 한국 개신교회에 강력한 “청도교적” 윤리 기준을 남겨 주었고, “복음주의적” 신학에 대한 관심과 부흥주의적-복음적 실천을 남겨 주었다.
Dae Young Ryu, “The Origin and Characteristics of Evangelical Protestantism in Korea at the Turn of the Twentieth Century,” <Church History> 77:2 (June 2008): 371-398.
요약정리: 최경환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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