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한국의 ‘항일 감옥교회’를 아십니까?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신사참배’만이 아니라, 우상숭배를 행하는 기존의 한국교회에 저항하는 대안적 교회이기도 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지역 모임과 전국 연락망은 ‘신사참배 거부운동 교회’라는 대안적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국가권력만이 아니라 우상숭배를 행하고 배교하는 기존 교회에 맞서 형성된 대안적 저항교회였다.
신사참배 거부운동교회는 아름다운 예배당이나 제도적 조직체로 존재하지 않았다. 부산 수영 해수욕장의 비밀모임에서 시작한 이 교회는 농촌의 사랑방, 도시의 비밀 공간, 남해 섬의 내산과 하동 옥종 의 지리산 계곡, 심지어 평양 감옥 안에도 존재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감옥교회’는 오늘날 재소자들이 감옥 안의 일정 공간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교도소 교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주도하다가 구속되어 투옥된 신도들이 주일날 교도관의 강한 제재에 개의치 않고 목숨을 걸고 예배한 교회를 일컫는다. 그들은 감옥에서, 일제 교도관의 행패에 개의치 않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설교하고 신앙을 고백했다. 쇠창살과 두꺼운 벽은 감옥교회의 예배를 막지 못했다. 그 육중한 벽이 둘러싼 감옥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장 순결한 모습으로 드러난 예배당이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 수인囚人 성도들은 성삼위일체 하나님에 드리는 예배를 목숨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겼다. 이들은 평일에는 조용했다.‘손가락 대화’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주일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은 감옥 안에서, 교도관의 극성스러운 제재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다섯 차례 예배를 드렸다. 설교자는 성경책 한 권 없는 상태에서 기억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옥중 성도들은 서로의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는 구조에서도 벽을 넘어 울려 퍼지는 목소리로 함께 찬송하고 큰 소리로 기도하고, 순차적으로 설교를 맡았다. “일본제국은 무너진다,” “우상숭배하는 나라는 망한다”고 설교했다. 우상숭배를 금하는 하나님의 계명과 일제의 패망을 선포하는 그들의 설교는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자면 철저한 ‘정치설교’였다. 그 설교는 국가 위에 계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선포하는 신앙고백의 메시지였다.
평양 감옥의 교도관들은 주일예배가 시작될 때마다 고함을 질렀다. “시끄럽다! 조용히 해라!” 그러나 감옥교회의 성도들은 ‘국가’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 예배를 중단하라는 요구가 하나님의 뜻과 불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들에게 예배는 목숨을 걸고 드리는 신앙행위였다. 그들은 일제에 대한 거역과 불순종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임을 믿었다.
교도관들은 예배자들을 끌어내어 잔인하게 구타하고 고문했다. 두들겨 맞고 피를 흘리는 성도들의 비명과 신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신앙고백이었다. 감옥교회는 매 주일 다섯 차례 예배를 드렸다. 그 때마다 일제 교도관의 매질과 고문이 반복되었다. 부상자들은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예배를 드렸다. 일제의 임박한 패망과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을 설교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 구성원들에게 주일성수와 예배는 자신들의 생명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국가는 그들의 몸을 가둘 수는 있어도 양심과 신앙, 기도와 찬송,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빼앗을 수는 없었다. 예배자들이 두려워한 것은 매질, 고문, 감옥, 죽음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을 두려워 했다. 일제 교도관이 “조용히 하라!”고 소리칠수록 감옥교회는 더욱 우렁찬 목소리의 기도와 찬송과 결기에 찬 설교로 응답했다.
일제는 한동안 폭력으로 그들의 예배를 막으려 했지만, 마침내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매 주일 반복되는 예배를 고문으로도, 매질로도, 독방 형벌로도 끊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일제는 감옥교회의 주일예배를 어느 시점에 더 이상 가로막지 않았다. 순교를 각오한 예배자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주일마다 울려 퍼지는 찬송과 기도와 설교의 외침은 해방의 날까지 계속되었다.
감옥교회에 ‘십일조 헌물’ 十一條獻物을 바치는 성도가 있었다. 통영 출신 최덕지 전도사는 자신에게 배급된 음식 가운데 십분의 일을 떼어 굶주리고 허약한 동료 수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일제의 감옥은 영양실조와 배고픔이 넘치는 곳이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 헌금을 평생의 신앙 원칙으로 삼았던 그녀는 감옥에서도 그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다. 감옥에서 바칠 수 있는 것은 음식이 전부였다. 교도관이 배식한 박한 음식의 일부를 동료들에게 십일조 헌금처럼 바쳤다.
감옥교회는 1940년 무렵부터 1945년 8월 해방에 이르기까지 약 5년 동안 평양감옥에 존재했다. 철문과 벽돌로 둘러싸인 곳이었지만, 그곳은 그 어떤 교회당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한 거룩한 성전이었다. 쇠창살은 사람의 몸을 가둘 수 있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믿음을 가두지 못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감옥교회 이야기는 출옥 성도 조수옥 전도사가 필자에게 직접 증언한 것이다. 그녀가 운영하는 사회사업 기관인 마산 인애원에서, 임종을 며칠 앞둔 시점에, 전 경향일보사의 사장 김경래 장로의 부인과 서울 서문교회의 어느 여신도 권사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조수옥은 최덕지의 ‘십일조’ 헌을 이야기 하는 대목에서 그 행위 율법주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정성은 매우 고귀하다고 말했다. 출옥성도 최덕지는 해방과 더불어 출소한 뒤에 재건교회 운동을 이끌었다.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로 무너졌으므로 이를 다시 세우는 교회재건운동을 전개했다.
조수옥(1914-2002)은 경상남도 하동에서 출생했다. 1938년 진주성경학교를 졸업한 뒤 삼천포교회와 부산 초량교회에서 전도사로 봉사했다. 호주장로교회 주한 선교부 순회전도사로 시무했다. 1939년부터 본격적으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했다. 서부경남 지역의 신사참배 거부운동 교회들을 이끌었다. 조수옥은 1940년 9월 부산에서 검거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약 5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조수옥은 광복과 더불어 마산 인애원, 경남 종합사회복지관, 청소년복지관 등을 설립한 사회사업가로 활동했다. 그는 제1회 ‘유관순 상’ 수상자(2002)다. 대한민국이 그녀의 사회사업을 기려’ 국민훈장 동백장’(1986)을 수여했다. 가나안농군학교 설립자 일가一家 김용기 장로를 기념하는 ‘일가상’(1997)을 수상했다.
‘감옥교회’가 증언한 것은 침략 국가가 폭력으로 성도들의 몸은 가둘 수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복음을 믿는 신앙의 자유는 결코 가둘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일제는 예배를 생명과 같이 소중하게 여기는 신도들의 목숨을 건 감옥교회의 예배를 중단시키지 못했다. 일제가 우상숭배를 강요하며 교회를 국가권력에 굴복시키려 했지만, 감옥교회 성도들은 그곳을 예배 처소로 바꿨다. 그들은 감옥을 기도와 찬송, 말씀 선포와 신앙고백이 그치지 않는 예배 처소로 만들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 교회와 감옥교회는 교회의 본질이 화려한 예배당이나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신앙공동체에 있음을 옥중 삶으로 보여 주었다.
감옥교회는 국가권력이 강압에도 침묵하지 않은 교회였다. 우상숭배를 거부하며 하나님께만 충성을 바치고 순교를 각오한 항일투쟁자들의 교회였다. 이 교회는 인간의 권력이 하나님의 주권을 대신할 수 없음을 증언했다. 국가권력이 교회를 지배하려 할 때 교회가 어디에 서야 하는지를 보여 준 역사적 이정표였다. 감옥교회는 한국교회 역사에 등장한 가장 장엄한 예배공동체였으며, 가장 순수한 신앙고백 공동체였다. 교회의 참 자유와 그리스도의 왕권을 몸으로 증언한 거룩한 공동체였다.
해방 뒤 출소한 출옥 성도들은 감옥교회의 경험에 따라 성도들에게 환난의 때를 대비하여 평소에 성경 말씀을 많이 암송하고, 찬송 가사를 많이 암기하라고 가르쳤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동력 한상동 목사는 출옥 성도들이 세운 고려신학교 학생들에게 자주 이 가르침을 주었다. 이 흐름에서 이 학교의 학생들은 신악성경 로마서 전체 암송 시도와 한 학기 동안 로마서 100번 읽기 운동을 전개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 교회는 조직과 연락망을 갖추고 있었다. 평양에 거점을 둔 밀양 출신 이인재 전도사는 전국 연락 책임자로 활동하며 지역 공동체들을 연결했다. 각 지역을 오가며 정보와 소식을 전달했다. 흩어진 저항 세력 간의 연대를 유지하는 연결망을 만들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 교회는 부산 중심의 경남 지역, 평양 중심의 평안도 지역, 봉천 중심의 만주 지역에 크게 형성되었다. 여수·순천, 대구, 안동, 영주, 마산, 하동, 진주, 거창 등지의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비밀리에 예배와 교제를 지속했다. 칼빈주의 신앙에 기초한 공동의 신앙고백과 개혁주의 정치신학에 부합하는 저항정신을 공유한 전국적 신앙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외형적 제도와 교회 권력이 무너져도 그리스도의 교회는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교회라는 조직이 국가권력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할 때 얼마나 쉽게 배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증언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사랑방교회, 숲속교회, 감옥교회는 교회의 본질이 건물이나 조직이나 제도에 달린 것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이 교회는 프랑스의 광야교회, 스코틀랜드의 들판교회를 연상시키는 한국 장로교회 안의 저항공동체였다. 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순수한 신앙고백을 지닌 그리스도의 신부였다.
최덕성, <경계선: 개혁주의 정치신학>(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26)에 실려 있는 글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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