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노 길들이기
―분노에 대한 한 편의 묵상(칠거지악, 3-8)
분노, 인간의 가슴 속에 놓인 작은 화로, 겉으로는 차분해 보이는 방 안에서도, 그 화로는 은근하게 붉은 숨을 내쉰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갑작스런 모욕, 기대가 무너지는 소리,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부딪히는 둔탁한 벽, 그때 화로의 불씨는 바람을 얻고, 혀끝이 먼저 붉어진다.
그러나 그 불은 처음부터 악이 아니었다. 분노는 상처가 “여기 아프다”고 신호를 보내는 방식이며, 정의감이 깨어 있을 때만 울리는 경보음이다. 문제는 경보음이 우리를 깨어나게 하느냐, 아니면 우리를 무너뜨리느냐에 달려 있다. 그 분기점에서 우리는 불을 다루는 제련공이 되거나, 창고에 불을 지르는 방화범이 된다.
분노의 근원은 대개 세 갈래에서 솟는다. 첫째, 상처다. 무시당했다는 느낌, 사랑받지 못했다는 기억, 존중받지 못한 어린 날의 어두운 복도들—그곳에서 들었던 말들이 아직도 우리의 벽에 못처럼 박혀 있다. ‘너 같은 놈은 필요 없어’라는 한 마디가 수십 년을 살아 꿈틀거리는 독을 품기도 한다. 그래서 별것 아닌 말 한 조각에도 우리는 그 못을 다시 만져 피를 낸다. 몸은 현재를 살지만, 분노는 종종 과거의 방에서 깨어난다.
둘째, 좌절된 욕구다. 마음속에 미리 그려둔 세계가 있다. 오늘은 이렇게 흘러야 하고,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해야 하며, 나는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작은 설계도. 줄을 오래 서서도 품절이라는 표지판을 마주치는 순간, 긴 기다림의 에너지가 방향을 잃고 불이 된다. 공익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도 내 울타리 안을 건드리면 우리는 즉시 경계색을 띤다. 욕구가 클수록 불길도 높다.
셋째, 교만이다. 교만은 마음속 왕좌에 앉아 말한다. “내 생각이 가장 옳다. 내 권위는 존중받아야 한다.” 이 왕좌가 흔들릴 때, 자존심은 곧장 칼을 찾는다. 겸손한 자는 모래처럼 충격을 흡수하지만, 교만한 자는 유리처럼 금이 가고, 그 금 사이로 뜨거운 공기가 드나든다.
이 세 갈래는 종종 한 강으로 합류한다. 누군가의 무심한 말(상처)이 오래 준비한 나의 기대(욕구)를 깨고, 그 모든 것을 “나를 어떻게 보고!”(교만)라는 의분이 감싼다. 그 순간 얼굴은 불처럼 달아오른다. 고대의 언어가 말하듯, 코가 벌렁이고 숨이 뜨거워지며, 안색이 바뀌고, 가슴은 북을 친다. 불길이 몸의 창문들로 신호를 보낸다.
이때 내 손이 칼이 되기도 하고, 혀가 칼이 되기도 한다. 행동의 칼은 눈앞의 관계를 베고, 말의 칼은 보이지 않는 영혼을 깊게 긋는다. 우리는 종종 주먹보다 혀가 더 먼 거리까지 파괴를 보낸다는 것을 뒤늦게 배운다.
그러나 불은 오직 파괴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대장간의 불은 칼을 만들고, 도공의 가마는 그릇을 빚는다. 분노 또한 방향을 얻으면 정의의 열이 되고, 조율을 받으면 사랑의 온기가 된다. 문제는 어떻게 이 불을 다루느냐다. 여기, 불과 함께 사는 몇 가지 길을 제안한다. 비법이라기보다, 오래된 지혜의 손놀림이다.
첫째, 불의 근원을 비추라—분노의 등불을 켜고 현장을 기록하라. 화가 날 때, 우리는 흔히 외부의 성냥개비만 탓한다. 그러나 불길은 대개 안쪽의 마른 장작에서 솟는다. “무엇이 상처였는가? 어떤 기대가 무너졌는가? 내 자존심의 어떤 부속이 흔들렸는가?”를 써보라. 그날의 말, 표정, 시간, 장소, 내 몸의 반응, 이후 벌어진 일들까지 적어라. 이 단순한 기록은 놀라운 반전을 가져온다. 실제 잘못이 아닌 ‘내 해석’이 불을 키운 순간들이 드러난다. 허상(가상의 모욕)에 내린 실재의 형벌이 보인다. 기록은 불길에 이름표를 붙여 주고, 이름 붙은 불은 이미 반쯤 길들여진다.
둘째, 시간을 사라—불은 공기와 시간에 산다. “듣기는 빠르게, 말하기는 더디게, 성내기는 더디게.” 가장 현실적인 기술은 지연이다. 입안에 침이 고일 때까지, 문자 그대로 혀를 다물고 기다려보라. 그 짧은 지연은 말의 칼이 칼집으로 돌아갈 시간을 번다. 얼굴의 피가 서늘해질 때까지 걸어라. 창밖의 나무를 세어라. 1분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이 짧은 사막을 건너오면, 불길은 이미 한 겹 낮아져 있다. 지연은 비겁한 후퇴가 아니다. 이는 화로의 뚜껑을 덮어 산소의 유입을 줄이는 숙련된 손놀림이다.
셋째, 몸을 움직여 불을 옮겨 심어라—분노는 에너지다. 막으면 터지고, 돌리면 밀어준다. 글상자를 열고 쓰라. “나는 지금 화가 났다. 이유는 …, 나는 바란다 ….” 종이에 적힌 분노는 종이 위에서 열을 잃는다. 가능하다면 땀을 흘려라. 달리기, 빠른 걷기, 숨 고르기—몸의 엔진이 열을 태워 없앤다. 루터가 격앙될수록 책상에 더 오래 붙었다는 이야기는 상징적이다. 불의 방향을 창조 쪽으로 꺾는 것이다.
넷째, 관계에 말을 걸어 오해에 바람구멍을 내라—분노는 종종 오해의 밀실에서 자란다. “나는 방금 그 말이 무시처럼 들려서 마음이 아프다”라는 1인칭 문장으로, 내 느낌을 공격 없이 건네라. 상대를 단죄하지 말고, 내 상처를 설명하라. 파편이 가라앉은 뒤 시간을 잡아 대면하라.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이 싸움이 아니라 화해라는 사실을 상대가 믿을 수 있을 만큼, 천천히, 정직하게, 구체적으로 말하라. 많은 분노는 빛을 맞는 순간, 허공의 그림자였음을 드러낸다.
다섯째, 더 큰 법정에 맡겨라—복수는 대개 계산이 틀린 산수다. “정확히 받은 만큼” 갚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고, 우리의 손은 늘 한 줌 더 쥔다. 그래서 악순환이 시작된다. ‘심판을 위탁하는 용기’는 분노를 이기는 신학적 길이다. “갚음은 내게 있다”는 더 큰 손에 맡기는 훈련—그것은 정의를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라, 정의의 최종 심판을 내 손에서 내려놓는 용기다. 다윗이 칼을 쥘 수 있을 때 칼을 쥐지 않았던 장면을 떠올려라. 그 순간 다윗은 역사보다 깊은 지하수에서 물을 길었다. 맡김은 영혼의 온도를 낮추는 가장 강력한 냉각수다.
여섯째, 용서로 뿌리를 뽑아라—억제는 잎을 자르고, 용서는 뿌리를 뽑는다. 용서는 가해자를 싸고돈다는 뜻이 아니다. 용서는 나를 과거의 감옥에서 풀어주는 출소장이다. 헬라어가 말하듯, ‘풀어 보낸다’. 나는 나를 체포하던 기억을 놓아 보낸다. 용서는 감정의 느낌이 아니라 의지의 결단에서 시작한다. “나는 오늘, 그 일을 내 손에서 내려놓기로 선택한다.” 이 문장을 오늘의 날짜와 함께 써라. 내일 또 써라. 어느 날, 가슴의 자물쇠가 딱 하는 소리를 낸다. 그때야 비로소 상처는 과거형이 된다.
일곱째, 겸손으로 방화벽을 세워라—교만은 분노의 초고속 연료다. 겸손은 방화벽이다. 겸손은 나의 생각을 낮추어 타인의 언어가 머무를 공간을 만든다. “혹시 내가 틀렸을 수 있다”는 작은 문장은 불길이 번질 방향을 돌려 세운다. 겸손한 사람은 모래다. 파도가 쳐도 형체를 바꿔 흡수한다. 교만한 사람은 유리다. 작은 충격에도 깨지고, 깨질수록 날이 서며, 더 많이 베인다.
여덟째, 기도와 침묵으로 불을 빛으로 바꿔라—사막의 수도사들은 분노를 기도의 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기도는 분노의 적이 아니라, 분노의 정련소다. 호흡과 함께 짧은 기도를 반복하라. “주여, 내 안의 불을 평화의 불로.” 이 간결한 호흡 기도는 뇌와 심장 사이의 빠른 통신을 느리게 만든다. 침묵은 무력감이 아니라, 지휘자의 손짓이다. 침묵이 들어오면 오케스트라의 소란이 정돈된다. 그 틈에, 불은 빛으로 바뀐다.
아홉째, 언어의 칼집을 만들라—우리는 말로 세상을 세우거나 허문다. 즉각적 언어 대신 비유와 질문을 써라. “당신은 항상…” 대신 “방금 나는 이렇게 들렸다. 당신의 의도는 무엇이었나?” 질문은 공격 대신 탐색을, 전쟁 대신 지도를 꺼낸다. 그리고 유머를 잊지 마라. 유머는 분노의 옆구리에 있는 작은 개폐밸브다. 적절한 미소 하나가 증기를 뺀다.
열째, 공동선으로 에너지를 전환하라—분노의 에너지는 거대하다. 이 힘을 공동선을 향해 돌릴 때, 불길은 횃불이 되고 길잡이가 된다. 억울했던 자가 제도 개선의 첫 번째 서명을 시작하고, 상처 입은 부모가 안전한 횡단보도를 만드는 운동을 시작할 때, 개인의 분노는 공공의 보호망으로 변한다. 불이 난방이 되는 순간이다.
이 모든 길의 바닥에는 한 가지 진실이 흐른다. 분노는 사랑의 그림자다.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의에 대한 분노는 정의를 향한 사랑이고, 배신에 대한 분노는 진실을 향한 사랑이다. 그러니 분노를 미워만 하지 말고, 그 사랑의 뿌리를 찾아 안아라. 다만 그 사랑을 하나님 쪽으로 돌려라. 그분의 분노는 거룩에서 나오고 사랑으로 끝난다. 인간의 분노가 그 모양을 닮을 때, 우리는 불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불에 삼켜지지 않는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 선명하다. 분노의 밤도 그렇다. 상처가 성좌를 이루고, 좌절된 욕구의 파편들이 하늘에 박혀 반짝인다. 그러나 그 하늘을 오래 올려다보면, 별들 사이로 보이는 한 줄의 은하수가 있다. 그것이 용서이고, 맡김이고, 겸손이며, 기도다. 그 은빛 강물 위로 새벽이 온다. 불길이 빛으로 변해 누군가의 길을 비춘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안다. 분노를 이기는 법이란, 불을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불을 다루는 예술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예술의 이름은—사랑이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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