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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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전적 선교는 사회복음의 현대적 변형

 

케이프타운 로잔대회 분석:

 

 

아래의 글은 김요셉 님이 페이스북에 개시한 글이다. <기독교한국>에 게시한 글인 것 같으며 글쓴이는 누구인지 확실치 않으나, 김요셉 님인 것 같다.

 

 

케이프타운 서약(The Cape Town Commitment, 2010)은 제3차 로잔대회에서 198개국 4,200명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모여 채택한 문서로서, 21세기 복음주의 선교의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이 서약은 전 세계 복음주의 운동의 광범위한 합의를 반영하려는 시도였으나, 성경의 무오성, 복음의 유일성, 그리고 교리적 순수성을 핵심 가치로 삼는 전통적 복음주의 관점에서 볼 때 여러 우려스러운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케이프타운 서약을 전통적 복음주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할 절박한 필요성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첫째, 로잔 운동의 중요성과 케이프타운 서약이 오늘날 복음주의 선교와 신학에 미치는 광범위한 영향력을 고려할 때, 그 내용에 대한 심층적인 검토는 필수적입니다. 단순히 문서를 수용하기보다, 그 안에 담긴 신학적 지향과 실천적 함의를 면밀히 평가함으로써 우리 신앙의 핵심을 지키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둘째, 복음주의 내부에서 점차 확산되는 신학적 포용주의와 실용주의적 경향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의의가 있습니다. 서약이 제시하는 일부 개념들은 전통적 복음주의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거나 본질을 훼손할 위험이 있기에, 이에 대한 명확한 성경적 판단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 이 분석은 복음주의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성을 재확인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복음의 절대적인 진리와 선교의 본질적인 사명을 굳건히 붙잡고, 세속화의 흐름 속에서 교회의 거룩성을 지켜나가기 위한 성경적 원칙들을 재천명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 복음주의 운동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케이프타운 서약의 긍정적 측면들

 

 

케이프타운 서약은 몇 가지 긍정적인 측면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첫째, 성경의 권위에 대한 명확한 확인이 돋보입니다. 서약은 성경의 무오성과 최종적 권위를 언급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정통적으로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배타성을 확언합니다. 이는 복음주의 신앙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둘째, 복음의 핵심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엿보입니다. 대속적 속죄의 교리를 유지하고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에 의한 구원론을 강조하며 개인적 회심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부분은 복음주의의 본질적 메시지를 지키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셋째, 선교 사명의 재확인은 고무적입니다. 지상 대명령의 중요성을 재천명하고 미전도종족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며 복음전도의 우선순위를 인정하는 것은 복음주의 운동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전통적 복음주의 관점에서의 주요 우려사항들

 

 

이러한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케이프타운 서약은 전통적 복음주의의 핵심 가치와 충돌하거나 이를 약화시킬 수 있는 여러 신학적, 선교학적, 그리고 교회론적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특히, 르네 빠디야와 같은 인물들이 주장한 '통전적 선교' 개념이 로잔 운동에 미친 영향은 케이프타운 서약의 방향성에 깊이 반영되어 있으며, 이는 전통적 복음주의의 주요 우려사항으로 이어집니다. 이 현상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의 권위를 해체하고 인간 이성을 절대화하면서 이데올로기적 우상숭배가 침투할 토양을 마련했던 역사적 흐름과 그 궤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게 평가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만든 이념과 체제가 절대적 진리를 자처하며 맹목적 숭배를 요구할 때, 그 결과는 죽음과 파괴였다는 20세기의 참혹한 역사는 현대 복음주의가 직면한 유사한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1. 복음의 본질 왜곡 및 신학적 포용주의에 대한 우려

 

 

정통 복음주의의 핵심은 인간의 죄와 영원한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영적 진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르네 빠디야가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내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 오셨다"고 주장한 것처럼, 그의 관점은 복음의 초점을 사회적 차원으로 옮겨놓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의 주된 목적이 영혼 구원이라는 성경적 진리를 약화시킬 위험을 내포합니다.

 

 

빠디야와 그의 라틴아메리카 동료들이 마르크스주의적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아 복음주의에 사회정치적 의제를 도입하려 시도한 것은 순수한 복음 메시지의 전달에 왜곡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의 권위를 해체하고 인간의 이성을 절대화하여 절대적 진리 기준을 상실하게 만든 결과와 유사합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가 부정되자, 인간이 만든 이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고, 이러한 흐름은 20세기 이데올로기들이 자신들만이 절대적 진리를 소유한다고 주장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케이프타운 서약이 제시하는 "경계 안에서의 폭넓음(breadth within boundaries)"이라는 개념은 전통적 복음주의가 견지해야 할 신학적 경계선을 모호하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서약은 "우리는 복음주의 신앙과 선교를 정의하는 성경적 경계선이 있으며, 이러한 경계선 안에서 폭넓음과 다양성이 있다고 믿는다"고 명시하지만 (케이프타운 서약, 파트 1, 섹션 I.11.C.11), 실제 적용에 있어서 이 '폭넓음'은 전통적 복음주의의 핵심 교리적 입장을 희석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낳습니다. 특히, 여성 목회자 문제와 같은 민감한 교리적 사안에 대해 서약은 "성경적 권위와 신학적 반성 안에서 다양한 입장이 존재함"을 인정하며 양쪽 입장을 모두 용인하는 접근을 취합니다 (케이프타운 서약, 파트 1, 섹션 I.11.C.11). 이는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에 대한 전통적 복음주의의 확고한 입장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서약이 "다른 전통의 교회들"과의 연합을 강조하는 것은 (케이프타운 서약, 파트 2, 섹션 II.A.1) 교리적 차이에 대한 비판적 분별보다 가시적인 연합을 우선시하는 경향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포괄적인 언어는 점진적으로 복음의 핵심 교리와 부차적 교리 사이의 구분을 흐리게 하여, 결국 신앙의 본질을 훼손할 위험을 내포합니다. 성경은 신자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할 것을 명령하며("너희는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 고후 13:5), 이는 명확한 교리적 기준과 분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가복음 8:36)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믿음은 모호한 경계가 아닌, 확고한 영적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2. 사회적 복음의 과도한 강조 및 존 스토트의 타협적 입장

 

 

케이프타운 서약은 "총체적 선교(Integral Mission)" 개념을 통해 복음전도와 사회적 참여를 동등한 위치에 두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주장을 펼칩니다. 서약은 "온전한 선교는 복음전도와 사회정의라는 두 날개를 가진다"고 표현하며 (케이프타운 서약, 파트 2, 섹션 II.A.2), 이는 사회 정의를 복음전도와 동등한 위치에 두어 복음전도의 고유한 우선순위를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환경 문제나 기후 변화와 같은 주제들이 복음적 사명과 동일선상에 배치되거나, 구조적 죄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개인의 죄 문제의 심각성을 상대화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통전적 선교' 개념의 확산에는 존 스토트의 입장 변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스토트는 원래 복음 전도의 우선성을 강조했으나, 1974년 로잔대회를 전후하여 그의 입장이 급격히 변화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성경적 확신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고조되던 제3세계 신학자들의 정치적 압력과 시대적 조류에 대한 타협으로 비판받습니다. 스토트가 로잔 언약에서 "사회적 책임"이라는 모호한 용어를 사용한 것은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했고, 결과적으로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정치적 활동, 사회 개혁 운동, 심지어 혁명적 활동까지도 교회의 정당한 사명으로 간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개념적 모호함은 교회의 사명에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이는 개인 구원보다 사회 개혁을 우선시하며 복음의 본질을 세속화한 19세기 사회복음주의의 등장과 그 궤를 같이합니다. 사회복음주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인간의 노력으로 실현 가능한 사회적 유토피아로 해석하며, 기독교인들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쉽게 동조하게 만드는 신학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6:33)고 가르치며, 이는 영혼 구원을 위한 복음전파가 그리스도인의 가장 시급하고 본질적인 사명임을 강조합니다. 사회적 참여는 복음의 자연스러운 결과이자 열매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 자체로 복음의 핵심과 동등한 위치에 놓여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복음 전파와 제자 양육에 있습니다. 그러나 통전적 선교 개념은 교회가 사회개혁, 정치적 참여, 빈곤 퇴치 등 다양한 세속적 과제까지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는 제한된 교회의 자원과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본질적 사명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의 '사회복음'이 복음의 초자연적 요소를 배제하고 사회 개혁을 강조했던 것처럼, 통전적 선교 개념은 사회복음의 현대적 변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종교 간 대화에 대한 과도한 개방성

 

 

서약은 타종교와의 관계에서 지나치게 융화적인 접근을 보인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타종교인들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는 서약의 태도는 (케이프타운 서약, 파트 2, 섹션 II.B.1) 자칫 종교적 상대주의로 이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또한, 종교의 자유를 위한 연대가 복음의 유일성과 배타성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복음의 유일성에 대한 강조가 부족해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4:12)고 명확히 선언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강조합니다. 이 절대적인 진리를 흐리게 하는 어떠한 접근도 경계해야 합니다.

 

 

4. 에큐메니컬 운동과의 모호한 관계 및 문화적 상대주의 침투

 

 

케이프타운 서약은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같은 자유주의적 에큐메니컬 운동과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서약이 "다른 전통의 교회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포용을 강조하고 교리적 순수성보다 연합의 가시성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케이프타운 서약, 파트 2, 섹션 II.A.1) 복음주의의 고유한 정체성을 희석시킬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1975년 멕시코시티에서 빌리 그레이엄이 로잔운동이 "복음전도와 선교에만 엄격히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스토트의 강력한 반대와 사임 위협으로 인해 그레이엄의 비전이 관철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로잔운동은 점차 복음 전도의 핵심 사명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회정치적 의제를 포괄하는 방향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또한, 빠디야의 '문화 기독교' 비판은 일면 타당한 측면이 있으나, 서구 선교사들의 문화적 우월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성경적 진리 자체가 문화적으로 상대화될 수 있다는 위험한 전제를 내포하며, 이는 케이프타운 서약의 문화적 다양성 존중이 지나쳐 진리의 절대성을 약화시키는 문화적 상대주의가 침투할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상황화 신학의 과도한 수용이나 서구 기독교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은 문화적 맥락이 성경적 진리를 압도하여 복음의 불변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를 자아냅니다. 이렇듯 특정 문화적 맥락이 진리를 압도하는 경향은 19세기 독일의 문화개신교(Kulturprotestantismus)가 기독교와 독일 문화를 동일시하며 후에 나치 이데올로기가 기독교 내부에 침투할 통로를 제공했던 것과 유사합니다. 이는 신학적 반유대주의의 뿌리가 되었듯이, 문화적 상대주의는 복음의 보편성과 절대성을 훼손하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5. 여성 사역 및 번영신학에 대한 미흡한 대응

 

 

여성 사역 문제에 있어 서약은 성경적 남녀 역할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회피하며, 여성 목회자 문제에서 양쪽 입장을 모두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케이프타운 서약, 파트 1, 섹션 I.11.C.11). 이는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 "여자는 조용히 하여 범사에 순종하며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딤전 2:11-12)라는 상보주의적 입장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번영신학에 대해 서약은 이를 거부하면서도 그 뿌리에 대한 신학적 분석이 부족하여 현상적인 비판에 그치고 근본적인 신학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세속적인 성공 추구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해석학적 문제점, 선교학적/교회론적 우려, 그리고 교회 쇠퇴의 실제 사례들

 

 

케이프타운 서약에는 성경 해석의 다원주의와 내러티브 신학의 과도한 수용이라는 해석학적 문제점도 발견됩니다. 다양한 해석 전통을 동등하게 인정하려는 경향과 성경의 객관적 의미보다 주관적 적용을 강조하는 태도는 역사적-문법적 해석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을 단순히 "하나님의 이야기"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은 명제적 진리의 중요성을 상대화하고 교리적 정확성보다 실용적 적용을 우선시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부인하고 인간 이성을 절대화하면서 절대적 진리 기준을 상실한 것과 유사합니다.

 

 

선교학적 측면에서는 선교의 우선순위가 혼란스러워질 위험이 있습니다. 영혼 구원과 사회 개혁을 동등하게 주장함으로써 복음전도의 긴급성이 약화되고 지상대명령의 핵심이 모호해질 수 있습니다. 문화적 적응이 복음의 불변성보다 과도하게 강조되어 진리의 타협으로 이어지고 기독교의 독특성을 상실할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교회론적으로는 교회의 정체성 혼란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가시적인 연합이 교리적 순수성보다 우선시되고, 교회의 거룩성보다 포용성이 강조되며, 교회 징계의 필요성이 간과될 위험이 있습니다. 지도력 구조에 있어서도 성경적 권위 구조에 대한 애매한 입장과 평등주의적 접근은 성경적 질서를 약화시키고 목회적 권위를 상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선교학적 지향의 변화는 실제 교회의 쇠퇴로 이어지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그 위험성을 입증합니다. 미국 주류 개신교 교단들은 사회복음과 진보적 신학을 수용한 후 급격한 회원 감소를 경험했습니다. 1965년에 약 3,100만 명이었던 회원 수가 2005년에는 2,100만 명으로 감소했고, 2009년에는 미국인의 단 15%만이 이들 교단에 속해 있었습니다. 특히 진보적 신학으로 빠르게 전환했던 교단들의 쇠퇴가 더욱 뚜렷했으며, 장로교(PCUSA)1965425만 명에서 2022119만 명으로 급감했습니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쇠퇴가 단순히 사회의 세속화 때문만이 아니라, 교회가 복음의 본질적 메시지보다 사회정치적 의제에 중점을 두면서 발생했다고 분석합니다.

 

 

캐나다 성공회(Anglican Church of Canada)의 사례 역시 이러한 경향을 뒷받침합니다. 사회정의와 진보적 의제에 중점을 두면서 2001년 약 64만 명이었던 회원 수가 201736만 명으로 약 44% 감소했으며, 세례 건수도 급감하여 현재 추세라면 2040년경에는 교인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주목할 점은 캐나다 성공회 내에서도 전통적 신학을 유지하는 북극 교구는 오히려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연합감리교회(UMC) 또한 1968년 창립 당시 약 1,070만 명의 회원을 보유했으나, 진보적 신학과 사회정의 강조로 인해 현재 690만 명 이하로 감소했습니다. 최근에는 신학적 자유주의 가속화로 인해 2023년 한 해에만 홀스턴 연회에서 264, 오클라호마 연회에서 55개 교회가 교단을 탈퇴하는 등 교단 내 분열이 심화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은 교회가 사회정의 활동에 중점을 두면서 제자훈련과 복음전도라는 본질적 사명이 약화되었고, 이로 인해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고 분석합니다.

 

한국 IVF(기독학생회)의 사례 또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한국 IVF는 원래 대학생들의 영적 각성과 복음 전도, 성경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순수한 복음주의 학생 운동으로 출발했으나, 1970년대 중반 이후 국제대학생선교회(IFES)를 통해 르네 빠디야와 존 스토트의 '통전적 선교' 개념을 수용하면서 그 성격이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빠디야 자신이 IFES의 라틴아메리카 지역 대표로 활동하며 자신의 신학적 관점을 확산시켰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합니다. 1980년대 들어 한국 IVF는 캠퍼스 복음화보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 노동운동, 사회정의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였고, 이는 당시 한국의 진보적 사회운동과 구분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러한 방향 전환의 결과, 1970년대까지 꾸준히 성장하던 IVF 회원 수가 198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복음의 본질적 메시지보다 정치적 활동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단체의 변화된 성격에 실망하여 떠났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의 연구와 통계에 따르면, 사회정의 의제를 중심으로 교회의 사명을 재정의한 교단들은 장기적으로 성장하기보다 쇠퇴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교회가 신학적으로 자유화되고 사회정의 활동에 집중할수록 젊은 세대의 유입이 감소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는 교회가 사회적 활동에 과도하게 집중하면서 영적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고, 영적 양육과 제자화를 약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회 쇠퇴의 양상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인간의 죄성을 부정하고 인간 본성의 선함과 진보 가능성을 과도하게 낙관했던 치명적 오류와 연결됩니다. 공산주의의 "새로운 인간" 창조 이념, 나치즘의 "우월한 인종" 육성 목표 등 20세기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들이 인간 완전성의 신화에 기반했듯이, 교회가 인간의 노력으로 지상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인간론에 빠질 때 필연적으로 본질을 상실하게 됩니다.

 

실천적 함의 및 대안적 제언

 

이러한 우려사항들은 실천적인 함의를 가집니다.

 

첫째, 선교 전략에 혼란을 초래하여 복음전도와 사회 사업의 동등한 비중으로 인해 선교사들이 우선순위를 정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둘째, 교육적 혼란이 증가하여 신학교와 성경학교에서 복음주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심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셋째, 다양한 입장을 수용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교회 내 갈등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특정 정치적 이념에 편향될 때, 특히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떠나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최근 바나 그룹의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의 35%"교회가 너무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교회 참석을 중단했다고 응답했습니다. 이는 복음이 진보든 보수든 특정 정치적 입장과 동일시될 때, 교회는 그 보편적 호소력과 초월적 메시지를 잃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현상은 이데올로기가 종교적 성격을 띠며 우상숭배로 변질되는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20세기 공산주의, 파시즘, 나치즘, 극단적 자본주의 등은 모두 자신들만이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고, 구원을 약속하며, 맹목적인 신앙고백과 헌신을 요구하며, 이단과 배교자를 정죄하는 종교적 패턴을 보였습니다. 1억 명에 달하는 공산주의 희생자들, 홀로코스트의 참상, 극단적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의 폐해는 인간이 만든 이념과 체제가 하나님의 자리를 탐할 때 어떤 비극이 발생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로마서 125절의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겼음이라"는 말씀처럼, 물질적 신상이든, 추상적 이념이든, 정치적 체제이든, 피조물을 창조주의 자리에 두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교회가 특정 정치적 이념이나 사회 운동에 깊이 연루될 때, 복음은 세속화되고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며, 결국에는 현대판 이데올로기적 우상숭배에 빠질 위험을 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통적 복음주의는 케이프타운 서약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수용하되, 위험한 요소들에 대해서는 명확한 성경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거부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경적 근본주의로의 회귀가 절실합니다. 이는 성경의 무오성과 축자영감설을 재확인하고, 역사적-문법적 해석을 우선시하며, 교리적 순수성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복음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하여 영혼 구원의 절대적 우선순위를 확인하고 사회적 참여를 복음의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하기 위해 교리적 순수성을 위한 교회 징계를 시행하고 성경적 권위 구조를 재정립하며 세속화에 저항해야 합니다.

선교에 있어서도 복음전파가 일차적 사명임을 재확인하고 사회 사업은 복음전도의 도구로 이해하며 문화적 적응보다 복음의 불변성을 강조해야 합니다.

 

결론

 

르네 빠디야와 존 스토트의 영향으로 변질된 로잔운동과 그에 영향을 받은 케이프타운 서약의 '통전적 선교' 개념은 복음의 본질적 메시지와 교회의 근본적 사명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미국 주류 개신교단, 캐나다 성공회, 연합감리교회, 그리고 한국 IVF의 사례들은 이러한 신학적 변화가 실제로 교단과 단체의 정체성 및 효과적인 사역에 어떤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이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의 이념이나 피조물이 탐하는 현대적 우상숭배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완전히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그것이 복음 전파와 영혼 구원이라는 교회의 고유한 사명과 동등하거나 그보다 우선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진정한 회심과 제자도가 선행될 때, 그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개인적 차원의 사회적 책임과 이웃 사랑이 자연스럽게 뒤따를 것입니다.

 

정통 복음주의는 빌리 그레이엄이 1975년 멕시코시티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교회가 "복음전도와 선교에 엄격히 집중"하면서 동시에 개인적 차원의 사랑과 섬김을 통해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균형 잡힌 관점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복음을 대체할 수 없으며, 복음만이 개인과 사회 모두를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특히 한국 교회는 19세기 서구 자유주의신학, 20세기 해방신학과 민중신학, 그리고 로잔운동의 급진적 제자도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지혜로운 균형을 찾아야 합니다.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복음을 대체할 수 없으며, 복음만이 개인과 사회 모두를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한국 교회는 특히 민중신학의 그리스도론 왜곡(민중이 곧 예수), 종교 혼합주의(무속신앙과 기독교 혼합 시도),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편향성(마르크스주의적 사회분석 무비판적 수용, 특정 정치적 입장과 동일시)이 가져온 상처와 분열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인간의 죄성을 부정하고 인간 본성의 선함을 낙관하여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가 침투할 토양을 마련했던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복음을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거나,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분석을 성경적 진리보다 우위에 두거나, 기독교를 다른 종교나 이념과 혼합하려는 모든 시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또한 국제적 압력이나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서구 진보 신학의 침투에도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동시에 진정한 사회 정의는 복음에서 출발해야 하며, 개인 구원 없는 사회 변혁은 또 다른 형태의 우상숭배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진리를 붙들고 모든 형태의 현대적 우상숭배에 맞서 참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입니다. 19세기 신학적 배교의 쓰라린 교훈을 잊지 않고, 20세기 이데올로기적 참상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서 겸손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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