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가을총회 자료모음(퍼가기 금지)
교회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원칙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서론
제74회(2024년) 고신 총회는 차별금지법 등 악법들의 발의 및 통과 가능성과 관련하여 정교 분리의 성경적 원칙에 관한 설명을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이하 교수회)에 요청하였다. (대사회관계위원장 원대연 목사가 발의한 “정교 분리의 원칙에 대한 질의”) 이에 교수회는 구약과 신약의 가르침과 개혁주의 장로교 신학 원리에 토대를 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이 문제에 대해 고백하는 내용을 제시하고자 한다. 동시에 본 연구보고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시대적 한계와 이로 인한 ‘고백서 수용사’ 에서의 내용 일부 변경과 정교 관계에 대한 교회사적 교훈을 신중하게 고려하여 실천적 적용 방안도 제시하고자 한다.
1. 중요한 주제, 제한적인 지침
교회와 정치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며 동시에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까다로운 주제이다. 그것은 성경이 교회와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명확한 지침을 제시하고 있지 않으며, 역사적 상황에 따라 교회의 입장이 상당히 달랐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교회나 교파가 각자의 정치적 견해나 상황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교회는 이런 역사적 경험을 충분히 성찰하여 교회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찾을 때 매우 주의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전인 교회에 대해서 분명한 규범을 제시하고 있으나 세속 정치에 대해서는 아주 제한적인 지침을 주고 있다. 이 제한적인 지침을 자신의 정치적 관점에 따라 확장하는 것은 교회의 영광을 가리고 복음 전도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있다. 교회와 교리적 진리에 대해서는 성경에 근거하여 확신을 할 수 있으나 정치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답을 확신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정치에 대한 성경의 제한적인 지침에 만족하면서 그 지침이 제시하는 원칙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인식하고 각자에게 주신 분별력을 사용하여 정치와 사회에 봉사하는 좋은 시민으로 살아갈 필요가 있다.
2. 교회 역사 속에서 배우는 교훈
교회 역사는 교회가 국가로부터 박해를 받거나 통제와 지원을 받기도 하고 반대로 교회가 정치에 깊이 관여하기도 하였음을 보여 준다.
1) 국가의 박해를 받은 교회
3세기 로마 제국의 정세가 불안정하여 235~284년에 걸쳐 30명 이상의 황제가 통치권을 놓고 권력 투쟁을 할 때, 데키우스 황제(249~251년)와 그를 이은 발레리아누스 황제(253~260)는 로마 제신 숭배를 경시하고 조상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 황제들의 칙령을 따르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징역형과 고문, 재산 몰수, 강제 노동, 추방, 혹은 사형을 선고받았고, 그리스도인의 집회가 금지되었다. 원로원 의원, 고위 관리, 또한 기사 계급에 이르기까지 상류 계층의 그리스도인들도 신분과 관직, 재산을 박탈당했고, 명령을 계속 거부하는 자들은 처형되었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는 303~304년에 총 네 차례에 걸친 칙령을 통해 로마의 종교 관습과 제신 숭배를 따르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집회를 금하였고, 성경을 소각하도록 하였으며, 성직자들을 체포하고, 그리스도인의 관직과 지위, 법적 권리를 박탈하였으며, 고문과 사형을 선고하기도 하였다. 로마의 관용을 무시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냉혹한 조처는 비그리스도인에게도 동의를 얻지 못할 만큼 가혹했다.
국가가 정치적 안정을 위해 교회와 동맹 관계를 맺는 시기도 있었다. 발레리아누스의 후계자인 갈리에누스(260-268) 황제와 아우렐리아누스 황제(270-275)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을 폐지하고, 압류한 예배 장소를 돌려주고, 제한적인 모든 조처를 폐기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물러난 후 갈레리우스 황제(305-311)도 기독교를 로마의 법규를 따르는 공인된 종교(religio licita)로서 인정하고 제국의 공공 안영(salus publica)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권장하였다.
2) 국가의 보호를 받은 교회
이 같은 동맹 관계를 넘어, 콘스탄티누스(~ 337년 사망) 대제 이후 정치의 교회 관여는 서구 국가에서 오랫동안 주장되었다. 서구에서는 오랫동안 신정 일치 국가였던 구약의 이스라엘과 같이 통치자 혹은 국가 정치가 참된 종교를 수호하거나 지원해야 하고 공권력을 사용하여 이단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25년 니케아에서 회집한 니케아 공의회와 테오도시우스 1세(347~395)가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회집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긍정적인 예이다. 이 두 보편 공의회로 아리우스주의자로 인해 교의적으로 분열될 수 있었던 사도적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이고 사도적인 신앙고백(니케아-콘스틴티노플 신경)을 통해 하나 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세속 권력과 교회의 관계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기에 1647년 제정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정치 위정자가 총회를 소집할 수 있다고 고백하였다.(31장 2항) 그러나 왕정을 폐지하고 위정자의 교회 통치를 거부한 미국혁명 이후 미국장로교회는 이 조항을 삭제하였고 우리 고신 교회도 이를 따르고 있다.
3) 국가 권력으로 세속화된 교회
주후 395년의 로마 제국이 분열되었을 때, 서방 교회는 교황권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제국의 종교로서 자리매김한 교회는 제국의 분열로 인해 황제의 권한이 약화되자 응급 처방으로 교황의 권위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주후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성직자들의 권위와 세속 권력이 나란히 제국을 이끈다는 관념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를 지나면서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의 긴밀한 결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결탁은 한편으로 교회에 대한 세속 권력의 간섭을 강화했고, 다른 한편으로 성직자들이 세속적 권세도 가지게 되는 세속화를 낳았다.
중세에는 봉건제의 구조 속에서 막대한 토지를 보유했던 주교나 수도원장들이 세속적인 권세까지 행사할 수 있었고, 황제와 교황은 이들에 대한 서임권을 두고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대립하기도 하였다. 교회 안에 성직매매가 관행이 된 결정적인 이유는 고위 성직자들이 세속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황의 힘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황제나 왕이 교황에 의해 파문을 당하기도 했는데, 파문된 위정자들은 정권의 정당성을 상실하기 때문에 국가 전체가 매우 위태로운 상태에 처하기도 했다. 교회가 세속적 권력을 가지고 정치적인 힘을 행사할 때 국정이 불안정하게 될 뿐만 아니라 교회가 세속화되었다는 것이 교회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다.
4) 종교개혁과 정교분리
이와 같은 문제를 정확하게 간파한 개혁교회 지도자들은 “왕이신 하나님은 자기 아래에 그리고 백성들 위에 국가 위정자들을 세우셨다”(23장 1항)라고 고백함으로 교황의 지위를 하나님과 위정자들 사이에 두어 위정자를 교황 아래에 위치시키려고 한 로마 교회의 교리를 근본적으로 거부하였다. 또한 이 원리에 근거하여, 우리 신앙고백서는 더 나아가 교황의 권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교황은 각 나라의 위정자들이나 그들의 백성 중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권세나 사법권을 주장할 수 없으며, 특히 위정자들을 이단으로 판결하거나 그 밖의 다른 구실을 내세워서 그들의 통치권이나 생명을 박탈할 수 없다”(23장 4항).
종교개혁 기간 동안 중세의 교회와 국가 관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국가는 거짓 교회의 통제에서 벗어나 참 교회의 지원군으로 바뀌었다. 거대한 로마 가톨릭 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많은 위정자가 참된 신앙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위정자들의 지지가 없었더라면 종교개혁은 매우 미미한 일시적인 운동에 끝났을 것이다. 실제로 종교개혁 당시 대다수 개신교 신학자들은 교회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았다.
하지만 세속 군주들은 종교개혁이 완성된 이후에도 교회를 지원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들의 지지 세력으로 만들기를 위하여 교회를 계속 통제하려고 하였다. 특히 개체교회에 목사를 청빙하는 일에 간섭하려고 했다. 이와 같은 간섭은 교회 안에서 자유주의적인 세력이 뿌리는 내리는 토대를 제공했다. 참된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 이들은 국가의 간섭에 대해서 교회의 독립을 강하게 주장했고, 결국 그들 중 일부는 교회로부터 쫓겨나서 독립적인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이처럼 교회사는 국가의 지원은 국가의 간섭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교회와 정치와의 관계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비극적인 30년 종교전쟁(1618-1648년) 이후 서구에서는 종교의 관용이 폭넓게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며, 자유 민주주의가 보편적인 정치형태로 자리 잡게 된 나라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보편적인 가치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다종교와 교파주의가 일상이 된 사회에서 정치가 참된 종교를 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오늘날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와 종교는 원칙적으로 분리되었고 정치가 종교적인 일에 직접 관여하고 결정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가 교회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는 시도가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교회는 늘 이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3. 교회와 정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구약성경의 종교와 정치 관계와 규범은 신정 일치 국가에 주어진 것임으로 자유 민주 공화정을 채택한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와 정치와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은 신약성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교회와 정치와의 관계에 대한 직접적인 가르침은 아래의 성경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마 22:2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요 18:36).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림이니...,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 13:1-7).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벧전 2:13-17).
성경은 선한 통치자는 물론 악한 통치자도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도구로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를 성취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대주재이신 하나님은 적당한 때에 위정자들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신다(삼상 2:6-7).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그들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와 같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세상의 대주재시요 왕이시다”(23장 1항). 최고 통치자로서 하나님은 자기의 종인 세속 위정자(civil magistrate)들을 백성들 위에 세워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23장 1항).
우리는 통치 기관은 왕이신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관이기 때문에 정치 자체를 악하게 혹은 부정적으로 보는 재세례파의 견해를 거부한다. 이와 더불어 정부 자체를 부인하는 무정부주의와 같은 급진적인 사상도 배격한다. 만약 정치가 없다면 사회는 만인이 서로 투쟁하는 사회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악한 정치라고 해도 정치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개인의 안녕을 위해서 더 낫다. 그뿐만 아니라 위정자들의 정치를 통해서 이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신비로운 뜻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하지만 신앙고백서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국가 위정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한만 사용할 수 있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칼의 권세이며 이 권세를 통하여 위정자들은 선한 자들을 보호하고 악한 자들을 징벌한다(23장 1항). 심지어 위정자들은 필요하고 정당한 경우 다른 나라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23장 2항). 이를 통하여 공적인 선(public good)이 실현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께서 위정자들에게 복종해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이 가진 권세를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의 종인 세상 위정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칼의 권한 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23장 3항). 정치는 칼의 권세 외에 교회에 부여하신 천국 열쇠의 권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시행하는 권한은 오직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 이것은 비기독교 정치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기독교 정치에서도 시행되어서는 안 된다. 천국의 열쇠인 권징이 정치에 있다고 주장하는 에라스투스주의 역시 배격되어야 한다.
4. 교회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신앙고백의 가르침
교회와 정치, 신자와 위정자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신앙고백서 23장 4항에 잘 정리되어 있다. “신앙이 없거나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위정자의 정당하고 합법적인 권세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며 백성들이 그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순종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이들의 직무를 통하여 신자들이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자는 기회나 여건이 되면 군인을 포함하여 위정자가 되어서 정치를 위해서 봉사를 할 수 있다(23장 2항). 이 점에서 우리는 “신자는 군인이나 정치 위정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하는 모든 견해를 반대한다. 세례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나아오는 군인들에게 폭정을 금하였지, 군복을 벗으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경건한 신자가 위정자가 되면 보다 많은 국민이 유익을 받을 수 있고 복음 전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신자가 위정자가 되었다고 반드시 교회에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온 세상의 왕이요 대주재이시라는 것을 믿음과 동시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왕이시요 머리”라는 것을 고백한다(30장 1항). 교회의 머리로서 우리 주님은 세상 정치와는 다른 정치체제를 만드시고 세상 위정자와는 다른 교회의 직원(church officers)을 세우셔서 교회를 다스린다. 국가는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다. 이 점에서 교회와 정치는 명백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원리에 따라 교회 직원들의 치리회인 공의회(당회, 노회, 총회)는 교회와 관련된 문제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다루거나 결정 내려서는 안 된다(31장 4항). 따라서 공의회는 상정된 안건이 교회적 사안(ecclesiastical matters)인지 아닌지 신중하게 판결해야 한다. 만약 그 안건이 교회적 사안이 아니라고 판결하면 치리회는 그 안건은 다루지 말아야 한다. 신앙고백서는 교회적 사안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신앙과 교리에 관한 논쟁, 목회 현장에서 제기되는 여러 양심의 문제들(cases of conscience), 예배와 교회 정치에 관한 것들, 교회 안에서 접수된 불만들(31장 2항).
노예 문제로 미국 전체가 격렬한 논쟁에 휘말리고 내전에 빠졌을 때 미국 장로교회는 노예제 자체에 대한 논쟁도 있었지만, 이 문제를 총회가 다루어야 하는 교회적 사안인가에 대해서도 치열하게 논쟁하였다. 결국 이 문제에 대해서 합의를 이루지 못하게 되자 교회는 안타깝게도 분열하고 말았다. 남북전쟁 이후 정치는 하나가 되었지만 분열된 교회는 하나가 되지 못한 채 오늘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교회가 정치와 연관된 사건을 얼마나 신중하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정치와 교회가 구분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치와 교회가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우리의 신앙고백서에 따르면, 치리회는 예외적으로 정치와 관련된 일을 다룰 수 있다(31장 4항). 하나는 비상시국 상황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의 위정자가 요청하는 경우이다. 전쟁이나 천재지변 등 비상시국에서 치리회는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정치와 관련된 안건을 다룰 수 있다. 하지만 안건을 결정해서 그것을 정치에 제안할 때는 “겸허한 청원”(humble petition) 형식을 사용해야 한다. 교회가 정치에 전하고자 하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전하는 형식 역시 중요하다.
실천적 적용
1. 신정국가의 시대가 아닌 종교 다원화 시대에 교회와 정치는 원칙적으로 각자의 영역을 지키고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교회의 생명과 성장은 복음의 순수성에 있기 때문에 교회는 정치나 세상 정치에 의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정치가나 정치의 힘을 빌려서 어떤 특혜를 받으려고 하는 시도는 장로교 정치 원리에 어긋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정치」 1장 2조 2항).
2. 비록 교회가 치리회를 통해 세상의 정치에 관여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주의해야 하지만 신자가 시민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권고할 필요가 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은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적인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 신자는 투표에 참여함으로써 정치에 참여해야 하고, 정당에 가입하거나 건전한 시민단체나 정직한 언론을 후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을 교회의 이름으로 하는 것은 주의해야 하는데, 어떤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 기독교 기관이나 단체들이 서로 의견을 대립하게 되는 경우 교회 전체가 신뢰를 현저하게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정치가 비성경적 혹은 반성경적인 법률을 제정하거나 정책을 시행할 때, 어떤 정치적 결정이 교회와 신자들의 신앙과 삶에 현저한 영향을 끼칠 때 교회는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다. 만일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을 근거로 입법기관이 성경에서 엄중하게 금하는 악법을 제정할 경우나 혹은 국가 기관이 성경의 가르침과 명백하게 상충하는 법이나 정책을 제정하려 하거나 실행할 경우, 성경과 신앙고백에 근거한 총회의 결의에 따라 교회는 성경대로 가르치고 행하며 위정자들에게 겸허하면서도 분명하게 진리를 말하고 시정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4. 순수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교회는 법률이나 정책에 대해서 진리를 말하고 시정을 요구할 때 교리적인 문제를 다룰 때보다 훨씬 신중할 필요가 있다. 교리에 대해서는 교회가 더 나은 전문성과 더 높은 권위를 가지지만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에서 공의회가 교리에 대해서도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교회가 세상의 정치에 대해 어떤 결정을 할 때, 교회의 간절한 기도와 더불어 신중하고 깊은 토의와 검토가 반드시 필요하다.
‘정교분리’ 질의 앞에 드러난 고려신학의 신학적 후퇴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보고서 비판-
고명길 목사
1. 서론: 질의의 배경과 보고서 작성 경위
작년 제74회 총회에서 대사회관계위원장 원대연 목사가 “정교분리의 원칙에 대한 질의”를 상정했습니다. 그 취지는 분명했습니다. 차별금지법 등 악법이 발의·통과될 위기 속에서, 교회와 목회자가 어떤 성경적 근거와 신학적 원칙으로 이에 대응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총회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신학위원회와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에 연구를 위임하여 1년 뒤 보고하도록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교수회의 보고서는 질의의 본래 취지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정교분리”를 강조하며 교회의 정치 참여를 지나치게 제약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지금 손현보 목사님이 차별금지법 반대, 불의한 정치인 비판 설교로 구속까지 당한 현실을 고려할 때, 이 보고서는 총회 질의의 목적에도 맞지 않고 고신의 역사와 정체성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2. 종합적인 비판
첫째, 정교분리의 개념을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경적 정교분리는 국가권력의 전횡으로부터 교회의 자유를 지키려는 원리이지, 교회가 공적 영역에서 입을 다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번 보고서는 정교분리를 “정치는 정치, 종교는 종교”라는 단순 이분법으로만 설명함으로써, 신앙의 사회적 책임과 교회의 공적 목소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습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만든 수정헌법 제1조는 종교의 자유(정교분리 원칙이 아님, 토마스 제퍼슨의 발언 역시 정교분리가 아님)도 사실은 국교회를 금지하면서 동시에 기독교 신앙이 공적 삶에 영향을 미칠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었음을 감안할 때, 보고서는 이 부분을 축소·왜곡한 셈입니다.
둘째, 역사적 서술이 지나치게 압축되어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교회의 정치 신학은 위그노 사태, 베자의 저항권 논의, 영국 혁명과 미국 독립혁명을 거치며 점점 더 풍성하게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보고서는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여, 초기 칼빈의 견해에 머무른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국가권력이 하나님께 정면으로 대적할 때 교회와 성도가 어떠한 대응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아쉽습니다.
셋째, 교회와 목회자의 예언자적 사명을 축소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이 불의한 권세 앞에서 의를 외치도록 부르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러했고, 신약의 세례 요한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보고서는 목회자의 정치적 발언을 사실상 최소화하려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으며, “겸허한 청원” 이후의 대응 단계조차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국가가 반성경적 정책을 고집한다면, 교회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베자의 저항권 사상이나, 바빙크와 카이퍼가 강조한 하나님의 주권·영역주권 사상은 무질서한 정치화로 빠지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질서 있게 저항하는 길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신학적 유산을 외면한 것은 고신의 정체성과 저항정신을 스스로 축소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보고서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
(1) 성경은 정치에 제한적 지침만 준다?
보고서는 “성경은 세속 정치에 제한적인 지침만 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의 풍부한 증언을 축소하는 해석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개인의 내면적 경건만 다루지 않고, 공동체적·공적 삶에 대한 분명한 지침을 제시합니다.
히브리 산파들은 바로의 명령을 거부함으로써 태아 살해라는 국가적 악법에 저항했습니다(출 1장).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권력자의 명령이 하나님의 뜻과 배치될 때 공개적으로 거부했습니다(단 3장, 6장). 신약에서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5:29)며 공회와 국가 권세에 저항했습니다. 이는 성경이 결코 “정치에 대해 제한적 지침만 준다”는 말로 축소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별금지법은 단순한 사회법이 아니라, 강단의 설교와 신앙 양심을 직접 침해하는 법안입니다. 코로나 시기 예배 금지 조치는 공예배의 본질을 침해했습니다. 성경적 원리를 좁게 적용하면, 교회는 불의한 법과 제도 앞에 침묵하게 되고, 결국 스스로 예언자적 사명을 포기하게 됩니다. 손현보 목사님의 구속 사건은 “정치에 제한적 지침만 있다”는 논리가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낳는지 잘 보여줍니다.
(2) 정치 관여는 전도의 방해가 된다?
보고서는 “교회가 정치 문제에 관여하면 복음 전도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와 현실은 그 반대입니다.
히틀러 시대 독일 교회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자”는 명분으로 침묵했고, 결국 나치 독재와 홀로코스트에 동조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반대로 본회퍼와 고백교회는 저항했기에 “복음이 권력에 종속되지 않았다”는 역사의 증거로 남았습니다. 한국 교회의 신사참배 거부 역시 “정치 관여”가 아니라 신앙 양심의 표현이었지만, 훗날 세계 교회가 기억하는 신앙적 저항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차별금지법은 설교와 교육, 전도 현장을 직접 제한하는 법안입니다. 교회가 이를 반대하지 않으면, 복음 전도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실제로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동성애를 죄라 설교하는 것만으로도 처벌을 받는 사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정치적 침묵이야말로 복음을 가로막는 가장 큰 방해가 아니겠습니까? 손현보 목사님의 구속 사건 역시 “복음을 전한 설교”를 “정치 개입”으로 몰아붙인 사례입니다. 이 상황에서 “정치 관여는 전도의 방해”라는 논리는 현실을 외면한 주장에 불과합니다.
(3) 치리회는 겸허한 청원만 해야 한다?
보고서는 “치리회가 정치 문제를 다룰 때는 겸허한 청원으로 해야 한다”고 제한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단순히 청원하지 않았습니다. 나단은 다윗 왕의 죄를 공개적으로 책망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당신이 이스라엘을 망쳤다”고 직언했습니다. 신약의 세례 요한은 헤롯의 불의한 혼인을 지적하다가 순교했습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문에 95개 조항을 붙인 것도 단순 청원이 아니라 공개적 저항이었습니다. 고신의 신사참배 거부 역시 국가와 교단의 잘못을 향한 공개적 고백이었지, “겸허한 청원”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현실적으로도, 단순한 청원만으로는 악법을 막을 수 없습니다. 차별금지법 반대 집회가 수십만 명의 성도들이 참여한 연합 예배로 드려졌기에 사회적 여론이 형성되었고, 입법 시도가 지연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겸허한 청원”만 했다면, 교회의 목소리는 묻혀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손현보 목사님이 구속된 사건 자체가 “겸허한 청원”이 아닌 강단에서의 공개적 발언이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청원에 머무르지 않고 예언자적 직언에 있습니다.
(4) 교회적 사안과 정치적 사안의 구분?
보고서는 교회적 사안과 정치적 사안을 엄격히 구분하며, 교회는 교리·예배·양심 문제만 다루고 정치 문제는 다루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적 사안은 법안제정을 통해 교회가 가진 자유의 일부를 침범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바로 설교와 교육을 억압하고 제한하는 악법입니다. 이는 정치가 아니라 신앙과 예배의 본질을 침해하는 문제입니다. 코로나 시기 정부의 예배 금지 조치 역시 정치가 아니라 예배 자체를 겨냥한 조치였습니다. 손현보 목사님의 구속은 강단 설교를 “정치 문제”로 둔갑시킨 사건입니다. 만약 이 논리를 따른다면, 교회는 강단에서 사회적 악을 지적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복음은 ‘사적 신앙’으로 축소됩니다.
역사적으로도,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정치적 사안”으로 치부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배와 신앙의 본질 문제였습니다. 고신의 설립자들은 이것을 정치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로 보고 목숨 걸고 저항했습니다. 오늘날 차별금지법 반대 역시 같은 본질을 지닌 문제입니다. 따라서 교회적 사안과 정치적 사안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며,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방해하는 주장입니다.
(5) 개인 참여만 허용하고 교회는 신중해야 한다?
보고서는 “신자는 개인으로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으나, 교회의 이름으로는 신중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권세를 침해하는 일에 있어서는 개인 참여만으로는 시대의 불의에 맞설 수 없습니다.
신사참배 거부는 몇몇 개인의 저항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함께 고백했기에 역사적 의미를 지닐 수 있었습니다. 만약 개인의 문제로만 남았다면, 고신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차별금지법 반대, 예배 자유 수호, 불의한 권력 비판은 교회 공동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실제로 손현보 목사님이 개인적으로 강단에서 외쳤기 때문에 구속까지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고신교회 전체가 “공동의 이름으로” 나섰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교회가 함께 외치지 않으면, 결국 개인 설교자가 모든 화살을 감당하게 되고, 교회는 뒤에서 방관하는 꼴이 됩니다. 이것은 고신의 전통에도 맞지 않고, 교회의 책임 회피에 불과합니다.
4. 결론: 고신의 저항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이번 교수회 보고서는 원대연 목사의 질의에 충실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질문은 “차별금지법과 같은 악법 앞에서 교회가 어떤 성경적 원칙으로 대응할 것인가”였는데, 교수회는 정교분리를 강조하며 교회의 침묵을 정당화하는 엉뚱한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손현보 목사님의 구속이 보여주듯, 단순한 정치 문제가 아니라 예배와 설교, 신앙의 자유 자체가 걸린 상황입니다. 고신의 정체성은 신사참배 거부에서 드러난 불의한 권력 앞의 거룩한 저항정신입니다. 이를 잊고 침묵한다면 우리는 개혁주의 교회의 사명을 저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총회는 이번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의 연구보고서를 그대로 받지 말고, 1년 더 연구케 하여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고신의 정체성과 저항정신을 분명히 드러내는 새로운 보고서를 제출받아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고신이 교회의 본질을 지키고 한국 교회를 살리는 길입니다.
고명길
재미 고신총회 임원회가 [손현보 목사 구속건에 대한 임원회 입장문]이란 것을 작성해서 유포했다. 즉각 장로닷컴과 고애연이 대응하자 공식적 입장이 아니란 말로 꼬리를 내리며 구차한 변명들을 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재미총회 임원들이 손현보 목사 구속건에 대한 대책 모임을 했었고, 입장문이 작성된것은 팩트이다
이미 황0섭 목사 페북과 기윤실 정병오 대표 페북에 전달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유포되었다 정병오 폐북의 성명서 인용 글은 25명이나 공유해 갔다. 고애연은 이에 대한 반론을 이곳에 포스팅한다.
<손현보 목사 구속에 대한 재미 고신총회 임원회의 입장문 비판>
2025년 9월 8일,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된 직후인 2025년 9월 11일, 재미 고신총회 임원회는 <손현보 목사 구속 건에 대한 재미고신 임원회의 입장>이라는 성명서를 작성 지인들에게 배포했다. 필자도 황0섭 목사 페이스북(10/13일자), 정병오 장로(기윤실 대표)의 페이스북(10/15일자)에서 재미 고신총회 임원회가 작성했다는 성명서를 읽었다. 많은 응원 댓글들과 함께 수십 명이 이 글을 공유해서 확산되고 있었다.
겉으로는 신중하고 균형 잡힌 입장처럼 보이지만, 이 성명서는 불의한 정치권력에 맞서야 할 교회의 선지자적 사명을 회피하고, 교회의 순수한 신앙적 저항 정신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이는 교단의 정체성인 '고신정신'을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이다.
1. 신앙고백서를 빙자한 정교 분리론의 왜곡
성명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근거로 “교회와 국가는 구별된다”라는 점을 강조하며,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면 부패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동시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력이라도 불의하게 행사될 때는 교회가 말씀으로 책망해야 한다”라는 원리를 전제로 한다. 교회가 국가에 예속되지 않는다는 말은, 국가의 부정과 불의에 침묵하라는 뜻이 아니다. 성경 어디에 교회와 국가가 구별된다는 증거가 있는가? 오히려 선지자들은 정치권력을 향하여 담대히 외쳤고 불의를 지적하지 않았는가? 세례요한은 헤롯의 죄악을 지적하다가 순교까지 당하지 않았는가? 예수님도 그런 헤롯을 향하여 “저 여우에게 가서 이르라”라고 하지 않았는가? 정교분리는 가당치도 않은 반성경적 주장이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정치권력에 침묵했을 때, 가장 큰 죄악이 발생했다. 독일교회가 히틀러 앞에서 정교분리를 구실 삼아 침묵했을 때, 유대인 학살과 전쟁의 광기가 세상을 휩쓸었다. 교회가 정치적 영역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부패다. 따라서 정교 분리론을 교회의 침묵과 방관을 강요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교회와 사회를 더 큰 죄악과 불행에 빠뜨리는 것이다. 개혁교회 목사는 불의한 정치에 대해 당연히 외치고 경고해야 한다.
2. 손현보 목사 사역의 성격 왜곡
성명서는 손현보 목사의 구속을 한국교회 전체에 대한 탄압으로 확대 해석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손 목사의 사역은 단순한 개인의 정치활동이 아니다. 그는 차별금지법, 동성애·동성혼 합법화, 유아 성교육 법제화 등 성경적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는 국가 정책을 공개적으로 정치권을 향해 책망했다. 이것은 정치권력을 탐하는 정치 행위가 아니라 목사로서 당연한 복음 진리 수호이며, 목회적 사명이다.
그의 설교와 활동을 단순히 “정치활동”으로 축소하고, 교단 전체와 무관한 개인행동으로 치부하는 것은 예언자적 설교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왜곡하는 행위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책망했을 때, 세례요한이 헤롯을 향해 그 죄상을 책망했을 때 그것을 “개인 정치 간섭”이라 부른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반성경적인 태도인가?
3. 교회의 정치참여 거부라는 위험한 논리
성명서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현실정치에 대한 관여가 답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빛과 소금이 된다는 말은 추상적 도덕이나 개인 윤리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불의한 권력과 제도를 향해 말씀을 선포하고 사회 정의를 요구하는 일까지 포함한다.
재미 고신 임원회나, 손현보 목사에 대해 딴지를 거는 좌파적 목사, 장로들에게 묻는다. 도대체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당신들의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신자들의 이웃까지인가? 교인들이 다니는 직장까지인가? 그 교회가 속한 지역사회뿐인가? SFC 강령에도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국가와 세계까지라고 천명하고 있지 않은가? 아브라함 카이퍼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전 영역이 그 대상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도대체 당신들은 어느 별에서 온 친구들인가?
목사가 설교에서 말씀을 적용할 때 성도들의 생활 중 정치 아닌 것이 어디 있는가? 여러분의 설교 한편을 가져 와 보시라! 말씀과 현장을 잘 적용한 설교라면 전부 정치와 관련된 것들임을 증명해 드릴 수 있다. 우리가 입고, 먹고 마시며 출퇴근하고 직장생활, 사업을 하는 모든 영역이 다 정치와 직결되어 있다. 여러분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성도들의 헌금은 전부 정치 영역에서 땀 흘려 번 십일조요 헌금들이다. 그 정치 영역이 잘 돼야 수입도 많고 헌금도 많이(?) 할 수 있지 않는가? 헌금은 좋아하는데 정치는 말하지 말라고? 얼마나 비겁하고 이율배반적인 태도인가?
루터는 황제 앞에서 “여기 내가 서 있다”라고 선포했다. 칼빈은 제네바 강단에서 정치와 사회의 부정을 강하게 지적했다. 쯔빙글리는 전쟁터에서조차 진리를 외쳤다. 개혁주의 목사는 당연히 그가 사는 도시와 국가 전반에 대해 죄를 지적하며 복음의 빛을 전해야 한다. 정치인의 불의와 불법에 대해 외쳐야 한다. 이것이 개혁교회의 본질이다.
4. 진리와 오류를 동일선상에 두는 왜곡
성명서의 기도 제목은 “지금은 같은 생각을 확인하기보다, 다른 생각을 존중하는 때”라고 말한다. 언뜻 들으면 화합을 말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 진리와 반성경적 오류를 동일선상에 놓고, 단순한 “의견 차이”로 축소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성경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라고 한다. 장성한 자는 선악을 분별하는 자(히 5:14)이다. 목사와 교회는 언제나 옳은 것을 붙들고, 잘못된 것을 책망해야 한다. 그래야 회개와 구원을 설명할 수 있다. 재미고신 임원회의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자”라는 말은 죄악을 허용하고, 반성경적 사상을 관용하고 포용하는 것으로까지 읽힌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비겁한 침묵이요 책임회피이다. 교회의 사명은 관용이나 침묵이 아니라 죄와 불의에 대한 진리의 선포다.
맺는말
재미고신총회 임원회의 성명은 겉으로는 중립과 균형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교회의 정치적 책임을 외면하고 손현보 목사의 예언자적 사역을 폄하하는 문서다. 이는 고신 교단의 정체성인 저항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개혁신학을 오용하는 것이다.
고신은 신사참배 거부 운동으로 세워진 교단이다. 그 정신은 불의한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복음의 진리를 외치는 데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다시 그 정신을 붙들어야 한다. 손현보 목사를 비판하며 침묵을 강요하는 성명서가 아니라, 불의한 정치권력과 반성경적 정책을 향한 저항의 성명서가 나와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고신정신이요 개혁교회의 길이다.
고명길(고신애국지도자연합 전문위원)
m
오도르 베자
진정한 종교의 행위의 자유가 주어지면... 통치자는 이것을 보존할 더 큰 의무를 가지며, 통치가 그 의미를 지니키지 못하는 것은 명백한 폭정이다. 얼마든지 그에게 저항할 자유가 있댜.
고명길
m
오도르 베자
진정한 종교의 행위의 자유가 주어지면... 통치자는 이것을 보존할 더 큰 의무를 가지며, 통치가 그 의미를 지니키지 못하는 것은 명백한 폭정이다. 얼마든지 그에게 저항할 자유가 있댜.
“정파 대변하는 전위부대 역할 안돼” “잘못 지적은 교회의 선지자적 사명”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전북지역 일부 신부들의 시국미사를 둘러싸고 기독교계 안에서도 보수와 진보로 양분됐다. 이런 가운데 정교분리와 정치참여에 대한 논의가 다시 등장하면서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기독교계 학자들은 정교분리와 정치참여를 어떻게 생각할까.
학자들은 대체로 예언자적 기능을 수행하는 차원에서 정치참여는 긍정적이지만 다양한 이념과 갈등이 존재하는 현 한국 사회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발언은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신원하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정교분리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 혹은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의미한다. 이 말은 본래 미국 헌법이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명시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흔히 교회가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을 할 때 이것의 정당성을 논하는 목적으로 사용됐다.
이와 관련해 두 가지를 바로 알 필요가 있다. 첫째, 정교분리라는 말은 국가가 특정 종교를 국교로 채택하거나 그 주장을 중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은 이민 사회이기 때문에 다양한 종교가 있었고 기독교 안에도 다양한 교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한 종교를 우대하다간 국가 통합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교분리는 국가 편에 해당하는 말이었지 교회가 정치 문제에 관여하지 말고 오직 종교 영역만 관여해야 한다는 것을 의도한 개념은 아니다.
둘째, 그런 점에서 정교분리는 교회가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금지하는 의미는 아니다. 교회는 정부든, 어떤 기관이든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잘못하면 그것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선지자적인 사명이기 때문이다. 미국 헌법에 정교분리 문구를 처음 삽입한 건국 선조들조차도 종교가 제공하는 도덕과 가치는 민주주의 국가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다고 생각했고, 종교인들은 그 가치를 반영하기 위해 소리를 높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교회나 목사가 국가의 명백한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문제 삼을 수 없다. 다만 특정 정파를 옹호하는 발언은 문제가 된다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세대, 계층, 지역별로 정치 이념과 견해가 현격히 다른 현실에서 목회자가 정치적 발언을 할 때는 깊은 고뇌가 필요하다. 의도한 것과 달리 성도나 교회의 화평을 깨뜨릴 단초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성돈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현재 대한민국은 정치과잉이다. 모든 것이 정치적 입장에서 가름되고 해석되고 있다. 그 입장은 개인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진영논리에 갇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가 무엇이 정의(正義)라고 이야기하며 나설 수 있겠는가.
최근 자신들의 입장을 확고히 보인 두 종교단체가 있다. 한 극단에서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일 것이고, 또 다른 극단에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있을 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극단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이들은 정치행위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종교가 정치에 참여한다면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이 사회에서 종교의 초월적 힘이 아니고서는 정의가 설 수 없을 때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적어도 종교의 이름으로 정치 가운데 들어가려면 이 정도의 기준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유감스럽지만 현재의 상황은 이런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본다. 지금 상황은 종교가 극단적 정치 입장을 대변하는 전위부대나 행동대 같은 느낌일 뿐이다. 현재 한국의 문제가 종교의 틀 안에서 재생산되고 있을 뿐이다. 기독교인이 바른 시민의식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교회의 이름으로 나서야 한다면 좀 더 신중해야 할 것이다.
배덕만 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최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미사 때문에 정교분리 혹은 교회의 정치참여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하지만 정교분리의 본래적 의미와 한국 개신교 역사를 고려할 때 정부와 여당이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교회의 정치참여를 비판하는 것은 합리적 근거나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한국 개신교는 오랫동안 정치에 깊이 관여했고 우파정권과 밀월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교회의 정치참여 여부가 아니라 참여의 명분과 방법이다. 교회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단체행동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지체 없이 행동해야 한다. 진실이 왜곡되고 국민이 현혹당할 때, 교회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크게 벌려야 한다. 상황을 직시하고 진리를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상황은 어떠한가. 국가적 차원의 선거개입과 조작 의혹에 대한 증거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진실을 밝히는 대신 색깔논쟁과 정치탄압에 몰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이 미사라는 종교적 틀을 통해 현 정부의 실정을 지적하고 개혁을 촉구했다. 이것은 종교계의 정당한 정치적 표현이며 행동이다. 물론 이것이 교회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이나 행동방법은 아닐 것이다.
개신교가 천주교에 대해 침묵하거나 비판만 하는 것은 더 무책임하고 무지하며 심지어 위험한 처사다. 지금이야말로 교회가 세속의 정부를 향해 예언자적 기능을 수행할 때이기 때문이다.
백종국 경상대학교 교수
최근 천주교 박창신 원로신부의 정치적 발언으로 다시 정교분리와 교회의 정치참여에 대한 논의가 뜨거워지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부든 목사든 누구나 정치적 견해를 나타낼 수 있고 누구도 이를 제한할 수 없다. 대한민국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결사와 집회의 자유도 보장된다.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정교분리를 선언하고 있다. 이때의 정교분리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국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종교인의 정치적 견해를 금지한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 기독교는 이미 반탁운동, 조찬기도회, 인권기도회, 반독재 시위, 친미반공집회, 공명선거운동, 기독당 창당 등 보수와 진보 공히 정치 활동을 해왔다. 새삼스레 어느 성직자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다른 발언을 했다고 해서 정교분리원칙을 어겼다고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기독교인들의 진정한 관심사는 정치적 견해의 내용에 있다. 크리스천의 정치적 견해가 과연 하나님의 품성인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반영하고 있느냐이다. 이에 기초하는 것이면 설사 정치적 탄압이 기다린다 해도 반드시 말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일을 위해 부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배치되는 발언이라면 기독교의 이름으로 해서는 안 된다. 복음의 문을 가로막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780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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