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퍼는 리츌을 닮았다
리츨과 신칼빈주의: 서로 다른 출발, 같은 도착
알브레히트 리츨은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였고, 아브라함 카이퍼는 개혁주의 전통을 따랐던 네덜란드의 보수 신학자였다. 그런데 이 둘이 19세기 유럽의 세속화에 대답하는 방식은 닮았다. 기독교를 단지 개인의 구원 이야기로 머무르게 하지 않고, 공적인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하려 했다. 둘 다 교육과 문화를 통해 사회를 바꾸려 했다. 물론 차이는 있다. 리츨은 윤리를 앞세웠고, 카이퍼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했다. 그러나 결과는 비슷했다.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사회를 바꾸는 기관이 되었다.
리츨은 하나님 나라를 '윤리적인 공동체'로 보았다. 사랑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상 사회였다. 예수님의 재림이나 심판은 중요하지 않았다. 카이퍼는 하나님 나라를 창조 질서의 회복으로 보았다. 타락한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이 남아 있다고 믿었고, 이를 근거로 문화 변혁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이 둘은 다르게 말했지만, 똑같은 오류를 범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모습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장차의 영광을 잊었다. 그 결과, 지금 여기서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시도가 탄생했다.
이들은 인간을 너무 믿었다. 리츨은 죄를 도덕적 약점 정도로 보았다. 인간은 교육받고 훈련받으면 나아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복음은 죄인을 살리는 소식이 아니라, 도덕 교육이 되었다. 신칼빈주의는 죄를 교리적으로는 인정했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문화적 가능성을 더 크게 보았다. 일반은총, 문화 명령, 창조 질서 회복이라는 말들이 죄의 심각성을 흐렸다. 죄인은 죽은 자가 아니라, 길을 잃은 사람쯤으로 여겨졌다. 두 전통 모두 엘리트를 통해 사회를 바꾸려 했다. 대학, 언론, 정치, 교육을 장악해 기독교적 영향력을 퍼뜨리려 했다. 그러나 성경은 반대로 말한다. 복음은 낮은 자, 미련한 자, 약한 자로부터 시작되었고, 위로 올라갔다. 하나님의 방식은 세상의 방식과 달랐다.
리츨은 죄와 심판을 말하지 않았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는 그의 체계에서 제거되었다. 신칼빈주의는 영적 전쟁을 구조 속에 감추었다. 문화와 구조, 시스템 이야기는 많지만, 마귀의 간계, 어둠의 권세는 잊혔다. 복음은 죽은 자를 살리는 소식이다. 그런데 두 전통 모두 복음을 윤리 프로그램이나 세계관 교육으로 바꿔버렸다. 복음은 더 이상 선포되어야 할 기쁜 소식이 아니라, 실천해야 할 프로젝트가 되었다.
리츨은 하나님을 도덕의 수호자로 만들었다. 하나님은 계시자가 아니라, 인간의 윤리적 완성을 돕는 존재가 되었다. 신칼빈주의는 하나님을 문화 질서의 보증인으로 바꿨다. 그분은 이제 문화 안에서 기능하는 원리, 체계 속의 규칙이 되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라, 인간의 프로젝트를 뒷받침하는 조력자가 되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과 부활이다.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하려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나 리츨은 복음을 도덕 교육으로 만들었고, 신칼빈주의는 세계관 전략으로 바꿨다. 복음은 하나님의 선포에서 인간의 적용으로 축소되었다. 교회도 달라졌다. 더 이상 말씀을 전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문화를 바꾸는 기관이 되었다. 성도는 전신갑주를 입은 군사가 아니라, 문화 운동가가 되었다.
리츨의 낙관주의는 세계대전 앞에서 무너졌다. 인간은 도덕적으로 진보하지 않았다. 바르트는 그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주었다. 신칼빈주의는 생명력이 길었다. 하지만 뿌리는 같았다. 복음을 점점 희미하게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신칼빈주의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실상은 리츨적 문화주의와 섞여 있다. 복음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금 한국교회의 주류는 리츨과 카이퍼의 혼합물처럼 보인다. 진보는 사회 참여에 몰두하고, 보수는 문화 전략에 빠져 있다. 그러나 둘 다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 복음 대신 프로그램이 있고, 케리그마 대신 적용이 있다. 교회는 어떻게 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 궁리하지만, 정작 복음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했는데, 지금 교회는 그 말씀을 잊은 듯하다.
교회는 문화를 위한 기관이 아니다.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는 공동체다. 복음이 전해지면, 변화는 따라온다. 그러나 순서는 바뀔 수 없다. 먼저 복음, 그 다음 변화다. 성도는 문화명령이 아니라 복음 사명을 먼저 받아야 한다. 교회는 이들을 복음으로 무장시켜야 한다. 병원이나 학교나 정당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본부가 되어야 한다. 신학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적용할까”보다 “무엇이 진리인가”가 먼저다. 복음이 분명하지 않으면, 그 어떤 적용도 복음이 아니다.
리츨과 신칼빈주의는 서로 다른 옷을 입고 똑같은 잘못을 했다. 하나님을 인간 목적에 종속시키고, 복음을 인간의 프로젝트로 바꿨다. 이것은 창세기 3장의 죄와 같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인간의 욕망, 그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학. 진짜 회개는 복음의 단순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 하나면 충분하다.
세상은 우리가 바꾸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바꾼다. 우리는 그저 “그의 기이한 일들을 선전”하면 된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신다. 세상은 넓고 길은 좁다. 그러나 그 좁은 길만이 생명으로 인도한다. 이 길에서 우리는 세상과 싸우면서도 사랑할 수 있고, 심판하면서도 구원을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교회의 길이다.
김요셉 목사, 기독교한국 | 페이스북 글(2025.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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