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최치원, 바람처럼 사라진 신라의 별
통일신라 말기의 쓸쓸한 하늘 아래, 하나의 찬란한 별이 태어났으니, 그가 바로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이다. 해동(海東)의 석학으로 불리는 그의 삶은 시대의 비운과 한 천재의 고독이 교차하는 서정시와 같았다.
열두 살 어린 나이에 낯선 당나라의 하늘 아래로 붓을 찾아 떠난 그는, 오로지 학문에 대한 열정만으로 머나먼 이국땅을 밟았다. 서라벌에서 당나라에 입국한 해는 868년, 12세되던 해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당나라 최고의 인재들만 통과한다는 빈공과에 급제하였고, 그 이름 석 자는 신라를 넘어 당나라에도 널리 퍼졌다.
최치원이 당나라의 지방 관직에 머물던 시절, 온 천하를 뒤흔든 황소의 난이 터졌다. 최치원은 토벌군에 종사하며, 황소를 꾸짖는 “토황소격문”을 써내려갔다.
그 격문의 문장이 어찌나 서슬 퍼렇고 빼어났던지, 반란의 수괴 황소가 그것을 읽다가 놀라 침상에서 굴러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질 정도이다. 그의 붓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천하를 바로잡는 칼이었다.
그러나 이국의 영화가 그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는 늘 고국 신라의 산하가 사무쳤다. 마침내 그는 미련 없이 모든 공명을 버리고 귀향길에 올랐다. 당나라의 사신 자격으로 884녀에 출발하여 이듬해에 고향에 도착했다.
돌아온 신라의 현실은 그가 꿈꾸던 이상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쇠락해가는 조국을 구하고자, 신라 진성여왕에게 올린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라는 강력한 개혁안을 894년에 올렸다. 귀국한 지 10년 되던 해였다. 당시 혼란했던 신라 사회의 쇠퇴를 막고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사회와 국가 개혁의 청사진이었다. 신라가 그 개혁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망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핵심적인 내용을 크게 구분하면 세 가지이다. 첫째, 폐단 시정과 귀족 억제이다. 신라 사회의 부패를 척결하고 사회 정의를 바로잡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귀족의 토지 겸병 및 사치를 규제해야 한다고 했다. 진골 귀족들이 과도하게 토지를 차지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등의 폐단을 강력히 규제하여, 국정의 혼란과 부의 편중을 시정할 것을 촉구했다. 귀족들의 횡포와 폐단을 바로잡아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것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제시했다.
둘째, 인재 선발 제도의 개혁, 이른바 골품제 타파를 촉구했다. 낡은 신분 제도인 골품제(骨品制)의 한계를 벗어나 능력 중심의 인재 등용을 주장했다. 출신 성분인 골품에 얽매이지 않고, 능력과 실력을 갖춘 인재를 널리 등용하는 인재 등용 제도를 확대 개혁해야 한다고 했다. 능력 위주로 인재를 선발할 수 있는 제도로 당나라의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도입할 것을 강력하게 건의했다. 이 개혁안은 후일 고려 시대에 도입되어 국가 체제의 근간이 되었다.
셋째, 민생 안정과 재정 건전화를 촉구했다. 백성들의 부담을 덜고 국가 재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조치들을 제안했다. 불교 국가였던 신라에서 무분별하게 이루어지던 사찰 건축 등의 불필요한 토목 공사를 금지하여 국가 재정 낭비를 막고 백성의 부역 부담을 줄일 것을 청원했다. 과도한 세금과 부역 부과 금지와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사회 불안을 해소하고자 했다.
시무십여조는 귀족 중심의 폐단을 시정하고,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쇠락기의 신라를 개혁하려 했던 비운의 천재 최치원의 염원이 담긴 강도 높은 개혁안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나라 신라는 이미 기득권에 눈이 멀고 낡은 관습에 갇혀버린 왕실과 귀족들은 그의 충언을 차가운 눈빛으로 거부하고 배척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한 후 고국의 여러 중앙 관직을 맡았다. 중앙 관직으로는 시독 겸 한림학사 (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 (守兵部使郎), 지서서감 (知瑞書監)을 역임했다. 진성여왕에게 개혁 상소를 올린 공로로 아찬(阿餐) 관등에 올랐다. 이는 육두품 신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직이었다
이후 지방관(태수)을 역임하기도 했다. 쇠락해 가는 신라의 국정이 문란함을 통탄하여 중앙 관직에서 물러나 외직(外職)을 청원하여 태수(太守)를 지냈다. 대산군 (大山郡), 부성군 (富城郡), 천령군 (千嶺郡, 현 경상남도 함양)을 역임했다.
신라의 골품제도(骨品制度)는 타고난 혈통에 따라 신분 등급이 엄격하게 정해지는 지배층의 특권 제도였다. 성골(聖骨), 진골(眞骨)의 ‘골’(骨)과 육두품(六頭品) 이하의 두품(頭品)으로 구분된다. 이 세 신분은 왕족 여부, 관직 등용의 한계 등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성골(聖骨)은 신라 사회의 최고 신분층이자 왕족이다. 왕위 계승권을 가졌다. 진덕여왕(眞德女王)을 마지막으로 성골 출신 남자가 끊어지면서 성골 신분은 소멸했다.
진골(眞骨)도 왕족에 해당한다. 성골이 소멸된 후, 태종 무열왕(김춘추)부터 신라 멸망까지 모든 왕은 진골 출신이었다. 신라 사회의 최고 귀족으로서, 관직 진출의 제약이 거의 없어 중요한 관직(예: 상대등, 시중 등)을 독점했다. 진골은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는 구조의 중심이었다.
육두품(六頭品)은 진골 아래의 최고 두품 신분이자 일반 귀족계층 중 가장 높았다. 최치원이 여기에 속했다. 이 품계의 사람ㄹ은 엄격한 정치적 한계를 가졌다. 능력과 관계없이 올라갈 수 있는 관등에 상한선이 정해져 있었다. 5등급 이상의 고위 관직에는 진출할 수 없다. 보통 6등급 아찬(阿湌)까지 오를 수 있었다. 최치원은 시무십여조를 올린 후 받은 아찬 직위를 받았다.
신라에서는 정치적 출세가 제약되었기 때문에, 육두품 지식인들은 최치원처럼 당나라로 유학하여 능력을 인정받거나, 학문과 종교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다.
최치원은 진골 귀족 중심의 폐쇄적인 사회에 불만을 품고 신라 개혁을 시도했지만, 직접적인 '반신라 세력의 주축'을 이루거나 '계급 타파'를 위한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진성여왕에게 강력한 개혁 정책을 건의하여, 쇠퇴하는 신라의 왕권 강화와 국가 보전을 위한 방안을 제시했다. 이는 진골 귀족 세력을 견제하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안은 진골 귀족들의 반발로 말미암아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그는 육두품 신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 직을 받았지만, 결국 신분의 벽에 막혀 뜻을 펼칠 수 없었다
최치원은 자신의 뜻이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끝내 벼슬길을 등지고 바람처럼 유랑하는 삶을 택했다. 이 땅 곳곳을 떠돌며 시(詩)와 술로 술과 시로 시름을 달랬다. 바다를 낀 지금의 해운대에 ‘해운’(海雲)이라는 호가 적인 글을 동백섬 바위에 새긴 데서 유래했다. 동백섬에는 최치원 동상, 해월정, 최치원 한시비, 그리고 '해운대'(海雲臺) 석각 등, 그의 흔적을 기리는 유적지가 조성되어 있다. 남해의 푸른 물결과 지리산의 깊은 골짜기를 벗 삼아 방랑했다. 그는 세상의 티끌을 버리고 자연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의 마지막 행적은 묘연하여, 어느 날 홀연히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채 신선(神仙)이 되어 사라졌다'는 식의 신비로운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최치원은 하늘로 승천했는가? 그가 승천했다는 설이 있다. 말년에 유랑했던 경남 합천 일대나 부산 해운대 등에는 그가 속세의 티끌을 털어내고 홀연히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내용의 전설이 전해진다. 신라 말기의 혼란기 지식인의 좌절과 이상향을 반영한다. 그를 도교적 신선으로 형상환 것으로 보인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그가 생전에 썼던 시와 글이 새겨진 대나무 조각(죽간)들이 발견되면서, 바람처럼 사라진 천재의 흔적이 다시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고운 최치원은 비록 그의 이상을 펼칠 시대는 얻지 못했으나, 그의 빼어난 문장과 지혜는 시대를 넘어 오늘날까지 해동을 밝히는 등불처럼 남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다.
최치원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가 많다. 총 인원 수를 특정하여 제시하기는 어렵다. 최치원에 대한 연구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진행되어 왔다. 최치원 연구는 문학, 역사, 철학, 종교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수많은 학자가 그의 삶과 사상에 관한 박사 논문을 제출했다. 최치원의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연구는 이 책에 수록된 표, 장, 서계 등 문체의 특성과 내용 분석을 통한 문학적 가치를 다룬다. 시(詩) 정신 및 세계관 연구는 그의 한시(漢詩)에 나타난 고뇌, 유교적 이상, 도가적 초탈 등 문학 사상 그리고 미학적 특징 분석한다. 최고운전(崔孤雲傳) 등 설화 연구는 최치원에 대한 전설과 구비문학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이되었는지에 대한 연구한다.
최치원은 유교, 불교, 도교에 모두 통달했다. 그의 사상적 깊이를 탐구하는 주제들은 (1) 유·불·선(儒·佛·仙) 통합 사상 연구로, 세 가지 사상이 그의 생애와 저술 속에서 어떻게 융합되었는지, 특히 만년의 은둔 생활에 미친 도교와 불교의 영향 연구한다. (2) 유교적 정치 이념 및 개혁 사상 연구는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에 나타난 정치 개혁 의지, 왕도(王道) 사상, 그리고 골품제의 한계를 극복하려 한 지식인의 역할 연구한다. 역사 인식 연구는 《제왕연대력》이나 비문 등에 나타난 그의 역사관과 신라 전통에 대한 인식 연구한다. 신라 말기 지식인 연구는 육두품 계층의 한계와 역할, 최치원이 당나라 유학을 통해 얻은 선진 문물의 수용과 개혁 동력 연구한다. 사산비명(四山碑銘) 연구는 그가 찬술한 비문,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등의 역사적 의의와 금석문(金石文)을 통한 당시 사회·종교 상황 분석한다. 호족 세력과 지방 문화 연관성 연구는 최치원의 만년 유랑과 은거가 지방 호족 세력의 대두와 지역 문화 발전에 미친 영향 연구한다.
해동 석학 최치원에 관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많다.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논문들 가운데 일부 주제는 다음과 같다. 유영봉, 「최치원 사상형성의 역정에 대한 고찰」, 성낙희, 「최치원의 시정신 연구」 (1986), 유영봉, 「사산비명 연구」 (1993), 곽승훈, 「최치원의 중국사 탐구와 사산비명 찬술 연구」 (2005), 김복순, 「최치원의 역사인식과 신라문화」 (2016)
아래는 토황소격문의 원문과 한글 번역문이다. 해설문은 구인환, 『동서고전』 (서울: 신원문화사, 1998)에서 옮긴 것이다.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쓴 해는 당나라에서 황소의 난(黃巢之亂)이 한창이던 시기인 881년이다. 이 격문은 당시 반란군 토벌 총사령관이었던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황소에게 항복을 권유하기 위해 작성한 글이다. 최치원의 학문, 정신, 삶의 세계을 엿 볼 수 있는 글이기도 하다.
황소가 최치원의 격문을 읽고 충격을 받아 넘어져 죽었다는 이야기는 해동 석학의 문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과장하여 보여주는 문학적인 일화 또는 과장법을 동원한 비유인 듯하다.
討黃巢檄文 - 檄黃巢書
廣明二年七月八日 諸道都統檢校太尉某官 告黃巢 夫守正修常曰道臨危制變曰權 (광명廣明: 당나라 희종僖宗의 연호. 제도도통 검교태위(諸道都統檢校太尉) : 여러 도(道)의 군대를 통솔하여 총지휘하는 벼슬 이름)
광명 2년 7월 8일에 제도 도통 검교 태위 아무는, 황소에게 알린다.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하는 것을 권이라 한다.
智者成之於順時 愚者敗之於逆理 然則雖百年繫命 生死難期 而萬事主心 是非可辨 今我以王師則有征無戰 軍政則先惠後誅 (王師: 천자의 군대)
지혜 있는 이는 시기에 순응하는 데서 성공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스르는 데서 패하는 법이다. 비록 백년의 수명에 죽고 사는 것은 기약하기 어려우나, 모든 일은 마음으로써 그 옳고 그른 것을 이루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왕사로 말하면 정벌은 있으나 싸움을 주로 하는 것이 아니며, 군정을 말하면 은덕을 앞세우고 죽이는 것을 뒤로 한다.
將期剋復上京 固且敷陳大信 敬承嘉諭 用戢奸謀 且汝素是遐甿 驟爲勍敵 偶因乘勢 輒敢亂常 遂乃包藏禍心 竊弄神器 侵凌城闕 穢黷宮闈 旣當罪極滔天 必見敗深遁地
앞으로 상경을 수복하고 큰 신의를 펴고자 하여 삼가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간사한 것들을 치우려 한다. 너는 본시 먼 시골 백성으로, 갑자기 억센 도적이 되어 우연히 시세를 타고 감히 강상을 어지럽게 하였다. 드디어 불측한 마음을 품고 높은 자리를 노려보며 도성을 침노하고 궁궐을 더럽혔으니, 죄가 이미 하늘에 닿을 만큼 극도에 이르러 반드시 여지없는 패망을 당하고 말 것이다.
噫 唐虞已降 苗扈弗賓 無良無賴之徒 不義不忠之輩 爾曹所作 何代而無 遠則有劉曜王敦覬覦晉室 近則有祿山朱吠噪皇家 (唐虞 요순시대, 苗 순임금때 복종치 않았다가 토벌당한 나라)
애달프다. 당우 시대로부터 내려오면서 묘와 호 따위가 복종하지 아니하였은즉, 양심 없는 무리와 충의 없는 것들이란 바로 너희들의 하는 짓이다. 어느 시대인들 없겠느냐. 멀리는 유요와 왕돈이 진 나라를 엿보았고, 가까이는 녹산과 주자가 황가를 시끄럽게 하였다.
彼皆或手握强兵 或身居重任叱叱則雷奔電走 喧呼則霧塞烟橫 然猶暫逞奸圖 終殲醜類
그들은 모두 손에 막강한 병권을 쥐었고 또한 몸이 중요한 지위에 있어서, 호령만 떨어지면 우레와 번개가 치닫듯 요란하였고, 시끄럽게 떠들면 안개와 연기가 자욱하듯 하였지만, 잠깐 동안 못된 짓을 하다가 필경에는 그 씨조차 섬멸을 당하였다.
日輪闊輾 豈縱妖氛 天綱高懸 必除凶族 況汝出自閭閻之末 起於隴畝之間以焚劫爲良謀 以殺傷爲急務 有大可以擢髮 無小善可以贖身 不唯天下之人皆思顯戮 仰亦地中之鬼已議陰誅 縱饒假氣遊魂 早合亡神奪魄
햇빛이 활짝 펴졌으니 어찌 요망한 기운을 그대로 두겠으며, 하늘 그물이 높이 쳐졌으니 나쁜 족속들은 반드시 제거되고 말 것이다. 하물며 너는 평민 출신으로, 농촌에서 일어나 불 지르고 겁탈하는 것을 좋은 짓으로 알고 살상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는 큰 죄만 있을 뿐, 속죄할 수 있는 조그마한 착함은 없으니, 천하 사람이 모두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아마 땅속의 귀신까지도 은밀히 죽이려고 의논하였을 것이니, 네가 비록 숨은 붙어 있다고 하지만 넋은 벌써 빠졌을 것이다.
凡爲人事 莫若自知 吾不妄言 汝須審聽
무릇 사람의 일이란 제가 제 자신을 아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내가 헛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니, 너는 자세히 듣거라.
比者我國家德深含垢 恩重棄瑕 授爾節旄 寄爾方鎭 爾猶自懷鴆毒 不斂梟聲 動則齧人 行唯吠主 乃至身負玄化 兵纏紫微 公侯犇竄危途 警蹕則巡遊遠地 不能早歸德義 但養頑凶 斯則聖上於汝有赦罪之恩 汝則於國有辜恩之罪
必當死亡無日 何不畏懼于天 況周鼎非發問之端 漢宮豈偸安之所
요즈음 우리 나라에서는 더러운 것을 용납하는, 덕이 깊고 결점을 따지지 않는 은혜가 지중하여 너에게 병권을 주고 또 지방을 맡겼거늘, 오히려 짐새와 같은 독심을 품고 올빼미와 같은 흉악한 소리를 거두지 아니하여 움직이면 사람을 물어뜯고 하는 짓이 개가 주인을 짖는 격으로, 필경에는 천자의 덕화를 배반하고 궁궐을 침략하여 공후들은 험한 길로 달아나게 되고 어가는 먼 지방으로 행차하시게 되었다. 그런데도 너는 일찌감치 덕의에 돌아올 줄 모르고 다만 흉악한 짓만 늘어가니, 이야말로 천자께서는 너에게 죄를 용서해 준 은혜가 있고, 너는 국가에 은혜를 저버리니 죄가 있을 뿐이니, 반드시 머지않아 죽고 말 것인데, 어찌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느냐. 하물며 누자라 솥은 물어 볼 것이 아니요, 한나라 궁궐은 어찌 네가 머무를 곳이랴.
不知爾意終欲奚爲 汝不聽乎 道德經云 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 又不聽乎
너의 생각은 끝내 어찌하려는 것이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도덕경>에 "회오리바람은 하루 아침을 가지 못하고 소낙비는 온종일을 갈 수 없다." 고 하였으니, 하늘의 조화도 오히려 오래 가지 못하거든 하물며 사람의 하는 일이랴. 또 듣지 못하였느냐.
春秋傳曰 天之假助不善 非祚之也 厚其凶惡而降之罰 公汝藏奸匿暴 惡積禍盈 危以自安迷以不復 所謂燕巢幕上 漫恣騫飛 魚戲鼎中 卽看燋爛
<춘추전>에 "하늘이 아직 나쁜 자를 놓아 두는 것은 복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 죄악이 짙기를 기다려 벌을 내리려는 것이다."고 하였는데, 지금 너는 간사함을 감추고 흉악함을 숨겨서 죄악이 쌓이고 앙화가 가득하였음에도, 위험한 것을 편안히 여기고 미혹되어 돌이킬 줄 모르니, 이른바 제비가 막 위에다 집을 짓고 막이 불타오르는데도 제멋대로 날아드는 것과 같고, 물고기가 솥 속에서 너울거리지만 바로 삶아지는 꼴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我緝熙雄略糺合諸軍 猛將雲飛 勇士雨集 高旌大旆 圍將楚塞之風 戰艦樓船 塞斷吳江之浪
우리는 뛰어난 군략을 모으고 여러 군사를 규합하여, 용맹스런 장수는 구름처럼 날아들고 날랜 군사들은 비 쏟아지듯 모여들어, 높이 휘날리는 깃발은 초새의 바람을 에워싸고 총총히 들어찬 함선은 오강의 물결을 막아 끊었다.
陶太尉銳於破敵 楊司空嚴可稱神 旁眺八維 橫行萬里 旣謂廣張烈火 爇彼鴻毛 何殊高擧泰山 壓其鳥卵
진나라 도태위처럼 적을 쳐부수는 데 날래고, 수 나라 양소처럼 엄숙함이 신이라 불릴 만하여, 널리 팔방을 돌아보고 거침없이 만 리를 횡행할 수 있으니 마치 치열한 불꽃을 놓아 기러기 털을 태우고, 태산을 높이 들어 새알을 짓누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卽日金神御節水伯迎師 商風助肅殺之威 晨露滌昏煩之氣 波濤旣息 道路卽通
금신이 계절을 맡았고 수백(水伯)이 우리 군사를 환영하는 이 때, 가을 바람은 숙살하는 위엄을 도와주고 새벽 이슬은 혼잡한 기운을 씻어 주니, 파도는 이미 쉬고 도로는 바로 통하였다.
當解纜於石頭 孫權後殿 佇落帆於峴首 杜預前驅 收復京都 剋期旬朔但以好生惡殺 上帝深仁 屈法申恩 大朝令典
석두성에 뱃줄을 놓으니 손권이 후군이 되었고, 현산에 돛을 내리니 두예가 앞잡이가 되었다. 앞으로 서울을 수복하기는 늦어도 한 달이면 되겠지만,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것은 하늘의 깊으신 덕화요, 법을 늦추고 은혜를 펴려는 것은 국가의 좋은 제도이다.
討官賊者不懷私忿 諭迷途者固在直言 飛吾折簡之詞 解爾倒懸之急 汝其無成膠柱 早學見機 善自爲謀 過而能改
국가의 도적을 토벌하는 데는 사적인 원한을 생각지 아니 해야 하고 어두운 길에 헤매는 이를 깨우쳐 주는 데서 바른 말이라야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나의 한 장 글을 날려서 너의 급한 사정을 풀어 주려는 바이니, 미련한 고집을 부리지 말고 일찍이 기회를 보아 자신의 선후책을 세우고 과거의 잘못을 고치도록 하라.
若願分茅列土 開國承家 免身首之橫分 得功名之卓立 無取信於面友 可傳榮於耳孫 此非兒女子所知 實乃大丈夫之事
早須相報 無用見疑
만일 땅을 떼어 받아 나라를 맡고 가업을 계승하여서 몸과 머리가 두 동강이 되는 화를 면하고 뛰어난 공명을 얻기 원한다면 몹쓸 도당들의 말을 믿지 말고 오직 후손에게 영화를 유전해 줄 것만을 유의하라. 이는 아녀자의 알은 체할 바가 아니요 실로 대장부의 할 일이니만큼, 그 가부를 속히 회보할 것이요, 쓸데없는 의심을 두지 말라.
我命戴皇天 信資白水 必須言發響應 不可恩多怨深
나는 명령은 하늘을 우러러 받았고 믿음은 맑은 물을 두어 맹세하였은즉, 한 번 말이 떨어지면 반드시 메아리처럼 응할 것이매 은혜가 더 많을 것이요 원망이 짙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或若狂走所牽 酣眠未寤 猶將拒轍 固欲守株 則乃批熊拉豹之師 一麾撲滅 烏合鴟張之衆 四散分飛 身爲齊斧之膏
骨作戎車之粉 妻兒被戮 宗族見誅
만일 미쳐서 날뛰는 도당들에 견제되어 취한 잠을 깨지 못하고 마치 당랑이 수레바퀴를 항거하듯이 어리석은 고집만 부리다가는, 곰을 치고 표범을 잡는 우리 군사가 한 번 휘둘러 쳐부숨으로써 까마귀 떼처럼 질서 없고 솔개같이 날뛰던 무리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칠 것이며, 너의 몸뚱이는 도끼 날에 기름이 되고 뼈다귀는 수레 밑에 가루가 될 것이며 처자는 잡혀 죽고 권속들은 벰을 당할 것이다.
想當燃腹之時 必恐噬臍不及 爾須酌量進退 分別否臧 與其叛而滅亡 曷若順而榮貴 但所望者 必能致之 勉尋壯士之規 立期豹變 無執愚夫之慮 坐守狐疑 某告
옛날 동탁처럼 배를 불태울 그 때가 되어서는, 사슴처럼 배꼽을 물어뜯는 후회가 있을지라도 시기는 이미 늦을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진퇴를 참작하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라. 배반하다가 멸망하기보다 어찌 귀순하여 영화롭게 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다만, 너의 소망은 반드시 이루게 될 것이니, 장부의 할 일을 택하여 표범처럼 변하기를 기할 것이요, 못난이의 소견을 고집하여 여우처럼 의심만 품지 말라.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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