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방언(glossolalia)을 지지하는가? 편집 중이나 옮기지 마십시오.
1. 방언 연구자들
한국교회에 성행하는 현대 방언(glossolalia)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하버드대학교 인류학자 니콜라스 하크네스 교수는 최근 여의도순복음중앙교회를 거쳐 교파, 교단을 넘어 확산되고 있는 오순절주의 방언 현상을 탐색한 책을 펴냈다. ‘방언’은 수수께끼이다. 그것의 인기가 경쟁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한국에서 종교-기독교 유산으로 정착되고 있다. 제도화된 대규모 교회들에 의해 증폭되고 있다. 한편에서 ‘방언’은 영적 욕구를 채우고 있고, 다른 한 편에서 강한 반대를 유발하는 교차점에 놓여 있다고 한다.
하크네스는 ‘방언’을 사람의 정상적인 언어 능력의 제한성과 인간 언어의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넘어서는 “충만신학(theology of fullness)의 표현”이라고 정의한다. 인류학-사회학-언어학 관점으로 접근한다. 성경적 근거나 역사적 모범을 탐색하지는 않는다(Nicholas Harkness, Glossolalia and the Problem of Languag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20).
보츠와나대학교의 종교학-신학 교수 제임스 아만즈는 ‘방언’ 현상을 심리학적 임상실험으로 분석하고서, 방언’은 완전한 신적인 언어(divine language)인 동시에 시끄러운 악기소리와 고성(高聲) 기도와 더불어 감정적으로 고조된 사람들이 영적인 것을 체험하고 싶어 하고 그런 것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결과라고 결론짓는다. 불안한 정서 상태에서 학습된(taught) 말하기이며, 신자가 ‘방언’을 할 때 성령의 완전한 통제를 받는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고 한다. ‘방언’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언어(man-made language)이고, 타 종교에서도 논쟁이 되고 있다고 한다(James N. Amanze, "Glossolalia: Divine Speech or man-made language? A psychological analysis of the gift of speaking in tongues in the Pentecostal Churches in Botswana," Studia Historiae Ecclesiasticae, vol. 41, no. 2, Pretora 2015).
오순절주의, 은사주의 신사도주의 운동의 상표처럼 여겨지는 '방언'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방언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제임스 아만즈의 주장과 대동소이하다. 방언 반대자들은 이를 저주받은 마법적 기호 발음(semiotic alchemy)이라고 한다. 사탄이 궤계를 부리며 신자들을 유혹하는 수단이라고 한다. ‘방언’이 사람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수단이며 그 ‘비밀’이 복음이라면 인간이 하나님께서 복음을 알려주는 것이라는 모순에 봉착한다고 지적한다. 하나님께 무슨 비밀이 있는가? 방언기도는 이교의 진언(眞言, 만트라)과 비슷하다. ‘방언’ 기도자는 신비롭고 감미로운 황홀경-엑스타시 또는 무아지경에 빠지게 한다. 집단 무아지경에 이르게도 한다. 일체의 번뇌를 해탈한 최고의 경지인 열반(涅槃, 니르바나) 상태에 들어가게 한다.
방언은 오순절주의, 은사주의, 신사도주의를 지향하는 교회의 생활과 영성에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성령께서 자신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여긴다. 마귀가 알아듣지 못하도록 비밀리 하나님께 방언 기도를 올리며, 따라서 자신도 그 기도 내용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이상야릇한 ‘방언’을 ‘하늘의 언어,’ ‘천사의 언어,’ ‘하나님께 올리는 영적인 기도'이며, 나아가서는 ‘성령세례’로 여긴다.
방언은 은사주의, 오순절주의, 신사도주의 추종자들의 최대공약수이며, 배타적 영성, 정통성, 영적 성숙의 보편적 기준이다. 이들은 현대 방언의 기원을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강림의 날의 방언으로 본다. 사도행전의 방언과 오늘날의 방언, 방언기도를 동일시한다. 방언을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수단으로 여기며, 특히 마귀가 알아들을 수 없도록 따돌리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장치라고 생각한다.
방언을 지지하는 설교자들과 저술가들은 현대 방언이 신적인 언어이며, 방언을 하면 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고 영적인 활기로 충만해 진다고 한다. 방언을 성령이 말세에 교회에 부어주는 광범위하고 새로운 능력이라고 한다. 방언을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고, 영이 새로워지며, 성령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은사와 능력을 활성화 하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가능하게 한다고 한다. 방언이 초자연적 지혜와 계시의 은사를 가져다준다고 한다. 방언을 탐탁치않게 여기는 신자는 '성령훼방죄'를 범하는 자이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라고 단정하기도 한다.
방언 지지자들은 방언 은사가 사도 중단된 적이 없으며 다만 쇠퇴한 상태였다가 20세기초에 다시 주어졌다고 한다. 오늘날의 방언은사의 출현은 말세를 위한 성령의 은사라고 말한다. 요엘서 2장 28절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요엘서 2장 23절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오순절 성령강림을 '이른 비', 20세기의 방언 현상을 '늦은 비' 곧 '성령세례'로 해석한다.
방언 지지자들의 결함은 이러한 주장들을 입증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점이다. 성경적 합리적 신학적 근거를 대지 못한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20세기 현상과 관계가 없다. 선지자 요엘은 방언이나 성령세례를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방언'에 심취하다가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에게서 왔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성령의 은사라는 확신을 하지 못하고, 무익함을 간파하고서 그것을 멀리하는 기독인들도 있다. 방언이 마귀의 장난이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방언을 20-30여 년 동안 열심히 해 온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방언' 퇴치 운동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교회는 영적은사들을 분별하는 책임을 지니고 있다. 바울은 방언과 예언과 관련하여 “영들 분별”(고전 12:10)의 중요성을 말한다. 방언을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하라고 하면서,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고전 14:29)이라고 한다. 정상적인 교회는 두 사람 이상의 전문가들의 검증 없이 영적 은사라는 것들을 수용하지 않는다. 성령 하나님은 성경의 가르침과 더불어 역사한다. 성경은 진정 오순절주의, 은사주의, 신사도주의 추종자들이 체험하는 '방언'을 지지하는가?
2. 방언과 글로쏘랄리아
방언(language, tongue)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에 필요한 언어 수단이다. 로마제국 안의 다양한 지방 언어들, 각 족속, 각 나라의 언어였다. 로마제국 안의 내국어들은 오늘날 개념의 외국어들이었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문법 체계를 지니고 있다. 통역이 가능하다. 사도행전에 세 차례 나타나는 방언은 언어체계를 구성하는 단어, 문법, 의미를 지니고 있는 초자연적인 언어현상이었다. 현대의 의미 없는 중얼거림이나 단순 음절의 반복 또는 자기 자신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이상야릇한 소리 현상이 아니었다. 방언하는 자신들이 말하고 듣는 내용을 또렷이 인지하고 있었다.
방언은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이다. 방언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린 형벌이다. 바벨탑 사건 때 각 민족들과 나라들의 다양한 방언들로 나뉘었다. 반면에, 오순절 성령강림의 날 예루살렘에 주어진 방언은 그 저주를 되돌리는 사건이었다. 언어장벽인 방언들이 초쟈연적으로 극복됨은 새 언약 시대의 시작과 기독교 공동체의 출범을 알리는 표적이었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표적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초자연적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모인자들은 단어와 문법으로 구성된 언어들 곧 방언을 말했고 타인의 방언을 알아들었다.
사도행전의 방어는 뜻 없는 말이나 중얼거림이 아니라 단어와 문법체계를 가진 각 나라의 언어들이다. 오순절주의, 은사주의, 신사도주의 추종자들이 말하는 방언은 언어가 아니다. 오늘날의 방언은 언어와 비슷한 것 같지만 약간의 피상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의사소통의 언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3. 사도행전의 방언
마가복음 16장 17절은 "새 방언들"(glosais, 복수)을 사도적 표적으로 언급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시면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를 것"이라면서 방언들을 언급한다. 복수형 '글로사이스'(glossais) 곧 여러 가지의 방언들을 표적으로 주어질 것이라고 한다. 사도행전 이외의 방언들은 표적이 아니다. 마가가 언급한 방언들을 오늘날의 방언과 동일시하고, 사도행전의 방언을 현대 방언과 같은 것으로 여김은 넌센스이다.
사도행전이 성령강림과 방언 이야기는 비상한 구속사 과정에서 발생한 단회적 사건이다. 이것은 교회 시대 전체의 규범적 패턴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도행전의 방언을 근거로 오늘날의 방언을 정당화하려 함은 무지의 소치이다. 목적, 동기, 형태, 결과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장은 방언을 표기하면서 ‘글로사이스’와 ‘디아렉토스’라는 두 용어로 서술한다. 이 단어들은 모두 언어를 지칭한다. 초자연적인 방언을 듣는 사람은 자기가 태어난 나라의 언어들, 살고 있는 지역의 지방어들, 오늘날의 외국어들로 알아들었다.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glossais, 복수)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4절)했다.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dialecto, 단수)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6절)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dialecto,단수)로 듣게 됨이 어찌됨이냐"(8절). 불신자들도 방언을 자기의 언어로 알아들었다. 이러한 묘사를 무아지경에서 하는 의미 없는 발음현상 곧 현대방언에 적용할 수 없다.
예루살렘 방언 현장에서 신기한 언어현상을 목격하고 놀란 사람들은 바대, 메대, 엘람, 메소보다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르기아, 밤빌리아, 애급, 리비야, 로마, 그레데, 아라비아에서 자라고 살고 있던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이방인들이었다. 제자들은 아람어로 복음을 전했을 것이고, 여러 지방에서 모인 사람들은 그 복음 메시지를 초자연적 능력으로 자기나라 언어로 알아듣고 이해했다. 로마제국의 내국어 곧 오늘날의 외국어는 다양했다. 방언을 듣는 사람들은 외국어를 또렷이 알아듣고 선명하게 이해했다.
예루살렘 기독인들은 ‘방언기도’를 하지 않았다. 신에게 비밀스런 무엇을 고하는 진언(眞言, 신 18:11; 사 42:12)을 하지 않았다. 이상한 소리나 황홀한 상태에서 방언을 하지 않았다. 자기도 그 뜻을 알지 못하는 중얼거림을 하지 않았다.
얼마 뒤,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주어진 것과 동일한 방언들(glossais, 복수)이 가이샤라에 주어졌다. 이탈리아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와 그의 가족과 친척들에게 방언을 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예수께서 나무에 달려 죽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 그의 이름을 믿는 자가 죄 사함 받음 등의 핵심 교리를 전했다(행 10:34-43).
사도행전은 가이샤라의 방언을 예루살렘의 방언과 동일시한다. 성령이 '방언들'을 이방인들에게도 부어주신다고 한다(행 10:46). 가이샤라의 방언을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증명하는 표적으로 제시한다(행 11:15). 베드로가 예수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그 말씀을 듣는 이방인들에게 임했고, 그들이 방언들을 했다고 기록한다.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성령 받음과 예루살렘에서 주어진 것과 동일한 것 곧 방언들을 함을 보고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행 11:18)라고 하며 놀라워했다.
약 20년 뒤, 에베소에 있는 12명가량의 ‘어떤 제자들’이 '방언들'을 했다. 세례요한 추종자들(Mandeans)로 추정되는 이들은 성령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세례요한의 세례만 받은 상태였다. 바울은 그들에게 세례요한이 한 말을 알려주면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언했다. 그러자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고,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자 방언과 예언을 했다(행 19:6, glossais, 복수). 누가는 바울의 사도권의 표징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방언을 가이샤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글로사'로 표기한다.
에베소 방언 사건의 순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방언은 복음전도와 세례 이후에 주어졌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에베소 지역 거주자들은 유대인들일 가능성이 크다. 바울과 그들은 그리스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에베소 방언이 의사소통을 위한 목적이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기 어렵다. 누가가 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을 보아 예루살렘, 가이샤라, 에베소의 방언 사건의 방언을 모두 동일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에베소는 당시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이 있었다. 에베소의 방언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보여주는 표적이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유대인이 아니라 헬라인이다. 사도행전을 헬라어로 기록했다. 바울의 동역자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이 정경으로 간주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에 동참함으로써 얻는 동역자 관계 덕분이고, 또 바울의 예수운동 사역의 목격자이고 증인이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0장과 19장의 방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의 수단, 초자연적인 수단, 성령 하나님이 개입하여 상대방의 언어, 학습하지 않은 언어를 말하거나 환하게 알아듣는 신비한 언어 현상이었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언어를 말하는 자가 그 내용을 알지도 못하거나 혀가 말려들거나 뒤틀리면서 하는 중얼거림이 아니었다.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맑은 정신으로 언어체계 따라 그리고 번역 또는 통역이 가능한 또렷한 말이었다.
예루살렘의 방언, 가이샤라의 방언, 에베소의 방언은 모두 하루 동안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였다. 제자들은 마가요한, 실라(실루아노) 등 통역하는 동역자들을 대동하고 전도여행을 했다.
4. 고린도 방언: 하늘의 언어인가?
고린도에는 아크로고린도(Acrocorinth)라 불리는 해발 578미터의 언덕 성채는 동서 양쪽 바다를 바라보는 절벽 바위산 정상에 있었다. 이곳에 여신 비너스를 섬기는 아프로디테(Aphrodite) 신전, 아폴로를 섬기는 델피(Delphi) 신전이 있었다. 이것들은 고린도에 유행하던 성적 방종과 이상야릇한 이교 방언과 신탁(神託)의 요람이었다. 고린도지역 주민들에게 지기(地氣)를 영기(靈氣)를 공급해주는 발전기 같은 난공불락의 '영산'(靈山) 곧 마귀들의 놀이터였다.
주후 1세기 고린도와 그 주변 지역에 존재한 신비종교는 무아지경의 말과 황홀경 비슷한 체험을 광범위하게 이용했다. 일부 고린도 교인들은 무아지경에서 나오는 가짜 방언을 교회 안에 도입하여 진짜 방언의 은사를 더럽힌 것으로 보인다. 가짜 방언, 이교적 방언은 오늘날의 이른바 방언과 매우 유사했다. 바울은 그러한 관행은 방언 은사의 전반적인 요점을 교묘하게 회피하는 것이라고 가르침으로써 고린도교회의 생각을 바로잡으려 했다. 기독인들이 방언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면 그리스도의 대의에 이롭지 않고 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고린도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 시달리고 있었다. 파당, 음행, 송사, 결혼, 우상제물, 육체부활, 여성의 수건쓰기, 바울의 사도권 시비,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하는 주장, 그리고 ‘방언’ 등이었다. 본받을 것이 없는 교회였다. 예수를 저주받을 자라고 말하고,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교회에서 방언의 역할에 대해 말하는 유일한 성경본문은 고린도전서 12장, 13장, 14장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방언(외국어)의 은사를 남용하는 것을 꾸짖기 위해 이 본문을 기록했다. 바울이 말한 대부분의 내용은 방언의 사용을 규제하고 경계하는 것이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영적인 은사에 대해 일반적으로 논한다. 이 장이 열거하는 성령의 은사 목록은 "각종 방언들"(gene glosson, 복수)을 말하는 것"(고전 12:28)을 포함하고 있다. "각종 방언들"은 무엇인가? 로마 제국 안의 여러 나라들의 말 곧 외국어들이 아닌가?
고린도전서 14장은 방언과 방언통역 은사의 올바른 사용 지침을 제시한다. 13장은 은사를 사용하는 올바른 동기인 사랑에 대해 논한다. 바울은 은사를 자기를 위하여 곧 이기적으로 사랑 없이 사용하고 있음을 책망한다. 고린도의 기독인들은 자기부인과 자기희생적 관심으로 서로를 섬기는 일보다 자기를 높이고 황홀한 체험을 즐기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의 방언들(glossais, 복수)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라는 동기가 올바르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한다.
바울은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들(glossai, 복수)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고 한다. 예루살렘에서 처음 나타나고 가이사랴와 에베소의 신자들에게 당일에만 주어진 초자연적 방언들(glossa)과 관련하여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말한 “천사의 말”은 무엇인가? 바울의 은사목록에 일종의 천사적인 언어 또는 하늘의 언어가 포함되어 있는가? 방언 지지자들은 방언의 은사를 개인적인 기도의 언어, 하나님만이 아시는 하늘의 언어, 천상의 말 곧 일종의 초자연적인 언어라고 믿는다. 그러나 본문 자체는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바울은 하나의 가정적 상황을 설정하면서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모든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주며 자기 몸까지 불사르도록 내어준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한다. 바울은 사랑의 필요성을 강조하려고 그 예를 극단적 한계까지 확장한다.
천사들이 하늘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성경에 없다. 천사들은 성경에 나타날 때마다 인간이 쓰는 보통의 언어로 의사소통을 한다(눅 1:11-20, 26-37; 2:8-14.)
성경은 ‘방언의 은사’가 인간의 언어와 다르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과 14장에 묘사된 진짜 방언이 실질적으로 오순절에 임한, 사도행전 2장에 묘사된 초자연적인 표적 언어와 다르다는 그 어떤 암시도 없다. 사도행전의 제자들과 유월절 방문자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언어/언어들로 소통을 했다. 말하는 자 편에서는 단수 방언이고 듣는 자 편에서는 여러 가지 언어들이었다.
흠정역(King james Version) 영어 번역 성경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미지의 언어”(unknown tongue)라는 표현을 사용한다(2, 4, 14, 27). 방언 지지자들은 이 표현이 이 세상의 언어가 아니라 천상의 언어를 묘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미지의”(unknown)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는 없다. 번역자들이 고의 또는 실수로 덧붙인 단어이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의 “사람의 방엉들”은 의미 없는 무아지경의 발음이나 일종의 하늘의 언어 또는 천사의 언어라는 주장을 옹호히가니 입증하는 데 사용될 수 없다.
고린도전서 14장은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다”(고전 14:33)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고린도교회가 방언의 은사를 바르게 사용하도록 지도하는 가르침 곧 교정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방언을 부정하고 예언을 장려한다. 국제무역도시 고린도를 드나드는 여러 지방 사람들의 "각종 방언들"과 이교적 방언이 야기하는 문제들을 다룬다(고전 12:10, 13:1, 8; 14:2-39). '방언'의 원조처럼 보이는 고린도의 이교 방언의 무의미하고 이상야릇한 소리 현상을 부정적으로 언급한다.
5. 고린도전서 14장 2절
'방언' 지지자들의 '성경적 보루'로 천명하는 성경본문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이 본문에 대한 빈약한 번역과 오역이 '방언'에 대한 상당한 오해를 초래하는 듯하다.
이 본문의 한글 번역은 빈약하고 미숙하다. 개역개정 번역본에는 헬라어 본문에 있는 단어 4개를 오역하거나 생략하여 의미를 호도한다. ① "그 이유는" 또는 "그 까닭은" 또는 "왜냐하면"으로 번역되는 단어를 생략한다. ② "사람들에게"를 "사람에게"로, ③ "신에게"를 "하나님에게"로 번역한다. "데오스"(theos) 앞에 정관사(행 17:23 참고)를 붙이지 않음을 보아 "신"으로 번역함이 옳아 보인다. ④ "말해도"를 번역하지 않고 넘어간다.
그리고 ⑤ 4절 번역에 두 번 등장하는 "덕"(edification)은 헬라어 본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의 덕을 위하여"가 아니라 "자기를 세우고"로 번역함이 옳다. ⑥ 5절의 "방언을 말하기를 원하나,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지 아니하면"의 단수형 '방언'은 복수형 '방언들'(glossais)로 번역함이 마땅하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부터 5절을 헬라어에 충실하게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신령한 것을 사모하십시오. 특히 예언을 열망하십시오. 그 까닭은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하지 아니하고 반대로 신(神)에게 한다고 하기 때문에 자기 영으로 비밀을 말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끼치며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자기를 세우고,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를 세웁니다. 나는 여러분이 다 방언들을 말하기를 바랍니다만, 예언할 수 있기를 더 원합니다. 방언들을 말하는 사람이 만일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사람만 못합니다”(고전 14:1-5).
고린도전서 14장 2절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예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방언’을 경계하고 교정하는 바울의 가르침에 등장하는 한 구절이다. “그 까닭은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하지 아니하고 반대로 신(神)에게 한다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기 영으로 비밀을 말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습니다”로 풀어쓰면 훨씬 이해하기 쉬워진다. 바울의 가르침은 고린도교회 안에 들어온 이교적인 방언을 경계하고 있다.
고린도교회에는 거짓 사도들이 들어와 진짜 사도인 것처럼 행사하면서 신자들을 속이고 있었다. 거짓사도들은 나무 위에 달려 죽은 예수를 저주받은 자라고 하고 자신들을 영적으로 신령한 자라고 선전했다.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한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전하지 않은 다른 예수를 전해도, 여러분은 그러한 사람을 잘도 용납합니다.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잘도 받아들이고, 우리에게서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잘도 받아들입니다(고후 11:4). 이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들이요,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놀랄 것은 없습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그렇다면, 사탄의 일꾼들이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다고 해서, 조금도 놀랄 것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그들이 행한 대로 될 것입니다"(고후 11:13-15).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신전들에서 성행하던 이상야릇한 '방언'을 앞세워 인기 몰이를 한 것으로 보인다.
6.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수단인가?
바울이 방언을 ‘기도의 언어’로 이해하지 않음에도 방언 지지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방언기도'로 풀이하고, 방언을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영적인 수단으로 여긴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이 오늘날의 방언을 긍정하는 본문이면 여러 가지 모순들이 뒤따른다. 첫째, 방언이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수단이라면 왜 청중이 알아듣는 통역을 하라고 하는가? “방언들(glossais)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라”(고전 14:4-5 축약). 방언이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면 이를 통역하라고 함은 모순이다. 남의 비밀을 청중에게 공개하라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라고 말한다.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라고 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라”고 한다.
둘째, 바울은 통역자 없이 방언을 말하는 것은 무익하다고 지적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hermeneuo)하기를 기도하라고 한다. 누군가 교회에서 방언(glosse 단수)을 말하면 누군가는 통역을 해야 한다(14:13, 27). 만일 바울이 ‘개인적인’ 기도의 언어나 자연발생적인 천상의 소리 곧 무아지경의 중얼거림을 염두에 두었다면 통역을 언급한 것은 시의적절하지 않다. 통역은 번역(translation)을 뜻한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 9장 7절과 히브리서 7장 2절에서 번역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통역 은사는 배운 언어를 번역하여 타인에게 알려주어 그 메시지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능력이다(고전14:5). 이를 무아지경의 발음이나 뜻 모를 중얼거림의 말로 번역하거나 해석함은 옳지 않다.
비밀을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면 왜 통역이 필요한가? “그렇지 아니하면(통역하지 않으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고전 14:16-17)고 한다. 이 맥락의 방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방언이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일이면 그것은 통역해야 할 까닭이 없다.
셋째, 바울은 자신이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들(glossais, 복수)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고 한다. 그는 여러 가지 언어들을 구사했다. 고향 방언 길리기아어, 팔레스타인 방언 아람어, 국제어 헬라어, 유대인 방언 히브리어에 능통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로마군대 안에서 통용되던 라틴어 방언도 어느 정도 구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울이 방언과 관련하여 “감사하다”고 말한 것은 타인이 알아듣지 못하고 교회와 타인에게 덕을 세우지도 못하는 방언 또는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발음현상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곧 시간적으로 더 오래했다는 뜻이 아니라 “각종 방언들” 곧 여러 지역의 언어들, 외국어들 곧 방언들(glosson, 복수, 고전 12:10, 28)를 지녔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자신이 방언들을 많이 하지만, 그 언어들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을 무시하는 결과에 이르는 방언들 곧 외국어들을 말하기를 자제했다. 바울은 방언들을 말하는 은사가 하나님이 의도한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면 오케스트라의 변주곡처럼 잡음에 지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넷째, 바울은 방언들(glossais, 고전 14:39) 곧 외국어들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도 그 의미를 모르고 타인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서술한다. 외국어는 장려하고 의미 없는 무아지경의 중얼거림을 경계한다. 국제무역 도시 고린도에 모인 외국인들은 자기들끼리 자기들이 방언으로 대화를 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이 “방언들을 금하지 말라,” “방언들 말하기를 원한다”고 한 말에 나오는 ‘방언’은 외국어로 봄이 타당하다. 여기서 사용된 ‘방언들’은 “각종 방언들”(고전 12:28)의 방언들(glosson)과 동일한 단어이다.
구약성경의 율법서는 사도행전의 초자연적 방언도, 고린도의 이교 방언을 알지 못했다. 바울은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들(eteroglossois)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들(glossai)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다”(고전 14:21-22)라고 한다. '방언들'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유익을 주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바울은 율법서에 등장하는 방언들을 가지고 고린도교회의 ‘방언'을 교정한다.
다섯째, 바울은 교회에서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glosse 단수)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리라”(고전 14:19)고 한다.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함이 말아듣지 못하는 외국어 방언이나 이교적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힌다. 만약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방언이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수단’이라면, 바울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까닭으로 이를 무익하다고 말할 까닭이 없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서 고린도교회 기독인들에게 그들이 “방언의 은사”를 사람들에게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기 위해 사용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영적인 은사는 하나님의 유익이나 은사를 받은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허락된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이 점을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라는 말로 분명히 한다.
여섯째, 바울은 방언을 질서 없이 하면 "미쳤다"고 하는 비난을 들을 것이라고 한다. ‘방언’과 관련하여 “미쳤다”는 단어를 구사함은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바울의 시각을 반영한다.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들(glossais)로 말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 14:23)라고 한다.
일곱째, “만일 누가 방언(glosse, 단수)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하라”(고전 14:27)고 한다. 전술했듯이, 방언이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수단이면, 왜 한 사람이 통역을 해야 하는가? 왜 두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회중을 향하여 방언으로 말을 해야 하는가? 바울은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전 14:28)고 잘라 말한다. 바울이 권장하는 방언은 좁은 공간의 예배 실에서 한꺼번에 통성기도 하듯이 하는 이상야릇한 중얼거림 방언이 아니다.
여덟째, 바울은 방언을 무질서와 품위상실과 연관시켜 언급한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3-34)고 하고, 또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고 한다. 바울은 방언을 교회 안의 무질서의 상징으로 묘사한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방언이 우리가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수단인가? 아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경계하는 가르침의 일부이다. 방언이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수단이면 그 비밀은 무엇인가? 오순절 날 베드로는 방언으로 예수 복음의 비밀을 증거했다. 방언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수단이면 사람이 하나님께 복음을 알려주는 모순에 봉착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무슨 비밀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아홉번 째, 바울이 방언을 언급할 때 인간의 언어를 염두에 두었다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방언은 믿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종의 표적이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14:21-22). 바울은 여기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이방인의 언어로 계시를 말씀하실 것임을 전하는 예언인 이사야서 28장 11-12절을 인용하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불신에 대한 하나의 책망이었다. 그 책망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의미 있는 표적이 되려면 그것은 천사의 말이 아니라 반드시 이방인의 언어 곧 외국어야 했다.
7. 방언기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외국어 방언과 교회 안에 들어온 이교 방언을 동시에 언급한다. 독자들이 이 본문을 읽을 때 독자들이 다소 어리둥절하는 까닭은 바울이 같은 어원의 단어(glossa, glosse, glosson, glossais)로 이상야릇한 이교 방언 곧 현대 방언과 외국에 해당하는 여러 가지 방언들을 모두 언급하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 안의 방언은 ‘다른 예수’를 전파하고 ‘다른 영’을 받게 하고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자들’ 곧 거짓 사도들 곧 궤휼의 역군들(고후 11:4)이 몰고 온 마법적 기호 발음으로 보인다. 신들린 듯한 상태에서 하는 무의미한 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말 곧 "신에게 비밀을 말한다"(고전 14:2)고 하는 그 이상야릇한 방언이다. 바울은 방언이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를 분명히 밝히기보다는 오히려 모호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 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고전 14:16-17).
고린도교회에서 방언을 말한 자들은 이기적이었다. 타인들 가운데서 자기를 세우려 했다. 교회 안의 나머지 사람들을 무시하고 올바로 전달되어야 하는 방언의 메시지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자아를 만족시키고 자기를 남에게 과시하고 자신의 영성이 탁월하다는 것을 타인에게 입증하려고 방언을 했다. 고린도교회 기독인들은 타인의 눈에 가장 잘 띄고 화려하며 선망 받는 영적 은사를 이기적으로 구하고 있었다. 타인의 칭찬을 탐했고, 갈채를 열망했다. 남들에게 ‘영적인 사람'으로 보이려고 했다. 고린도교회의 가짜 방언을 사용히거나 방언을 남용함으로서교회를 위협하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이와 똑같은 현상이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전 14:14)고 한다. 외국어로 기도하면 영은 기도를 하지만, 교회 안에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탓으로 마음의 열매가 없다. 바울 자기도 이해하고 타인도 알아듣는 특정 외국어로 기도하면 영과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바울은 찬송도 이처럼 교회 구성원들이 알아듣는 언어로 불러 영과 마음으로 찬송하는 것이 되겠다고 한다.
바울은 심령술사가 아니었다. 1세기에 지중해 지역 전역에 성행하던 영지주의의 위험을 알고 있엇고, 고린도교회의 이교적 현상을 경계했다. 따라서 이 본문에 영지주의적 이원론 개념을 적용하여 영과 혼을 구분함은 옳지 않다. 혼의 기도, 영의 기도, 육의 기도를 구분하거나 오늘날의 심령술 개념이나 이원론 구도로 풀이함은 바람직하지 않다.
종교개혁신학자 존 칼빈은 제네바교리문답 제247문에서 “그렇다면 방언으로(알지 못하는 말)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고 “이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며 일종의 사악한 위선입니다”고 답한다. 종교개혁운동 시대에도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방언 현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방언'은 대부분 몇 개의 단어들로 구성된 단순 음절의 반복이다. 선박용 모스 부호(Morse Code)를 소리로 발음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단어 수가 지나치게 적고 단조롭다. 언어의 구성 요소를 갖추고 있지 않다.
하나님은 전능한 신이다. 오늘날에도 예루살렘, 가이샤라, 에베소의 표적 방언을 일으킬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초자연적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신자에게 탁월한 외국어 능력을 주어 그 은사를 활용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에 유익을 끼치게 할 수 있다. 전능한 하나님의 활동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사도시대 이후로 교회사에 사도행전 방언과 동일한 방언이 있었던 기록은 없다.
우리는 성경에서 현대 방언의 모범이나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 날의 방언 현상과 오늘날의 방언은 다르다. 목적과 언어 현상이 같지 않다. 마법적 기호 발음과 같은 현대 방언과 다르다. 자연스런 학습기제가 가져오는 심리적인 소리 현상이 아니었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수단이 아니며, 마귀가 알아들을 수 없도록 따돌리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장치나 영적인 기도가 아니었다.
바울은 타인이 알아들을 수 없고 자신도 알지 못하며 교회에 유익하지 않은 무의미한 기호발음 현상(semiotic utterance)을 경계한다. 방언 지지자들이 사실상 호소하는 방언의 유일한 근거는 고린도전서 14장 2절이지만, 이 본문조차 오늘날의 이상야릇한 방언을 지지하지 않는다. 타국인이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 사용을 절제시키고 교정하며 교회 안에 들어 온 이교적 방언 현상을 경계하는 가르침의 일부이다.
("방언은 신앙생활에 이로운가?"로 연결됩니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리포르만다(기독교사상연구원) 제14회 학술회 발표 논문, 2020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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