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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보적 칭의론과 지옥 공포심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근본 목적은 율법주의자들이나 계몽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사람을 위협하여 선한 행동을 유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물론 개혁주의자들도 선을 독려하고 악을 제어하는 '율법의 제3용도(tertius usus legis)'를 가르쳤습니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성화적 차원이었지 칭의적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도들로부터 성화된 삶을 이끌어 내려면, 이신칭의(以信稱義) 같은 부드러운 것만 가르쳐서는 안 되고 율법과 지옥의 두려움도 함께 넣어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함으로서, 몽학선생으로서의 율법의 용도(갈 3:24)를 왜곡시켰습니다. 그들은 근자에 한국 기독교의 부패 원인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의 강조 탓으로 돌리며, 이런 한국교회의 병폐를 고치려면 이신칭의는 조금만 말하고 종말론적 두려움을 갖다 주는 '유보적 칭의론' 같은 신율주의(theonomy)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옥의 공포를 설교하기로 유명했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의 사례를 거론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지옥 설교로 성도들에게 공포심을 유발시켜 거룩한 삶을 이끌어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즈가 지옥 설교를 한 것은 공포심으로 선한 삶을 유발시켜 지옥 형벌을 면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두려운 지옥이 분명 실재하며 지옥에서 건짐을 받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지옥 심판을 면케 하려고 율법적 행위를 부추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 앞에서 절망하여 모든 율법적 행위를 그치게 하고, 율법의 완성자(롬 10:4)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해서 입니다(갈 3:24). 인간은 자신에게 절망하지 않는 한 결코 그리스도께로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사 율법의 공포심을 조장하여 사람들에게 어떤 선한 행위를 유발시켰다 해도, 이 행위적 의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천국 입성에 2% 부족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율법적 의(義)에 지나지 않습니다(마 5:20). 진정한 성화의 열매는 율법의 공포심에서 나올 수 없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만 나옵니다. 삭개오로 하여금 그의 재산 대다수를 내놓도록 회개를 유발시킨 것은, 율법의 공포심에서가 아니라 길가의 돌멩이 같은 천덕꾸러기를 '아브라함 자손'으로 삼아주신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유보적 칭의론자들의 논리처럼, 종말론적 두려움을 주는 신율주의(theonomy)의 협박으로는 이런 성화를 이끌어 낼 수 없습니다.

두려움이 성화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은 오늘 우리 현실 속에서도 확인됩니다. 세상은 이미 두려운 소식들로 넘쳐나고 있으며, 사람들은 죽음과 질병, 사고,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에 붙들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두려움은 사람들을 선량하게 만들기는 커녕, 점점 더 악하게 만들 뿐입니다. 오히려 두려움의 크기만큼 죄도 넘쳐나는 것 같습니다. 사형제 폐지가 공론화되는 것도 사형의 공포심이 결코 범죄를 줄이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7, 11)"는 성경 말씀과, "율법은 죄의 먼지만을 일으키고 복음은 영혼을 깨끗케 한다"고 말한 청교도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의 말처럼, 율법적 두려움은 죄를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더욱 부추기고, 오히려 우울증이나 동반 자살 같은 파괴적 결과들을 양산시킵니다.

일부 신학자들이 유보적 칭의론 같은 종말론적 두려움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심어주면 성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심리학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성화의 열매를 맺는데 필요한 것은, 율법적 두려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성화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성화를 그리스도와 연합의 결실로 말합니다. 부부의 사랑의 결실로 자녀가 태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아더 핑크(A. W. Pink)는 요한복음 15장 4절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근거로, 그리스도인이 맺는 열매는 일(율법적 수고)의 결과가 아니라 연합의 결실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고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의 기초는 이신칭의(以信稱義)입니다. 칭의 없인 그리스도와의 연합도 없으며, 그리스도와의 연합 없이는 성화의 열매도 없습니다.

유보적 칭의론자의 주장처럼 한국교회가 성화를 이루기 위해 이신칭의를 덜 강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이를 낳기 위해 남녀가 결혼하면 안 된다는 말처럼 모순되게 들립니다. 아무리 이신칭의를 받았어도 율법의 닦달을 받지 않으면 성화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하는 그들의 주장은, 결혼을 했음에도 닦달을 받지 않으면 아기를 낳지 못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여성은 결혼하여 남편과 연합하면, 닦달을 받지 않아도 당연히 자식을 생산합니다. 성도가 열매를 맺기 위해 필요한 것은 율법의 닦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또 하나, 유보적 칭의론자들이 자신들의 논리를 변호하기 위해 자주 들고 나오는 "은혜의 남용이 갖다 주는 폐해(?)"에 대해 짚고 넘어가려 합니다. 그들은 한국교회의 방종과 타락이, 이신칭의의 강조로 말미암은 은혜의 남용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은혜의 속성을 모르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은혜는 기독교의 핵심인 '구원'의 원천이며, 은혜를 말하지 않고서는 구원경륜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은혜의 복음인 이신칭의(以信稱義)를 전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구원 사건이 일어나므로, 은혜의 선포를 제한하고서는 구원 사건이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은혜의 남용이 두려워 은혜를 말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은혜와 모순됩니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남용할 만한 은혜라야 비로소 은혜"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루터가 한 말인데, 은혜의 속성을 정확히 설파한 말입니다. 만일 은혜의 남용을 두려워하여 은혜를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미 은혜가 아닙니다.

나아가 은혜로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즉 은혜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은혜가 제한(to be limiteded), 혹은 부정(to be negative)되면, 구원의 방도가 제한 혹은 부정되기에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방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스펄전(C. H. Spurgeon)은 은혜의 남용을 두려워한 나머지 은혜를 담대히 선포하지 못하는 자들을 향해 "은혜를 남용하는 자는 언제나 있어 왔으며, 은혜를 남용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신에게 책임이 있지 은혜를 자주 말하는 사람에게 있지 않다"면서 "물에 빠진 자에게 구명줄을 던져주었을 때 그것으로 목을 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잘못이지 구명줄을 던져준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구명줄을 목줄로 남용할까봐(남용하는 자 때문에) 물에 빠진 자에게 구명줄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타락상은 결코 이신칭의의 남용으로 인해 생긴 폐해가 아니라, 가라지들의 교회 유입으로 생겨난 폐해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은 박해받던 초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됨으로서(A.D. 313) 조성된 당시의 교회 정황과 비슷합니다. 기독교가 지배층이 되자, 기독교에 빌붙으려는 가라지들의 교회 유입으로 교회의 세속화를 불러왔듯, 한국교회가 주류 기득권층이 되자, 교회 권력(?)에 기생하려는 가라지들의 유입이 세속화를 불러왔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회자된 '고소영'이란 유행어도 그 한 정황입니다.

또 하나, '유보적 칭의론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변호하려고 곧잘 들고 나오는 성경 귀절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말씀입니다. 이 역시 그들을 옹호해주지 못합니다. 이 말씀은 종국적 구원이 자신의 행위에 달려있다는 '칭의적 경고'가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구원에 도취되어 방종하지 말라는 '성화적 경고'입니다.

만일 그들의 주장처럼 이 두려움이 칭의의 불확실성에 대한 것이라면, 성경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심판에의(칭의적) 두려움은 하나님 사랑이 온전히 이루지 못한 결과로 온 것이기에, 형벌이 따른다고 했기 때문입니다(요일 4:18).

성경은 두려움은 결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라고 못박으며, 두려움 대신 '근신'을 권면합니다(딤후 1:7). 여기서 '두려움(the spirit of fear)'이 칭의의 불확실성으로 말미암은 불안의 감정이라면, '근신(a sound mind)'은 방종(예컨대 구원의 확신에서 오는)에 대한 조심을 말한 것입니다.

비유컨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절벽 가장자리를 걸어가는 아빠가 아이에게 "아빠 손을 꼭 붙들어야 돼, 아빠 손을 놓으면 절벽에 떨어져" 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는 정말 아이가 아빠 손을 놓고 절벽에 떨어질까 하는 두려움에서 한 말이 아니라, 방심하지 말라는 경계의 말입니다. 설사 어린 아들이 아빠의 손을 놓친다 해도 아버지의 강한 팔이 아들의 손을 놓지 않을 것이기에, 아들이 절벽에 떨어질 가능성은 없기 때문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말씀 역시 어린아이처럼 유약한 성도의 손을 붙잡은 하나님이 성도의 방종을 경계시키는 근신의 의미이지, 결코 칭의의 두려움을 넣어주기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 우리에게 확실히 담보해주셨습니다.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9)",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4)".

우리가 약하여 하나님의 손을 놓치는 일이 있더라도, 내 손을 붙든 전능한 하나님의 손은 결코 나의 손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연구위원)


 

<크리스천투데이>( 2016.10.23.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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