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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기만하는 흐릿한 거울: 교만

 

교만은 자기기만의 덫이다. 교만은 단순한 자부심 과잉이 아니다.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드리워진 그림자이다. 스스로를 속이고 타인과의 연결을 끊으며, 모든 선한 노력의 끝자락에서 다시 고개를 드는 뿌리 깊은 악덕이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흙 속에 묻혀 굳어진 단단한 돌처럼, 교만은 생명의 유연함을 앗아가고 관계를 삭막하게 만드는 차가운 힘을 지닌다.

 

교만의 첫 번째 얼굴은 자기기만‘(自己欺瞞)이다. 이는 영혼의 거울을 흐릿하게 만들어 스스로를 실제보다 훨씬 웅장하고 탁월하게 비추는 왜곡된 시선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 기만의 덫에 취약하여, 선한 행동의 잔영(殘影)만을 붙잡고 자신이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드린 기도는 이 자기기만의 가장 극적인 예시이다. 그는 자신의 규율적인 행위(금식, 십일조)를 증거 삼아, 자신을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는 구별되는 의로운 존재로 확신했다. 그러나 그의 확신은 위로부터 오는 인정이 아닌, 오직 스스로를 향한 찬사에 불과했다.

 

임상심리학의 영역에서도 이 자기기만의 비극은 반복된다. 자신이 동료보다 가장 지적이고 유능하다는 굳은 믿음이 좌절될 때, 그 믿음의 성채가 무너지면서 분노와 고통이 밀려온다. 교만은 객관적 사실의 분석이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야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자신이 생각만큼 탁월하지 않다는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비로소 마음속을 꽉 막았던 분노의 응어리가 풀리는 것은, 교만이야말로 그 분노의 불꽃을 지피는 연료였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이처럼 교만은 진실을 가리고 거짓된 자아상을 숭배하도록 속삭이는, 영혼의 깊은 곳에 숨은 조용한 반역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엄중히 질책한 것은, 이 자기기만이 공동체의 근간마저 흔들 수 있는 치명적인 독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교만의 두 번째 얼굴은 타인의 세계를 향해 차가운 장벽을 쌓아 올리는 공동체의 분열이다. 교만은 대화를 단절시키는 차가운 장벽이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판단과 사상이 세상의 모든 견해 중 가장 합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의롭다고 굳게 믿는다. 이 우월 의식은 타인의 의견을 진정으로 경청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설령 듣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예의를 갖추는 시늉에 불과할 뿐,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미 자신의 독단적 고립 상태를 공고히 하고 있다.

 

이 태도는 개인을 넘어 조직과 국가적 차원에서도 동일한 파괴력을 발휘한다. 자신이 속한 집단이 우월하다는 도덕적 우월 의식은, 타 문화를 무시하거나 저개발 국가의 삶의 방식을 경멸하는 오만으로 이어진다. 대화와 소통의 창문이 닫히면, 그 공간에는 이해 대신 멸시와 비판의 날선 언어만이 난무하게 된다. 교만은 동료의 부족한 식견이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고, 심지어 말로 비판하지 않더라도 마음과 눈길로 상처를 입힌다.

 

교만은 시기, 탐욕, 나태와 함께 '차가운 마음의 죄'이다. '뜨거운 마음의 죄'보다 훨씬 치명적이다. 교만은 관계의 온도를 냉각시키고, 조직의 결속력을 무너뜨리며, 결국 공동체를 파괴하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해악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만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신 것 또한, 그들의 교만이 영혼의 평화뿐 아니라, 인간 공동체의 평화를 근본적으로 해쳤기 때문이다.

 

교만은 모든 노력의 끝에 다시 솟아나는 뿌리이다. 최후까지 남는 죄다. 교만은 모든 죄의 뿌리라고 일컬어지는 가장 끈질긴 악덕이다. 이는 교만이 탐욕이나 정욕 같은 다른 죄들의 근원이 될 뿐 아니라, 뿌리처럼 땅속 깊이 박혀 있어 가지에 해당하는 모든 죄가 제거된 후에도 최후까지 남아 제거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교만은 가장 교묘하고 집요하게 생존한다. 신자가 마침내 겸손의 미덕을 성취했다고 믿는 순간, 악마는 그에게 "내가 이렇게 겸손해지다니!"라고 하는 자부심과 만족감을 심어주며, ‘겸손해졌다는 사실에 대한 교만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싹을 틔운다. 이 유혹조차 알아차리고 근신(謹身)하려고 할 때, 교만은 다시 스스로를 통제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자랑스러움으로 변모하여 영혼을 조롱한다.

 

수도사들의 치열한 삶의 분투는 교만의 이 끈질긴 속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욕망을 다스리고 자기를 비우는 고행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그 성취감과 감사함이 묘하게 자부심과 교만으로 변모하여 다시금 영혼의 문을 두드린다. 교만은 선한 삶을 살고, 타인을 도우며, 소박하게 나누는 이웃의 도덕적 행위 속에도 스며들어,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은밀한 우월 의식을 낳는다. 마치 나무를 뿌리째 뽑지 않으면 언젠가 다시 싹이 트는 것처럼, 교만은 모든 외적인 죄의 가지가 잘려나간 영혼의 땅 속에서 슬그머니 머리를 쳐들며 최후까지 저항하는 것이다.

 

교만은 결국 스스로를 멸망으로 이끄는 자폐적인 독백이며, 세상과의 진정한 관계를 가로막는 어두운 장막이다. 그것은 진실을 듣지 못하게 하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게 하며, 마침내 자신조차 속이는 흐릿한 거울만을 남긴다.

 

진정한 탁월함은 스스로를 웅변하지 않으며, 진정한 선함은 타인을 비판하는 우월감 속에서 피어날 수 없다. 교만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고통스러운 자기 인식, 곧 겸손뿐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모든 선한 성취를 그저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겸허한 마음만이, 교만이라는 영혼의 뿌리 깊은 병을 치유하고 진정한 빛 속으로 나아가게 한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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