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와 누나' 이야기
오빠와 누나 이야기 – 노래로 부르는 한국 현대사
황석영의 <장길산> 읽을 때 싱긋 웃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 목 비틀기를 예사로 하는 험상궂은 장정들이 상대방을 부를 때 ‘언니’라고 부르는 거예요. 어려서 사촌 누나에게 ‘언니’라 불렀다가 ‘언니’는 여자들이 부르는 거라며 매섭게 혼난 뒤에 제 머리 속에 ‘언니야’는 여성들 간의 호칭이자 전유물로 각인하고 있었는데 웬 산적들이 언니언니 하니까 웃기잖아요.
그런데 조선 시대에는 남녀불문 손위를 부르는 호칭이 언니였습니다. 이게 여성들간의 호칭에 국한되고 여기에 대응하는 ‘누나’나 ‘오빠’가 등장하는 것은 근대 이후로 추정됩니다.
누나라는 단어는 1897년께 나온 한양사전에서 처음 보이고, 역시 비슷한 시기에 오빠의 전 형태인 옵바가 등장한다고 합니다. 오라버니가 오라바가 되고 오라바가 옵바가 되고 옵바가 오빠로 변한 걸로 보이는데 ‘올’이라는 단어는 아직 미숙하다는 뜻이 있어서 아빠가 안된 사람, 즉 ‘아직 다 자라지는 않은 남자’ 즉 ‘오빠’가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있죠.
말이란 게 그렇습니다. 일단 유행하기 시작하면 굳어지고 오래 전부터 써온 듯한 말이 됩니다. 오빠라는 단어도 그랬습니다. 집안의 대장인 아버지에 비해 ‘오빠’는 뭔가 만만하고, 쉽게 보챌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맞먹기는 어려운 오묘한 대상이죠. 1920년대에는 이미 단어는 일상으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동요 <오빠 생각>이 나온 게 1925년이었거든요.
이 노래의 가사인 동시 <오빠 생각>은 1925년 방정환 선생이 만드는 잡지 <어린이>에 실립니다. 지은이는 놀랍게도 우리 나이 열 두 살의 최순애였습니다. 그녀의 집은 외동아들 오빠에 딸 부잣집이었다고 하는데, 8살 위의 오빠 최영주는 가히 집안의 우상이었다고 합니다.
일본 유학을 다녀와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요시찰 인물로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았고, 그 때문에 가족들의 마음을 졸이게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크기와 무게에는 미치지 못해도 넉넉히 기댈만한 언덕이었고, 마음 속을 털어놔도 괜찮고, 자신을 위해서라면 뭐든 해 주마 약속할 수 있었던 사람. 최순애의 ‘오빠 생각’은 많은 이들을 울렸습니다. 그 중에는 작곡가 박태준도 있었죠.
후일 <가을밤>, <새나라의 어린이> 작곡가로 유명해지는 그이지만 <오빠 생각>의 가락을 붙일 무렵은 작곡가로 나서기 전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어린이의 애절한 오빠 생각은 그를 무한한 영감에 빠뜨렸습니다.
“하루는 그 양반이 어린이 잡지를 한 권 들고 와 ‘뜸북뜸북 뜸북새’ 하며 읽더니 곡을 붙이기 시작했어요. 시가 너무 좋아 어쩔 줄 모르더니 결국 그날 밤 노래로 만들더군요.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지요.” (박태준의 부인 김봉렬의 증언, 신동아 2014. 12) 노래를 만들면서 박태준은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특히 2절의 이 대목 “서울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1920년대는 흡사 1980년대와 같은 질풍노도의 시기였습니다. 3.1항쟁으로 폭발한 민족적 열기는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했고 그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황해 바다를 넘어 침략자에 저항하기 위해 집을 떠났고 몸을 던졌습니다. 유독 슬픈 이별이 많았던 시대, 아직 칭얼대며 조르는 동생에게 어느 오빠는 “서울 가서 비단구두 사오마.”고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하고설랑 어디로 가는지 모를 길을 떠났던 풍경 그대로가 이 ‘오빠 생각’에 녹아 있었던 거지요,
자 노래 한 번 같이 불러 보시죠. <오빠 생각>.
여기서 복선으로 하나 기억해 두십시다. 가을밤 외로운 밤벌레 우는 밤 <가을밤>의 작곡가 박태준.
이 동시를 보고 가슴이 두근거린 사람은 또 있었습니다. 최순애는 수원 사람인데 수원으로부터 천리 남쪽 경남에 살던 이원수라는 소년이었지요. 이원수 1912년생 최순애 1914년생 그러니까 1926년이래야 이원수 나이 열다섯 살, 이원수 역시 <어린이>에 투고를 해서 당선됩니다. 그 동시가 <고향의 봄>이었어요. 이 동시에 홍난파가 곡을 붙인 게 우리가 부르는 <고향의 봄>입니다.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람이라면 거의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래. 그리고 저 칼날같은 남과 북의 분단도 뛰어넘은 노래 가사는 열다섯 살 소년에 의해 지어진 겁니다. 이 소년이 소녀에게 편지를 씁니다. 1년 선배 당선자였던 최순애에게 말이죠.
그로부터 근 8~9년 가까이 편지가 오가고 사진도 주고받습니다. 원조 접속 커플이랄까요. 마침내 1935년 이원수와 최순애는 만나기로 합니다. 모월 모일 몇 시 차 타고 경부선을 탈 테니 수원역에 나와 계시오. 어떤 옷을 입고 있겠소. 흡사 수십년 뒤 유행한 007 미팅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원수는 역에 나오는 길에 체포됩니다. “너 독서회같은 거 했지? 그거 아주 불온한 모임이라 같이 좀 가줘야겠어.”
그때는 핸드폰은커녕 전화도 없을 때였죠. 최순애는 하루 종일 기다리다가 울면서 수원역을 나왔고, 후일 이원수가 투옥된 걸 알게 됩니다. 최순애는 이원수의 옥바라지를 하며 기다렸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원수와 결혼합니다. 이미 최순애의 오빠는 바뀌어 있었죠. 최영주가 아니라 이원수로 말입니다.
“옥에 갇혀 있는 사랑하는 임을 기다리는 노래로 변해, 남몰래 부르며 울었다.”고 본인 스스로 토로하고 있거든요. 이 가난한 빵쟁이 총각을 사위로 맞을 수 없다는 집안의 반대를 꺾어 준 건 오빠 생각의 원조 오빠 최영주였다고 합니다. 장남인 그가 나서서 이원수와의 결혼을 밀어붙여 준 겁니다. 1936년 6월 6일 그들은 결혼하고 경남 마산의 단칸방으로 경부선을 타고 함께 내려갑니다. 기차 안에서 그들은 <고향의 봄>을 합창했을지도 모르죠.
한 번 같이 불러 보실까요 <고향의 봄> 좀 느낌이 다르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최순애에게 오빠 최영주가 있었다면 이원수는 누나들이 있었습니다. 역시 딸 부잣집이었죠. 최순애 1남 5녀, 이원수 1남 6녀. 위로 누나 넷, 아래로 동생 둘의 귀남이가 이원수였습니다. 집이 그렇게 귀하지 않고 가난에 찌든 게 문제였지만요.
이원수의 어린 시절 추억은 ‘누나들의 남동생’으로 그득했습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후 이원수를 뒷바라지한 이가 누나들이었습니다. 갖은 고된 일은 물론, 심지어 권번에 나가, 즉 기생이 돼서 이원수의 학비를 댄 이도 있었습니다. 이원수가 어찌 그 누나들을 잊을 수 있었을까요.
말씀드린 것처럼 오빠와 누나는 19세기 말엽에야 우리 언어에 등장했고 20세기에 일반화된 말입니다. 성별 없아 손위를 가리키는데 쓰였던 ‘언니’가 여자와 여자들 사이로 좁혀지는 동안 남매간의 호칭인 오빠와 누나는 그 역사와는 어울리지 않게 깊고 두텁게 한국 사람들 사이로, 그들의 역사 속으로 함박눈처럼 내려앉았습니다.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는 노래 앞에 장안의 기생들이 통곡한 것이, 소월이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를 노래할 때 누나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가슴이 따뜻하게 적셔졌던 것이 어디 다른 이유였을까요.
일제 강점기 이원수는 누나에 대해 이런 동시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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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이 하얗게 피었다오
누나 일 가는 광산 길에 피었다오.
찔레꽃 이파리는 맛도 있지.
남 모르게 가만히 먹어 봤다오.
광산에서 돌 깨는 누나 맞으러
저무는 산길에 나왔다가
하얀 찔레꽃 따 먹었다오.
우리 누나 기다리며 따 먹었다오.
광산에서 돌 깨는 누나 기다리며 먹은 찔레꽃에는 어떤 향기가 돋았을까요. 그런데 이 가사 어디서 많이 들은 것 같지 않습니까? (다음 노래에서 알아보겠습니다.)
김형민, 페이스북 글, 2025.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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