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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세례의 신학적 의미와 설교 (김병훈, 합신 조직신학)


출처 : 헤르메니아 48(2009 가을) “유아세례의 신학적 의미와 설교” 15-44


들어가는 말


개혁신학을 따르는 장로교회에서는 유아세례를 당연시할 뿐만 아니라,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반드시 행하여야 할 성경적 교훈에 따라는 신앙규칙이다. 하지만 침례교회에서는 장로교회와는 정 반대로 유아세례를 성경의 교훈에 어긋나는 중세적 전통을 이어받은 매우 잘못된 관행이며 전통으로 비판을 한다. 장로교회는 유아세례를 베풀 때에 천주교회가 그런 것처럼 세례의식 자체에 어떤 영적 효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약신학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는 장로교회는 유아세례를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세례의 성례전적 의미에 따라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복된 은혜의 방편으로 고백한다.


본 논고의 주제는 "유아세례의 신학적 의미와 설교“이다. 즉 유아세례의 신학적 의미를 살피고 유아세례를 시행하며 설교를 하기 위한 몇 가지 중점들을 밝히는 것이 논고의 목표이다, 주제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하여, 본 논고는 먼저 세례의 성례전적 의미와 성경적 근거를 정리하고, 이어서 유아세례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 이후에,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침례신학의 오류를 밝히고,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밝히는 신학적 설명을 개혁신앙문서들을 통해 덧붙이도록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간단히 설교와 관련한 몇 가지 사항을 언급하도록 하겠다. 이를 통하여 유아세례의 신학적 정당성이 확인이 되고, 아울러 적어도 장로교회 안에서 유아세례가 복된 성례로 계승되는 일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1)


개혁주의 신앙문서에 나타나 세례의 의미


 한국 장로교회 신앙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28장 1항은 세례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신약의 성례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 165문답과 소요리 문답 94문답에서도 그대로 확인이 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 가운데 제정하신 성례들은 몇 가지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 68에 대하여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두 가지가 있으니 곧 세례와 성찬이라고 답을 한다. 이것은 곧 유아세례의 의미를 살피기 위하여서는 성례란 어떠한 것인지를 바르게 이해할 것을 필요로 함을 말해준다.


 개혁신학이 낳은 신앙문서들을 살피면 성례와 관련하여 몇 가지 신학적 의미들을 강조하는데, 이를테면 복음의 약속에 대한 표지, 그것의 보증으로서의 인침, 그리고 그것을 향한 믿음의 강화 및 증진 등이다. 예를 들어, 현재 프랑스와 벨기에 사이의 지역에서 태어난 지도 드 브레(Guido de Brès, 1522-67)가 1561년에 작성하여 출판한 벨직 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는 이렇게 고백한다.


...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연약함과 견고하지 못함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성례를 제정하시어, 하나님의 약속들을 인치시고,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의와 은혜를 보증하여 주시며, 또한 우리들의 믿음을 양육하시고 강화시키셨습니다. ... (33)


성례는 믿음이 견고하지 못한 우리들의 필요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며, 성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인치시고, 보증하시며, 그 약속들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시기 위한 것이다.

 1563년에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 1534-1583)가 작성한 것으로 믿어지며, 프레데릭 3세가 통치하던 팔쯔 영의 수도인 하이델베르크 이름을 따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라고 불리는 개혁신앙 문서는 문답 66항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질문: 성례들이란 무엇입니까?

: 성례들이란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주신 거룩한 표지(標識)이며 인장(印章)입니다. 이 성례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례들이 사용이 됨으로써 복음의 약속이 더욱 더 충만하게 선언되고 확증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복음의 약속이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드리신 단번의 제사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값없이 사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고백하는 성례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복음의 약속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것으로, 복음의 약속을 보여주는 표지이며 또한 그것이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보증하는 인침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복음의 약속을 더욱 더 뚜렷하게 선언하시고 확증을 하시기 위한 은혜의 수단이 곧 성례인 것이다.

 

 쯔빙글리의 후계자인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75)가 1562년에 개인 신앙고백서로 작성하였으며 4년 뒤인 1566년에 약간의 수정을 거쳐서 스위스 북부 지역과 유럽의 다른 지역들에 있는 교회들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채택이 되었던 스위스 제 2 고백서(Second Helvetic Confession)의 성례에 대한 고백은 다음과 같다.2)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선포하실 처음부터 교회에 성례들, 곧 성례전적 표지들을 말씀에 덧붙여 주셨다. 성경은 이것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성례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으로 신비한 상징, 혹은 거룩한 예식, 또는 신령한 활동이며, 하나님의 말씀, 외적인 표지, 그리고 표지되는 것들로 구성이 된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부여하신 위대한 은택들이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기억이 되고 상기되도록 하신다. 또한 그의 약속들을 인치시고, 외적으로 제시하시며,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내적으로 행하시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제시하시며, 이와 더불어 우리의 심령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고 증대시키신다. 끝으로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종교들에게서 분리시키며 우리를 성결케 하시어 오직 하나님에게만 묶어두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도록 하신다. (19 1)


 성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 안에서 역사하시는 내적인 은혜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외적인 표지로 제시하여 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인치시고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고 증가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으로 정의가 된다. 스위스 제 2 고백서는 이것에 덧붙여 성례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를 다른 사람들이나 종교들과 구분하여 주는 거룩한 언약공동체의 표지로서의 기능을 고백한다.


 마지막으로 영국 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청교도들의 영향 아래 있던 의회에 의하여 소집된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48)가 작성한 신앙고백서는 앞에서 살펴본 신앙문서들이 말하는 바와 내용적으로 일치하면서 형식적으로 가장 요약적인 진술을 제시한다.


성례는 은혜 언약에 대한 거룩한 표지이며 인장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그의 은택들을 제시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유익을 공고히 하고, 또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을 세상에 속한 자들에게서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구분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진지한 자세로 섬기도록 하기 위하여 성례를 친히 제정하셨다. (27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그보다 앞서 출판된 개혁신앙 문서들을 종합하여 성례에 대한 이해를 정리하면 성례란 (1) 눈으로 볼 수 없는 은혜 언약을 볼 수 있게 외적으로 제시하는 거룩한 표지이며, (2) 은혜언약이 확실히 이루어질 것임을 보증하는 인침이며. (3)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고 증진시킴으로써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은택들을 공고히 하고, (4) 외적으로 언약공동체를 세상과 구분하여 주며, (5) 하나님을 진지하며 엄숙한 자세로 섬기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은혜의 수단이다.


 이러한 고백들 가운데 담겨 있는 중요한 신학적 초점들 가운데 하나는 성례가 단지 표지만이 아니라 또한 인침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개혁신앙 문서들은 소시니안들(Socinians)이 주장하는 바처럼 성례가 단지 불신자들에게서 신자들을 구별하여 주는 신앙의 표지나 배지(badge)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임을 강조한다. 그것은 또한 죄사함과 중생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보증하는 인침인 것이다. 개혁신학은 표지와 인침 가운데 인침이 오히려 성례의 주된 용도이라고 생각을 한다.3)


 개혁신학이 인정하는 성경적 성례는 세례와 성찬 두 가지 뿐이다. 그 까닭은 네 가지 정도로 정리가 된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 오직 이 둘 뿐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 둘만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약속을 물질적이며 가시적인 표지로 나타내고 인치는 성례전적인 본질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세 번째는 바울의 증언(고전 10:1-3; 12:13)에서 보듯이 세례와 성찬만이 언급되고 있으며, 네 번째는 세례와 성찬이 구약의 통상적인 성례로 볼 수 있는 할례와 유월절 만찬에 각각 유비가 되기 때문이다.4) 하지만 흥미롭게도 신약 성경 어디에도 세례와 성찬을 가리켜 표지 또는 인장이라고 직접적으로 일컬은 부분은 없다.5)


 그렇다면 논고의 관심사인 세례가 갖는 표지와 인장으로서의 성례의 의미는 각각 어떠한 것이며, 그것의 근거는 어떠한 것일까? 우선 벨직 신앙고백서에 따를 때(34항), 세례는 “물이 몸에 부어졌을 때에 몸의 더러운 것들을 씻어내며, 물이 뿌려졌을 때에 그 뿌려진 물이 몸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피가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내적으로 영혼에 뿌려져 그것의 죄를 깨끗이 씻어내며, 진노의 대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중생케 되는 일”을 표지한다. 이것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도 조금도 차이가 없이 동일하게 고백이 되고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69문답)은 세례가 표지하고 인치는 것은 “마치 물을 가지고 외적으로 씻을 때 나의 더러움이 또한 씻기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씻김을 받을 때에 나의 영혼의 모든 더러움, 곧 나의 모든 죄가 분명하게 씻긴다는 것”이라고 고백을 한다. 이것은 스위스 제 2 고백서 20장 1항과 2항에서도 조금도 차이가 없이 동일하게 반영이 되고 있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것을 좀 더 요약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신약의 성례이다. 그것은 세례를 받은 사람이 보이는 교회에 진지하게 가입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은혜언약의 표지와 인침이며, 또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는 것과, 중생과 죄사함을 받는 것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 속하여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것 등에 대한 표지이며 인침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명하신대로 성례는 세상 끝 날까지 그의 교회 안에서 계속되어야 한다.(28 1)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개혁신앙 문서들은 모두가 세례가 표지하고 인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과 그것으로 인한 영적 은택들임을 통일성 있게 고백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개혁신앙이 은혜언약의 표지와 인침이라는 세례의 성례전적인 의미를 말할 때, 세례가 표지하고 인치는 영적 사실 등이 실제로 역사하는 것은 표지인 세례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음을 주의 깊이 보아야 한다. 세례는 표지이며 인장일 뿐, 그것이 가리키는 영적 사실을 실제로 이루는 능력을 그 자체로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세례가 복음의 약속을 단지 가리키는 표지일 뿐이며 그것을 보증하는 인장이라고 할 때, 그 말이 마치 세례는 한낱 껍질뿐이라는 식으로 오해를 하여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용도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벨직 신앙고백서는 33항에서 이르기를 “... 성례는 내적이며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볼 수 있게끔 해주는 보이는 표지와 인장이며, 하나님께서는 이것들을 수단으로 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례는 우리를 기만할 정도로 헛되거나 의미가 없는 그런 것이 아니다. ...”고 하였다. 즉 성례로서 세례는 복음의 은혜언약을 제시하며 보증하는 표지와 인장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세례가 표지하며 인치는 영적 사실들이 우리 안에 일어나도록 그 세례를 사용하신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는 또 다른 성례인 성찬과 더불어 은혜의 수단인 것이다.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성례의 용도에 대한 분명한 강조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161: 성례는 어떻게 해서 구원의 유효적인 수단이 됩니까?

: 성례가 구원의 유효적인 수단이 되는 것은 그 자체에 있는 어떤 능력 때문도 아니며, 또는 성례를 집행하는 자의 경건이나 의도에서 비롯되는 어떤 덕목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거나 성례를 제정하신 그리스도께서 복을 주심으로써 그렇게 됩니다.


 이처럼 세례가 은혜의 수단으로 작용하는 데에는 표지와 표지하는 것, 인장과 인치는 것 사이에 있는 특별한 관계성이 전제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한다.


성례 각각의 표지와 표지되는 것은 서로 영적인 관계 또는 성례전적 연합을 이룬다. 그리하여 표지되는 것의 이름과 효과들이 표지에 속한 것으로 돌려지기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28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말하는 성례전적 연합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 바르게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표지와 표지되는 것 사이의 관계는 어느 사물을 형상과 질료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처럼 물질적인 관계로 이해하여서도 안 되며, 또한 의롭게 하며 중생케 하는 복음의 은혜가 성례에 바로 주입이 되어 있는 것처럼 영적인 관계로 이해해서도 안 된다. 성례는 표지와 표지되는 실체뿐 만 아니라, 그것에 더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행하도록 되어 있어, 표지와 표지되는 것, 그리고 말씀의 세 구성요소로 이루어진다.6) 성례의 말씀은 성례의 표지를 받는 자의 귀에 눈에 보이는 표지를 통해서 제시되는 영적 사실이 무엇인지를 들려주고, 이것을 깨닫도록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령님의 역사가 있을 때에, 성례의 표지를 통해서 표지되는 영적 사실은 성례의 자리에 참으로 역사하게 된다. 즉 성례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7) 하지만 세례에 참여하는 자에게 믿음이 없다면 세례는 이러한 성례전적 연합을 통한 은혜의 수단으로 작용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성례는 그것을 받기에 합당한 자에게만 역사하기 때문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7장 3항)


 이처럼 세례가 복음의 약속을 가리키는 표지이며 그것을 보증하는 인장이라고 할 때, 그 말이 마치 세례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은 한낱 껍질뿐이라는 뜻이 아니다. 세례는 표지이며 인장으로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은혜의 수단인 것이다. 비어마(Lyle D. Bierma)가 잘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당연히 이 말은 역으로 표지와 인장을 마치 그것들이 제시하는 영적 실상인 것처럼 혼동을 해서도 안 되며(참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2문답), 세례가 자동적으로 참여자에게 은혜를 수여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참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7장 3항, 28장 5항) 세례는 세례를 받는 이에게 일어날 어떤 것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 백성들을 위하여 행하셨으며 행하실 것에 대해서만 보증을 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가 성례전적 표지로서 그것이 표지하는 영적 실상에 대해 갖는 관계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약속하신 은혜를 주시기로 선택한 수단이며 방식이 되는 만큼 특별하다.8) 그렇기 때문에 세례를 경멸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은 커다란 죄악이 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8장 5항)


성례로서의 세례의 성경적 근거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신약 성경 어디에도 세례를 가리켜 성례전적인 표지 또는 인장이라고 직접적으로 일컬은 부분은 없다. 그런데 이러한 개혁신앙의 고백은 어떠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28장 1항에서 세례를 가리켜 은혜언약의 표지이며 인침이라고 할 때, 그 근거 구절을 로마서 4장에 두고 있다. 이를 테면, 로마서 4장 11절 “그가 할례의 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이탤릭체는 강조)의 말씀 안에서 표와 인침이라는 표현을 보게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따르면 어떻게 할례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표지와 인장으로 성례의 역할을 하였는지를 살피는 것이 곧 은혜언약의 표지와 인장으로서의 세례의 성례의 역할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된다. 물론 이것은 간접적인 근거이지만, 이를 근거로 침례교회도 세례를 표지와 인침이라는 성례로 고백하고 있으며 기독교회 안에 조금도 의심치 않은 확고한 근거이다.


할례에 대한 성경의 교훈이 어떻게 세례의 이해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언약에 속한 회원으로서의 표지로서의 할례의 역할이 신약시대와 더불어 세례로 대체가 되었으며, 세례의 의미와 적용은 구약에서의 할례의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이해에서 비롯된다. 먼저 세례가 할례를 대체하고 있다는 주장의 성경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 2:11-12)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들어오기 위하여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을 향하여 바울은 결연히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사도행전 15장에서 보듯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할례 문제와 관련하여 예루살렘에 모였던 총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명하는 것이 유대인조차도 능히 메지 못하던 율법의 멍에를 그들에게 두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림으로(행 15:1-21)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을 이유가 없음을 확정하였다. 그럼에도 이방인 교회들에서 일부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이 문제로 교회를 어지럽게 하였다. 이에 대해 바울은 위에서 본 성경 구절에서처럼 할례는 이미 세례로 대체가 된 것이라는 신학적 변증을 행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육적 할례를 이미 받은 자들이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그리스도의 할례에 참여한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할례란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뜻한다. 구약의 할례는 몸의 작은 일부를 찢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할례는 육적 몸을 벗는, 즉 온 몸을 찢는 죽음을 통하여 이루신 것이었으며 구약의 할례의 성례전적 의의를 이루는 할례의 성취였다.9)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할례가 상징하던 것, 곧 죄인을 끊어내는 죽음으로 정죄의 심판을 청산하는 일을 감당하신 것이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의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자들이 되는 것이다.10)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할례를 이미 받은 자들이며, 이것은 또한 세례를 통해 그들에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행하는 할례를 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할례는 세례로 대체되었음을 뜻한다.11) 구약의 성례인 할례를 대체한 세례는 당연히 구약의 성례로서 할례가 담당하였던 은혜언약의 표지이며 인침이라는 성례전적 기능을 또한 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성경의 교훈을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보는 것에서 그것의 정당성을 더욱 분명하게 확보한다.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세례의 의미와 적용은 구약에서의 할례의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침례신학자들과 개혁신학자들은 구약의 성례인 할례와 신약의 성례인 세례 사이에 있는 일치성과 불일치성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주장한다. 침례신학자들은 할례가 세례와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례를 할례에 준하여 이해를 하는 데에는 상당한 제한이 따른다고 말한다. 반면에 개혁신학자들은 할례와 세례는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훨씬 더 많다고 주장을 한다. 먼저 개혁신학자들의 할례와 세례의 언약신학적 연속성에 대해서 설명을 한 다음, 침례신학자들의 이견을 살펴보도록 하자.


 칼빈은 할례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구약의 성례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12) 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셨을 때에 그것은 이미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의 하나님이 되시며(창 17:7, 10) 또한 모든 것을 풍족하게 누리도록 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창 17:1, 6, 8)을 주신 후에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복의 약속은 바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할례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죄사함을 받는 것이며, 둘째는 육을 죽이는 것이다. 모세가 아브라함의 할례를 말하며 육에 받는 할례만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신 30:6)은 할례의 진정한 의미를 밝혀주는 것이라고 덧붙이다. 칼빈은 여기서 이러한 할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사죄의 영생과 육을 죽이는 중생은 신약의 세례가 표지하는 것과 동일한 영적 약속임을 강조한다.13) 왜냐하면 세례 또한 죄사함을 받는 것(마 28:19; 행 2:38)과 육을 죽이고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유익(롬 6:4-5; 골 2:11-12; 딛 3:5)을 가리키는 표이기 때문이다.14) 결국 할례와 세례는 외형적인 의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 각각이 가리키는 영적 사실은 동일하다.15)


 이와 관련하여 비니마(Cornelius P. Venema)는 할례가 이스라엘 민족의 구성원임을 말하는 단지 외적인 표지일 뿐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교통과 사귐을 뜻하는 언약적 관계성 자체와 사실상 같다는 사실(창 17:10)을 환기시킨다. 이어서 보이지 않는 은혜를 나타내 보이는 표지로서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의 오염을 제거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구체적으로 상기시킨다고 말한다(신 10:16; 30:6; 렘 4:4). 왜냐하면 죄의 오염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귐을 불가능하게 하는 장애물인데 이를 제거하기 위한 피흘림이 있어야만 하며, 그것이 할례를 통해서 표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러한 구약의 해석이 옳다는 것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할례는 아브라함에게 있어 믿음으로 된 의를 표지하며 인치는 것이라고 말한 바(롬 4:11)에서 확인이 된다고 덧붙인다.16) 요컨대 비니마에 의하면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적 교통이며 사귐,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귐을 누리는 데에 장애가 되는 죄의 오염의 제거, 그리고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믿음으로 된 의 등과 같은 영광스러운 영적 복들을 표지하고 인치는 성례로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신약에 있어서 세례가 할례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해진다. 비니마의 설명을 다시 따르면, 이제 할례는 더 이상 하나님과의 교제를 표지하며 인치는 성례의 기능을 하지 않고 있으며(갈 2:3), 이제는 세례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통을 나누며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을 표지하며 인치는 기능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례는 “손으로 하지 아니한, 육의 몸을 벗는”(골 2:11) 영적 할례를 나타게 됨으로써, 할례를 통해서 제시되었던 영적인 복들이 이제는 세례에 의해서 제시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죄사함(막 1:4; 행 2:38; 히 10:22), 그리스도와 사귐을 통한 죄씻음(롬 6:2-10; 고전 6:11; 엡 5:26; 골 2:12), 중생,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와의 사귐(행 2:40-41; 고전 12:13) 등이 이제는 세례라는 성례를 통해서 확증이 된다.17) 


 이상에서 보듯이 세례가 할례를 대체하였다는 사실을 사르텔리(John P. Sartelle)는 세 가지 질문들에 대해 답을 하는 형식을 통해서 흥미로우며 간명한 정리를 제공한다.18)


[구약에서]

질문 1: 구약에서 사람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을 신뢰할 때 어떠한 일이 그에게 있게 되는가?

: 할례를 받는다.

질문 2: 구약에서 정결한 심령을 표지하는 외적인 사건이 무엇인가?

: 할례

질문 3: 구약에서 신자들의 공동체에 가입되었음을 말해주는 외적인 표지가 무엇인가?

: 할례

[신약에서]

질문 1: 신약에서 사람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을 신뢰할 때 어떠한 일이 그에게 있게 되는가?

: 세례를 받는다.

질문 2: 신약에서 정결한 심령을 표지하는 외적인 사건이 무엇인가?

: 세례

질문 3: 신약에서 신자들의 공동체에 가입되었음을 말해주는 외적인 표지가 무엇인가?

: 세례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튜레틴이 제시한 바와 같이 첫째는 성경이 말하고 있고(골 2:12), 둘째는 각각의 목적이 언약에 가입되는 최초의 성례라는 점에서 같고, 셋째는 각각이 표지하는 바가 심령의 내적인 할례이며 중생의 은혜라는 점에서 같고, 넷째는 구약에 주신 은혜가 신약에서 폐지되기는 커녕 오히려 증가되고 있기 때문에 할례는 세례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개혁신학의 견해이다. 19)


유아세례의 성경적 근거


 왜 개혁교회는 신자의 유아에게 세례를 베푸는가? 그 이유는 채플이 잘 대답을 하였듯이, 개혁교회는 성경이 그렇게 하라고 교훈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20) 물론 성경에 직접적으로 유아에게 세례를 주라고 명하신 곳은 없다. 개혁신학은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구약의 할례는 신약의 세례로 대체되었으나, 할례는 세례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영적 사실을 표지하며 다만 외형적인 의식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판단을 한다. 따라서 할례를 유아들에게도 베풀었다면 세례도 당연히 유아들에게도 베풀어야 마땅하다고 판단을 한다.


 칼빈은 이르기를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의 어린 유아들에게도 할례를 베풀도록 하시고 그들도 할례가 의미하는 모든 영적 복을 약속하는 표지와 인장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이 분명한 만큼(창 17:12),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에게도 복음의 약속을 표지하며 인치는 세례를 베푸는 일이 마땅하고 하였다.21) 구약 성도들의 자녀들을 가리켜 그들이 언약의 자손이며 거룩한 자손이라고 한 것처럼(스 9:2; 사 6:13), 동일한 약속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녀들도 역시 거룩한 자손들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는 부모 가운데 한 편만 믿는 경우에도 그들의 자녀는 우상숭배자들의 부정한 자손과 달리 거룩한 자녀로 여김을 받는다(고전 7:14).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구약의 유아들에게 외형적인 할례를 베풀어 은혜언약을 표지하고 인치도록 명령한 사실을 볼 때,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그들에게 세례가 표지하는 은혜언약을 인치지 않는다면 그것에 대해 핑계할 길이 없을 것이라고 칼빈은 역설한다.22) 요컨대 할례와 세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행하여지지만 언약의 계속성 가운데 동일한 영적 은택들에 대한 표지와 인침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며 그 대상의 범위 또한 동일하기 때문에 유아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유아세례의 성경적인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한 또 다른 답변 방식은 유아세례를 주지 말라는 명령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23) 개혁신학자들은 유아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신약성경의 사례가 없다는 지적에 대해서 답을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으로 침례신학자들은 성경 어디에도 언약적 표지와 인침을 유아들에게는 주지 말라고 하는 특정한 명령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답을 하여야 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논증은 ‘침묵으로부터의 주장’(argument from silence)라고 비판을 할지모르지만, 그렇게 간단히 무시할 논증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신약시대에는 이미 아브라함 이래로 2000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 동안 언약 공동체 안에서 가정마다 유아에게 언약의 표지이며 인장인 할례를 베풀어 온 실천적인 경건의 행위가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아이들에게는 언약을 표지하며 인치는 세례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급진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신학적 이유에 대해서 어떠한 설명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24) 머레이(John Murray)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만일 유아들이 이제 배제된다면, 이러한 변화는 이전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관행이 완전히 뒤집혀 지는 것임을 암시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도대체 구약에서이건 신약에서이건 그처럼 전복이 되었다는 말하는 어떤 암시나 힌트가 있는지를 우리는 물어야 한다.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유아들이 언약에 포함이 되고 그들이 또한 언약의 표지와 인장에 참여하는 것과 같이 명백한 권위로 정해진 원리를 신약이 취소한다거나 최소한 최소하는 암시라도 주고 있는가? 이러한 관행은 거의 2천년 동안 은혜언약의 실행 과정에서 하나님의 권위로 이어져 왔다. 그것이 이제는 그쳐진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우리의 답변은 취소되었다는 증거를 전혀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새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의 개진이라는 점에서 볼 때, 할례와 세례에 덧붙여진 의미가 기본적으로 서로 동일하다는 점에서 볼 때, 신약과 구약의 세대에서 시행이 되는 은혜언약이 동일하며 연속적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만일 관행이나 원리가 신약에서는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취소되거나 폐지되었다는 증거가 반드시 제시되어야 한다는 점을 우리는 확신있게 강조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 유아세례를 금하는 명령이 없다는 것은 유아에게 할례를 행하여 온 것과 같이 할례와 동일한 성례전적 표지이며 인침인 세례를 유아에게 행하는 것이 문제될 것이 아니며 오히려 마땅하다는 사실을 암시하여 주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주장하는 개혁신학자들은 유아세례를 주라는 명령이 신약성경 가운데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야 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적반하장의 논리가 된다. 오히려 구약에서 그렇게 견고하게 확립이 되었던 근본적인 언약의 구조가 취소 또는 폐기되었음을 말하는 성경구절이 신약성경 가운데 어디에 있는지를 말하여야 할 책임이 침례신학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유아세례가 성경적인지에 대한 추가적인 논증은 성경에 나타난 사례들이다.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유아가 세례를 받았다는 사례가 성경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러한 사실이 유아들이 세례를 받지 않았음을 말하여 주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2천년 동안 이어져 왔던 관행, 즉 유아에게도 할례를 베풀었다는 상황을 생각할 때, 유아세례를 금하는 명령이 없다는 것은 유아에게도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을 방증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아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구체적인 사례가 없다고 하더라도, 온 가족이 다 할례를 받았다는 정황은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방증하여 주는 것이다. 채플(Bryan Chapell)은 이 사실을 강조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신약에 있는 세례의 기록을 읽을 때, 어떤 이가 회심을 할 경우 가족들이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 확인이 된 사람은 그 가족들 모두가 또한 세례를 받도록 하였다.”26) 채플이 신약성경의 사례를 들면서(고넬료-행 10:38; 루디아-행 16:15; 스데바나-고전 1:16; 그리스보-행 18:8; 고전 1:14) 쓰고 있듯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들은 세례를 받았으며, 또한 신약성경이 개인에게 세례를 준 일을 세세히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세례 받는 이와 함께 하고 있는 가족들도 또한 세례라는 언약적 표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27) 이러한 방증들은 분명 유아세례가 성경적이며, 유아세례를 가리켜 성경의 교훈에 어긋난다는 주장은 성립이 되지 않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유아세례에 대한 반대 주장들의 오류


 머레이(John Murray)는 앞에서도 인용한 그의 책 기독교 세례에서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일곱 가지 이유들을 나열하고 차례로 이것들에 대한 오류를 밝히고 있다. 이것을 참조하면서 유아세례에 대한 반대 주장들의 오류를 정리하기로 한다. 첫째,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는 가장 큰 근거는 유아에게도 세례를 베풀라는 구체적인 명령이 성경에 없다는 것과 또한 유아에게 세례을 주었다는 명백하고도 사례가 없다는 성경적인 관찰이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설명을 한 바와 같이, 유아에게 세례를 금하는 명령이 성경에 분명하게 없는 한, 그러한 관찰들은 성경이 결코 유아에게 세례를 주지 않도록 금하고 있다거나 실제로 세례를 준 사례가 없다는 증거가 결코 되지 못한다.28)


 둘째, 유아세례 반대론자들은 성경에서 본 사례들을 살필 때 세례는 신뢰할 수 있으며 또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신앙이 고백된 후에야 주어졌다는 주장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고백할 수 없는 유아들에게는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직 신앙고백을 분명하게 한 사람에게만 세례를 주었다는 주장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가장이 세례를 받음으로 인하여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을 경우 각각 다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성인의 경우에는 세례를 받기 이전에 신앙을 고백하여야 했다고 말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신앙을 고백할 수 없는 유아들에게도 신앙의 고백이 요구되었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29)


 셋째, 유아들이 과연 중생을 하였는지, 또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지를 알 길이 없다는 이유로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은 타당성이 결여된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세례는 세례를 받는 이가 중생한 자라는 지식에 기초하여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인들의 경우에도 그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그들이 중생한 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으며 신뢰할 만한 신앙고백을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례른 중생한 자임이 확인된 자에게 베푸는 것이기 때문에 유아에게 세례를 줄 수 없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30)


 넷째, 유아들은 세례를 받아도 그것이 갖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런 유익을 누리지 못하며, 따라서 유아들에게는 세례를 준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주장을 하며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라면 할례도 유아들에게 베풀어야 할 이유가 없게 된다. 할례나 세례는 모두 하나님이 제정하신 성례이며 은혜의 수단이다. 유아에게 할례를 주도록 한 하나님의 뜻이 헛되지 않다면 세례를 유아에게 주는 것 또한 헛될 이유가 없다.31)


 다섯째, 유아세례를 받았으나 성장하면서 신앙의 길에서 떠나 불경건의 죄에 빠져 버린 비극적인 사례들이 많음을 들면서 유아세례에 대하여 반대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슬프지만 인정이 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우들은 성인세례를 받은 자들 가운데서도 발견이 되는 일이다. 여기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은혜의 수단들로부터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경건의 책임과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다.32)


 여섯째, 할례와 세례는 그 차이가 너무나도 다른 것이기 때문에 할례에서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할례와 세례는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데 다른 것이 아니다. 할례와 세례는 그것들의 의미에 있어서 은혜언약의 표지이며 인침이라는 본질적인 동일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점은 성경에서(골 2:11, 12) 이미 확인이 되고 있는 사실이다.33) 본고는 이미 이 점과 관련하여 앞에서 다룬 바가 있다.


 일곱째,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이들은 유아세례 찬성론자들이 할례에 빗대어 유아세례를 정당화 하면서도, 유월절에 온 가족이 참여하였던 것과는 달리 세례를 받은 유아들에게 성찬의 참여를 허용하지 않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고 비판을 한다. 하지만 유월절에 유아들에게도 유월절 음식을 먹도록 하였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유월절 음식이 유아들에게는 결코 적절한 것이 아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유아세례를 받는 유아들의 나이는 유월절 음식을 나눌 나이가 아직 아닌 것이다. 좀 더 자란 후에는 먹을 수 있겠지만, 그런 연령에 이른 아이들의 경우는 유아세례의 유아들의 경우와 다른 범주에 속한 문제인 것이다.34)


 뿐만 아니라 개혁교회가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면서도 성찬에 이들을 참여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세례와 성찬 사이에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세례는 죄사함과 죄씻음이라는 영적 사실, 곧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유아들도 구원을 얻기 위하여 마땅히 받아야만 하는 것을 표지하고 인치는 것이다. 반면에 성찬은 세례가 표지하고 인치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성찬이 표지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식하고 그를 기념하는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살아계신 주로 인식하고 그와 교제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찬을 행할 때에 주님을 기념하고 그와 교제하며 주님의 몸을 분별하는 것과 같은 것은 일정한 수준의 지적인 분별이 요구되는 것이다. 세례가 표지하는 죄사함과 죄씻음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반복되지 않는 은혜의 구원이다. 반면에 주님을 기억하고 교통하는 것과 같이 성찬이 표지하는 것은 매일 반복이 되는 것이다. 유아들에게도 죄사함과 죄씻음의 약속은 처음부터 필요한 것이므로 그들에게 은혜언약의 표지와 인침의 성례인 세례를 주지만,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책임에 대한 이해와 분별이 필요함으로 그것이 가능한 나이에 주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것이다.35)


 잘 알려진 현대의 침례신학자인 파이퍼(John Piper)는 자신이 왜 유아세례를 반대하는지에 대해서 크게 다섯 가지 이유를 밝힌 바 있다.36) 첫째, 세례에 대한 신약의 명령과 사례를 살피면 회개와 믿음이 세례에 앞서 있다. 둘째, 성경에 유아세례에 대한 사례가 없다. 셋째, 바울은 세례를 가리켜 그것이 믿음으로 행하여지는 것으로 표현한다(골 2:11-12). 넷째, 베드로는 세례란 세례를 받는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죄씻음 받기를 간구하는 기도이며 외적인 표현이라고 말한다(벧전 3:18-21). 다섯째, 새 언약에 속한 자들은 구약에 속한 자들처럼 육적인 혈통에 의하여 규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음에 율법을 새기시고 그들을 자신에게로 불러 회개와 믿음으로 이끌어 가심으로 규정이 된다.


 파이퍼의 반대 이유들 가운데 처음 두 가지는 이미 앞에서 충분한 답변을 주었으므로 생략을 하고, 다른 세 가지에 대해서 생각을 나누기로 한다. 사실 이 세 가지들은 각각 나누어 쓰고 있지만 결국 한 가지 원리 위에 서 있는데, 그것은 세례는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와 믿음을 갖은 자에게 베푸는 것이라는 이해이다. 그렇다면 세례란 믿음으로 행하여지는 것이며, 또한 죄씻음을 받기를 간구하는 기도이며 외적인 표현이라고 할 때, 세례는 오직 중생자에게만 적용이 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구약의 할례는 당연히 그렇지 못했다. 로스(Mark E. Ross)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아브라함의 아들 가운데 이스마엘이나, 이삭의 아들인 에서와 같은 이들은 파이퍼가 생각하는 중생자의 범위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할례를 받았다.37) 이에 대해서 파이퍼는 앞서 말한 다섯째 이유를 제시할 것이다. 이스마엘이나 에서와 같은 이들이 할례를 받은 것은 육적인 혈통에 따라 언약의 대상으로 규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육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구성하기 때문에 할례가 주어진 사례를 세례의 경우에 적용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파이퍼의 대답이다. 파이퍼의 말을 옮기어 보도록 한다.


구약의 언약 백성들은 육체를 따른 이스라엘, 곧 “육체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를 포함하는 인종적이며 민족적이며 종교적인 민족으로 구성이 되었다. “그러므로 할례가 모든 육체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적절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 불리는 새 언약의 백성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에 의해 세워진다. 교회는 어떤 인종적이며 민족적인 특징들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오직 은혜에 의하여 오직 믿음이라는 실재에 기초하고 있다. 교회는 이스라엘 전체의 연장이 아니며, 참 이스라엘 남은 자, 곧 육체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들의 연장인 것이다.38)


 파이퍼의 주장에 따르면, 결국 교회는 새 언약의 공동체이며 영적으로 참된 공동체이므로, 구약의 언약 공동체와는 달리 참된 영적 생명과 믿음에 의해서 규정이 된다. 따라서 언약의 표지인 세례를 육체의 자녀들, 중생의 증거가 없거나 마음에 율법의 새김도 없고 그리스도를 향해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새 언약의 공동체의 의미에 어긋나는 것이며 구속사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 된다.


 파이퍼의 주장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세례를 받았으나 언약 공동체를 떠나 사례들로 인하여 바로 확인이 된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이나 디모세 후서 4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데마 등이 그것이다. 초대교회에 사도들이 세례를 준 자들 가운데서도 분명 중생치 않은 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세례가 파이퍼가 생각하듯이 중생한 자들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성인들의 경우에는 물론 신앙고백을 전제로 세례를 주지만, 유아의 경우에는 할례와 같이 언약적 연속성에 따라서 적용이 되는 것이다. 파이퍼의 주장은 주님이 다시 오셔서 이루실 완성된 공동체에 적용이 될 수 있는 것을 현재의 교회에 잘못 적용을 한 것이며, 그 결과 유아세례에 대해 그릇된 접근을 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러한 오류 때문에 세례가 하나님이 제정하신 은혜의 수단으로 세례를 받는 자가 바라볼 은혜의 약속의 표지이며 인침이라는 객관적 성격을 약화시키고, 세례를 가리켜 세례를 받는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죄씻음 받기를 간구하는 기도이며 외적인 표현이라고 말함으로써,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라는 주관적 성질의 것으로 축소시키는 잘못을 범한 것이다.39)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에 담겨 있는 유아세례의 의미


 이제 유아세례에 대한 신학적 논의를 마무리 짓기 위한 노력으로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에 담겨 있는 유아세례와 관련한 의미들 살피도록 하겠다.40) 이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과 다른 새로운 내용을 더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유아세례와 관련한 신앙 이해의 전거로서 핵심적인 원리들을 개혁교회가 공적으로 고백한 신앙문서들을 통하여 요약하기 위한 것이다.


벨직 신앙고백서, 34항 일부

그러므로 세례를 한 번 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또한 신자들의 자녀들에게 세례주는 것을 정죄하는 재침례파들의 오류을 혐오한다.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이전에 우리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것과 똑 같은 약속 위에서 할례를 받았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세례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진실로 그리스도께서는 성인들을 위한 것 못지않게 신자들의 자녀들을 위하여 자신의 보혈을 흘리셨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율법에 명하심으로써 그들을 위하여 양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성례가 그들이 태어나자마자 그들에게 주어지도록 하신 것처럼, 우리의 자녀들도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행하신 것의 표지와 성례를 받아야만 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례였다. 게다가 세례는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행하였던 그것을 우리의 자녀들을 위하여 행한다. 이것이 바울이 세례를 “그리스도의 할례”( 2:12)라고 일컬은 이유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4문답

질문 74: 유아들도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 그렇습니다.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유아들도 하나님의 언약 안에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속하여 있습니다.( 17:7; 19:14) 아울러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죄의 용서와 믿음을 갖도록 하시는 성령님이 유아들에게도 어른들 못지않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22:10; 44:1-3; 1:15; 2:38-39; 16:31) 그러므로, 유아들은 언약의 표지인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이 되어야 하며,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자녀들과 구분이 되어야 합니다.( 10:47; 고전 7:14) 구약에서는 이런 일이 할례를 받음으로 이루어졌으나,( 17:9-14) 신약에서는 할례 대신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2:11-13)

 

스위스 제 2 신앙고백서, 20 6

우리는 재침례파들을 정죄한다. 그들은 믿음의 부모들에게서 태어난 어린 유아들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복음서의 교훈에 따를 때, “하나님 나라는 그와 같은 자들의 것이며”( 18:16),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표지가 그들에게 주어지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친 백성이며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그들이 거룩한 세례로 성결하게 되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슬리는 그들의 다른 견해들에 대해서도 재침례파들을 정죄한다. 우리는 재침례파가 아니며, 또한 그들의 관점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동의를 하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8

실제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순종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부모들 중에 둘 다 또는 어느 한 편이 믿는 신자의 경우, 그들의 자녀들도 세례를 받아야 한다.(4)

세례의 효력은 세례가 시행이 된 그 시각에만 나타나도록 묶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규칙에 따라서 올바르게 시행을 하면 약속된 은혜가 주어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자신의 뜻의 경륜에 따라 은혜가 주어지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늙은 사람이든지 유아이든지) 성령에 의하여 제시되고 수여가 된다.(6)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66문답

: 세례는 어떤 이에게 시행이 되어야 합니까?

: 보이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 곧 약속의 언약에 대하여 외인인 그 어떤 자에게도,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고백하고 그에게 복종을 하기 전에는, 세례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둘 다 또는 어느 한 편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고백하고 그에게 복종을 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유아들은 그러한 점에서 언약 안에 있는 것이며, 그들에게는 세례가 시행이 되어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개혁주의 신앙문서들은 유아세례를 언약의 통일성 안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을 하나의 목소리로 강조를 한다. 구약이나 신약은 같은 언약의 약속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의 유아들이 할례를 통해 언약의 표지를 받았으므로, 구약보다 더 풍성한 영적 은혜를 누리는 신약의 유아들이 믿는 부모 아래에서 세례를 통해 언약의 표지와 인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천명한다. 유아들에게도 어른들 못지않게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용서와 정결케 하는 성령님의 은혜가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아세례와 관련한 찬반의 논쟁의 요점은 결국 단 한 가지로 모아진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구약과 신약, 할례와 세례 사이에 연속성이 강조되는가 아니면 불연속서이 강조되는가에 있다.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개혁신학은 비록 의식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영적 실체는 동일하다는 연속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침례신학은 신약의 교회가 구약의 이스라엘과는 전혀 다른 영적 특성으로 구성이 된다는 의미에서 불연속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차이로 인하여 개혁신학이나 침례신학이나 모두 신약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복종하는 자에게 세례를 베푸는 데에 동의를 하지만, 신자의 자녀에 대하여서는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나오는 말 - 유아세례의 설교


 유아세례는 성인세례와 마찬가지로 소중한 은혜언약의 성례이다. 모든 성례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와 함께 시행이 되어야 한다. 성례의 시행 때에 전하여지는 말씀은 성례가 무엇을 표지하는 것인지,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보증하시는 것은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설교적 의무이다. 특별히 유아세례를 베푸는 자리는 성례에 관한 미신적 생각들을 제거하고 개혁신학의 소중한 언약신학을 전달하는 의미 깊은 기회가 될 것이다.


 만일 성례의 표지에 대해서 선명하며 확고한 설명을 말씀에 담지 못한다면, 칼빈이 말한 바대로 회중들은 마치 말씀을 “아무런 의미도 없고 또한 믿음이 없이 그냥 중얼거리는 소리로, 또는 내용물을 신령하게 만드는 힘이 었는 주술적인 주문 같은 것으로” 오해를 하는 일을 조장하게 될 것이다. 칼빈은 오히려 타락한 인간은 성례를 경이롭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성례에 대한 말씀의 해설을 하지 않은 채 사람들이 성례에 관한 교리적 가르침을 주지 않으려 애를 쓰기도 한다고 비판을 하였다. 성례는 그 자체로 신앙을 낳지 못하며 말씀으로 인하여 형성된 신앙을 강화하여 확증해 주기 때문에 말씀이 바르게 전달이 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표징만을 자기 소견대로 바라보다가 지각을 잃은 어리석은 자처럼 될 것이라고 경계를 하였던 것이다.41)


 따라서 설교자는 유아세례를 시행할 때에 성례로서 세례가 무엇을 표지하며 인치는 것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세례는 그 자체로는 죄를 사하거나 씻는 능력이 없으며, 다만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말씀을 믿을 때에 그리스도와 연합을 하여 죄사함과 죄씻음을 받게 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해 주어야 한다. 세례는 단지 이러한 영적 은택들을 담고 있는 복음의 은혜언약을 지시하며 보증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임을 강조해 두어야 한다. 그리고 언약 공동체인 교회에 가입을 하여 세상에 속한 자들과 구별을 하는 신령한 예식임을 밝혀야 한다.


 그러나 세례는 한낱 껍데기뿐인 형식적인 의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기로 약속하시고 우리에게 제정하여 주신 수단 또는 방편임을 아울러 강조하여야 한다. 즉 복음의 말씀을 믿고, 세례를 믿음으로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세례를 은혜의 수단으로 삼아 세례를 받는 자의 믿음을 견고하게 강화하며 확증하여 주실 것임을성도들에게 주지시켜야 한다.


 특별히 신자들의 자녀들이 유아세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바르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유아세례는 우리 편에서 유아를 제물로 바치듯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신자인 부모와 더불어 은혜언약의 공동체에 함께 속한 자임을 감사하면서, 하나님께서 부모와 마찬가지로 유아에게도 하나님의 언약의 표지와 보증의 인침인 세례를 베푸는 은혜를 주실 것을 바라며 기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아세례는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는 소중한 설교의 기회가 된다.


 아울러 설교자는 부모들에게는 세례를 받은 자신들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임을 믿음 안에서 기쁜 마음으로 고백하도록 하며, 하나님의 귀한 선물인 자녀들에게 대하여 신실한 청지기가 될 것임을 헌신하도록 일깨워야 한다. 부모들은 세례를 받는 자신의 자녀들이 자신들과 같이 부패한 성정을 가진 죄인들이며 아담의 죄책을 물려받은 죄인들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부모들의 이러한 경건의 헌신이 유아세례를 통해 자녀들이 받게 되는 영적 유익의 자산임을 자각시켜야 한다. 아울러 교회로 하여금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영적으로 양육하고 훈계하는 일에 도움을 주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일깨워야 한다. 부모들은 물론이거니와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기도로 돕고 또한 경건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경건한 헌신이 있음으로 인하여 유아세례를 받은 자녀들이 복을 누리는 되는 것임을 강조하여야 한다. 요컨대 하나님의 성례전적인 은혜는 그 복을 누리는 자에게 마땅한 의무와 책임을 또한 부여한다는 것을 설교자는 가르쳐야 한다.42)

 

 채플(Bryan Chapell)이 지적한 바와 같이,43) 유아세례를 시행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린아이들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나 또는 예수님께서 아이들이 자신에게로 오는 것을 금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반복적으로 전하는 것에 설교의 초점이 멈추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어린아이까지 놓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설교하는 것은 좋겠지만, 이것만으로는 유아세례의 핵심적인 의미를 전달하기에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단지 감상적인 강조가 아니라 성경적인 원리를 들어내 주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채플 자신이 유아세례를 시행하면서 사용하였던 설교의 글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아마도 채플이 미국 PCA 교단 신학교인 커버넌트 신학교(Covenant Theological Seminary)의 총장이면서 또한 설교학 교수임을 생각할 때 그의 설교를 인용하는 것은 본 논고의 목적에 충실한 기여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높여준다.44)


세례가 이 아이를 구원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이며 주님으로 믿고 의지할 때에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 아이에게 세례를 주는 것입니까? 이 아이가 실로 아름답기가 그지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와 같은 감상에 얽힌 감정 때문에 세례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전통은 소중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전통 때문에 세례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아이에게 세례를 주는 까닭은 성경이 그렇게 하도록 명령을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과 언약 관계를 맺음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와 네 자손들에게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을 믿었으며, 자신의 가족들을 포함하여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복종을 함으로써, 아브라함은 자신의 집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할례예식을 행함을 통해 자신의 헌신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이 예식은 하나님의 언약이 미래의 세대들에게로 전하여 질 것이지만 죄사함을 위한 피흘림이 필요하게 될 것임을 나타내 보여주었습니다.


피흘림으로 인하여 언약이 있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약속을 존중히 여기며 지키겠다는 것을 인치거나 또는 보증하셨습니다.


신약에서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에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들이 신자의 어린 자녀들에게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모든 이들로 하여금 확신토록 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을 통해 주시는 복의 약속들은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 언약의 표지가 바뀌었음을 말하였습니다. 신약의 성례인 세례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예표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성취한 것, 곧 죄를 씻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주는 것을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이 물 자체가 죄를 씻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 사도에 따르면, 이 성례 자체가 하나의 인침의 역할을 하여 교회에 하나님께서 눈에 볼 수 있게끔 주신 보증입니다. 이로써 하늘은 이 아이와 같은 아이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게 될 때, 은혜언약의 모든 약속들이 그에게 적용이 될 것임을 우리로 하여금 확신하도록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세례를 통해서 우리가 누리게 되는 언약의 특권을 말해주는 충분한 근거를 말해줍니다. 신약성경에 있는 세례의 기록들을 보면, 세례를 받을 때에 그 자리에 가족들이 있는 것으로 확인이 된 각 사람은 그 가족들도 또한 세례를 받게끔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는 것은 실로 행복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감상이 교회나 여기 있는 부모로 하여금 이 거룩한 예식을 행하도록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을 하여 신실한 성도들의 가정이 수 백년 동안 이전에 행하여 왔던 것을 좇아서,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와 복주심을 기대하면서 이 아이에게 세례를 줍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언약의 이 아이를 하나님께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 성례를 사용하시어 그의 신실하심을 우리에게 보증하여 주실 것입니다

 

주석



1) 로저스(Rogers)에 따르면, 1983년에 출판된 한 미국장로교단의 조사 결과에 의할 때, 응답자의 31퍼센트에 달하는 목사들이 교인들의 요구에 의하여 재세례를 베푼 적이 있다고 답하였다고 한다. 로저스는 세례를 받은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나, 선교단체 등에서 강력한 은혜의 각성과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이 상당수 나타남에 따라서, 점차 장로교회의 개혁신학에 대한 의식들이 약화되어가고 있음을 지적한다. 아울러 어느 교파에서 받았든지 성인세례를 인정하는 신학의 결과와 더불어, 장로교 개혁신학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유아 헌아식이 유아세례를 대신하는 일도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유아들이 스스로 신앙을 고백할 때가 될 때까지 세례를 미룰 수 있도록 하는 일을 선택적으로 허용하는 신학적 주장이 개혁신학 가운데 나타나고 있으며, 칼 바르트(Karl Barth)와 에밀 부룬너)Emil Brunner) 등이 이러한 견해를 주장한다. Jack Rogers, Presbyterian Creeds: A Guide to the Book of Confessions (Philadelphia, PA: the Westminster Press, 1985), p. 133, 137-38.
다.
43) Bryan Chapell, "Pastoral Overview of Infant Baptism," p. 27.
44) Ibid., pp. 27-29. 

2) Second Helvetic Confession, ch. XIX, art. 1. 라틴어판은 Philip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vol. III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90 reprinted)를 참조할 것이며, 영문 번역은 Joel R. Beeke & Sinclair B. Ferguson, Reformed Confessions Harmonized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9)에서 찾아 볼 수 있음.

3)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3, translated by G. M. Giger and edited by J. T. Dennison (Phillipsburg, NJ: P&R Pub., 1997), loc. 19, q. 5, pp. 350-51.

4) Ibid., loc. 19. q. 11, p. 377.

5) Mark E. Ross, "Baptism and Circucison as Signs and Seals," in The Case for Covenantal Infant Baptism, edited by Gregg Strawbridge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2003), p. 85.

6) 칼빈은 성례가 일반적으로 말해서 외형적인 표지와 말씀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표지가 표지하는 영적 실상을 전제로 할 때에라야 표지로서 기능을 한다고 할 때, 결국 성례는 표지, 표지되는 것, 그리고 말씀으로 구성이 된다고 하는 것과 차이가 없는 진술이다. 칼빈은 여기서 표지를 설명하는 말씀이 있어야만 성례가 성례의 기능을 감당할 수 있으며 그럴 때에라야 말씀으로 믿음이 일어나 성례의 유익을 누리게 됨을 강조한다. John Calvin, Institutes, IV. xiv. 4.

7)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3, loc. 19, q. 4, pp. 348-49.

8) Lyle D. Bierma, "Infant Baptism in the Reformed Confessions," in The Case for Covenantal Infant Baptism, p. 243.

9) G. R. Beasley-Murray, Baptism i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62, reprinted 1990), pp. 152-53.   

10) Edmund P. Clowney, The Church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5), p. 282.

11) G. R. Beasley-Murray, Baptism in the New Testament, pp. 158-59.

12) Institutes, IV. xiv. 20-21.

13) Institutes. IV. xvi. 1-3.

14) Institutes. IV. xv. 1-5.

15) Institutes. IV. xvi. 4.

16) Cornelius P. Venema, "Covenant Theology and Baptism," in The Case for Covenantal Infant Baptism, p. 221.

17) Ibid., p. 222.  

18) John P. Sartelle, What Christian Parents Should Know About Infant Baptism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85), p. 10-11.

19)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3, loc. 20, q. 20, pp. 416-17.

20) Bryan Chapell, "Pastoral Overview of Infant Baptism," in The Case for Covenantal Infant Baptism, p. 9.

21) Institutes. IV. xvi. 5.

22) Institutes. IV. xvi. 6.

23) Bryan Chapell, "Pastoral Overview of Infant Baptism," p. 18.

24) Lyle D. Bierma, "Infant Baptism in the Reformed Confessions," pp. 238-39.

25) John Murray, Christian Baptism (Philadelphia, PA: The Committee on Christian Education,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1952), pp. 52-53.

26) Bryan Chapell, "Pastoral Overview of Infant Baptism," p. 19. 이탤릭체는 채플의 강조.

27) Ibid., p. 21.

28) John Murray, Christian Baptism, pp. 72-73.

29) Ibid., pp. 73-74.

30) Ibid., p. 74.

31) Ibid., pp. 74-75.

32) Ibid., p. 75.

33) Ibid., p. 76.

34) Ibid., p. 77.

35) Ibid., pp. 77-79.

36) John Piper, "Infant Baptism and the New Covenant Community" (1993년 2월 14일에 행한 설교). Desiring God Ministries의 온라인(www.desiringGod.org)에서 구할 수 있음.

37) Mark E. Ross, "Baptism and Circucison as Signs and Seals," p. 91. 

38) John Piper, “How Do Circumcision and Baptism Correspond?" (1999년 8월 29일에 행한 설교).

39) 이상에서 살핀 유아세례에 대한 침례신학의 주장들은 Mark E. Dever, "the Church," in A Theology for the Church, edited by Daniel L. Akin (Nashville, TN: B&H Publshing Group, 2007)에서도 간략하지만 동일한 요점으로 제시되어 있다. A Theology for the Church는 침례신학을 교의학적 관점에서 잘 소개한 최근의 책으로 침례신학을 이해하는 데에 유익한 도움을 준다.

40) Lyle D. Bierma, "Infant Baptism in the Reformed Confessions," pp. 231-35에 유아세례에 관한 주요 신앙문서들이 소개되어 있음을 참조할 것. 특별히 개혁주의 신앙문서들을 신앙 항목별로 비교하여 살피기를 원할 경우, Joel R. Beeke and Sinclair B. Ferguson, eds., Reformed Confessions Harmonized (Grand Rapids, MI: Baker, 1999, 4th printing 2002)를 참조할 것.

41) Institutes. IV. 14. iv.

42) 유아세례를 시행하면서 선포되는 말씀에 담아야할 교리적인 중점들에 대해 잘 정리된 글을 보기 원하면 Edmund Schlink, The Doctrine of Baptism, translated by Herbert J. A. Bouman (Saint Louis, MO: Cornelius Publishing House, 1972; original German edition, 1969), pp. 157-60을 볼 것. 슈링크의 책은 유아세례의 실천적 난점에 대해서도 책 후반에 서술해 놓고 있어 많은 유익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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