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과 원나라의 기독교( 1)
13세기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이후 원나라를 건국한 시기에 기독교가 어떤 위상을 가졌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는 기존의 역사적 사실들을 연대기적 및 주제별 관점에서 살펴보고, 기독교의 흥망이 몽골 제국의 독특한 정치적, 사회적 맥락과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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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기독교의 부흥과 쇠퇴가 단순한 종교적 사건이 아니라, 시대적 흐름과 지배층의 전략에 종속된 결과였음을 논증한다. 이와 같은 접근을 통해, 본 연구는 몽골-원 시대 기독교 역사의 핵심 원리인 '정권이 망하면 종교도 소멸한다(政亡敎息)'는 원리를 설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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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몽골 제국과 원 시대 기독교의 흥망성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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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몽골리카와 종교 관용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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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초, 테무진이 몽골 고원의 분열된 부족들을 무력으로 통합하고 1206년 칭기즈 칸으로 추대된 사건은 단순한 부족 통일을 넘어, 초원 사회의 근본적인 정치 체제를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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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은 혈연 기반의 '가문사회'를 해체하고 강력한 칸의 권위에 복종하는 새로운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이어진 몽골 제국의 확장은 독보적인 군사적 우위와 제도적 혁신이 결합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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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은 1인당 3~4필의 말을 운용하여 지치지 않는 기동성을 확보했고, 50km마다 역참(Jam)을 설치하여 제국 전역에 걸친 통신 및 보급망을 구축함으로써 원거리의 군대까지 효과적으로 통솔했다. 또한, 벌떼처럼 움직이는 게질라 작전인 '스웜 전술 (Swarm Tactics)'과 사냥 방식에서 비롯된 '네르제(Nerge)' 포위 전술은 몽골군의 군사적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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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물리적 확장을 뒷받침한 것은 바로 종교적 관용 정책이었다. 몽골 제국은 유럽(Europe)과 아시아(Asia)를 합친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방대한 영토를 정복하면서 종교적 신념의 자유를 허용하는 독특한 정책을 채택했다. 이는 제국의 창건자 칭기즈 칸으로부터 시작되어, 거대하고 복잡한 다민족 사회를 통합하고 통제하기 위한 실용적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흔히 알려진 몽골인들의 거친 이미지와 달리, 종교 관용은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의 실현에 있어 핵심적인 축을 이루는 통치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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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망교식(政亡敎息)'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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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의 핵심 주장은 몽골 제국과 원나라 시대 기독교의 운명은 지배층의 권력에 전적으로 종속되었으며, 그 기반이 매우 취약했기에 정권이 멸망하자 종교 또한 사라지는 '정망교식(政亡敎息)'의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과 몽골에 전래된 기독교는 동방 시리아 교회의 한 분파인 네스토리우스파와 로마 가톨릭교회였다. 네스토리우스파는 당나라 시대에 '경교(景敎)'로 불렸고, 원나라 시대에는 가톨릭과 함께 '야리가온교 (也里可溫敎)'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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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독교의 운명은 종교가 지배층의 특권적 지위에 기대어 번성하는 한편, 대다수 민족인 한족에게는 뿌리내리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를 동시에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 제국의 종교 정책은 진정한 의미의 종교적 신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교를 가진 지배층의 단결을 도모하면서도 잠재적 위협인 다수의 한족이 단합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전략적 다원주의'에 가까웠다. 즉, 기독교는 바로 이 정치적 계산 속에서 지배층의 종교 중 하나로 우대받았으며, 이 특권적 지위가 사라지자마자 존재 기반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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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몽골 초원의 기독교: 제국 이전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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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를 수용한 몽골 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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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이 몽골 제국을 건설하기 이전의 몽골 고원은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이 시기부터 중앙아시아의 여러 튀르크계 및 몽골계 유목민족들 사이에서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실크로드를 따라 전파된 이 종교는 당나라 시기 중국에 '경교'로 들어 당나라에서 흥왕했으나 당 무제의 탄압 회창폐불 (会昌废佛, 845년) 으로 망했으나, 몽골 제국 시대에 다시 부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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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칭기즈 칸의 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부족들, 즉 케레이트족, 나이만족, 메르키트족은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중 케레이트족은 칭기즈 칸 시대의 몽골 초원 부족들 가운데 유일하게 기독교를 신앙하는 부족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사실은 몽골 제국의 탄생 초기부터 기독교의 영향력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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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 칸과 테무친의 갈등: 신앙과 정치적 야망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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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초원 통일 과정에서 칭기즈 칸(Chinggis Khan, 1162?~1227, 성스러운 군주)"과 케레이트족의 지도자인 옹 칸(Ong Khan, 王汗, Toghrul, 1130?-1203)의 관계는 기독교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옹 칸은 테무친의 아버지와 오랜 친구였으며, 테무친에게는 정신적 멘토이자 핵심적인 동맹이었다. 그러나 테무친의 세력이 커지자 옹 칸은 그에 대한 두려움과 질투심을 느끼게 되었고, 결국 테무친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 배신은 케레이트족의 몰락을 가져왔고, 테무친은 위기를 극복하고 몽골 제국을 세우는 초석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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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단순히 부족 간의 정치적 갈등을 넘어, 한 종교의 역사가 거대한 정치적 흐름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이끌었던 개인의 선택과 성품에 의해서도 좌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기독교 공동체를 이끌던 옹 칸의 개인적인 질투와 권력욕이 종교의 확산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의 행동은 초원 지역에서 기독교가 더 널리 전파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상실하게 만들었으며, 몽골 제국의 기독교 역사가 거시적인 정책뿐만 아니라 미시적인 개인 관계와 선택의 결과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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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국 권력의 중심에 선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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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의 대모(大母), 소르카크타니 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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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인물은 단연 칭기즈 칸의 막내아들 툴루이(Tolui)의 아내이자, 뭉케 칸, 쿠빌라이 칸, 훌레구 칸, 아릭 부케 등 네 명의 위대한 통치자들의 어머니인 소르카크타니 베키 (Sorkhakhtani Beki)이다. 그녀는 케레이트족의 공주였으며 독실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다. 1203년 케레이트족이 칭기즈 칸에게 굴복한 후, 패배한 부족의 딸로서 그녀는 칭기즈 칸의 막내아들 툴루이의 아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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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혼은 단순한 혼인이 아니라, 칭기즈 칸이 멸망시킨 케레이트 부족의 유산을 흡수하고, 황실의 혈연 관계를 강화하여 제국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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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르카크타니 베키는 멸망한 부족의 왕족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남편 사후 뛰어난 지혜와 정치적 식견으로 자신의 아들들을 제국의 최고 권력자로 양육했다. 그녀의 종교적, 문화적 관용은 아들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제국 내 종교적 공존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정복과 무력의 역사로만 인식되는 몽골 제국에서, 혼인 동맹과 같은 섬세한 정치적 수완, 그리고 한 여성의 지성과 통찰력이 어떻게 제국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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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의 실용적 선택과 기독교인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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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은 개인적으로 하늘신을 섬기는 텡그리교(Tengriism) 신앙을 가졌지만, 기독교인 여성들을 사위나 며느리로 선호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종교적 교리보다 자질과 능력을 중시하는 실용적인 안목으로 이들을 받아들였다. 칭기즈 칸이 기독교인 여성들을 선호한 것은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아이들을 잘 키우는 좋은 부모"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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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실용적인 선택이 소르카크타니 베키와 같은 인물을 황실의 핵심부에 위치시켰고, 이는 몽골 제국의 종교 관용 정책이 단순히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황실의 개인적인 선택과 가족 관계에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몽골 황실의 기독교 영향력은 공식적인 선교 활동보다 결혼을 통한 인척 관계 형성을 통해 확산되었으며, 종교가 제국의 안정과 미래 세대 양성을 위한 인적 자원의 일부로 간주되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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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황실 구성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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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르카크타니 베키 외에도 몽골 황실 내에는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보이거나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인물들이 다수 존재했다. 훌레구 칸의 아내인 도쿠즈 카툰(Dokuz Khatun) 또한 케레이트 부족 출신의 공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녀는 훌레구 칸에게도 친기독교적인 성향을 갖게 하는 데 영향을 미쳐, 일 칸국 내 기독교인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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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제3대 칸인 귀위크 칸(Kuyuk Khan)은 공식적으로는 몽골의 전통 신앙을 따랐지만, 서양 사절에게 보낸 칙서에서 스스로를 "기독교도(tarsa)" 라고 고백한 기록이 전해진다. 이는 몽골 최고위층 내에서 종교적 정체성이 매우 유동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처럼 궁중 내에는 몽골인뿐만 아니라 외국인 출신의 무사, 의사, 후비 등 경교 신자들이 상당수 있었음이 묘석 발굴 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장석, 페이스북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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