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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 박사 (수영로교회, 2015.12.04)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 유감

 

 

김세윤 교수(풀러신학교)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역설한다. “믿음만으로 구원 받는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이론에 결함이 있다고 본다. 자신이 주장하는 새로운 칭의론이 종교개혁을 완성할 복음이라고 한다. 이른바 '유보적 칭의론'을 그리스도의 통치 곧 하나님나라의 틀 안에서 의의 열매와 관련시켜 소개한다. 며칠 전 서울에서 열린 어느 모임에서 한 말을 언론사들이 보도한 내용이다.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은 교회 안에 의의 열매가 많지 않다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구원받은 자의 탈락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다. 예수 믿는 기독인이라도 윤리와 순종이라는 기본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한다. 유보적 칭의론 구도에는 성령의 역사 곧 성도의 견인 진리가 들어설 곳이 없다. 죽을 때까지 기독인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거나 헛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로마가톨릭주의 구원론에 빠지게 하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김세윤은 500년 전에 외쳤던 마르틴 루터의 의문을 떠올린다. "기독인이 어느 정도로 의의열매를 맺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김세윤에 따르면 믿음만으로는 의롭다는 칭함을 받지 못한다. 믿음과 함께 의의 열매를 맺어야 의롭다고 칭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가톨릭교회에 저항하면서 외친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는, 김세윤에게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1. 새 관점

 

김세윤이 저술한 <칭의와 성화>(서울: 두란노서원, 2013)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바울의 칭의론은 윤리적인 가르침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바울 자신의 제한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신학자 샌더스는 그리스도의 탄생 전후 약 400년 동안의 유대교를 연구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당시의 유대교는 언약적 율법주의 종교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그들과 언약을 세웠다. 율법을 주셨다. 율법으로 그들의 선택을 지탱시켰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지킬 의무가 있다. 순종하면 상 또는 복을 주시고 불순종하면 벌을 준다. 율법은 속죄의 수단들이다. 속죄는 언약의 관계를 지탱하거나 회복시켜 준다. 율법에 대한 순종, 속죄, 또는 하나님의 언약의 관계 안에 들어온 자들은 종국적으로 구원을 받는다.

 

샌더스가 제시한 위 명제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유대교는, 아브라함의 자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의해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 진입하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그 관계 속에 머무는 종교이다. 유대교는 은혜언약이 율법준수를 요구한다고 믿는 종교이다.

 

샌더스는 바울이 유대교를 오해했다고 한다. 바울은 배타주의 구원론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도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의 이방 선교를 방해하자, 독자적인 칭의론을 전개하면서 유대교를 비방했다. 바울의 칭의론은 언약적 율법주의종교인 유대교를 의도적으로 율법주의적 공로종교로 왜곡시킨 결과라고 한다.

 

바울연구가 제임스 던과 톰 라이트는 바울의 칭의론을 이방선교의 맥락에서, 이방인들의 믿음을 정당화 하려는 동기와 선교라는 차원에서 전개한 구원 교리라고 본다. 이들의 새 관점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저질러진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깊은 반성을 담고 있고, 20세기 후반의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유대교를 긍정적으로 보고 유대인들을 환대하려는 시대정신의 결과이다.

 

김세윤은 위 새 관점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논거의 기저에 유대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바울의 칭의론에 대한 축소주의가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위 이론들을 모두 수용하기 어렵다고 하면서도 현대 위 학자들의 노력으로 유대교를 보다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새 관점이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큰 틀을 새로운 칭의론 구축에 제공했다고 본다.

 

김세윤의 칭의론은 언약적 율법주의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을 때에, 우리는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는다. 그러나 '언약적 율법주의'는 종말론적 유보 곧 구원이 벌써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구조 속에서 구원론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고 한다. 칭의와 성화 곧 칭의와 윤리의 관계를 더욱 잘 이해하게 해 준다고 한다.

 

새 관점학파의 칭의론은 선교적 교회론적 의미에 집착한 탓으로 법정적 의미를 무시한다. 동시에 전통적인 칭의론은 지나치게 법정적 의미만을 강조한다. 김세윤은 이 두 관점의 통합을 시도한다. 이러한 취지에서 톰 라이트의 통합 방식에 동의하며,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다.

 

김세윤은 법정적 의미와 관계적 개념을 바울의 칭의론에 적용하고, 두 관점을 통합하는 길을 찾는다. 칭의를 의인이 되었다는 법정적, 선언적 의미로만 볼 것이 아니라 신분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곧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관점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한다(김세윤, 칭의와 성화, 71-72, 74, 81).

 

2. 유보적 칭의론

 

김세윤에게 칭의는 무죄선언 곧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사건이다. 슈바이쳐가 칭의론은 윤리를 낳지 못한다고 말한 적이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한국교회에 윤리가 결여되어 있는 이유를 전통적 칭의론만 붙든 탓이라고 본다. 전통적 구원론은 칭의의 현재적 의미를 망각하고, 윤리 또는 의로운 삶을 무시하고 만다고 지적한다.

 

김세윤은 이러한 구도에서 칭의가 종말 때까지 유보되었다고 강조한다.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관계로 전이되었음을 뜻한다. 칭의는 우리에게 최후의 심판 때까지 그 관계 곧 순종 안에 있기를 요구한다. 성화는 칭의 다음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회복이라는 의미에서 칭의와 성화는 동의어이다(칭의와 성화, 172-173). 성화는 하나님께 바쳐지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되기, 현재 단계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이다.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의 핵심 전제는 예수 믿는 자, 구원받은 자의 탈락 가능성이다.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자라도 순종이라는 기본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한다. 칭의의 현재 요소는 성화이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순종하는 기본자세를 가지고 살지 않는 사람은 탈락한다. 과거에 믿음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여 칭의 또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10:9-10), 종말의 칭의 또는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탈락한다고 주장한다(칭의와 성화, 192, 264).

 

김세윤의 신학에는 성령의 내주동행 역사와 성도의 견인 교리가 들어설 공간이 없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한 자의 믿음을 끝까지 구원받는 단계까지 유지시켜 준다는 진리를 사실상 거부한다. 그리스도인이 윤리적으로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김세윤에 따르면,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자신이 구원을 받을지, 받지 못할지 알 수 없다. 심판대에 설 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는 시점까지 유보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 시민에 합당한 의의 열매와 선한 행위를 가진 자만 구원 받을 수 있다.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행위를 수반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김세윤의 칭의론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관점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단번에 이루어지는 칭의를 무시하고 로마가톨릭교회의 의화교리처럼 구원의 전 과정으로 본다(칭의와 성화, 177). 로마가톨릭교회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의 열매 곧 행위의 합작품이라고 본다. 종교개혁자들이 반대하던 구교는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는다. 트렌트공의회는 칭의를 구원에 합당한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주입되는 어떤 것으로 정의했다. 로마가톨릭교회와 마찬가지로, 김세윤의 칭의론은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오직 믿음' 구도와 불일치한다. 하나님의 구원이 오직 은혜로 받은 선물이 아니라, 개인의 성화나 공덕의 결과라는 결론에 이른다.

 

3. 나무와 열매

 

전통적 구원론, 칭의론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그 시점에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와 연합된다. 죄 용서받음과 더불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 그 때, 기독인은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관계에 진입하고, 천국시민이 된다. 예수 믿는 자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록에 기록된다. 천국 시민권은 믿을 때 받는다. 시민은 국가의 호적부에 이름이 등재된 자이다.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칭의를 받은 자 곧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은 자기가 속한 나라의 법을 준행한다. 천국 백성의 열매를 맺는다.

 

칭의는 장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믿을 때 발생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에 믿음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를 향해 의롭다고 선언한다. 칭의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미래의 죄들을 용서받을 법적 근거이다. 그리스도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죽은 자를 일으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혔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2: 1-10). 믿을 그 때,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하나님이 우리의 죄과를 멀리 옮기신다(103:12).

 

그리스도를 믿고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 곧 하나님의 나라에 진입한 자는 현재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우리의 하나님의 나라 시민 신분은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령은 믿는 자의 신앙을 끝까지 지켜 유지시켜 주신다. 성령 하나님은 성도의 견인 사역을 중단하지 않는다.

 

나무는 열매를 보아 알 수 있다. 진정한 기독인은 열매를 맺는다. 칭의와 성화는 분리되지 않는다. 분리되지 않지만, 구분된다. 칭의는 하나님의 선언적, 법적, 단회적 사건이다. 반복되는 과정이 아니다. 칭의의 조건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뿐이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음을 뜻한다.

 

성화는 전 생애에 걸쳐 계속되는 과정이다. 그리스도께서 의롭다고 칭한 자를 동시에 성화로 인도한다. 칭의는 성화의 출발이다.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에게 연합됨으로 주어지는 이중적인 은혜이다. ‘성화 없는 칭의칭의 없는 성화는 불가능하다. 진정한 칭의를 얻는 자는 필연적으로 성화를 수반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는 자는 동시에 반드시 거룩해진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반드시 성화의 열매를 맺는다. 성화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기독인은 믿음과 구원이 확실한 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4. 질문

 

김세윤에게 묻고 싶다. 첫째, 비기독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개하여 개종, 회심하도록 인도해 본 적이 있는가? 복음을 제시하여 몇 명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돌아서게 했는가? 한 명이라도 있다고 가정하자. 그 회심자, 개종자에게 당신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는 시점까지, 구원을 받을 지 받지 못할 지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의 구원은 유보되어 있습니다고 말할 것인가? 둘째, 예수 믿는 자 곧 기독인이 어느 정도의 의의열매를 맺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인간의 자신의 의의 열매나 선행이나 윤리의 실천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셋째, 김세윤이 말하는 칭의의 조건은 결과적으로 성화 곧 윤리적 행위인가? 선행 또는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말 아닌가? 

  

칭의는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사건인 동시에 현재적 사건이다.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우리에게 선고할 판결을 현재의 우리에게 앞당겨왔다. 구원은 근본적으로 미래에 속한 것이지만, 그 미래의 하나님의 선언이 우리의 현재 속으로 침투하여 이미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당당히 외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오늘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하나님의 구원과 칭의는 현재 완료형 사건이다.

 

구원받은 자 곧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자는 의의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열매의 많고 적음에 따라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적 판결이 취소되거나 번복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믿는 자 가운데 의의 열매가 전혀 없는 사람이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구원받는 참 신앙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칭의를 선물로 받지 못한 탓이다. 심리적 현상, 분위기 탓, 망상, 오해, 마귀의 궤계, 환경,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다른 이유 등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예수 믿는 자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봄이 옳다.

 

김세윤이 결함이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은 지난 500년 동안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정수로 존중되어 왔다. 율법에 부합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고 강조해 왔다. 

 

김세윤은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공로사상이 가져온 신앙의 왜곡에 대한 거친 반발, 지나친 반발이었다고 한다. 의의 열매 곧 선한 행위를 가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자신의 칭의론으로 종교개혁 신학을 완성해야 한다고 한다. 종교개혁자들처럼, 칭의를 법정적인 의미로만 이해하면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고 교인들을 방종과 나태에 빠지게 한다고 주장한다. 무율법적인 혼란을 야기하므로, 우리 시대의 칭의론은 종교개혁 시대의 칭의론과 달라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교회에 행함이 부족한 현실은 개탄스럽지만, 하나님이 베푸는 구원과 칭의를 인간 행위의 대가로 전락시키는 김세윤의 주장은 아이를 목욕시킨 물을 버리려다가 아이까지 버리는 격이 될 수 있다. 성화의 결여나 결핍이라는 현실을 가지고 칭의 진리를 뒤바꾸면 콘텍스트를 가지고 텍스트를 바꾸는 것이 되고만다.

 

종교개혁자들이 이해한 칭의 교리는 구원 메시지의 심장이다. 교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1장 1조와 벨직신앙고백서 제2조에 표현된 전통적 칭의 교리가 강하게 외쳐지는 곳마다 교회가 생명력 있게 왕성해지고 성장하고 부흥했다. 칭의 교리의 중심에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 대속 진리, 은혜의 복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교회의 윤리적 결함은 칭의 교리가 옳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진리와 전통적 칭의론을 확실하게 가르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봄이 타당하다. 우리를 구원한 의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전가시킨 것이지 우리가 맺은 의의 열매의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의롭다고 선언한 것은 인간의 율법준수와 행위 때문이 아니다. 

 

5. 나의 신앙고백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향하여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빌 2:12)라고 말한다.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다투는 자들을 향한 권면이다(빌 2:14-15).


야고보서는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약 2:14,17, 26)라고 한다. 기독교 진리에 대하여 지적인 신앙이 구원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이다. "헐벗고 굶주리는 형제자매에 대한 관심" 촉구 맥락의 메시지이다(약 2:15-16). 열매없이 살아가는 믿는 자들의 실천을 강조한 말씀이다.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은 여러 면에서 유감스럽다. 기독인으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 없이 생기 없이 열정 없이 살아가게 하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복음전도자의 열정을 앗아간다. 교회부흥의 동력을 축소시킨다. 성령의 사역인 성도의 견인 진리를 팽개친다. 콘텍스트를 가지고 텍스트를 해석하려고 한다. 윤리와 실천을 구원과 칭의의 열쇠로 보는 그릇된 확신을 확대시킨다. 로마가톨릭주의 구원관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바울은 유보적 칭의론을 거부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롬 5:1)고 선언한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렸다"(엡 2: 1, 5)고 한다.

 

나의 신앙을 짧게 고백하고 싶다. 나는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죄인이다. 의인이기도 하고 죄인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 숨을 거두어도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눈을 뜰 것을 확신한다. 내가 맺은 의의 열매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게 전가시킨 그리스도의 거룩한 의 때문이다. 나는 의의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한다. 그렇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한들, 나의 의, 의의 열매, 선행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구원의 눈 높이에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겠는가? 절망할 수 밖에 없다.

 

나는 나 자신의 의와 선한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래서 구원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대속사역의 십자가를 바라본다. 하나님이 내가 믿을 때 베풀어 주신 은혜의 선물에 감사한다.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성령 하나님이 나의 믿음을 심판 날까지 굳건하게 지켜 줄 것이라 믿는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단절시킬 수 없다. 그래서 내게 구원을 선물한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한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이 글이 김세윤의 주장을 올바르게 이해한 것이기 바란다. 소모적인 논쟁, 논의는 사양한다.

 

 

최덕성

 

쓴이 최덕성신학자이다. 현재 브니엘신학교 총장(2013-), 교의학 석좌교수이다. 고려신학대학원-고신대학교 교수(1989-2009)였다. 하버드대학교 객원교수(1997-1998)였다.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쓰기>, <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 <정통신학과 경건>, <신학충돌>, <교황신드롬>, <KOREAN CHRISTIANITY> 등 약 20권을 저술했다. 미국 예일대학교(STM), 에모리대학교(Ph.D.)를 졸업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로부터 '신학자대상'(2001)을 수상했다.

 

 

위 글은 <크리스천투데이> (2015.10.23.)에도 게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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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5.10.25 21:13

    김경열/ 페이스북에 올린 글 (자구 수정)

    왜 바울만 갖고 티격태격하는지

    1. "믿음으로 의롭게 여긴다" 소위 바울의 칭의론이 뭔지, 또한 신자의 거룩한 삶이 요구된다는 성화론이 뭔지, 저는 아직 잘 모릅니다. 저의 바울의 칭의론 공부는 몇 년 전에 멈춘 상태라 더욱 그렇습니다.

    2. 김세윤 교수님의 저서들과 그외 바울의 율법관에 대한 몇몇 주요 학자들의 책들은 신대원 시절 여러권 원서로 정독한 적이 있었기에 아직도 주요 논점은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 후 <바울의 새관점>도 선교지에서 읽었으니까 어느 정도는 알지요.


    3. 몇년 전부터 중심이 톰 라이트이더군요. 구약 공부하느라 밀려서 개인적으로 톰 라이트 공부는 이제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 주장은 샌더스와 제임스 던의 주장을 대단히 정교하게 완성시킨 사람으로 보이네요. 현재 대충은 알지만 아직 확실히는 모르니 뭐라 할 말은 없습니다.

    4. 톰 라이트의 주장의 핵심은 믿음으로 얻는 칭의는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즉, 칭의 = 구원은 아니며, 더불어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은 아니라는 논지로 받아들여집니다.

    5. 구약에서도 이게 난해한 문제이긴 합니다. 언약과 율법의 관계의 문제인데, 복잡하니 이 내용은 나중에 올려드립니다.

    6. 쉽게 말하면, 율법의 준수가 언약 백성을 확증하는 조건이었느냐 아니면 율법과 상관없이 언약 백성으로서 자격이 확증된 것이냐는 논쟁이죠.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의 행위없이 구원이 주어진 것이나 아니면 행위가 조건으로 달린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7. 결론만 말씀드리면, 구약의 언약에는 이 두 가지 측면이 다 나타납니다. 무조건적인 일방의 언약(아브라함)과 조건적인 쌍방의 언약(시내산) 이 두 가지가 말이죠.

    8. 순종여부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내가 너에게 복을 주고 너를 통해 이러이러한 일을 하겠다"고 선언적 약속을 하시는가 하면, "너희가 순종하면 제사장 나라가 되고.."라면서 율법 순종의 조건을 명시하십니다.

    9. 언약과 율법의 관계에서 이 두 가지 양상이 모두 나타나니 혼동을 줄 수 밖에 없습니다 .

    10.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하나님의 주권적이면서 일방적 구원이 부각되고, 동시에 바울의 이신칭의의 근거가 바로 이미 할례나 율법을 준수하기 전에 아브라함이 확신한 그 약속에 대한 그의 믿음이었죠.

    11. 반대로 시내산 언약은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 그러나 조건부 구원의 특징이 두드러집니다.

    12. 전통적으로 루터 이후의 개혁파는 아브라함 언약에 시내산 언약을 수렴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조건부" 언약처럼 보이는 시내산 언약도 종국에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일방적인 최종적 성취를 내다보고 있다는 겁니다.

    13. 즉, 루터 이후의 주장에 의하면, 그 율법의 조건들은 구원의 자격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닌 구원 받은 백성의 삶의 규범으로 주어진 것이죠. 다시 말해 율법은 구원 테스트를 하려는 시험지가 아니었습니다.

    14. 즉, 율법은 90점 맞으면 합격, 그 이하는 낙제, 혹은 70점이면 합격 아니면 불합격시키는 그런 일종의 시험지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일단 합격한 사람들(구원 얻은 사람들)의 생활규범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15. 그러나 행위와 순종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시내산 언약의 그 '조건성'에 초점을 맞추지요.

    16. 저는 전자에 서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결정이고, 인간에게는 단지 '믿음'의 반응이 요구됩니다.

    17. 바울은 아브라함의 행위가 그의 칭의에 그 어떤 일조를 한 바가 없음을 강조합니다. 저는 여기서 바울이 그 행위에 할례라는 제의적 행위만이 아닌 인간의 업적을 분명히 포함시키고 있다고 봅니다.

    20. 그리고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구원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분명히 믿음에 의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이것은 변할 수 없습니다.

    21. 그런데 문제는 그 '믿음'이 하나님이 판단하신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내가 확신하면서 내 편에서 말하는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22. 그건 너무나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그의 믿음을 보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는다고 한다 할지라도 그 믿음의 진정성은 오직 하나님이 판단합니다.

    23. 그에 따른 구원도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구원은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내가 믿고 구원받았다는 스스로의 선언은 어떤 점에서 인간의 교만한 태도일 수 있습니다.

    24. 물론 "나는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말은 사람 편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는, 나아가 진정으로 구원받았는지는 하나님 만이 아시고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기독인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는가?)

    25. 그러니 우리는 "믿습니다"고 고백을 하면서도 구원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나의 구원의 문제를 내맡길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구원받았다고 확신한다해서 구원이 무조건 주어진다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6. 바로 이로 인하여 신자의 삶은 긴장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신학의 틀인 <이미와 아직>의 구도와는 약간 다른 방식의 긴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27. 바로 이점이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뻔뻔하게 단정지으며 사실은 멋대로 죄짓고 살아도 되는 <구원파>와 우리와의 근본적 차이점이 있습니다.

    28. 우리는 그저 우리의 구원은 주인의 처분에 달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익한 죄인입니다. 주여 용서하소서"라는 겸손한 고백을 죽을 때까지 입에 달고 살아야 합니다.

    29.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번 구원시켜 준 사람은(우리가 건방지게 확정할 수 없으나) 결코 그 구원은 철회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그 구원의 철회란 있을 수 없습니다.

    30. 반복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판정하신 것, 즉 그렇게 결정하신 구원이지 인간 편에서 판단을 내리는 구원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런 의미의 한번 구원 = 영원한 구원은 성립이 되지 않는 겁니다.

    31. 바로 이러한 차이를 알지 못하니, 한번 구원 = 영원한 구원 가지고 맞니 틀리니 싸움이 벌어지고, 칭의 = 구원이니 아니니 하는 논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32. 한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라는 증거를 바울이 아리까리하게 말해서 정확히 찾기가 혼동스럽다면, 다른 성경을 들여다 보시면 명확해 집니다. 왜 바울만 갖고 싸움질 하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33. 요한복음 3:5-8 보십시오.

    34. "3:5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35.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36. 첫째, 예수님은 "거듭남"이 순간의 사건임을 말씀하십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 같이 새사람으로의 영적인 탄생의 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결코 여기서 사람의 행위나 노력이 아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십니다.

    36. 둘째, 성령으로 난 사람은 마치 바람소리는 들어도 바람의 실체를 알 수 없듯이 어떤 체험의 과정을 통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거듭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생의 체험은 바람과 같은 분명한 실제 사건인데, 구원의 구체적 시점과 양상은 사람마다 다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37. 그건 강풍이 불어 불덩어리가 떨어지는 듯한 뜨거운 극적 체험일 수도, 아니면 약풍이 불어 별 감흥이 없는 이슬비를 맞는 듯한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38. 예수께서는 우리는 바람의 실체를 볼 수 없듯이 성령에 의한 거듭남의 사건을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어떤 경우이건 물과 성령에 의한 중생의 "순간"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아이가 태어났다가 취소되어 엄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듯이 한번 중생은 결코 철회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39. 이 설명에 이은 예수님의 선언은 가장 유명합니다.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40. 두말할 것도 없이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겁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바울의 선언의 요한복음 버전입니다. 양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41.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건대 그 믿음은 내가 측정하고 판단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에서 확인되듯, 하나님께서 보시고 판단하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에 의해 영생을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이죠.

    42.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믿음과 신앙 생활은 최종결과를 하나님께 의탁한 긴장 속에 살 수 밖에 없는 겁니다.(?)

    43. 예수님께서는 인간 편에서 그것을 점검해볼 기준, 즉 그 믿음의 척도를 바로 "열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합격 판정 내리시는 참된 믿음은 열매가 없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44. 분명히 아무런 열매가 없는 가운데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이 확증됩니다. 예수님 옆에 매달린 강도가 "믿는다"고 고백할 때의 바로 그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살면서 자동적으로 열매를 맺게 되는 참 믿음입니다.

    45. 그러니 중생 순간의 믿음을 열매맺는 믿음으로 측정해선 안되는 겁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천국을 확신하고 그 순간 죽으면 그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열매를 맺는 믿음이니 살아가면서는 우리 삶에서 참 믿음이 열매로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46.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열매로 알리라"는 말씀과 야고보고가 강조한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을 통해 볼 때 행위의 열매가 우리의 믿음을 측정하는 유효한 저울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브라함의 언약과 시내산 언약 둘 다 필수적인 것입니다.

    47. 이 긴장 속에서 그저 우리는 엎드려 그분의 자비와 은혜를 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구원받았다"고 기쁨의 확신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는 두려운 고백을 해야하는 것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48. 한번 구원 = 영원한 구원이라는 "칭의론"과 "구원론"이 잘못되어 한국 교회가 엉망진창이라는 김세윤 교수님의 논지에 대해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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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5.11.15 23:13


    브니엘 신학교 총장  최덕성 교수 의 말


    나의 신앙을 짧게 고백하고 싶다.
    ​나는 의롭다고 칭함받은 죄인이다.

     

    의인이기도 하고 죄인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 숨을 거두어도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눈을 뜰 것을 확신한다.

    ​내가 맺은 의의 열매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게 전가시키신 그리스도의 거룩한 의 때문이다.

    나는 의의 열매를 맺으려 노력한다. 그렇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한들, 나의 의, 의의 열매, 선행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구원의 눈높이에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겠는가? 절망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나 자신의 의와 선한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래서 구원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대속사역의 십자가를 바라본다.

    ​내가 믿을 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의 선물에 감사한다.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성령 하나님이 나의 믿음을 심판 날까지 굳건하게 지켜 주실 것이라 믿는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단절시킬 수 없다.


    그래서 내게 구원을 선물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한다
    . “오직 은혜, 오직 믿음.”
    ...........................................................
    한국 신학연구원 ​

    `칭의` - 창세 전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예정하신 자녀들(엡1:4,5)은 예정하심과 함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로된다. 그 이름이 기록되었을 뿐 아니라 삶도 기록된다(시139:16). 그후 이 땅에 태어나서 살 때에 하나님은 예정하셨기 때문에 성령하나님을 보내신다. 성령하나님은 성도 안에 오셔서 예수님을 믿게 하신다. 이 때에 하나님은 <의롭다>하시는 것이다. 이 의롭다하심의 하나님의 선언은 예수님을 믿게되기 전의 모든 죄를 사함과 동시에 자녀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대로 살게하신 다는 언약의 징표이시다. 때문에 하나님으로 부터 칭의 함을 받은 사람들은 성령하나님이 그 사람의 안에서 율법을 온전케 이루신다.(마5:17,18) . 이 율법을 이루어 가시는 상태를 성령의 법이라 하신다.  [출처] 작성자 이준목사의 주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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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5.12.23 18:04
    마 7:21에서 구원의 조건이 ‘믿음’ 하나만이 아니고, ‘믿음과 행함’둘이라는 사실은, 지성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고, 인정해야하는 진리 아닌가요? 행함이 믿음과 함께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씀하는 성경구절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임태수 (제2종교개혁연구소 소장. 호서대 명예교수) <들소리신문에서 옮겨 옮>

    존경하는 서문강 목사님,

    강의 내용을 면밀히 읽으시고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주장하는 “행함 있는 믿음(fide cum opera)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제2종교개혁사상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 목사님께서는 로이드 존스를 존경하시고 좋아해서 그의 책들도 번역하시고, 로이드 존스가 추구한 청교도적인 삶을 사시면서, 교인들도 청교도적으로 교육하시고 목회하시는 분이시니, 제가 추진하고 있는 제2종교개혁의 방향과 멀지 않다고 느껴집니다.

    서 목사님께서 제기하신 질문들은 제가 오랫동안 강의해오면서 수 없이 많이 들어본 질문들입니다. 이번 기회에 서 목사님과 같은 질문을 가지신 다른 많은 분들을 대신해서 서 목사님께서 질문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답변은 서 목사님 개인에게 드리는 답변임과 동시에, 그동안 저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신 모든 분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동일한 질문을 제기하실 많은 분들을 염두에 두고 드리는 답변이기도 합니다. 이번 답변을 들으시고 혹시 오해가 있으셨다면 오해를 푸시고 제2종교개혁신학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답변드리겠습니다.

    질문1: 본인이 이해하기로는 박사님의 주장의 핵심적인 요점은, 구원은 ‘믿음으로만’이 아니고 ‘믿음과 행함 두 가지다’라는 것입니다. 들소리신문에 기사화된 대로 박사님의 주장은 ‘믿음 + 행함 = 구원’이라는 공식을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계십니다(해당기사 보러가기). 박사님의 파일 논문 6면에서 이런 대목을 발견합니다. “다시 말하면 마 7:21에서 구원의 조건은 ‘믿음과 행함’ 두 가지다. 루터는 구원의 조건을 ‘믿음’ 한 가지 뿐이라고 말한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마 7:21에서 구원의 조건을 ‘믿음과 행함’ 두 가지로 제시하신다.” 개신교는 루터의“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이신칭의, Justification by faith alone)”는 주장을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통하여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방식’에 대한 정당한 이해로 받아 들여왔습니다. 그러므로 루터 이후 이신칭의(以信稱義)를 생명처럼 여겨왔던 정통 개신교가 잘못이든지 박사님의 주장이 잘못인지 둘 중 하나입니다. 박사님의 주장이 맞는다면 이는 박사님 스스로 주장하듯이 ‘제 2의 종교개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박사님이 오해한 것이라면 박사님의 주장은 마땅히 수정되거나 철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답변: 질문1에 대한 답변을 마 7:1에 대한 답변과, 이신칭의에 대한 답변으로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첫째, 마 7:21에 대한 답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마감하시면서 마 7:21에서“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의 조건은‘주여 주여’ 하는‘믿음’ 하나만입니까, 아니면 ‘믿음과 행함’둘입니까? 만약 ‘믿음’하나만이라면 주님께서는“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행함’이 천국에 들어가는 또 하나의 조건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주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이 ‘주여 주여’하는 ‘믿음’ 하나만이 아니고, ‘행함’도 구원의 조건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는데, 여전히 마 7:21에서 구원의 조건은 루터가 말한 대로 ‘믿음’하나만이라고 주장하시겠습니까? 마 7:21에서 구원의 조건이 ‘믿음’ 하나만이 아니고, ‘믿음과 행함’둘이라는 사실은, 지성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고, 인정해야하는 진리 아닌가요? 여기에 대한 서 목사님의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행함이 믿음과 함께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씀하는 성경구절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지켜 구원”즉 ‘행함’이 구원의 핵심조건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고 인정되는 진리이므로 여기에서는 논외로 하고, 신약에서만 중요한 성경구절들을 골라서 설명드리겠습니다.

    (1) 눅 6:46-48(마 7:24-25)에서 주님께서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구원의 조건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이란 말은 여기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말을 듣는 것”에서‘믿음’을 유추해 낼 수 있을 뿐입니다. 이 비유에서 구원의 조건은 ‘믿음’ 하나만이 아니고, “행하는 것”을 포함하여‘믿음과 행함’ 두 가지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시겠습니까?

    (2) 마 25:34-36에서 주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조건은 ‘믿음’인가요, 아니면 ‘행함’인가요? 이 말씀에서 믿음이란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믿음은 37절 ‘주여’란 말 속에 숨겨져 있어서 겨우 유추해낼 수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주님(인자)께서 구원의 조건으로 강조하신 말씀은 “먹을 것, 마실 것, 옷을 주고”“병들었을 때에 돌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보는”‘행함’ 아닌가요? 이 비유에서도 구원의 조건은‘믿음과 행함’ 두 가지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구원의 조건은 ‘오직 믿음만’이라고 주장하시겠습니까?

    (3) 마 19:16-19(막 10:17-31; 눅 18:18-30)에 나오는 대화 즉“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는 대화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영생의 조건으로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계명은 십계명의 5-9계명과 이웃사랑의 계명입니다. 이 계명들을 지켜야 즉 행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영생 즉 구원의 조건은 ‘오직 믿음’인가요? 아닙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이 부자청년이 이스라엘 사람이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믿음을 유추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서‘행함’이 ‘믿음’과 함께 영생의 조건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4) 눅 10:25-28에“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대화가 나옵니다. 이 대화에서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길에 대하여 율법교사가 답변한 대로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는 일”을 “행하면 살리라”고 답하십니다. 여기에서 주님이 제시하신 영생의 길은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인가요? 아닙니다. 여기서도 믿음이란 말은, 율법교사가 이스라엘이요 율법학자이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일 것이라는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계명을 행하는 행함 아닌가요? 여기에서 영생 즉 구원의 조건은 행함임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이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5) 요 5:29에서 주님께서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생명의 부활로 나오는” 구원의 조건은 무엇인가요? ‘오직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선한 일을 행함”입니다. ‘행함’이 ‘생명의 부활’을 얻는 구원의 조건임을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오직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믿음과 행함’즉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여전히 루터의 가르침을 따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주님을 헛되이 경배하는”(마 15:9) 일이 될 것입니다. 루터의 말을 예수님 말씀보다 더 사랑하고 우위에 둔다면 이는 주님께 합당한 일이 아닙니다(마 10:37).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님의 분명한 말씀을 무시하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루터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 루터의 제자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6) 고전 6:8-10에서 바울은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조건으로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행함을 내세웁니다. 간음하고 우상숭배하고 도둑질하는 사람 즉 행함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이 율법들을 지키고 행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는 말 아닙니까? 여기에서 바울이 강조하고 내세우는 구원의 조건은 ‘믿음’이 아니고 ‘행함’입니다. 이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믿음’이란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이 서신의 수신자가 8절에 나오는 ‘너희’라는 사실에서, 그들이 고린도교회 교인이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임을 유추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전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도구원의 조건은 ‘믿음’ 하나만이 아니고,‘믿음과 행함’ 두 가지임이 분명합니다.

    (7) 갈 5:18-21에서 바울은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한다. 여기에서도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조건으로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행함’을 내세웁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강조하고 내세우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행함’아닙니까? 여기에서 ‘믿음’이란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이 서신의 수신자가 18절에 나오는 ‘너희’라는 사실에서, 그들이 갈라디아교회 교인이므로 하나님을 믿는‘믿음’을 가진 사람들임을 유추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전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도구원의 조건은 ‘믿음’ 하나만이 아니고,‘믿음과 행함’ 두 가지임이 분명합니다.

    (8) 엡 5:5에서도 바울은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도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얻는”조건으로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행함’을 내세웁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강조하고 내세우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행함’입니다. 여기에서도 ‘믿음’이란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이 서신의 수신자가 5절에 첫머리에 나오는 ‘너희’라는 사실에서, 그들이 에베소교회 교인이므로 하나님을 믿는‘믿음’을 가진 사람들임을 유추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전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구원의 조건은 ‘믿음’ 하나만이 아니고,‘믿음과 행함’ 두 가지임이 분명합니다.

    루터의 말을 예수님 말씀보다 더 사랑하고 우위에 둔다면 이는 주님께 합당한 일이 아닙니다(마 10:37).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님의 분명한 말씀을 무시하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루터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 루터의 제자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9) 약 2:14에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므로”(17절), 행함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야고보의 결론입니다. 이 말 때문에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서신’이라고 평가절하했습니다. 야고보서는 성경이 아니던가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가르침만 따르겠다고 고백하고 주장한 루터가, 왜 성경인 야고보서의 가르침은 따르지 않고 거부한 것인가요? 루터에게 일관성이 결여된 것 아닌가요? 성경 가운데서 자기의 “오직 믿음으로만”의 신학에 맞으면 따르고, 맞지 않으면 따르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요? 야고보에게 있어서도 ‘오직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믿음과 행함’ 즉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이란 사실이 분명합니다.

    행함이 믿음과 함께 구원의 조건이라는 성구는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으리만큼 많이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조건은 ‘오직 믿음’(sola fide)이 아니라, ‘행함 있는 믿음’(fide cum opera)입니다. ‘오직 믿음’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행함이 믿음과 함께 구원의 조건이란 말에 일레르기적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출국하려고 할 때 갖춰야 할 조건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여권이고 다른 하나는 비행기표입니다. 이 둘 가운데 하나만 없어도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갈 수 없습니다. 이 경우에 여권과 비행기표는 해외 출국을 위한 필수조건들입니다. 믿음과 행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필수조건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닙니다. 믿음과 행함이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이라는 것이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말씀하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위와 같이 설명을 드리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이라고 믿어온 사람들 가운데서 약 97-98%의 사람들은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약 2-3%의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성경적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서문강 목사님,

    위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이 아니라 ‘믿음과 행함이 구원의 조건’임을 9가지 성구를 들어 분명히 설명드렸습니다. 이 말씀들은 저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요 성경의 말씀입니다. 저는 단지 성경말씀에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을 뿐입니다. 이 설명을 들으시고 ‘믿음과 행함이 구원의 조건’임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오직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루터의 구원론을 견지하시겠습니까? 서 목사님의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둘째, 이신칭의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답변드리겠습니다.

    저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에 대하여 부인한 일이 없습니다. 자세하지는 않지만 들소리신문에도 나와 있고, 보내드린 자료집 21-23에서 롬 3:26-28; 4:1-25; 갈 2:16 등을 들어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이신칭의를 받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어떠한 인간의 행함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헬라어원전에는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고 되어 있지, ‘오직 믿음으로’(롬 1:17) 라고는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은 루터가 말한 것이고, 독일의 루터 성경과 우리말 성경에만 있을 뿐 다른 나라 성경에는 없는 말입니다. 저는 의롭다함을 받는 칭의에는 이신칭의만 있는 것이 아니고,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이행칭의(以行稱義)도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구원을 위하여 이신칭의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행칭의도 필요함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음을 자료집 p.23-35에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여기서는 이행칭의에 대하여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직 믿음’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행함이 믿음과 함께 구원의 조건이란 말에 일레르기적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출국하려고 할 때 여권과 비행기표는 해외 출국을 위한
    필수조건들입니다. 믿음과 행함도 마찬가지입니다.

    (1) 야고보는 2:24에서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고 두 종류의 의(義) 즉 이신칭의와 이행칭의에 대하여 분명히 말합니다. 야고보는 2:21에서 이행칭의의 예로서“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야고보가 24절에서 “믿음으로만(faith alone)은 아니니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야고보 당시에 교회 안에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 이신칭의만을 말하고,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이행칭의에 대해서는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기 위하여 야고보는 여기에서 이신칭의뿐만 아니라 이행칭의도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신칭의만을 주장하고 이행칭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야고보의 경고를 받아들여 이신칭의뿐만 아니라 이행칭의가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2) 모세는 신 6:25에서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모든 명령 즉 율법들을 지켜 ‘행하면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행칭의의 말씀입니다.

    (3) 예수님은 마 5:20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義)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의(義)는 ‘믿음으로 얻는 의’가 아니라(5:17-48에서는 믿음이란 말이 한 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행함으로 얻는 의’(이행칭의)입니다. 예수님이 20절에서 말씀하시는 의는“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입니다. 이 의에 대하여 예수님은 21-48절에서 6가지 대립명제(antithesis)로 설명하시는데, 여기서 말씀하시는 6가지 대립명제는 모두 사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행함’에 관한 것입니다. 21-48절에서 말씀하시는 ‘더 나은 의’가 있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일인데 “나는 할 수 없다”고 거절하면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계명들을 주시고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요 14:15)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롬 8:3-4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 육신은 약해서 율법을 지킬 수 없지만, 성령을 따라서 살며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우리는 예수님이 명령하신 계명들을 지킬 수 있습니다.

    (4) 마 25:31-46의 최후심판비유에서 심판주이신 주님께서 오른 편에 있는 양과 같은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부릅니다(37,46절). 여기에서 양과 같은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부른 것은 그들의 행함 때문입니다. 양과 같은 사람들이나 염소와 같은 사람들 모두 심판주를‘주여’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37절, 44절), 양자 모두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의 차이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양자의 차이는 믿음에 있지 않고 행함의 여부에 있습니다. 믿음이 있음과 동시에 행함이 있는 양과 같은 사람들은(35-36절) 행함으로 ‘의인’이 되었고, 염소와 같은 사람들은 믿음이 있지만 행함이 없기 때문에(42-43절)‘의인’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의인이 될 수 있는 조건은 행함입니다. 양과 같은 사람들은 행함으로 의롭다함(이행칭의)을 받은 것입니다.

    (5) 바울은 롬 8:4에서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성령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 개정개역이“율법의 요구”라고 번역한 헬라어는 dikaiōma tou nomou입니다. dikaiōma는 롬 3:28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다”는 동사 dikaiousthai의 어근과 같은 어근인 dikaioō에서 나온 명사형입니다. dikaioō는“의롭게 하다”는 말인데, dikaiousthai는 dikaioō의 동사형이고, dikaiōma는 dikaioō의 명사형으로서‘의’(義), ‘의로움’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NIV는 dikaiōma tou nomou를 the righteous requirements of the law(율법의 정당한 요구)라고 번역했으나, KJV은 the righteousness of the law(율법의 의)라고 번역했다. KJV의 번역이 헬라어원문의 의미를 더 잘 반영한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KJV을 따라서 8:4를 번역하면“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의’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우리에게 ‘율법의 의’가 이루어진다”(the righteousness of the law might be fulfilled in us)는 말은“우리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이행칭의)는 말입니다. 율법의 의는 율법을 지켜 행할 때 주어집니다. 우리도 성령을 받으면 율법을 지켜 의롭다함을 맏을 수 있음을 바울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절대적인) 의인은 세상에 없지만(전 7:20; 롬 3:10), 때로는 죄를 범하기도 하지만 회개하고 두루마기를 빨아(계 22:14) 의인으로 인정받은 ‘상대적 의인’들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경은 노아(창 6:9), 아브라함(약 2:21), 욥(욥 1:1), 아벨(마 23:35), 롯(벧후 2:7), 요셉(마 1:19), 사가랴와 엘리사벳(눅 1:6), 아리마대 요셉(눅 23:50), 고넬료(행 10:22) 등이 의인들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인은 이신칭의 뿐만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이행칭의도 있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이 마 5:20에서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질문2: 어거스틴은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 의롭다 하심을 받을 조건으로 제시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는 박사님이 인용하신 자기 진술에서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구원받은 이후’에 ‘구원받을 만한 믿음’의 표지와 열매로 그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답변: 어거스틴은 413년에 쓴 On Faith and Works(「믿음과 행함에 관하여」)에서 행함이 믿음과 함께 구원의 조건임을 아래와 같이 분명히 강조하였습니다.

    제14장
    “구원을 위해서는‘믿음으로만’(faith alone)으로 충분하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선행(good works)을 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확신(false assuarance)이다.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한 것은 선행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이신칭의 이전에는 율법을 행하지 않아도 이신칭의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율법을 행하는 것은 이신칭의 이후에 필요하다.”

    “사랑 없는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2), 사랑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선한 삶을 사는 사람 외에는 영원한 구원은 주어지지 않는다.

    “바울 서신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지만, ‘선행 없이 구원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제15장
    주님은 마 25:41에서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그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고, 그들이 선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이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분리하신 것은, 그 누구도 “믿음으로만(faith alone), 죽은 믿음(dead faith) 즉 행함 없는 믿음이 영생을 얻는데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제23장
    성 요한은 하나님을 믿기 원하면서 동시에 범죄하는 삶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쉬운 구원의 길도 약속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5:28-29에서 요한은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요한이 “믿는 자”, “믿지 않는 자” 라고 말하지 않고, “선한 일을 행한 자”, “악한 일을 행한 자” 라고 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선한 일을 행하는 삶”(a good life)은 믿음에서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26장
    “예수 이름으로 세례받고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삶을 살든지 상관없이 구원얻을 것”이라는 잘못된 확신을 사람들에게 주지 말라. 기독교인의 삶은 세례의 성스러운 특성(sacred character)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영생은 세례 안 받는 자에게도 허락되지 않거니와, 선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도 허락되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믿음으로만’(faith alone)으로 충분하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선행(good works)을 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잘못된 확신(false assuarance)’이라고 말합니다. 루터보다 1100여년 전에 어거스틴은 루터가 말한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론을 잘못된 구원론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위의 인용문들의 밑줄친 부분에서 어거스틴은 ‘조건’이란 말은 사용하지 않지만, “행함(선행)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몇 번이나 강조해서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행함이 믿음과 함께 구원의 조건임을 분명히 말합니다. ‘조건’이란 무엇입니까? ‘조건’이란 “어느 일을 진행되게 하거나 성립되게 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기본요소”(국어국문학회 감수, 「새로나온 국어대사전」, 민중서관, 2000, p. 2230)를 말합니다. 믿음과 함께 행함은 구원을 얻기 위한 기본요소요 필수조건입니다. 행함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어거스틴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 말이 행함이 구원이 조건이란 말 아닙니까?

    질문3: 어거스틴과 루터가 칭의(稱義)에 대하여 앞에서 말한 것을 옹호하는 일치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답변: 어거스틴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했지, 루터처럼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선행(행함)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루터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질문2의 답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질문4: 성경 자체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후’에 ‘율법의 행위’도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구원받을 만한 믿음(saving faith)의 표지와 열매로서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21과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이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행위’를 말하지 않습니다.

    답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미 질문1에 대한 답변에서 충분히 말씀드렸습니다. 서 목사님께서는“성경이 구원받을 만한 믿음(saving faith)의 표지와 열매로서의‘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데, “구원받을 만한 믿음(saving faith)의 표지와 열매로서의 ‘행위’가 없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서 목사님의 논리를 따르더라도 그런 ‘행위’가 없다면“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아니므로 구원이 없는 것 아닙니까? 서 목사님께서“구원받을 만한 믿음(saving faith)의 표지와 열매로서의 행위”를 말씀하셨는데, 그 표현 자체가 ‘행함이 구원의 조건’임을 말해주는 것 아닌가요? “마 7:21과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이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행위’를 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질문1의 답변에서 충분히 말씀드렸기 때문에 다시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질문5:‘행함’은 ‘칭의(justification)’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의 본분과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에 부합하기 위한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열매와 표지로서 강조되어야 합니다.

    답변: 저는 성화라는 말보다는 행함이라는 말을 선호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화’는 구원의 조건으로 명확히 제시된 곳이 많지 않은 반면에, ‘행함’은 구원의 조건으로 분명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함은 이신칭의 때는 필요하지 않지만(롬 3:28) 이행칭의 때는 필요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도 질문1의 답변에서 충분히 답변하였으므로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질문6: 예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 천국백성이 된 자들의 지상행로에 관해서 증거한 산상설교에서 ‘착한 행실’을 강조하십니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그 경우에도 ‘행함’을 우리의 구원을 위한 부가적 조건으로 강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자녀다운 거룩한 성품, 곧 그리스도의 형상으로서의 변화인 ‘성화’의 열매로서의 ‘행위’입니다(엡 4:11~13). 그 행위도 우리 자신에게 돌려지는 공덕(功德)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한 것입니다. 그러니 ‘성화의 진전과 열매’가 있어도 우리의 공력으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돌려져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믿음으로만’으로 충분하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선행을 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잘못된 확신’이라고 말합니다. 루터보다 1100여년 전에 어거스틴은 루터가 말한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론을 잘못된 구원론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답변: 산상설교를 마감하는 자리에서 7:21-27에서 예수님께서 “행함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은 그 앞에서 말씀하신 모든 행함에 관한 말씀들(5:3-7:20)을 다 포함해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행위도 우리 자신에게 돌려지는 공덕(功德)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열매’”라는 서 목사님의 말씀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바울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고 말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해주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구원받고 사도로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100%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 100%를 받아서, 자기도 마음, 목숨, 힘. 마음을 다 해서,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가진 것 100%를 다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음을 고백합니다(눅 10:25-28). 그러나 바울의 이 고백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만약 여기서 끝났다고 하면, 바울은 자기 공로를 자랑하는 교만에 빠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가진 것 100%를 다 바쳐서 일했으나, 그 모든 공로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다 바칩니다. 그러면 바울에게 남는 것은 0%가 됩니다. 참으로 멋있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100% 받아서, 그 받은 것 100%를 다 바쳐서 행하고, 그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다 돌려드리고 자기는 0%로 남는 것,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눅 17:10) 하고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절대로 구원의 공로를 우리 자신에게 돌리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었다”고 하면서 아무 것도 안 하는 사람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같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당신은 굳은(능력이 많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 25:24-25) 하는 마음으로 아무 일도 안했습니다. 결국 그는 주인으로부터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고 저주받지 않았습니까? 한국에 이런 기독교인이 너무 많은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과 같은 한국교회의 위기가 왔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5달란트, 2달란트 받은 종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다음에 마음과 목숨과 힘과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모든 공로를 하나님게 다 돌려드리고요!

    질문7-1: 교회사의 대표적인 비복음적이고 이단적인 두 대표적인 극단(極端)이 있습니다. 첫째로, 구원의 조건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의 충분성과 완전성을 부인하게 하고 다른 것을 첨가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극단입니다. 갈라디아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바로 그런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할례’를 첨가하여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그것은 ‘다른 복음’임을 천명하여 그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저주를 받을 것임을 강력하게 경고하였습니다(갈 1:6~10).

    답변: 저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의 충분성과 완전성을 부인한 일이 없습니다. 다만 이신칭의 받은 다음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바울과 야고보가 말한 이행칭의가 필요함을 말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바울과 야고보가, 그리고 교회 역사 가운데 가장 큰 스승이신 어거스틴이, “행함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위해서는 이신칭의만 받으면 되고, 다른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잘못된 것 아닙니까? 제가 구원을 위해 믿음과 함께 행함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성경이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수천년 동안 말씀해오는 구원의 진리인 “행함 있는 믿음”을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가 성경에 있는 행함을 구원의 조건으로 강조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 루터가 성경의 진리인 행함을 구원의 조건에서 제거한 것이 잘못한 것 아닙니까?(계 22:19) 제가 믿음과 함께 행함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하고, 이신칭의 받은 다음에 이행칭의를 받아야 구원이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바울이 말한 계명들을 지키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저는 성경에 없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질문1에서 충분히 답변드렸습니다.

    질문7-2: 둘째로, ‘그리스도의 은혜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구실로 은혜를 자기 정욕의 도구로 사용하여 믿는 자의 ‘선행’은 불필요한 것 같이 가르치는 극단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사에 나타난 ‘도덕폐기론(무율법주의, Antinomianism)’입니다. 구원을 받은 이들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후 5:17). 그 속에 영생을 가지고 있으며(요일 5:12,13), 보혜사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벧후 1:3~4).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 걸려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아무렇게나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빙자하여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요 자기 행실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 대속의 은혜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유 1:4). 그런 의미에서 복음 사역자가 ‘믿는 사람들의 행함’을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구원의 열매와 표지로서 강조해야 합니다. 그 강조가 없는 가르침은 균형을 잃은 가르침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행함’의 열매가 모자란 것이 복음을 주밀하고 섬세하게 가르치는 일을 등진 결과라고 저는 믿습니다. 가장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청교도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선한 행실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답변: 옳은 말씀입니다. 서 목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그 길이 바로 ‘오진 믿음으로만’(sola fide)이 아니고, ‘행함 있는 믿음’(fide cum opera)으로 구원 얻는 길입니다. 지난 500년 동안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면서, 행함을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만’의 구원론은 행함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그 구원론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오늘의 동서양의 교회의 피폐한 모습이 잘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행함 없는 오직 믿음만이 의롭게 하고, 자유하게 하고, 구원한다”(“A Treatise on Christian Liberty”, Works of Martin Luther with Introduction and Notes, Philadelphia Edition, Vol.2, Muilenberg Press, 1943, p. 317)는 말은 행함을 강조하는 다른 말들을 약화시키고 사실상 무효화시켜왔습니다. “칭의와 구원에 행함이 필요 없다”고 말한 다음에, 행함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그자체로 모순 아닌가요? 그래도 계속해서 ‘오직 믿음으로만’의 구원론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해서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청교도처럼‘선한 행실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목사님께서,‘도덕폐기론(무율법주의, Antinomianism)’을 이단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율법을 지키는 행함이 있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구원론을 거부하십니끼? 오히려 서 목사님의 입장에서는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의 성경적인 구원론을 지지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들이 지켜야 할 율법은 구약에 있는 율법 전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율법은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지키라고 명령하신 율법과 계명들, 그리고 바울을 비롯한 신약성경 저자들이 우리들에게 지키라고 권하는 말씀들만 지키면 됩니다.
    질문8: 우리의 절대적인 표준은 성경이며, 성경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해석의 기준은 교회사를 통하여 옳다 평가된 정당한 개혁주의적인 교리의 체계라고 본인은 믿습니다. 박사님도 같은 의식을 공유하고 계심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답변: “우리의 절대적인 표준은 성경이며, 성경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라는 서 목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위에서 제가 말씀드린 내용들 전체가 성경을 근거로 한 진술들입니다.

    개혁주의적인 교리의 체계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개혁주의적인 해석이 모두 다 옳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이라는 구원론이다. 이는 성경의 말씀에 따라서 수정되어야 한다. 루터나 칼빈은 어거스틴을 존경하고 의존했는데, 어거스틴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이라는 구원론을 신랄히 비판하고, “행함 있는 믿음으로라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을 위에서 충분히 설명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어거스틴의 책을 구하셔서 직접 읽어보시는 것도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에서 부족하지만 저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답변드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서 목사님께서 저의 의도를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질문 주셔서 미진한 부분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 주심을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토론의 장을 마련해 주신 들소리신문사에도 감사드립니다. 기회가 되면 한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임태수 박사 dsr12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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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6.01.28 21:55
    구원받은 사람이 그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존 파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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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6.04.13 16:57
    칭의와 성화/ 댄 텔젤 목사, 미국인

    사도바울은 믿음과 행위 사이의 관계를 멋지게 조율했다. 그는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순종"(롬1:5)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했다. 그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칭의와 성화를 명확히 설명하는 편지들을 썼다.

    칭의는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믿는 순간에 완성된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칭의는 성화라는 "집"의 토대에 해당한다. 기독교인의 삶(성화)은 영적 성숙도와 순종이 커지면서 진행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실수하면 안 된다. 믿음은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반면, 순종은 믿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받는다. 동시에 믿음은 외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믿음은 항상 좋은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의 열매가 없이는 그 "믿음"이란 것도 살지 못한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그런 "믿음"을 "죽은" 것이라 규정했다(약2:17).

    행위 없는 진정한 믿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있을 수가 없다. 믿는 순간 성령이 믿는 자 안으로 들어오면 좋은 열매가 즉시 맺히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 가지들이다(요15:5). 하나님만이 자신의 자녀들 속에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실 수 있다.

    칭의와 성화를 혼동할 때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선한 행실은 믿음에서 유래하지만, 그것이 믿음의 성질을 더하거나 구원의 내용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구원은 믿는 순간에 주어진다. "집"의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다. 영혼이 구원을 얻는다. 죄인이 속량을 받는다. 그리고 믿는 자의 이름이 "어린 양의 생명책"(계13:8)에 기록된다.

    일단 당신의 이름이 천국의 예약 장부에 기록되었으니, 당신은 그곳에 가도 된다. 낙원에서의 영생이 보장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당신은 더 이상 죄에 매여 있지 않기 때문에(롬6:18) 구애받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 수 있다. 바울 사도가 같은 구절에서 말했듯이, "당신은 죄로부터 해방되었다."

    따라서, 계속 죄를 좇아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롬6:16). 믿는 자는 이제 예수를 위해 산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섬기기를 원한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이 된 것이다.

    그러면, 믿는 자들은 완전한가? 물론 아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하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았기 때문에(고전2:16)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는다.

    믿어서 순종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것과 다른 종류의 "순종"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고 다만 인간 본능의 결과물일 뿐이다. 그것은 초자연적이지 않으며 종교적일 따름이다. 세상의 많은 종교인들은 모종의 윤리적 규칙에 순종하고자 한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으면 그의 "순종"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유일한 순종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며 실행하는 순종이다. 어쨌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히11:6).

    그리스도를 믿는 이 믿음이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한다. 일단 토대가 놓여지면 그 위에 세울 "집"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작업하신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당신의 인생이 바로 하나님의 작업인 것이다. 당신은 그 토대에 대해서 자신의 공적을 자랑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집에 대해서도 공적을 자랑할 수 없다.

    주님께 대한 순종에는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모두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몸과 대화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그분께 순종한다. 우리의 말 속에는 우리 마음속의 생각이 종종 드러난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5).

    하나님께 복종하기 전에 우리는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롬3:21)를 받아야만 한다. 이것은 친절한 사람이 행동으로 보여주려고 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의로움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는 십자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의 결과와 마찬가지로 완전하다. 이 의는 믿는 순간 믿는 자에게 그의 것으로 주어진다. 즉시 영생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딛3:7).

    일단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그 사람은 용서를 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으며 구원을 얻고 새로 태어나 구속함을 받는다. 그러한 복들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면 믿는 자들은 즉시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시작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방식이기 때문에 구원의 과정은 그렇게 진행되는 것이다.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은 믿음 자체만큼이나 기적적이다. 영적으로 성숙한 "집"은 그 토대만큼이나 두드러진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의 삶에 있어서 이 모든 것들의 연출자이시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 들어오면, 당신은 하나님의 이웃이 된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면 당신은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 일단 가족이 되면,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 안에 넣으신 거룩한 능력을 통해 초자연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다.

    이 과정이 실제로는 복잡하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시간이 걸려서 성숙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먼저 의롭다 칭함을 받지 못한다면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마라. 그런 시도로는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어쨌든, 만일 우리의 행위가 그 토대를 놓는다면 예수님이 굳이 하늘을 떠나 이곳에 와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고통당하다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다고 믿는가, 아니면, 그분이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인가? 그리스도가 당신의 전부인가, 아니면, 그분은 당신께 아무런 의미도 없는가?

    성경은 그 문제에 대해서 매우 분명히 말한다. 믿음에서 나온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얻는 결실이다. 그리고 예수님보다 당신을 더 잘 돌보실 분은 아무도 없다.

    기사출처: http://www.christianpost.com/news/dont-confuse-justification-with-sanctification-160826/#Jr4QrtzkFvyoktfR.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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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씀 2016.10.04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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