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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전적 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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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구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도르트회의는 1618년~1619년에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인 도르트레흐트(Dordrecht) 시에서 열렸던 17세기의 국제적 ‘교회 회의’(council)였다. 이 회의에서 결정문(Canons of Dordt or The Decision of the Synod of Dort on the Five Main Points of Doctrine in Dispute in the Netherlands)이 채택되었는데 소위 칼빈주의 5대 교리라고 불린다. 그 첫 번째 항목은 전적 타락이며 이는 모든 논의의 기본적 전제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 회의에 모였던 개혁파 교부들(Reformed Fathers) 또는 개혁파 믿음의 조상들이라고 언급되는 지도자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충실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성경의 사상과 표현을 충분히 반영하려고 했고 그 결과 타락한 인류의 상황을 소위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으로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성경에 충실하려는 회의참석자들의 생각이 전적타락이라는 결정을 도출했다는 의미다.

자칫 거꾸로 생각하여 당시 교회지도자들이 교조적이라고 오해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참석자들은 오직 성경에 충실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한 결과, 인간은 전적 타락되었다고 결론 내렸다. 이같은 성경적 시각으로 다른 문제들도 논의했다.

 

1. 전적타락? 그것이 뜻하는 바가 아닌 것과 그것의 진정한 의미


 신학의 용어들 가운데서 가장 많이 오해되는 용어들 중의 하나가 바로 전적 타락이라는 것이다. 우선 우리 선배들이 이 용어를 쓸 때 의도하지 않았으나 오늘의 사람들이 오해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 용어를 쓰면서 잘못하면 인간이 거의 사탄과 같은 존재로 타락했다고 여길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타락했어도 사탄과 같은 형상이 된 것이 아니데 왜 전적 타락이라는 말을 사용하느냐는 반발이 나오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이 용어를 오해한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것이다.

과거 개혁파 사람들 가운데서 인간이 거의 사탄처럼 되었다는 의미로 이 전적 타락이라는 용어를 쓴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성도는 타락하였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다.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에 대한 정확한 이해였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인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함이라는 소위 원의(原義, original righteousness)는 완전히 상실되었고,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사람다움은 일그러졌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를 ‘기괴하게 된 하나님의 형상’(deformed image of God)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타락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형상 자체를 상실한 것은 아니며 타락한 사람이 사탄과 같다고 생각한 개혁파 신학자들도 전혀 없었음을 밝힌다.

그렇다면 전적 타락이란 말을 사용할 때 우리 선배들이 의도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상실된 성향 가운데서 인간의 타락이 영향을 미치지 않은 부분은 하나도 없다는 의미였다(결정문 3.1항). 교부들은 물론 17세기 개혁파 정통신학자들은 인간이 타락 전에는 무죄 상태(status innocentia)였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타락한 후에는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됐다고 생각했다. 타락한 상태에서 사람들은 그 인간성의 모든 부분이 죄로 물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결정문 3.1 항), 그 죄로부터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가능성도 조금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결정문 3.3항). 이것을 전적 타락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모든 부분이 죄로 물들어 부패한 상태에 있다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성(total corruption)과 그 인간은 그런 상태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전적인 무능력(total inability) 상태에 있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전적 타락이라는 용어의 구체적인 의미이다.

 

2. 도르트회의 정황에서의 그 의미


 도르트회의는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와 그의 생각에 동조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주장도 개혁파적인 생각으로, 또는 성경적인 것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청하여 모였다. 알미니우스를 따라서 생각하던 사람들도 타락한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의식을 소유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나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자들과 다른 사상을 가졌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타락 이후에도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구속받은 상태에서는 은혜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고, 그 행위가 구원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공로(meritum)로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타락한 사람들이 그 스스로의 힘으로 복음을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은 있다고 주장했다. 즉 타락한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은 것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신다고 한 것이다. 알미니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하나님께서는 영원 가운데서 그렇게 미리 보여진 신앙에 근거해서 사람들을 선택하셨다고 믿었던 것이다.(도르트 회의 결정문, 오류 1.c와 반박)

토르트 회의에 모인 정통파 개혁신학자들은 알미니안들의 주장에 대해서 성경에 근거해서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었다”(엡 2:1)고 반박했다. 성경은 영적인 죽음이 아주 실질적인 것이며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 영적인 죽음 상태에서 일으킬 수 없다고 확인했다. 이는 분명히 알미나안들과는 다른 것이다. 알미니안들은 다른 것은 인간이 타락하여 무능해졌으나 적어도 복음이 전파되면 그것을 믿을 수는 있다고 주장했다. 타락은 했으나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도 있다고 한 것이다. 이에 비해서 개혁파 전통주의자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서 자신을 일으킬 수도 없고, 스스로 회개할 수 도 없다고 말했다는 데서 차별화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 또는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같은 말씀들을 생각하면서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돌이키거나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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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서 돌이키게 하시면, 오직 거기에서만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생각도 오직 성경에 충실하려는 사유에서 나온 것임은 분명하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렘 31:18). 이와 같은 말씀에 근거해서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5)라는 말씀을 그대로 받은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는 문장에 진심으로 동감하던 루터와 그 심정을 같이 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고(롬 3:23), 주님을 믿는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도르트 회의 결정문 제1.5항),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셔서 주님을 믿도록 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이 옳다고 했던 것이다(도르트 회의 결정문 3.11, 12항).

이렇게 하나님께서 영적인 부활, 즉 중생을 주셨을 때에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한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한 것이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돌이켜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나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서로 묻는 장면이 나온다. (막 10:26) 이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7, 마 19:26)고 언급하셨는데 이는 인간의 무능을 잘 설명한 구절이다.

이와 같이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그저 성경에 충실해서 생각하고 표현하기를 타락한 상태의 사람은 모든 면에서 죄로 물들어 있고 심각하게 오염된 존재라고 한 것이고, 그 영적 어두음과 영적 사망 상태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 날 수 없느니 스스로는 믿을 수도 복음을 받아 들일 수도 없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전적 부패’(total depravity)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였다.

이렇게 성경에 충실하게 생각할 때에 복음이 얼마나 중요하고 대단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영적으로 다시 살리시기 위해서 유일한 구원의 방식인 십자가를 허락하시고 구속을 믿게 역사해 주셨다. (결정문 3.16항), 복음은 그야말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셨다는 놀라운 소식이고, 우리들의 영적인 어두음을 제거해 주신 사건이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셨다.(결정문 3.12항)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할 때 진정 하나님께 감사하고 너무 황송하여 전적인 헌신을 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결정문 3.15항)

이런 성경적 이해에서 바라보면, 최소한 복음을 깨닫고 주님을 믿을 수는 있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우스주의는 인간에게 최소한의 여지를 두려는 것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도 스스로 복음을 깨닫고 그 스스로의 힘으로 믿을 수는 있다고 한 것이니 결국 구원의 마지막 고리는 인간의 손에 맡겨진 것이 되어,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참으로 든든한 구원의 금사슬(the golden chain of salvation)을 잘 드러내지 못하게 된다. 인간 스스로 복음을 믿을 수 있다고 하는 알미니우스의 생각은 하나님 혼자의 힘으로 다 하신다(monergism)는 복음에 충실하지 않은 것이다. 알미니우스주의는 구원에 있어서 신인협력주의(synergism)를 주장하는 것이고, 성경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다.

 

3. 현대적 의미


 이 모든 논의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가? 형식적으로는 과연 성경에 충실하고자 하는가, 오직 성경에 충실한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전적 타락을 말하던 우리의 선배들은 교조적이어서 이 주장을 한 것이 아니고, 오직 성경에 충실하게 생각하여 전적 타락을 말한 것이다.

내용적으로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에 대해서 말하는 바가 타락한 인간의 실상을 충실히 설명하고 있는가? 복음의 살리는 능력에 대해서 말하는 바가 과연 하나남께서 행하시는 창조의 능력에 부합한가?”를 물었던 것이다. 알미니우스적인 사고는 “인간 스스로가 선행을 행하여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펠라기우스주의와는 달랐다.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인 후에 인간이 행하는 선이 그 자체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공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반(半)-펠라기우스주의와도 달랐다. 그러나 결국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복음을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마지막 한 고리를 타락한 사람에게 허용했다. 그래서 개혁파 전통주의자들은 이런 생각을 성경적인 것이라고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개혁파 정통주의의 이런 사유의 태도를 과연 우리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전적 타락을 구호로만 외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렇게 말하게 된 이유를 기억하면서 우리들도 우리 주변의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성경에 비추어 충실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타락한 인간에 대해서는 가장 심각한 비관주의(pessimism)를 가지고, 오직 하나님에 대해서만 낙관주의(optimism)를 가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런 생각은 그렇게 인기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면서도 우리들은 항상 성경에 충실하게 사유하고 실천해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기독신문 ekd@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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