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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황제 직위를 매입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돈으로 산 황제: 카를 5세의 대관식과 중세 세계의 마지막 장면

 

독일의 아헨(Aachen)은 중세 기독교 세계에서 특별한 위상을 지닌 도시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의 전통적인 대관지였다. 이 제국은 명목상 샤를마뉴(독일어 카롤루스) 대제의 800년 대관에서 그 기원을 찾지만, 역사적으로는 오토 1세가 962년에 황제로 즉위하면서 비로소 제도적 틀을 갖추었다고 평가된다.

 

1000년 동안 지속된 기독교 제국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은 원칙적으로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아 쓰는 의식으로 권위를 부여받았다. 이 사실은 교회와 국가가 긴밀히 결합되어 있던 중세 질서의 핵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교회가 세속 권력의 정당성을 승인하는 체제는 약 천 년에 걸쳐 지속되었으며, 유럽 중세 세계를 지탱한 근본적인 질서로 기능했다.

 

1520년 가을, 아헨의 공기는 단순한 축제의 열기로 설명될 수 없는 묵직한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성당의 종소리는 장엄하게 울려 퍼졌고, 제국의 귀족과 사제들은 오래된 의식의 정밀한 질서를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그 질서의 중심에 서게 될 한 젊은 군주의 권력은, 전통과 신성의 언어로 포장되어 있었을지라도, 이미 다른 성격의 토대 위에 세워지고 있었다. 그 이름이 바로 카를 5세였다.

 

그는 중세의 마지막 황제처럼 보였으나, 동시에 근대의 첫 번째 군주이기도 했다. 그의 즉위는 신의 섭리와 혈통의 계승이라는 고전적 명분 위에 놓여 있었지만, 실제로는 돈과 금융, 그리고 계산된 정치적 거래의 결과였다. 제국의 왕관은 더 이상 오직 신의 선택이나 귀족적 합의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래 가능한 것이 되었고, 그 거래의 배후에는 당대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금융 권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카를 5(Charles V) 가 황제 선거에서 승리하기까지의 과정은 이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경쟁자는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였고, 두 사람 사이의 경쟁은 단순한 왕위 다툼이 아니라 유럽 패권을 둘러싼 거대한 게임이었다. 이 게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군사력도, 혈통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본이었다.

 

황제 자리에 오르려면 독일의 선제후들의 표를 얻어야 했다. 카를은 독일의 선제후들의 표를 얻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했고, 그 자금은 야코프 푸거라는 이름의 금융가에게서 흘러나왔다. 푸거 가문은 이미 유럽 경제의 심장부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교황청과 왕실, 귀족들을 상대로 거대한 금융 네트워크를 구축한 상태였다. 카를은 이 자본으로 선거인들을 설득했고, 그 결과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 사건은 단순한 부패나 뇌물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의 성격 자체가 변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징후였다. 중세의 정치 질서는 신성과 전통, 그리고 봉건적 충성의 관계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카를 5세의 즉위는 그 질서가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권력은 이제 자본과 결합하기 시작했고, 정치적 정당성은 점점 더 경제적 힘에 의해 보강되고 있었다.

 

15201023, 아헨 대성당에서 거행된 그의 독일왕 대관식은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화려한 의식과 성스러운 기도, 황금으로 장식된 제관과 성유의 도유(塗油)는 여전히 중세의 언어로 권력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장면의 이면에는 이미 다른 논리가 작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의 은총이 아니라, 금화의 흐름이었다.

 

이때의 유럽은 겉으로는 여전히 하나의 그리스도교 세계로 보였다. 교황과 황제, 교회와 제국은 상호 보완적인 권위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내면에서는 균열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1517, 마르틴 루터가 촉발한 종교개혁은 교회의 권위를 근본에서부터 흔들기 시작했고, 이는 단순한 신학 논쟁을 넘어 정치적 질서 전체를 뒤흔드는 사건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카를 5세는 이러한 변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가톨릭 세계의 수호자로 인식했고, 실제로도 그 역할을 수행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지키고자 했던 세계는 이미 내부에서부터 해체되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신앙의 문제를 넘어 권위의 문제를 제기했고, 이는 곧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530, 카를 5세는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교황 클레멘스 7세로부터 정식으로 황제 대관을 받았다. 이 장면은 중세적 질서의 마지막 절정이라 할 만하다. 교황이 황제에게 왕관을 씌우는 이 의식은, 교회가 세속 권력을 승인하고 정당화하는 구조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장면은 그 질서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카를 5세는 교황에게서 왕관을 받았지만, 그의 권력은 이미 교회만으로는 지탱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광대한 영토스페인, 네덜란드, 이탈리아 일부, 그리고 신성로마제국를 통치해야 했고, 이 모든 영역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정치적 현실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복합적 제국은 더 이상 단일한 종교적 권위로 통합될 수 없었다.

 

더욱이, 대항해 시대의 도래는 유럽의 세계관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신대륙의 발견과 새로운 무역로의 개척은 경제의 중심을 이동시키고, 기존의 질서를 재편했다. 자본은 더욱 빠르게 축적되었고, 상업과 금융은 정치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다. 카를 5세의 제국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유지되기에는 지나치게 오래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돈으로 황제 직을 매입한 자의 통치는 끊임없는 고투와 조정의 연속이었다. 그는 생의 말년에 이르러 제국을 분할하고 은퇴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 결단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였다.

 

카를 5세의 대관식은 따라서 두 개의 세계가 교차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중세적 질서의 마지막 화려한 장면이다. 교회와 제국이 결합하여 하나의 보편적 세계를 구성하던 시대의 최종 순간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근대의 서막이다. 자본과 정치가 결합하고, 권력이 새로운 방식으로 조직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권력은 황금 위에서 세워졌으나, 그 권력이 마주한 것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었다.” 이 문장은 카를 5세의 시대를 가장 정확하게 요약한다. 그는 돈으로 황관을 샀다. 그러나 그가 산 것은 단순한 권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무너져가고 있는 세계의 마지막 형태였다.

 

오늘날 우리는 이 장면을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여전히 반복되는 질문을 던진다. 권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권력이 지탱하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이라 믿고 있는가?

 

아헨의 그 가을날, 찬란한 황금빛 속에서 빛나던 왕관은 단지 한 황제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시대가 마지막으로 스스로 자신을 장식한, 가장 화려한 유물이었다.

 

역사적으로 800년 샤를마뉴 (카를) 대제의 즉위부터 1806년 프란츠 2세의 퇴위까지, 정식으로 황제’(Emperor) 칭호를 보유했던 통치자는 약 50명 내외다. 초기부터 종교개혁기까지는 교황으로부터 직접 왕관을 받는 대관식을 거쳐야만 황제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16세기 초 막시밀리안 1세 이후부터는 교황의 대관 없이 선거를 거쳐 선출된 것만으로도 선출된 황제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다.

 

신성로마제국은 어느 시점부터 독일 지역 선제후들에 의해 독일 왕으로 먼저 선출된 뒤, 추후 교황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하는 독특한 체제를 유지했다. 따라서 정식 황제 대관식을 치르지 못하고 왕의 지위에만 머물렀던 통치자들까지 모두 포함할 경우, 제국을 이끌었던 전체 군주의 수는 약 80명에 달한다. 특히 유럽 중세 전성기에는 교황과의 갈등이나 정치적 사정으로 왕으로만 군림하다 생을 마감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위 사진 속 황관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황관(Imperial Crown of the Holy Roman Empire)이다. 특정한 한 황제의 소유물이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을 상징하는 보물이다. 대대로 전해져 왔다. 이 왕관의 제작 시기는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초 사이로 추정된다. 오토 1세 또는 콘라트 2세 때 완성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카를 5세 역시 1520년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를 때 이 왕관을 사용했다. 이 왕관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유물이었다.

 

이 황관은 7개 또는 8개의 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 왼쪽 판에 보이는 "PER ME REGES REGNANT"(나를 통하여 왕들이 다스린다)라는 문구는 왕권신수설과 정치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PER ME REGES REGNANT 문구의 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교황인가? 하나님을 가리키지만 실제로는 교황을 가리키는가?

 

이 문구는 중세 유럽의 정치적, 종교적 권위가 어디서 기원하는지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상징물이다. 이 문장은 구약 성경 잠언 815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지혜, 곧 기독교 신학에서 로고스(Logos)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문구의 표면적인 의미는 지상의 모든 군주가 누리는 통치권의 근원이 인간이 아닌 성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있음을 천명한다. 이는 왕의 권위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신성한 것이라는 '왕권신수설'의 신학적 토대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에게 이 문구는 황제의 독립적 정당성을 보증하는 글이다. 자신들의 통치권이 교황의 허락이나 중재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부여받은 것임을 강조하는 근거가 되었다. 황제는 이 왕관을 머리에 씀으로써 자신이 지상에서 신의 대리자 역할을 수행하며, 영적인 영역이 아닌 세속적인 통치 영역에서는 교황과 대등하거나 또는 직접적인 신의 승인을 받은 존재임을 대외적으로 선포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황관을 씌어주는 자는 교황이다. 그러므로 실제 역사 속에서 위 문구의 해석은 교황권과의 치열한 대립을 피할 수 없었다. 교황청은 하나님이 권력을 주시는 것은 맞지만, 지상에서 그 신성한 권위를 검증하고 황제에게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는 오직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위 문구의 ''라는 주어는 비록 하나님을 지칭할지라도 실제적인 권위의 집행과 정당성 부여의 측면에서는 교황을 의미한다. 교황의 승인을 거쳐야만 그 효력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위 문구 속의 는 명백히 하나님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 신성한 ''의 뜻을 지상에서 누가 대변하느냐를 두고, 황제는 이를 '직접적인 신령(神領)'으로 해석하려 했고, 교황은 자신을 거쳐야 하는 '위임된 대리권'으로 해석하려 했다. 황제의 자리는 교황이 최종 승인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 왕관은 권력의 원천인 신의 이름을 빌려 세속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던 쌍두마차의 세계인 교황과 황제 사이의 갈등, 중세 정치신학적 갈등의 상징물이다.

 

현재 이 황관은 오스트리아의 어느 보물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약 50명의 황제는 교황에게서 이 관을 받아썼다. 통치자가 바뀔 때마다 이 황관을 쓰고 교회당에서 대관식을 함으로써 황제의 권위를 인정받았다.

 

이 글은 필자가 현재 집필을 마무리하고 있는 <정치신학 1: 정교분리>와 직결되어 있다. 일본이 헌법으로 규정한 '정교분리'는 유럽의 기독교 역사를 간파한 일본이 신도와 국가의 결합인 일본제국을 위태롭게 하는 종교(특히 기독교)의 정치적 접근을 금지하는 용어이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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