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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방언기도가 없는가?


김동수 교수 (평택대)


최근 성경에 방언 기도가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현재 세계 교회와 한국 교회에서 사용하는 방언은 가짜 방언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세계 교회와 한국 교회는 지난 백년간 사탄에게 완전히 미혹되어 방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과 유투브로 읽고 본 그들의 주장은 매우 진지했고, 또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틀림이 없다고 매우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이들이 어떤 사심이나 욕심으로 이러한 주장을 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이러한 주장을 하기에는 성서주석에 대해서 충분히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이 보기에는 매우 엉뚱한 헬라어 문법 해석, 단어 해석, 정황 해석이 많았다. 일반 독자들은 그들의 확신에 찬 말에 설득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였다. 그래서 그들이 핵심적으로 주장하는 몇 가지 사항을 들어 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지 못한 것인지를 설명해 보려고 한다.

바울이 말한 방언은 외국어였다고?

이들의 주장은 바울이 말한 방언의 은사가 외국어를 말하는 은사였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을 말하다”라는 어구가 똑 같이 나오는데 성경에서 같은 어구는 같은 뜻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서주석의 abc를 모르는 말이다. 성경에서는 같은 어구가 반듯이 같은 뜻이 아님은 같은 저자에게서도 나타난다. 세상이라는 단어가 같은 요한복음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피조물이 되기고 하고(요 3:16), 교회를 핍박하는 하나님의 반대 세력이 되기도 한다(요 16:19). 더구나 동일 저자가 아닌 경우에 같은 어구를 사용하더라도 다른 뜻으로, 또 다른 신학적 입장에서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방언은 외국어로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는 이것이 기본적으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기에, 또 이성이 아니라 영으로 하는 말이었기에(14:2), 이것을 실제 외국어로 보기는 어렵다. 그것이 실제 외국어였다면 성령의 나타남에 의한 통역의 은사가 따로 필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 시간에 방언을 할 때 외국어를 잘하는 통역인을 쓰면 되는 것이다. 방언이 외국어라면 방언하는 사람이 통역하기를 기도한다는 말은(14:13) 말이 되지 않는다. 즉 통역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외국어를 배우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이성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성령의 나타남에 의한 통역이 또 필요했던 것이다. 
  
바울과 누가가 방언에 대해서 말할 때 공통점은 이것은 인간의 능력이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행 2:4; 고전 12:7) 된 것이라는 것이다. 또 이것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 말을 배우지 않은 것이었기에 이것이 외국어이든, 실제 언어가 아니든 자신은 그 말의 뜻을 모르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다른 사람보다 더 방언을 많이 했다는 것을(고전 14:18) 바울이 외국어 구사 능력이 있어서 외국어를 더 많이 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또 바울은 우리가 성령의 은사로 부르는 것을 “성령의 나타남”(고전 12:7)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피아노를 잘 치거나, 운동을 잘 하거나 하는 은사와 같은 것들이 아니다. 여기에 예시로 나와 있는 9가지는 모두 성령의 능력이 일시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현시되는 것이다(고전 12:8-10).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말하려고 했던 것은 자신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만 인정하지 말고, 이 모든 것들이 성령의 현시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또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처음에는 방언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지 않고 그 은사를 다른 은사와 함께 열거하다가(12:8-10), 14:2에서야 비로소 이것을 정의하고 설명한다. 첫째, 이것은 이성이 아니라 영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14:15 참조). 둘째, 이것은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셋째, 그 내용은 “신비”라는 것이다. 바울서신에서 신비란 남들을 알지 못하게 하는 비밀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에 관한 어떤 것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신자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 찬양, 감사, 축복하는 것이다(14:15-17). 이것을 다 포괄하는 용어가 바로 기도다.

바울이 말한 방언은 방언 기도가 아니라고?

이들의 주장의 요체는 바울이 소개한 방언은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방금 앞에서 말한 대로 바울은 분명히 방언이 기도라고 말했다. 그는 “기도하다”라는 용어까지 사용한다(14:15).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근거로 바울이 말한 방언이 기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가? 이창모 목사는 『방언, 그 불편한 진실』(서울: Band of Puritans, 2014)에서 이런 주장을 한다. 이에 대해서 필자의 반박과 적절한 답을 추가하면 다음과 같다.

1) 주장: 바울은 ‘글로사’(방언, 혀)의 복수형은 방언의 은사를, 단수형은 가짜 은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양자를 구별한다. 반박: 바울이 단수형과 복수형을 사용해서 참 방언과 거짓 방언을 구별해서 말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어떤 것의 진위를 설명할 때 저자가 단복수를 사용해서 한다는 예는 동서고금의 어떤 문서를 통해서도 본 바 없다. 또 본문 자체에서도 이런 증거는 전혀 없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방언들”은 진짜 방언을, “방언”은 가짜 방언을 의미한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보는가?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바울이 독자들이 분명하게 인식할 수 없게, 마치 암호화 하듯이 했다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가?

2) 주장: 고전 14:2, 4에서 방언이 하나님께 말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바울의 주장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주장을 인용한 것이다. 반박: 이러한 주장은 바울이 전혀 말하지도 않은 방언에 대한 정의(외국어를 말하는 능력)에서 출발해서 이런 엉뚱한 해석을 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바울이 자신의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반대하는 고린도교회의 주장을 인용한 것이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기록 당시에 인용부호는 없었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할 때와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을 분명히 구분해서 저자는 말할 수 있었고 또 저자들은 그렇게 했다.

3) 주장: 방언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성령으로 하는 방언(고전 12:3)과 인간적으로 말하는 방언(14:2)을 구별하고 있고 후자를 거짓 방언이라고 생각했다. 반박: 또 고전 14:2에서 “영으로”는 그 의미가 “성령으로”도 될 수 있고 혹은 “사람의 영으로”도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성령으로” 혹은 “하나님의 영으로”와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영으로”와 대척 개념으로 삼고 있는 것은 개역개정판에서 “마음으로” 번역한 “이성으로”이다(고전 14:15-16). 여기서 방언은 사람이 이성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에 의해 자신의 영으로 혹은 성령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성령에 의한 진짜 방언과 인간의 영에 의한 가짜 방언을 말했다는 것은 본문과 전혀 상관없는 주장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방언의 진위 문제가 아니라 방언의 바른 사용법을 말하고 있다. 올바르지 않은 사용법 중 하나는 통역이 없이 공적으로 방언을 사용하는 것이고, 올바른 사용법은 공적으로 방언을 할 때는 통역을 동반해서 사용하든지(고전 14:13), 아니면 사적으로 하는 것이다(고전 14:28).

4) 주장: 고린도전서 14:14-15에서 바울이 가정법을 써서 “방언으로 기도하다”라는 말을 쓴 것은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답변: 이것은 헬라어의 기초를 전혀 모르고 하는 주장이다. 헬라어에서 가정법 구문이 꼭 현실과 반대되는 상상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본문에서 현재 가정법으로 쓰인 구문인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은 “내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혹은 기도할 때 마다]”라는 뜻이다(Gordon D.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rev. ed., 742). 만약 본문에서 이 사람의 주장대로 가정법 구문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이라면(예를 들어 내가 만약 새라면 날아갈 수 있을 텐데, 즉 내가 새가 아니기 때문에 날아가지 못한다는 말) 이 구절은 이렇게 번역해야 한다. “나는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영으로 기도하지 않는다.”(14절) 그러면 이 문장은 바로 뒤 구절과 모순된다.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15절) 헬라어 사전을 보면 헬라어 에안( ??ν)+ 가정법 현재 구문은 “...할 때”를 의미할 수 있다.

5) 주장: 고전 14:28에서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는 “집에 가서 혼자 떠들고 혼자 들어라”라고 하는 것이다(364). 반박: 여기서 “자기와 하나님께”에 대척된 개념은 “교회에서”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개인적으로 혼자 방언하라는 말이다.

방언 통역은 방언을 검증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고?

바울은 고전 14:5에서 방언 통역의 목적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언의 효과와 똑같은 것이다. 예언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기에 듣는 이의 신앙을 북돋아 줄 수 있었듯이(고전 14:4), 방언 통역은 방언에 대한 통역이었기에 듣는 이에게 신앙적으로 도움이 되는 말이 되었던 것이다. 또 이들의 주장은 만약 방언이 영의 기도라면, 하나님과 은밀한 기도인데 그것을 통역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감히 하나님과 은밀히 하는 기도의 내용을 알려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반드시 사실은 아니다. 바울은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가 하는 기도의 내용을 앎으로 본인이나, 그것을 듣는 이에게 예언과 같이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방언 통역의 목적은 방언이 올바른 것인지 거짓 방언인지 검증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것이야 말로 자의적 해석의 극치다. 본문에는 방언 통역이 예언과 같이 교회의 덕(교회의 세움)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 방언을 분별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러한 것은 영 분별의 은사이지 방언 통역의 은사가 아니다.

방언이 그친 근거가 로마서 은사 목록(12:6-8)에 방언이 안 나오기 때문이라고?

노우호 목사는 방언이 바울이 로마서를 쓴 그 시점에 그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바울이 로마서 12:6-8에서 여러 은사를 언급하면서 방언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바로 이 때 방언이 그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고린도전서 13:8에서 방언이 그친다는 말이 이 때 실현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침묵에 근거한 주장(argument from silence)이라고 한다. 저자는 그것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았는데, 독자가 단순히 상상을 통해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로마서 12:6-8에서는 고린도전서 12-14장과는 다른 종류의 은사를 바울은 말하고 있다. 이 은사는 영적인 은사라기보다는 재능과 같은 ‘자연적 은사’다. 여기에 예언이 나오기는 하지만,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성령의 나타님에 의한 종류라기보다는 믿는 자에게 주어져서 “믿음의 분수대로” 사용하는 것이다(롬 12:6). 바울은 지금 고린도전서에서와 같이 영적인 은사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그러한 은사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지, 그 사이에 이 은사들이 그쳤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만약 이런 식의 추론이 옳으려면 다음과 같은 추론도 가능해야 한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의 하나님 나라가 이제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다 뺐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 나라 가르침을 따를 필요가 없다.” 아마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추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서 은사 본문에 방언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바울이 방언이 그쳤다고 생각하는 것은 침묵에 의한 논증일 뿐이다.

현대 교회의 방언은 가짜 방언이라고?

이들은 현대 교회의 방언은 가짜라고 한다. 그 근거는 이것이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대 방언은 만 사람이 하면 만 가지가 되는데, 그 어떤 것도 통역의 규칙에 맞지 부합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앞에서 말한 대로 바울 본문을 잘 못 해석한 데서 근거한 것이다.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라고 바울이 분명히 말했다(고전 14:2). 그것을 통역하려면 통역하기를 기도해서 그 은사가 임해야 한다(고전 14:13). 그렇다면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는 방언을 못 알아듣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함으로 하나님만 알아들으면 되는 것이다. 영으로 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기도를 하려면 이성으로 기도하면 되는 것이다. 바울은 영으로 하는 방언 기도와 이성으로 하는 기도를 모두 하겠다고 한다(고전 14:15). 그런데 이런 기도를 반대하는 것은 바울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현대 교회의 방언이 바울이 말한 방언과 같지 않은 것이라는 주장은 서구 세계에서 늘 있어왔다. 이 분야를 오래 연구한 전문가 중의 하나인 막스 터너는 신약성서의 방언과 현대의 방언 현상을 연구한 후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의 방언이 바울이 알고 있던 것과 동일한 현상이 아니라는 교조주의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성령과 은사』, 새물결플러스, 2011, 549-550). 한국 교회에서 하는 방언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고,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영으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축복하는 것으로 바울이 말한 방언과 부합하는 것이다(고전 14:15-17). 바울이 이 방언을 많이 말함으로 감사했고(고전 14:18), 또 이러한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한 명령(고전 14:39)을 우리는 잘 지켜 나가야 할 것이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안 된다고?

이들은 신자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절대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몇 시간 동안 기도하는 것이 다 헛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한 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고린도교인들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에 지나친 가치를 부여하자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도 부정하지 않으면서 또 자신은 이성으로도 기도하겠다고 한다. 두 가지를 다 하겠다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마음은 헬라의 ‘누스’에 대한 번역: 이성] 기도하며...”(고전 14:15). 또 바울은 자신이 그 어떤 사람보다도 방언으로 더 많이 혹은 더 자주 기도한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14:18). 물론, 그는 방언 기도만 하지 않았다. 이성으로도 기도하고 또 이성으로 설교했다. 어떤 것도 무시하면 안 된다.


오순절파신학 관점의 글


뉴스미션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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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thdghk 2015.03.17 01:08

    이글 올려주신 것도 참 감사합니다. 


    '오순절파 신학의 관점'이란 부언이 없으면 더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노우호 목사님 영상 밑에 '통합 목사님'이란 부언을 안달았고, 이 창에 있는 모든 글마다, 개혁, 고신, 장신, 합신, 총신이라는 교단, 교파  정체를 따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편견이나 선입견 없는 눈으로 읽고 각자 비교, 판단, 분별하란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이 과연 뭐라고 했는가'가 기준 아닙니까? 필자가 오순절파라는 이유로 그의 믿음이 엉터리가 되지도 않고, 그가 오순절파라는 이유로 성경을 들어 옳은 진술을 하지 말란 법도 없습니다. 그의 논지는 성경적이지만=옳지만 오순절파 신학이라고 비하하거나 배척하는 것은, 학자나 표방하시는 개혁주의의 기본 자세에 걸맞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근본이 흔들리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교파가 무슨 소용입니까? 개혁주의 어느 교파나 교단이 한국 교회를 건져서 보호하고 있거나, 전체 성도들을 안전한 교리로 이끌 계획을 따로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이 지경이 되었나요?

    총장님께서 WCC에 대항한 것이, 개혁주의나 소속 교단이 대표로 내세운 게 아니잖습니까? 어느 교단도 함께 나서지 않고 뒷짐을 진 체 뒤에서 웅얼거리고만 있었지요. 그일을 지원하고 응원한 이들은 교단과 무관하게 그 건에 대해서는 최덕성 교수님이 '성경적으로 옳고, 그래서 그것을 사수하려고 고군분투하시는' 것을 감사하고 존경한 것 아닙니까? 저도 교단과 무관하게 벡스코에서  항의 집회에 끼어들었고, 총장님 교단을 모른 체 함께 구호를 외쳤습니다

    지금 옳은 교단이나 교파가 어디 있습니까?
    오직 ! < 예수님을 성경대로 믿는가 / 아닌가? > 두 교파가 있을 뿐입니다.
    오직 ! 성경에 복종하는 학자만이 하나님 편입니다.

    . . . 불구하고,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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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5.04.24 21:44


    이동수 교수의 억지, 무지

    언제나 무지하게 거짓 방언을 옹호하는 평택대학교의 신학과 교수 김동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부채도사 유형의 영성을 드러내는 온누리교회의 김하중 장로 등에게서 나타나는 일들이 사도행전 성령의 역사라고 극찬하는 등의 내용을 보고서 어떤 사람들은 그를 '박사급 박수무당'이라고 한다. 김동수 목사는 아무 의미가 없는 사이비 소리현상이 기독교의 신령한 영의 언어이고, 그것이야 말로 원래의 기독교의 방언이라고 우기는 항상 안타까운 행동을 계속 일삼는다. 최근 김동수는 이창모 목사의 저서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 2014)에 대해서도 훼방하는 어리석은 글을 써서 또 많은 신실한 신자들의 눈살을 찌뿌리게 만들었다. 이에 이창모 목사는 아무런 바른 지식이 없으면서도 단지 신학대학의 교수라는 타이틀로 부끄러운 줄도 그릇된 글을 남발하는 김동수 목사의 글로 인해 또 신자들에게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부득이 반박하고 교정하는 글을 작성하여 바른믿음에 보내왔다. 아래의 푸른 색 내용은 김동수가 이창목 목사의 책의 내용에 관하여 반박한 내용이다. - 바른믿음 -


    평택대학교 신학과 교수 김동수. google - images에서 캡쳐.

    "바울이 말한 방언은 외국어였다고? 이들의 주장은 바울이 말한 방언의 은사가 외국어를 말하는 은사였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을 말하다”라는 어구가 똑 같이 나오는데 성경에서 같은 어구는 같은 뜻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서주석의 abc를 모르는 말이다. 성경에서는 같은 어구가 반듯이 같은 뜻이 아님은 같은 저자에게서도 나타난다. 세상이라는 단어가 같은 요한복음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피조물이 되기고 하고(요3:16), 교회를 핍박하는 하나님의 반대 세력이 되기도 한다(요16:19). 더구나 동일 저자가 아닌 경우에 같은 어구를 사용하더라도 다른 뜻으로, 또 다른 신학적 입장에서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김동수)

    성경에서 같은 어구라도 다른 뜻, 다른 신학적 입장일 수 있다는 김동수의 말은 옳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혹 드물게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지 항상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같은 어구가 다른 뜻, 다른 신학적 의미를 가지는 경우보다는 같은 뜻, 같은 신학적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럼에도 김동수는 성경 본문을 해석할 때,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 같은 어구라도 다른 뜻과 다른 신학적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을 독자들에게 슬쩍 흘린다. 그리고 헬라어를 잘 모르는 일반 독자들의 기를 죽이려는지 너무도 자명한 분명한 뜻을 결코 흔하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되는 뜻으로 슬쩍 바꾸면서 자신의 그릇된 주장을 정당화시키는 치졸한 야바위 수법을 자주 쓰고 있다(이 야바위 수법은 다른 곳에서도 불리하면 의례히 자주 사용되는 김동수의 특기이다).

    이런 논리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행2:17)를 김동수 식으로 해석한다면, ‘말세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짐승들에게도, 다시 말하면 개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이 되고 마는 것과 같다.

    한글 성경에서 “육체”(또는 육, 육신)로 번역된 헬라어 ‘사르크스’(sa,rx)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사람’이라는 의미(요1:14)와 함께 ‘죄에 종속된, 즉 인간의 부패한 죄의 본성’(롬7:18,25;8:5 등)이나 또 ‘사람을 포함한 모든 짐승의 육체’를 의미(고전15:39)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육체”도 ‘사람’뿐 아니라 ‘짐승’이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김동수식대로 사도행전 2장 17절을 해석한다면, ‘말세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짐승들에게도, 다시 말하면 개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이상한 해석이 합리적으로 도출된다.

    그러나 다른 저저라 할지라도(원 저자는 한 분 성령이시다), 같은 사항(방언)에 대하여 동일한 동사(말하다)를 예외 없이 쓴다는 것은, 오히려 “방언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된다. 이것이 성경주석의 abc이다.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은, 동사와 함께 쓰일 때는 예외 없이 ‘말하다’와 함께 쓰인다(다른 모든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외가 있다면,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고전14:14)와 “~내가 영으로 기도하면”(고전14:15) 밖에 없는데, 이것은 바울의 예외적인 표현이 아니라 바울의 의도된 표현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여기서(고전14:14,15)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인 ‘사람들에게 말하는 방언’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가 만들어낸 (즉 사도바울이 지적한 궤휼의 역군들에 의해 뿌려진) 거짓 방언인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언’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방언은 외국어로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는 이것이 기본적으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기에, 또 이성이 아니라 영으로 하는 말이었기에(14:2), 이것을 실제 외국어로 보기는 어렵다. 그것이 실제 외국어였다면 성령의 나타남에 의한 통역의 은사가 따로 필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 시간에 방언을 할 때 외국어를 잘하는 통역인을 쓰면 되는 것이다. 방언이 외국어라면 방언하는 사람이 통역하기를 기도한다는 말은(14:13) 말이 되지 않는다. 즉 통역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외국어를 배우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이성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성령의 나타남에 의한 통역이 또 필요했던 것이다."(김동수)

    고린도전서 14장 2절로 설명되는 옹알거림의 방언이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외국어로 보기 어렵다는 김동수 교수의 주장은 옳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외국어인데 반해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방언은 외국어가 아닌 거짓 방언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나 고린도 교회에서나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인간의 언어이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의 옹알거림의 영음 방언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다. 그러므로 오순절주의의 영음 방언은, 성령이 초대 교회에 주셨던 방언의 은사와는 다른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 10절의 은사 목록에 방언의 은사와 함께 통역의 은사가 있다는 것은, 방언이 외국인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언어라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1)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4장 27절에서 방언을 말하고 그것을 통역하도록 바울이 명령하고 있는 것도, 방언이 언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분명한 증거다.

    그러나 김동수는 “만약 실제 외국어였다면 방언을 하는 사람은 방언 통역하기를 기도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바울은 그 언어를 배우라고 하든지 그 언어를 쓰는 사람을 초빙해서 방언 통역을 하라고 권면했을 것이다.”2) 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고린도 교회의 사정을 잘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말이다. 어쩌다가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 들어오는 외국인들의 국적을,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미리 알고 이들의 언어를 배울 수 있겠는가? 또 외국인들이 언제 올지 어떻게 알고, 이들의 언어를 통역할 수 있는 자를 미리 준비할 수 있겠는가?

    김동수 교수는 “방언이 만약 실제 외국어였다면 실제 그 언어를 아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 없다. 통역의 은사를 통해서 통역되려면 실제 인간이 쓰는 언어가 아니어야 한다.”3) 라고 말한다. 그러나 외국어 방언을 말할 때 거기에 그 언어를 아는 사람이 있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는가? 아마 그는 방언의 은사가 예배에서 현지인 신자들이 아니라 현지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을 위한 은사임을 몰랐기 때문에 이런 무모한 상상을 한 것 같다.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이 행해질 때 외국인들은 통역 없이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방언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께 예배에 참석한 현지인 신자들은 그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는 현지인 신자들이 외국어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고린도 교회에 통역의 은사를 주신 것이다.

    성령이 고린도 교회에 주신 방언의 은사는 예배에서 현지어를 모르는 외국인들을 위한 것이며, 통역의 은사는 외국어 방언을 모르는 현지인 신자들을 위한 것이다. 만약 김동수의 말대로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오순절주의의 방언처럼 영음이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하다면, 영음 방언을 하는 이유가 ‘인간의 언어로 표현 불가능한 내용을 하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며, 또한 마귀에게 비밀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라는 자신들의 주장과 모순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서 하늘 언어로 하나님께 말한 것을 다시 인간의 언어로 통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또한 영음 방언을 하는 이유가 마귀에게 비밀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라면, 그 영음 방언을 통역하는 것은 마귀에게 비밀을 알려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성령이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주의 제자들에게 주신 방언, 즉 외국인에게 하나님의 큰 일을 전할 수 있는 외국어 방언 외에는 없다. 그러므로 성령이 고린도 교회에 주신 방언의 은사도 어쩌다가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 참석한 외국인에게 하나님의 큰 일을 전할 수 있게 하는 외국어 방언이었다.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외국어인 이유를 문법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서 ‘방언을 말하다’(lale,w, 랄레오 + glw,ssaij, 글롯사이스)와 바울이 기록한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을 말하다’(lale,w, 랄레오 + glw,ssh|, 글롯세)의 헬라어 문구는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4) 헬라어에서 어구가 같은 표현은 같은 의미를 가진다.5) 그러므로 성령이 고린도 교회에 주신 방언의 은사도 사도행전에서와 마찬가지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언어 능력이었다.6)

    둘째, 방언을 뜻하는 헬라어 ‘글롯사’(glw/ssa)라는 명사는 성경에서 단 두 가지의 의미, 즉 입 안에 있는 혀(tongue)와 언어(language) 외에 다른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7) 따라서 예언이 모든 교회에서 필요한 보편적인 은사라면8) 방언은 특수한 상황, 즉 오순절 날 예루살렘의 상황이나 고린도 교회와 같이 외국인들이 예배에 들어온 상황에서만 필요한 특별한 외국어 은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본문에서 ‘통역함’으로 번역한 헬라어 ‘에르메네이아’(e`rmhnei,a)의 동사 ‘디에르메뉴오’(diermhneu,w)는 언어를 번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존 R. W.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조병수 옮김(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p.135.
    2)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116.
    3)앞의 책, p.116>
    4)김동수, 신약이 말하는 방언(서울: 킹덤북스, 2009), p.135; 존 R. W.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조병수 옮김(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p.135; 김동수, 방언은 하늘의 고귀한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61.
    5)존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조병수 옮김(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p.135.
    6)그러나 김동수 교수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영음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기준으로, 오히려 사도행전의 방언이 외국어라는 것까지 의문을 제기하며 영음일 수 있다는 억지 주장을 한다. 김동수, 신약이 말하는 방언(서울: 킹덤북스, 2009), p.135)>
    7)존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조병수 옮김(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p.135>
    8)롬12:6; 고전11:4,5; 살전5:20; 딤전1:18; 4:14; 벧후1:19-21; 계1:3; 10:11; 11:3,6 등을 살펴보라.


    <이창모 목사>


    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


    위 글은 앤아버에서 목회하는 어느 목사님의 홈피에 실린 것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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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5.05.08 12:00
    방언은 일부 교회에선 여전히 신앙성숙의 척도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방언은 이미 중지된 은사(은사중지론)일 뿐이다. ‘방언’을 바라보는 시각이 성도마다 천차만별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크리스천에게 ‘방언’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방언기도

    ▲평택대 신약학 김동수 교수

    못 받았다면 받도록 사모해야 하는 것이 맞을까, 받았다면 가짜가 아닌지 의심해야 하는 것이 맞을까. 방언에 대해 무엇이 진실이고 오해인지 성도들을 혼미케 하는 상황에서 신약성경과 교회사적 측면, 그리고 신학적 측면에서 방언을 검증한 책이 출간됐다. 평택대학교 김동수 교수의 ‘방언, 성령의 은사-성경과 교회 역사에 나타난 방언’(킹덤북스)이다.

    김 교수의 방언 관련 저서는 이번이 세 번째다.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이레서원 2008), ‘신약이 말하는 방언’(킹덤북스 2009) 집필을 통해 신앙적 측면과 신학적 측면의 방언을 다룬 바 있다. 이번 저서는 방언 신학과 교회사에 나타난 방언, 그리고 방언중지론에 대해 담았다. 그리고 실천적 측면에서 방언이 신앙생활에 매우 유용하며 성경의 원리대로 사모하면 방언을 체험할 수 있다는 내용까지 담겨 있다.

    김동수 교수는 한국교회에서 방언 논쟁을 네 가지 입장으로 정리했다. ▲방언중지설: 방언은 중지됐기 때문에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방언 적극 지지설: 방언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고 지금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방언 소극적 인정설: 방언은 지금도 유용하지만 방언 체험 유무는 성령에 의한 것이므로 신자는 개의치 말아야 한다 ▲평화주의자: 논쟁은 좋지 못하며 이 문제로 다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동수 교수는 방언 적극 지지의 입장에서 신학자로서 방언이 충분히 연구 가치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에 관해 연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국내에서 방언 연구가 충분하지 않은 것에 저서를 통해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책에서 김 교수는 방언이 지금까지 학자들과 신자들이 흔히 생각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신학적 주제임을 다뤘다.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 국제성령신학연구원 사무실에서 열린 ‘방언, 성령의 은사’ 북콘서트에서는 신학자, 목회자, 성도 등 방언에 관심 있는 청중들이 모여 김동수 교수의 ‘방언’에 대한 연구 결과와 실제적인 이야기들을 나눴다. 북콘서트에서 사회를 맡은 성서대학교 이민규 교수와 저자 김동수 교수 사이에 오간 질의응답을 인터뷰 형식으로 엮어 소개한다.

    - 방언에 차별이 있던데, 남자들보다는 여자가, 강남보다 강북이, 유럽보다 아프리카에서 방언을 더 잘 받더라. 심지어 진보보다는 보수에 속하는 쪽에서 방언이 많이 나타난다는 연구결과도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나?

    계몽주의와 현대주의 사고 안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몸을 쓰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다. 몸이 컨트롤 안 된다는 것에 대해 불편을 느끼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 기도 방식에는 묵상 기도가 많고 방언 기도가 없다. 배운 사람들이 오히려 방언을 덜 받는 것 같다. 계몽주의적 은사중지론, 세대주의적 은사중지론 사상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영향을 받는 거 같다. 이미 정신 속에 들어간 사상이 있으면 방언을 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인 것 같다. 한 사회학자는 1970-80년대에 낸 책에 보면 방언은 못 배우고 못 사는 사람들이 주로 하고, 배우고 잘난 사람들은 안 한다는 사회학적 측면에서 방언을 설명하기도 했다. 평균적으로는 낮은 사회 부류에서 방언을 많이 받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영원불변의 법칙인 것은 아니다. 최근 온누리교회 같이 사회적으로 중산층 이상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방언을 많이 한다는 것이 이것을 방증한다.
    그래서 방언을 체험하는데 있어서 사회적 위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언에 대한 태도인 것 같다. 담임 목사가 방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말하는 교회에서는 부정적으로 말하는 교회에서보다 방언 체험이 더 많다.

    - 방언해도 사람이 성숙해 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인격이 변하지 않고. 특히나 방언하는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던데, 어떤 입장으로 설명 가능할까?

    이 세상에 방언이 아니라 3층천을 갔다 와도 사람이 안 변한다.(웃음) 사람이 어떤 경우에도 인격 자체가 완전히 변해 천사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표현이라는 게 노동자 분들(워킹클래스)는 마음보다 말이 거칠다. 배운 사람들은 마음보다 말이 훨씬 더 부드럽다. 배운 사람들이 마음보다 말을 부드럽게 말하는 것을 배우는 거다. 매너 없이 표현하는 걸 성숙하지 못한 것으로 흔히 생각하는데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관점으로 보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셨기에 거친 사람들의 마음이 더 깨끗하다고 본 경우가 많다. 방언이 신앙성숙에 이바지 하지만 방언을 비롯한 어떤 신앙 체험도 사람을 하루아침에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방향성이 분명하다면 개인적으로는 영적 체험이 강할 때 인격이 꾸준하게 변하는 것을 느끼게 되긴 하더라. 통역에 대해 질문해 보겠다. 방언을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전하는 통역도 중요하다. 방언은 강조되는데 반해 왜 통역은 약할까? 어떻게 균형을 잡아갈 수 있나?

    현상으로 통역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방언 천명이면 통역 한명 있을까 말까다. 방언은 성령충만한 상태에서 입술만 맡기면 쉽게 터진다. 하지만 방언 통역은 임해도 막상 하기가 두려울 거 같다. 그래서 통역이 많지 많다. 또 통역을 하려면 통역의 장이 있어야 한다. 고린도교회 예배 시에는 찬송시도 있고, 계시도 있고 방언도 있었다(고전 14:26). 은사집회 같은 형식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교회의 예배가 포멀화(formal) 됐다. 우리나라는 오순절 교회도 똑같다. 주일 낮 예배는 장로교식 예배고, 금요철야예배는 순복음식 예배다. 금요철야예배라도 은사집회가 있으면 좋은데 장이 없고, 모델이 없었다. 토레이 신부님이 원장으로 있던 예수원에는 그런 것들이 좀 있었다. 방언 통역이 임했을 때 해보고 검증도 받아보고 이런 게 있었다. 오순절 교회 안에서도 그런 집회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예언과 방언, 통역이 모두 있으려면 권위가 담임목사에게만 있으면 안 된다. 누구에게나 임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은 우리나라의 위계질서, 유교적 가부장제의 폐해 같다. 성령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어야 되는데 우리나라는 가부장제가 자유함을 빼앗았다.(웃음)


    - 가짜방언은 어떻게 구별하나. 방언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나도 가짜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가짜방언이라는 것은 누가 퍼드렸느냐. 증거는 없지만 심증은 간다. ‘가짜방언’이라고 할 때 움츠러들지 않나. 천사와 마귀 중 누가 이 풍문을 퍼뜨렸냐고 묻는다면 마귀가 퍼뜨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진짜나 가짜냐를 구분하라고 하는데, 고전 14장에는 두 세 사람이 방언하고 한 사람이 통역해서 분별하라고 한다. 또 신앙고백 여부로 구별할 수 있다(고전 12:3). 실제 집회에서 가짜방언은 우려할 만큼 많지 않다고 본다.

    - 방언은 신의 언어인가?

    언어학 분야 논문을 보니 방언을 녹음해서 들어보면 언어학 규칙에서 벗어난다고 하더라. 실존하는 언어는 아니다. 그러면 방언이 하나님의 말인가? ‘천사의 말’ 이라는 표현은 아름다운 말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 그만큼 귀중한 것이라는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방언이 하나님의 언어나 천상의 언어는 아닐 것이다. 언어학적으로는 혀에 근육이 생기기 때문에 혀는 해보지 않은 발음을 잘 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근육의 움직임을 뛰어 넘는 것이 방언이라고 한다. 그래서 방언을 ‘other tongue’이라고 하는 것이다.

    - 방언은 외국어여야 하는가? 종종 외국어 방언이 검증된다고 하던데, 언어학자들이 조사해 보면 거의 UFO 발견처럼 근거가 없는 얘기인 경우가 많다.

    누가는 성령 세례를 설명하던 중에 방언을 말했다. 성령, 은사, 충만, 세례를 풀다보면 방언이 나온다. 사도행전 2장에는 방언이란 말만 있고 외국어인지 분명하지도 않다. 지금과 같이 똑같이 방언이 터진 거고, 알아듣는 기적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만약에 그게 아니라면 오순절 사건에서만의 일회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순절 사건 이후 베드로가 설교할 때는 성령론이 아니라 구원론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렇다고 본다면 사도행전 2장은 특수하게 볼 수 있다.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고 듣는도다’라는 의미가 다른 나라 말로 유창하게 한다는 내용은 아닐 것으로 본다.

    - 방언이 바로 이런 유익이 있다는 설명을 한다면?

    바울이 말한 건 두 가지다. 고전 14장에는 자기를 ‘오이코도메’ 한다고 하고 있다. ‘빌드 업(build up)한다’ 곧 ‘허물어진 것을 세운다’는 것이다. 바울은 오이코도메오(세운다), 오이코도메(세움)라는 말을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의미로 주로 썼다. 방언으로만 회복할 수는 없지만, 희로애락, 마음의 상처, 마음의 응어리 이런 것들이 회복될 수 있다. 그리고 로마서에는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돕는다는 의미로 방언을 사용한다. 성령의 기도인데, 피조물이 탄식하고 처음 익은 열매 신자들이 탄식하는 것에 공감한다는 의미다. 즉 하나님이 나의 기쁨, 희로애락에 공감해 주신다는 거다. 이 두 가지 때문에 어려움이 있을 때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 논문에 따르면, 신자들을 조사해 보니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새벽기도와 철야기도 참석률에 가장 크게 있더라.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이 새벽기도와 철야기도에 참석률이 높았다. 다른 차이보다 깊이 기도하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 방언의 체험 중 소개해줄 만한 체험이 있는가?

    인생의 위기 때마다 대부분 기도로 극복했는데 그 때마다 방언 기도를 했다. 어느 대학에 갈까, 어디로 유학을 어떻게 갈까와 같은 모든 문제를 새벽기도에서 방언 기도를 하며 결정했다. 미국에서 영국으로 갔을 때는 기도로 결정하고도 3년을 후회했다. 나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당시엔 나쁜 결정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10년 후에 돌아보니 대부분 좋은 결정이었다.


    ▲지난 2일 국성연에서 김동수 교수의 '방언, 성령의 은사' 출간 기념 북콘서트가 열렸다.ⓒ뉴스미션



    위 보도문의 출처 <뉴스미션> (2015.5.초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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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schoiword 2015.09.04 14:10

     

    뜻을 모르는 방언기도

     

    지금 우리나라는 이단이 창궐하고 복음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비 논질이 본질을 덮어버린 것입니다. 본질이 무엇일까요? 오직 예수의 십자가 복음입니다. 비 본질은 무엇인가요? 귀신 쫓기, 병 고침, 예언, 안수, 안찰, 신비체험, 방언, 기름부음, 내적치유, 심리학, 각종의 이적, 율법 준수, 인본주의 인성교육, 성품교육, 쉐마교육 ... 등 본질을 벗어난 많은 것들이 비 본질입니다.

    예수께서는 표적을 보이셨지만 표적을 따르는 자들은 미워하셨습니다. 자신이 전능한 하나님이시며 메시아이신 것을 알리기 위해 귀신을 쫓으시고,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살리시고, 불치병인 나병을 고치셨습니다. 이런 기적과 오병이어의 기적 등의 표적을 보이실 때는 수많은 자들이 예수를 따랐지만, 막상 복음을 전하자 모두 예수님을 떠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따르지 않고 표적을 따른 자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표적을 보이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 목적이셨습니다. 만약 병 고치는 것이 목적이셨다면 예수께 병 고침을 받은 자들은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병 고침은 십자가 사역을 알리는 표적이셨습니다. 율법의 저주로 병든 자들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시며, 네 죄를 내가 십자가에서 해결하겠다는 의미로 병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이렇듯 초대교회의 모든 은사와 표적은 십자가 복음을 가리키기 위한 것입니다.

    비 본질에 치중하면 반드시 본질은 위축되고 퇴색됩니다. 성도들은 연약하여 눈에 안 보이는 복음보다 눈에 보이는 표적과 방언을 더 따릅니다. 신약이 완성되고 진리의 성령이 복음을 깨닫게 하시는 오늘 날에 방언은 복음을 크게 훼손하고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 나라에 방언이 널리 퍼진 것은 큰 교회 큰 목사님들 덕분입니다. 그들은 방언은 하나님과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며 성령을 받으면 방언을 할 줄 알아야한다고 가르치고, 또한 본인들도 유창하게 합니다.




    교인들은 방언을 못하면 성령을 못 받은 자로 취급 될 것을 걱정하여 열심히 방언을 연습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일제히 큰소리로 방언으로 기도하면 마치 개구리 울음소리에 온 천지가 뒤덮이고 진동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들은 방언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 자신의 비밀을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과 하나님에 대해 크게 오해한 것 입니다. 우리의 비밀을 방언으로 해야 하나님이 알아들으실까요? 하나님은 전능한 분이 십니다.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스쳐가는 생각까지도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입을 다물고 기도하면 못 알아들으실까요? 뜻 모를 방언으로 해야 알아들으실까요?

    방언을 말해야 할 대상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방언의 대상은 불신자입니다. 하나님이 방언으로 해야 알아듣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오해한 것이며 방언의 용도도 오해하는 것입니다. 방언을 하나님께 하는 영의 언어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마저도 꿰뚫어 보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에게 ‘영의 언어’로 해야만 알아들으신다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지나치게 오해하시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경건하고 믿음이 좋아 보이는 사람들이 방언을 하는 경우가 많고 존경받는 사역자들이 방언을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성도들은 방언을 받으려고 하나님께 조르고 또 조르다 방언을 못 받게 되면 방언을 연습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방언의 유래와 언어의 회복

    각 방언은 저주의 표적입니다. 원래 인간은 언어가 하나였습니다. 모든 인간이 한뜻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 할 수 있도록 언어가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한뜻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기위해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사악함을 보시고 언어를 흩으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게 되고 흩어져서 다른 민족이 되고 각 방언이 생긴 것입니다.

    결국 방언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저주로 흩어져서 생긴 산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흩으시고 시간이 흐른 후 때가 차매 메시아인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죄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시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로 흩어져 각 방언을 하게 된 죄인들이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흩어짐을 면하고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즉, 복음으로 모두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는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말씀은 복음이며 언어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복된 말씀으로 하나 되게 하시려고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각 방언을 쓰는 죄인들도 예수를 영접하면 저주에서 벗어나 말씀이신 예수로 하나가 되며 한 가지 언어인 복음으로 회복되어 흩어짐을 면하고 한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각 방언을 하는 자들도 이제는 한 언어인 말씀(예수)으로 회복되고 하나 되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각 방언의 저주에서 벗어나 흩어짐을 면하고 예수 안에서 회복된 것입니다. 뜻 모를 방언에 대해 제일 먼저 들고 나오는 구절이 예수님의 말씀인 막 16:17절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이 구절에 나오는 새 방언은 뜻 모르고 주절대는 방언이 아니고 복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주신 말씀인 "새 방언"은 주절대는 마귀방언을 말씀하신게 결코 아닙니다. 새 방언이란 새로운 언어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죄인들은 입으로 죄만 지었습니다. 죄인들이 하는 모든 언어는 죄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입으로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일이 없는 새로운 언어인 생명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새 언어이며 새 방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새 방언은 뜻 모를 방언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은 언어이며 각 나라 말입니다. 왜 방언을 주셨을까요? 성경을 보면 사도들조차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이 강했고 성경도 유대인만의 것이고 하나님도 유대인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장벽을 깨뜨리는 것이 방언의 은사로 나타났습니다. 한 번도 배운 일이 없는 이방인의 언어인 방언이 사도들의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무려 16개국(행2:8-11)의 각 나라 방언을 체험한 사도들은 그제 서야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사도들의 입에서 나온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을 말함을 들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행2:11) 이로 인해 삼천 명이나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행2:41) 또 베드로에게 복음을 들은 이방인이 자기나라 말로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행10:46)

    이처럼 방언은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아듣지 못하는 뜻 없는 방언으로 어떻게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어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개구리 울음소리 같은 방언을 들으면 복음전도는커녕 기겁하고 도망가지 않겠습니까?

    이로 보건대 뜻 모를 방언을 성령이 주셨다고 믿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현대의 방언을 하는 분들에게 일어나는 입이 돌아가고 혀가 꼬이는 현상이 사도들에게 일어났다고 성경은 증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연 바울이 방언을 권장했는지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고린도는 우상숭배가 극심한 무역도시이며 항구도시입니다. 이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도덕적으로도 매우 타락하여 심지어 아버지의 첩과도 동침한 사람이 바울이 개척한 교회에 있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들을 무질서하게 사용하고, 성찬을 남용하며 방언의 은사를 주신 이유도 알지 못하고 방언으로 시끄럽게 기도하며 방언을 남발하고 은사가 같은 자들끼리 서로 편을 가르고 서로 분쟁하였습니다.(고전11:18-19)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편지로 그들을 꾸짖기도 하고 타이르며 성령의 은사는 위아래 가 없이 다 똑 같다고 가르치며(고전12:8-30), 성령의 은사들을 질서 있게 사용 할 것을 권면하고 성령의 은사 보다 십자가 사랑을 깨닫는 것이 제일이라고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즉, 무질서한 고린도교회를 방언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로 이끌어 가는 편지가 고린도전서입니다.

    바울이 편지를 통하여 무엇을 강조 했는지, 또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은사에 매달리는 교인들에게 모든 성령의 은사보다 가장 귀한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 합니다.(고전12;31-13:13) 바울이 말하는 사랑이란 인간의 일시적이며 얄팍하고 감정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면 이 사랑을 깨닫는 것이 온전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고전13:10)

    이 사랑을 깨달으면 예언도 그치고 방언도 그치고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한다고 말합니다.(고전13:8) 이 사랑이 없으면 모든 은사나 지식이나 헌신이나 울리는 꽹가리에 불과하고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고전13;1-3) 이 사랑을 깨달으면 그동안의 모든 일이 어린아이의 일이였음을 깨닫게 된다고 말합니다.(고전13:11) 이 사랑 안에 깊이 잠겨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면 예수의 얼굴을 마주보듯 온전히 알게 된다고 합니다.(고전13:12)

    이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몸부림치며 꿈틀대며 고통 속에 죽어간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는 것이 지식이 아닌 완전한 복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인들에게 모든 은사보다 이 사랑의 은사를 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12:31) 모든 성령의 은사는 이 사랑의 복음을 가르쳐주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방언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완전한 복음을 가르치는 책입니다.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하는 것이며 불신자에게 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14:22) 방언의 은사란 불신자에게 그 사람이 난 곳의 언어로 복음을 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행2;8) 하나님께 방언을 하는 분들은 하나님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전도의 대상일까요? 고전 14장은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통역하지 않는 방언(외국어)을 남발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책망하는 구절로 차있습니다.

    "분명치 못한 소리", "알아듣기 쉬운 말", "무엇이 유익하리요", “거고같이 생명 없는 것", “깨닫는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보다 낫다", “그리고 너희처럼 방언을 남발하면 너희를 미쳤다하지 않겠느냐",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뜻 없는 소리", “열매 맺지 못하리라" ... 등

    이처럼 거듭거듭 해서 방언을 자랑하고 남발하는 것을 책망하는 것이 어찌 방언을 권장하는 것이겠습니까? 바울은 방언을 자랑하며 남발하는 교인들에게 "너희보다 내가 더 방언을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뜻 모를 방언을 여러 가지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사도가 될 수 있도록 사도바울에게 여러 나라의 방언을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여러 방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교인들에게 방언의 자랑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고전 14;18)

    또 방언을 장려하는 구절이 "방언을 금하지 말라"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방언의 남발을 꾸짖은 바울은 이로 말미암아 방언의 은사가 위축되어 타국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지 않게 될 것을 우려하여 방언을 금하지는 말라고 하였습니다.(고전14:39)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고전14장 2, 4, 14, 15절을 근거로 바울이 방언을 권장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위 구절이 방언을 장려한 구절이라면, 지금까지 방언을 남발한 교인들을 책망한 바울을 이랬다 저랬다하는 변덕이 심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로마서를 통해 정통기독교 교리를 반듯하게 세운사람입니다. 또 성령에 사로잡혀 복음을 전한 사람입니다. 오직 복음에 역점을 둔 바울이 뜻 모를 방언을 권장했겠습니까? 바울이 오늘날 복음과 관계없는 뜻모를 방언을 하는 교인들을 본다면 아마도 꾸짖고 책망하지 않았을 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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