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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 우리 시대의 가장 거대한 우상1)


존 쿠퍼(칼빈신학교 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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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 조망

십계명 첫 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촉구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돈 둘 다를 동시에 섬기지 말라고 경고 하셨다 (마 6:24). 바울은 아테네의 수없이 많은 우상들을 보고 (행 17:16-23)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섬기는 것을 금했다 (롬 1:23-25). 이러한 책망과 경고는 시간과 문화를 초월하여 의미가 있다. 특별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더욱 더 말이다.

이 시대는 너무나 많은 우상들을 섬기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와 권력, 자유, 과학, 기술, 문화, 스포츠, 성 등을 자신의 신으로 섬기고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우상을 섬기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이러한 것들에 탐닉할 때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가장 거대한 우상은 바로 즐거움 혹은 흥밋거리를 찾아 헤매는 것일 듯싶다.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 최대한 시간을 쓰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과 죽음에서 유일한 낙이요 위로”라고 생각한다. 이런 삶을 추구하는 방식을 전문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쾌락주의 혹은 향락주의 (hedonism)이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방법으로 쾌락주의로부터 멀어지길 노력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더 사랑할 때도 있었고, 세상이나 우리 자신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기도 했다. 심지어 성경이 말하는 우상숭배 금지에 대한 경고에 크게 개의치 않는 무감각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과연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이런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며, 쾌락주의와 향락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향해 그리스도를 통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


즐거움 그리고 이 시대의 우상들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바울이 기록한 로마와 아테네에서의 우상숭배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 로마 종교에서는 제우스가 모든 선과 즐거움, 전쟁, 사랑, 권력, 운, 자연 등을 통치하는 가장 위대한 신이라고 믿었다. 현대 세속 문화도 여전히 이러한 요소들을 섬기고 있다. 다신론자들처럼, 우리도 권력, 과학, 기술, 사회적 지위, 음식, 성, 문화, 스포츠, 레져 등을 우상화하여 섬긴다. 간단히 표현해서 우리는 결국 “즐거움”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인류 문화는 종교, 전통, 사회, 권력, 부, 지식, 명예 등을 가장 높은 가치로 여겼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사회를 사는 우리는 우리의 “기분”에 주로 집중하여 가치 평가를 한다. 가능하면 좌절이나 슬픔 혹은 지루함 없이, 즐겁고, 기분 좋고, 쾌락을 즐기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우리에게 있어 무언가가 가치 있게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얼마나 건강하고, 선하고, 진실 되고, 아름다운가가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내가 그것을 좋아 하는가 싫어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 버린 것이다. 즉, 우리의 감정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이다. 광고업자들이나 정치인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우리의 감정을 조정하려든다. 부모 노릇을 한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자기 자신이 행복하다는 감정을 갖도록 해주는 노력의 일환이다. 우리는 주말을 위해 일하고 여가를 즐긴다. “마침내 금요일이다!” (TGIF!)를 외치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취향대로 즐기세요!” (역자 주: 버거킹 광고 슬로건, Have it your way!) 같은 패스트푸드점 광고는 시대의 정신을 대변한다. 과소비 없이는 경제가 휘청거리고, 우리의 욕구는 광고에 의해 조종당한다. 제멋대로 사는 것을 높은 가치로 여긴다. 맞춤 생산하는 커피나 햄버거, 개인적 취향이 듬뿍 담긴 재생 곡 목록, 온라인 데이팅 서비스, 그리고 각종 교회 성장 전략 등등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 결과이다. 이 시대의 모든 문화는 마치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는 삶이 제대로 된 삶인 듯 잔뜩 환상을 불어 넣고 있다. 만약 이 시대의 문화들이 우리를 만족 시키지 못한다면, 컴퓨터나 마약류 등이 그 빈자리를 채울 것이다.

쾌락주의는 단순히 음식, 성, 그 외 사고 싶은 물건들로 그 범위가 제한되지 않는다. 우리의 모든 삶의 부분 부분이 바로 쾌락의 원천이다. 특별히 우리는 종교, 도덕, 정치, 관계, 일 등을 통해 즐거움을 찾으려고 한다. 쾌락주의는 단순히 특정 사회 계층에만 국한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예술품 감정가, 질 높은 음식만 찾아다니는 미식가 등도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만족될 때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하며 사는 이들을 보면서 부러워하기도 한다. 때때로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 중에는 즐거움과 공공선을 헷갈리기도 한다. 비만병은 단순히 육체적 문제를 지칭 한다기 보다는 사회 전반에 걸친 탐닉의 이야기에 대한 메타포일 수 있다. 온갖 종류의 즐거움에 탐닉하는 모습은 마치 우리의 가슴과 영혼과 생각이 비만병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모습과도 같다.
미국 독립 선언문에 보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의 목적이다. 만약 쾌락주의가 말하듯 행복이 단순히 기분이 좋은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될 것이고 모든 가치와 의무들은 그것에 의해 판단되고 통제될 것이다. 그러므로 쾌락주의는 세계관이요 가치관이다. 이러한 쾌락주의는 종교와 도덕에도 깊게 침투한다.

종교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건전하고,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도록 우리를 고취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쾌락주의에 전도된 예배는 항상 즐거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성령의 임재는 감정이 느끼는 바와 상관있다. 예배 찬양은 우리의 구미를 맞춘다. 지루한 예배를 만들지 않기 위해 예배 중의 무질서함도 어느 정도 용납된다. 복음 전도 시 죄와 회개의 이야기보다는 구원의 유익에 대해서만 집중한다. 십자가 없는 종교적 약속, 바로 이러한 종교적 행복감에만 탐닉하고 있는 것이다. 영성 훈련을 위해서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지 않는다. 그냥 가끔씩 가벼운 운동 하듯 영성 훈련을 한다. 만약 아이들이 교회나 교리교육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거나 귀찮아 할 때는 그냥 쉽게 포기해 버리고 한 마디 던진다: “꼭 필요한 일에만 전력투구하라” (Pick your battles). 이것은 개혁주의 전통에 있는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양한 기독교 전통의 모든 교회들도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 문화가 종교를 변화시키고 있다. 종교는 문화에 굴복 당하고 있다.

즐거움과 쾌락은 도덕적 가치도 형성한다. 쾌락주의는 남들을 해치지 않는 이상, 원하는 대로 행복을 찾아 누릴 권리가 있다고 가르친다. 또한 우리 자신에게만 이기적으로 즐거움을 선사하지 말고, 남들에게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라고 외친다. 감정 이입된 공감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즐거워할 때 자신도 즐거워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만약 우리가 남들을 즐겁게 해주었을 때 그들도 나에게 똑같이 해줘야 한다는 심리도 가지고 있다. 황금율 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그렇게 하듯 남들에게도 행복을 위한 똑같은 기회와 자유를 줘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우리 사회에 도덕적 포괄주의를 선사한다.

성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바로 그 예이다. 모든 사람은 성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쾌락주의적 원리에 의해 성을 해석하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모든 어른들은 자신의 성적 만족을 위해 노력함에 있어서 자유를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 하에서는 결국 모든 종류의 합의된 성관계 (예를 들면, 이성간의 관계, 동성애, 직업여성과의 관계, 혼전 관계 등)는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이 도출되기 마련이다. 반대로 미성년자와의 성관계, 자발적이지 않은 관계, 혹은 불륜 관계 등은 반드시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도덕과 윤리 그 자체를 버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결국 기독교적 윤리 대신에 쾌락주의만을 인정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연민” 혹은 “무조건적 사랑”에 근거하여 일부 크리스챤들은 성윤리를 진보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엔 반드시 그에 맞는 세계관이 심사숙고 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우상숭배

성경에 의하면,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공기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듯, 하나님과의 관계도 하나님을 닮은 인간에는 반드시 필요하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멀어짐과 동시에 그들의 “빈 공간”의 문은 열렸다. 하나님이 없는 이 빈 공간은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가 않았다. 우리는 이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 대신에 다른 것으로 채워 넣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치 폐로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이 부질 했고, 공기 대신에 독가스를 마시는 것과 같이 무모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심지어 이름 없는 신에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목격하기에 이른다 (행 17:16-23).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무슨 짓을 하는지에 대해 똑똑히 목격했다.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섬기고, 심지어 동물이나 새나 파충류를 섬기기도 하고 (롬 1:25), 음식 (빌 3:19), 돈, 자기 자신, 그리고 즐거움 (딤후 3:2-4)을 섬기기도 한다. 그러므로 쾌락주의 우상은 오늘날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를 앗아가고, 인간의 삶의 질을 황폐화시킬 뿐 아니라, 우상화 되는 모든 것들을 왜곡시킨다. 쾌락주의는 원래 없던 즐거움을 진정한 즐거움이라고 속이고, 원래 줄 수 있는 기쁨보다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다고 과장할 뿐 아니라, 삶의 모든 부분을 왜곡시킨다. 이러한 쾌락주의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상숭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을 갚지 못함을 통해 하나님을 우리에게서 빼앗아버린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순종해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창조주대신 피조물에게 경배한다면, 우리는 결국 피조물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과 존경을 우상들이 대신 받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제목을 응답해 줄 능력이 없는 우상들에게 뭔가를 기대하며 섬긴다. 이사야서 44:6-20은 나무에게 신적 권위를 부여하는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말해주고 있다. 나무의 반쪽은 땔감으로 쓰고 있으면서 나머지 반쪽에게는 신이라고 부르며 섬기는 것이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심지어는 우리가 만든 것을 신이라 부르고 그것들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우상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우상들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국 우상숭배는 자기기만일 뿐이다. 시간 낭비일 뿐이며, 우리에게 아무런 축복을 주지 못하는 것들에게 우리의 정력만 낭비할 뿐이다. 결국 우상을 통해 충족되지 못한 공허감을 달래기 위해서 우리는 더욱 더 다른 것에 우상숭배를 하는 어리석은 사이클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상숭배는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방편이 되지 못한다. 쾌락주의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성경적 지혜 그리고 즐거움의 경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과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음식, 사랑, 성, 가족, 사회, 자연, 문화, 일, 여가, 쉼 등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선한 즐거움의 원천들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선하고 옳은가를 판단할 수 있는 지각을 주셨고,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능력도 주셨다. 우리는 맛과 기분,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의 감정도 느낄 줄 아는 지각을 지녔다. 우리는 신성에 대한 느낌/인식 (sensus divinitatus)까지도 가지고 있다.

인간의 경험 속에서 성경적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단순하고 순간적인 쾌락은 우리가 늘 바라던 지속적인 즐거움과는 거리가 있다. 음식이나 성, 음악, 스포츠, 돈, 사랑, 성공 등은 우리에게 기껏해야 짧은 즐거움을 줄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욕구는 끝이 없고 절대 만족이 없다. 한번 느낀 쾌락은 또 금방 싫증난다. 나이가 먹어갈수록 혹은 몸이 아플수록 즐거움에 대한 욕구는 줄어간다. 플레이보이지의 휴 헤프너가 과연 아흔살이 되어서도 계속 즐기면 살 수 있을까? 삶은 즐겁지만, 과연 죽음까지도 즐거울까? 영원토록 지속되는 즐거운 삶은 하나님으로부터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피조물도 이러한 즐거움을 주지는 못한다.

타락한 인간이 느끼는 즐거움은 자주 우리 자신을 속인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암이 있는 사람은 암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여전히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다. 몸을 해롭게 하는 음식들도 맛만 좋다면 몸이 망가지든 상관없이 즐겁게 먹는다. 우리의 몸과 영혼을 죽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분만 좋다면 그냥 즐긴다. 어떤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또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진실은 반대일수도 있다. 때때로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하더라도 전혀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은 채 살기도 한다. 죄가 우리의 몸과 영혼을 다 장악하고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의 삶을 이끌만한 능력이 없다.

우리의 삶의 목적을 단순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행복과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행복과 즐거움은 그러므로 우리 삶의 목적이라기보다는 목적을 성취하는 과정에 발생되는 결과물이다. 만약 행복과 즐거움을 최우선 순위로 둔다면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정면 배치되는 결과를 낳는다. 건강보다 순간적인 쾌락을 우선시한다면 당연히 건강은 안 좋아지게 될 것이고 이는 결국 즐겁지 못한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만들 것이다. 만약 단순히 스스로의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 남에게 잘 대해준다면 이것 역시 결국에는 자신 자신을 망치게 된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가 단순히 하나님께 그 섬김에 대한 보답을 받기 위함이라면 이것은 결국 하나님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에 해가 될 것이다. 쾌락주의는 결국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종류의 유익들, 즉 결혼의 유익, 혹은 가정, 교육, 정의, 도덕, 종교의 유익을 위태하게 만들 것이다. 쾌락주의는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이 아니다. 쾌락주의는 스스로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소비하게 만들어 결국 건전한 자연, 사회, 경제, 도덕의 근간을 흔들리게 할 것이다.


크리스챤 삶의 즐거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우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죄악 된 본성과 싸우고 있으며, 진실 되지 않은 즐거움에 대한 욕구로 갈등하고 있다. 성경 속 인물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상을 섬기고 싶은 유혹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다. 비록 크리스챤들은 세속적인 쾌락 그 자체를 우상화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즐거움에 대한 욕구는 하나님의 뜻과 배치될 때가 많다. 우리는 즐거운 경험을 위해서 많은 시간과 물질을 들인다. 우리는 때때로 잘못된 방법으로 즐거움에 대한 욕구를 만족하려 한다. 그러다 보면 과연 무엇이 진정한 즐거움인지에 대해 망각할 때가 많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결국 영적인 게으름을 동반하며, 참된 청지기직을 수행하기에 힘들게 만든다. 하나님 나라를 찾는다는 목표는 실패하게 된다.

이토록 심하게 쾌락을 탐닉하는 사회 속에 사는 크리스챤들은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을 영위하도록 애써야 한다. 때때로 극단적인 쾌락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건전한 즐거움도 필요할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것이 건전한 즐거움인지에 대해 취사선택하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금욕주의가 능사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은 말하길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로 인해 평생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역시 교훈하길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진정한 위로와 행복의 원천이 된다고 한다. 진정한 기쁨과 행복은 바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그의 선한 기쁨과 영광을 누리는 “샬롬”의 상태이다. 이러한 즐거움을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가족, 교회, 그리고 공공의 장소에까지 널리 퍼트려야 한다. 이를 통해 쾌락주의에 빠져 허우적대는 우리 이웃들이 진정한 행복이란 쾌락을 숭배하는 것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시편 37편 4절이 교훈하듯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의 방법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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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고는 미국 칼빈 신학교 Forum 2014년 가을 호에 실린 내용으로 번역 및 게재 허락을 맡고 게재 합니다. 저작권은 Forum과 저자에게 있습니다. 원제목은  " Pleasure: The Greatest Idol of Our Time"dlek.


2) 역자 박재은 목사는 현재 미국 칼빈 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조직신학으로 박사논문 중에 있다.


< 저작권자 ⓒ 개혁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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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성경 2015.02.16 06:41

    2) 구태의연한 신학의 반복- 자기부상열차 승객에게 마차 선전하는 효과.
    성경적 원론도 아니면서, 현사태 파악이 바로 되어 있지도 않고, 예시처럼 마지못해 'Pick your battles' 하시는 것 같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함을 누가 모르나요? 놀이기구 위에서도 책을 떨어트리지 않는 법을 몰라 헤매는 거지요 3) 이 창에 들어오는 이들은 '답'이나 '기쁨(은혜, 덕)'를 갈망하여 들어오는 것 아닐까요? 외람되지만 윗글은 둘 다 없습니다. 교수님께 임팩트를 못주는 글은 저희에겐 더 싱겁겠죠? 그러면 글 읽은 시간이 아까와 집니다. 제가 나쁜 걸까요? 1) 일단, 우리 총장님 보다 글을 못씁니다.

    과거에는-문서 속에서 고래의 정통을 규명하고 미래의 목회자인 신학생을 효과적으로 설득하여, 교회내에 진리를 보수하는 하는 것이 충성된 신학자라면, 오늘날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현장 속으로 내려가서 고발 분석 예측하는 기자들 처럼, 단정한 신학자의 수트를 벗고 교회와 함께 달려야 하지 싶습니다.


    그래야 모세의 판단과 아론의 내달림으로 산자와 죽은자 사이에 향로를 가져가서 산자를 더 건질 수 있겠지요. (민16:41~50) 벌써 염병은 시작되었고, 성도는 급박하게 변해가는 현 사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학은 성도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글의 품행이 나쁘거나 총장님을 곤란케 하면 지우거나 손보십시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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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갑제, 어찌 이런 것을 헌재의 판결문이라 할 수 있나? 사랑하는 법치 애국 시민 여러분, 1. 여러분, 어제 우리는 결코 지지 않았습니다. 진 것은 우리가 아니라 헌법재판소입니다. 여러분, 어제 많이 긴장하고, 놀라고, 괴로우셨지요? 특히 저에게는 박근혜 ...
    Date2017.03.11 Bydschoiword Reply0 Views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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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판결문

    헌법재판소 박근혜 대통령 탄핵 결정 판결문 지금부터 2016헌나1 대통령 박근혜 탄핵사건에 대한 선고를 시작하겠습니다. 선고에 앞서 이 사건의 진행경과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재판관들은 지난 90여일 동안 이 사건을 공정하고 신속하게 해결하기...
    Date2017.03.11 Bydschoiword Reply0 Views2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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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분이 김철홍 교수다

    이 분이 김철홍 교수다 “사상적 전향에 대한 그늘”에 대한 비판과 공산주의 이론의 그늘 속에 있는 한국 근현대사 역사학에 대한 나의 입장 김 철 홍 며칠 전 전주(全州)에 있는 본 교단 소속 한일장신대의 신약학 교수인 차정식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나...
    Date2017.02.11 Bydschoiword Reply0 Views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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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이 말하는 방언

    성경이 말하는 방언 <신학정론> 글 이성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교회사) 방언에 대하여 글을 쓰는 것은 늘 부담스럽다. 한국교회에서 방언에 대한 논쟁은 쉽게 과열이 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모든 논쟁이 그렇듯이 방언에 대한 ...
    Date2017.02.08 Bydschoiword Reply0 Views1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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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기 비결 15가지/ 유홍준

    글쓰기 비결 15가지/ 유홍준 유홍준 교수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0주년 기념 강연 – ‘문화유산을 보는 눈과 나의 글쓰기’ 강연에서 발표한 내용을 <중앙선데이> 정재숙 문화전문 기자가 정리한 것이다. 1. 주제를 장악하라. 제목만...
    Date2017.01.29 Bydschoiword Reply0 Views1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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