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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 자살, 신학교수, 신학검증, 총대, 그리고 교회

(신재형, 페이스북 글, 2017.10.11.)

 

최근 고신 교단 총회에 김세윤 교수가 포함된 이신칭의 문제와 관련하여 교회와 신학교수들의 입장에 대한 질의가 상정되었다. 신학위원회는 이에 대해 논의를 했고, 결국 교수회의 신학적 입장을 확인하기로 했다. 하지만 한 총대는 전체 신학교수의 신학사상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했다. 이신칭의에 대한 것과 더불어 언급된 한 내용이 자살에 대한 문제이다. “신대원 교수들 가운데 자살해도 구원받는다고 주장하고...” 아마도 이신칭의와 관련하여 소위 유보적 칭의론을 주장한 김세윤 교수의 “자살하면 지옥에 갈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지옥 갈 것”이라는 발언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페북을 통해 이에 대한 몇 가지 반응을 볼 수 있었다. 비록 큰 이슈가 되지는 않았지만 비아냥거림과 조소적인 반응이 대부분이다. 대체적으로 자살에 대한 발언과 신대원 교수 신학검증에 대해 불편함을 드러내는 반응들이다. 그것들을 실제로 이곳에 옮기는 것이 반론을 제기하는 데 도움 된다고 판단하여 의미변화 없는 선에서 나의 표현으로 다시 적는다: 쓸데없는 문제제기이다. 교만하다. 이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근거나 밝혀라. 개 같은 짓이다. 신학교수들이 동네북이냐. 심판자처럼 말하지 마라. 목사들이 기본이 안 되어 있다. 자살을 막는 교회적 행동이나 해라. 잘 듣고 배워라. 신학교수들을 존중해라.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질문하나. 

 

반응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이런 식의 행태들이 과연 신학적으로, 교회적으로 바람직한지 의구심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과 교회의 부름을 받아 교회 건설을 위해 섬기는 목사들의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정말로 교회를 염려하고 사랑해서 하는 말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렵다. 논의는 균형을 갖춘 반론으로 발전하는 법. 이러한 반응에 찬물을 끼얹어 보련다.

 

1. 김세윤의 칭의론

 

몰매를 맞을 수도 있겠고, 정말 미안한 표현이지만 이것은 쓰레기다. 잘못된 가르침이다. 성경이 말하는 칭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고백이 그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을 따라 가르친 선배 개혁자들의 가르침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 쉬운 말 한마디를 교단 내에서 잘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무엇이 겁나는가? 우리의 표현의 자유는 어디에 있으며, 차별 금지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것을 신의 한 수 운운하며 교회 안에서 강의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신대원 교수들을 초청하여 잘 듣고 배우면 될 것을. 누가 배우지 않는 자들인가? 총회에서 이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총대들인가? 아니면 이 강연의 주최자들인가? 쓸데없는 논쟁과 비생산적인 주제는 바로 공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것을 펼치고 듣는 것이 아닌가? 직분자와 성도들은 모두 자유가 있지만 교회는 자신의 자유를 펼치는 장이 아니다.

 

2. 자살

 

“택하신 자의 구원은 자살해도 취소되지 않는다”. 반응들을 살펴보면 이것이 자살과 관련한 신대원의 일반적 가르침이다. 이 진술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판단은 차치하고 이것을 교회에서 가르칠 수 있을까? 과연 어느 목회자가 이것을 교회에서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인가?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렵고 힘든 시기를 살아가고, 여러 가지 정신적 육체적 질병이 많은 시대를 함께 지나가는 성도들에게 과연 어떤 목회자가 이것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다음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신대원은 교회에서 가르치지 못하는 내용을 배우는 곳인가? 신학과 목회는 과연 분리된 것인가? 그렇다면 교회는 잘못된 줄 알면서도 성도들의 현실 때문에 반대로 가르친다는 것인가? 아니면 신대원이 교회를 아름답게 섬기는 신학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알기로) 초대 교부들이 왜 자살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까지’ 가르쳤는지 그 지혜를 상고해 보아야 할 시점이다. 또 하나, 마치 선배들이 이런 내용을 모른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리는데, 당신들이 말하는 자살과 관련된 내용을 총회 총대들, 우리 선배들이 정말 모른다고 생각하는가? 또 하나 더, 웨민고백서 어디에 이런 가르침이 있는지 날 가르쳐 주면 좋겠다.

 

3. 신학교수의 신학검증

 

신학교수는 교회의 직분자이다. 우리 교회정치에 따르면 신학교수는 목사직의 한 부분이다. 교회를 섬기고, 교회의 안녕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주신 직분이다. 교회의 일반적 직분들과의 유일한 차이점은 한 지역교회가 아닌 전체 교회의 유익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특히 말씀을 정당하게 해석하고, 우리가 받은바 건전한 교리를 지키는 최 일선에 있는 직분자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교사라고도 불리며, 선생님이라고도 불린다. 교회는 이들을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신학교수의 신학검증에 대한 조소들로 인해 우리는 ‘교회의 직분자’라는 관점에서 이 조소들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 직분에 대한 모든 개념을 살필 수는 없지만, 이와 관련하여 알아야 하는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직분자들은 상호권징과 권면 및 책망이 가능하다. 또한 교회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직분은 존경과 의심을 함께 받아야 마땅하다. 생각해보자. 목사와 장로와 집사의 봉사가 평가의 대상이 아닌가? 경중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늘 감시받고 있지 않는가? 조소자들이 욕하는 선배들 역시 매주일 강단에 서서 존경과 감시를 함께 받고 있다. 신학교수는 더 높은 직분인가? 일말의 의심조차 보내서는 안 되는 그런 자리에 위치한 고귀한 자들인가? 신학교는 교회(단)의 목사들을 양성하는 기관이다. 노회가 학생들을 위탁했다고 해서 신학교수들의 신학을 검증할 수 없다는 것이 가능한가? 노회가 목사를 지교회에 파송하였기 때문에 지교회는 지도(?적합한 말을 못 찾겠다)의 대상이 아닌가?

 

뵌 적은 없지만 존경하는 한 선배께서 웨민11장 칭의에 대하여가 우리의 공식입장이라는 확인을 총회에서 해야 했다고 말씀하셨다. 교수회가 교단헌법과 다른 내용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백 번 옳은 말씀이다. 하지만 이것도 한 번 생각해보자. 앞에서 나는 ‘부름’(부르심)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교회 직분자의 부르심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위임(혹은 임직식)식이다. (목사의 경우 개혁교회는 안수(임직)식와 위임식을 구분하지 않지만, 장로교회는 이 둘을 구분한다. 어쨌든) 강도사 인허식, 목사 장로 집사 권사 임직식에서는 웨민 및 교회정치를 따를 것인지 묻는다. 목사 위임식에서는 이것을 따로 묻지는 않지만, 임직 때의 서약을 재확인함으로 이를 확고히 한다. 교회의 부름이, 그리고 교회를 섬기는 것이 신앙고백과 교회정치에 대한 서약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알기에 (틀렸으면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학교수의 임직식은 없다. 서약식도 없다. 교회의 생명력과 직결되어 있는 이렇게 중요한 직분에게,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직분의 한 부분인 이 직분에게 신앙고백과 교회정치를 따를 것인지에 대해 묻지 않는다. 교수로 위임 초기, 특별대우를 하는 셈이다. 전체 교회를 위해 부름을 받아 지교회의 목사와 같이 노회의 파송으로 기관에 위임이 되는데, 이 과정이 없다.

 

오래 동안 신학교수의 신학검증 문제는 총회 의제의 단골메뉴였다. 지금도 그렇다. 무엇인가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최 일선에서 교리를 파수하고, 전체 교회의 안녕을 위해 목사를 양성하는 직분자라면 더 엄격한 요구가 필요하다. 내가 신대원 시절 들었던 내용들 중, 우리 신앙고백과 전혀 상관없는 내용들을 읊어보련다: 관상기도는 개혁주의적이다. 로마가톨릭에 구원이 없는가? 고신교회의 존재 정당성은 없다. 뿐만 아니라 입에 담기 어려운 사건들이 교수 사회와 학생 사회에 있었고,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교수회의 이름으로 이에 대해 사과나 유감을 표명하는 발표와 언급을 들은 적이 없다. 좋은 선생님들이 많았고, 지금도 안부를 여쭙는 분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위적으로 누르던 분들도 다수 계셨고, 반면에 강도사 고시로 인해 조마조마하며 숨죽이며 눈치보고 살아야 하던 동료들도 많았다. 졸업하면 신대원 쪽으로 오줌도 누지 않겠다고 핏대를 올리던 동료들도 있었다. 모든 것이 우리 선생님들 탓이라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으랴마는, 이 정도면 교회가 더 많은 것을 요구해도 할 말이 없지 않는가?

 

몇 년 전 총회에 신학교수들의 목회와 관련된 안건이 올라왔다. 우리 교회정치는 기관목사의 목사 겸직 금지를 말한다. 당회장 허락 하에 임시로 봉사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불가하다. 신학교의 대답은 (내 기억에)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런가? 몇몇 분들이 교단주소록에 기관목사로 이름은 올라가 있으면서 실질적인 담임으로 역할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임시로 했다지만 오랜 기간 동안 그렇게 하고 있지 않았던가? 5-6년, 9-10년이 임시인가? 기관목사의 겸직 금지는 최근에 생긴 조항이 아니다. 1992년판에도 등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금지를 하는 이유를 나는 교권주의 횡포가 아닌 각 직분으로의 ‘부르심’ 때문으로 이해한다. 신학교수는 한 지역교회가 아닌 전체 교회의 유익을 위해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목사는 목사로 부름을 받았기에 장로나 집사의 일을 하지 않는다. 장로는 장로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목사나 집사의 일을 하지 않는다. 집사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개혁 신앙이 이해하는 직분이다. 물론 신학교수도 목사이기 때문에 필요로 하는 곳에서 복음을 증거 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목회는 다르다. 이것이 한 평생을 쏟아 부어도 부족한 일이기 때문에 노회는 목사를 파송하고, 지교회에 위임을 한다. 서류상으로는 기관목사로 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 목회적 역할을 감당 하고 있다는 것은 노회가 같은 사람을 한 교회로, 그리고 동시에 신학교로도 파송했다는 뜻이 된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는 말씀이 어찌 직분의 가장 중심에 있는 자들에게는 해당이 안 된다는 말인가? 목사들의 설교를 우습게 여기고 “나도 설교하겠다”라고 나서는 다른 직분자들이 있다면 무슨 말을 할 것이며,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

 

신학교수의 말을 잘 듣고 배우고, 존경하는 것은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이 부분에 있어 우리 교회는 좀 더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신학교수 역시 동료 직분자들의 말을 잘 듣고 배우며, 존경함이 마땅하다. 신학교수가 교회의 직분이라면 말이다. 개혁주의 교회는 그런 곳이다. 

 

4. 총대

 

총대는 누구인가? 정치하는 집단인가? 총회를 소위 정치판으로 만드는 것도 문제이지만, 총대를 정치하는 집단으로 인식하며 표현하는 것도 문제이다. 우리 신앙고백서는 칼빈의 가르침을 따라 교회에 회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고백한다. 물론 ‘총대’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다. 하지만 교회의 직분자들이 이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라고 고백한다. ‘총대’라는 의미가 포함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인식과 비아냥거림이 신앙고백서를 잘 이해한 것인가?

 

총대는 각 교회, 각 노회의 대표들이다. 노회원들이 투표하여, 가장 연륜이 있고 덕망 있는 분들을 총대로 파송한다. 큰 교회라고 다 총대로 가는가? 못가는 분들도 많은 줄 안다. 이것이 교회의 정치고, 질서이다. 그렇게 우리는 총대들을 노회로, 총회로 파송한다. 표를 통해 뽑았다. 비아냥거리고 조소하는 분들도 투표했을 것이다. 저 노회의 저 목사는 내가 투표한 총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공교회가 그런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느 회에서든지 법대로 결정된 사안은 총회산하교회가 준거할 수 있는 결정이 된다” (이전 판에서는 “...어느 회에서든지 법대로 결정된 사안은 전국교회의 결정이 된다.”)는 표현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것인가? 이런 신학적, 교회적 성격의 총대에 대해 자신과 생각이 맞지 않다고 SNS 상에서 비아냥거리는 것이 과연 목사 혹은 목사 후보생이 할 행동인가? 이것이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인가?

 

직분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정말 엄격한 것이다. 한국교회 문제들을 이야기 할 때 다들 한 번씩은 직분의 문제를 언급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것으로부터 자유 하는 모습이 우리 교회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부족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SNS 상에서도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는 말과 행동이 표현되어야 마땅하다. 유머를 빙자하여 교회를 비방하고, 직분자들을 비아냥거리는 것이 과연 교회를 위한 것인지, 아니 신자다운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님이 보시면 잘했다 칭찬하실까?

 

“감독은...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딛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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