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성 교수의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의 의의
안수강 박사 (백석대학교 교수, 교회사)
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 최덕성 박사의 신간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0, 620면)은 출간과 더불어 한국교회사의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친일파 시각에 따라 날조되거나 왜곡된 한국교회의 역사를 교정하고 교회의 신앙좌표를 바르게 세우려는 목적으로 저술한 책이다. 장로교뿐만 아니라 감리교와 천주교를 포함한 한국기독교의 과거사 청산을 촉구하면서, 교회의 좌표를 바로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 졌다.
저자가 본서를 2000년 초에 발행한 것은 한국교회가 ‘뉴밀레니엄’이라는 역사 선상의 분기점─전환점을 맞이했음에도 친일파 전통과 과거사를 청산하지 않은 채 고착되어 있는 것을 경고한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본서의 저작의도와 저작시기의 상관관계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 책은 한국기독교 친일파 전통을 엿볼 수 있는 몇몇 사건들을 선별하여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다루었다. 친일파 시각으로 기술된 왜곡되거나 날조된 역사를 교정하며 교회의 신앙좌표를 바로 세운다. 장로교 감리교 한국천주교를 포함한 한국기독교의 과거사 청산과제를 제시한다. 과거사를 통절히 참회하며 무너진 양심을 회복하고 실추된 위상을 다시 세우도록 하는 데 초점을 모았다. 기독교 친일파 인사들과 신사참배 거부자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차분한 마음으로 과거사를 검토할 때가 되었다. 입을 열어 진실을 말하고 겸허히 과거와 현재를 검토할 때가 되었다. 한국교회의 친일파 문제와 친일파 전통을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시점에 이르렀다.1)
초판은 총 7편에 걸쳐 38장의 논문으로 구성되었다. 제1편은 ‘양심의 교사’(총 3장), 제2편은 ‘교권주의 전통’(총 7장), 제3편은 ‘주기철과 장신대학’(총 7장), 제4편은 ‘한신대학과 과거사 문제’(총 5장), 제5편은 ‘우물에 독 뿌리기’(총 10장), 제6편은 ‘새 술은 낡은 부대에’(총 4장) 그리고 마지막 제7편은 ‘청산해야 할 과거사, 새 시대를 향한 비전’(총 2장)을 담았다.
편별 혹은 장별 제목들은 대체로 은유적 혹은 비유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내용을 숙지해야 한다. 저자의 내적 메시지는 마지막 제7편의 제37장 ‘조상의 범죄와 자손의 참회과제’에 총괄적으로 함축되어 있으며, 마지막 제38장의 ‘역사바로세우기’는 본서의 궁극적 집필의의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서평자는 저자의 집필 의도를 ‘구조적 도식을 통해 본 전체 논점들’과 ‘주요 이슈들’(issue)로 대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결론에서 전체적인 평가와 저자에게 드리는 몇 가지 질문을 제시하고자 한다. 괄호 안의 숫자는 초판의 면수를 표기한 것이다.
I. 도식을 통해 본 전체 논점
본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 윤곽을 설정해주는 전제적 논거들을 이해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서평자는 이것을 ‘도식’으로 표현한다. 아래의 도식 ① ② ③ ④는 서평자 나름대로 설정한 논거들이다. 이 선행적(先行的) 논거들은 본서를 비평적으로 조명해 볼 수 있는 틀이 될 것이다.
A. 도식 ①: ‘교회부패-사회부패’에 대한 동시적 연계통찰
저자는 교회의 부패상과 사회의 부패상을 연계하여 통찰한다. 부패상을 바라보고 고발하는 그의 시각은 일차적으로는 교회이지만 진일보하게도 교회 밖의 영역까지도 조망하고 있다. 교회와 사회를 유기적 관련 속에서 이해하고 파악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한국교회의 부패상은 기구주의, 형식주의, 교권주의, 성직주의, 영적 도덕적 타락, 분열 등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용어군(用語群)의 형태로 묘사된다.
교회가 말씀중심의 신앙생활에서 떠나 제도화되고 형식화되고, 성직주의와 교회주의 혹은 교회교의 속성을 지녔고(100), 한국교회가 기독교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많은 분열을 겪고 있고 신행불일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윤리의식이 결여되어 있으며 세상의 조롱을 받는다(492-493). 한국교회의 현실은 암담하고 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외쳐지고 있다.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지 않고 민족과 사회를 향한 양심의 교사 역할도 하지 않고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지 못하면 소아시아 교회들처럼 이름만을 남긴 교회로 사라질 수도 있다(563).
저자가 진일보하게도 교회의 타락상과 사회의 부패상을 연계시키는 데는 큰 의미가 있다. 그는 한국사회의 ‘군사독재’, ‘인권유린’, ‘부정부패’, ‘금권선거’, ‘범죄’, ‘폭력’, ‘잔인성’, ‘상호불신’, ‘타락’, ‘거짓’, ‘부정’, ‘이기주의’, ‘향락주의’, ‘빈부격차’ 등 구조악과 윤리적 타락상을 다루면서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유명무실한 기독교인의 책임을 부각시킨다. 이 점은 저자가 교회와 사회를 유기적 관련 속에서 통찰하고 있으며, 은둔주의가 아닌 교회의 사회참여 기능을 피력한 흔적을 드러낸다. 그의 이러한 시각은 사회복음적 차원이 아니라 철저하게 ‘문화의 개혁자로서의 그리스도인’2)의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다음 글은 그의 사회개혁 개념이 사회복음주의 차원이 아니라 복음과 성령의 역사에 근거한 개혁주의 입장임을 천명한다.
복음은 창조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전파되는 곳에는 삶이 변하고 윤리의식이 높아진다. 교인 수가 많아지는 만큼 사회악이 줄어든다. 복음은 사회를 변혁시키고 도덕성을 고취하며 문화를 발전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인구 4명 중 1명이 기독교인이지만 사회에 미치는 도덕적 영향력은 극도로 미미하다. 한국사회의 군사독재, 인권유린, 부정부패, 금권선거, 범죄, 폭력, 잔인성, 상호불신, 타락, 거짓, 부정, 이기주의, 향락주의, 빈부격차 또한 세계에서 으뜸이다(30-31). 민족과 사회의 희망은 복음을 가진 교회에 있다. 한국의 희망은 교회를 구성하는 성경적 실천을 가진 교회들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신앙공동체에 있다(563).
B. 도식 ②: ‘친일전통-교회부패’에 대한 인과적 이해
저자는 시종일관 한국교회가 부패한 배후에는 근본적이고 역사적인 원인이 있음을 논한다. 이것은 이 책 전체의 핵심이기도 하다. 왜 한국교회가 기구주의, 형식주의, 교권주의, 교회주의, 성직주의, 영적 도덕적 타락, 분열 등의 타락일로를 걸어왔는가? 과거사에 대한 아무런 참회고백 없이 교권을 쥐고 교계의 요소요소에 자리 잡은 친일인사들로 인해 친일파 시각, 정신, 기질, 관습, 성격이 한국교회에 자리 잡게 되었다고 본다. 한국교회가 과거사를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교회론적으로 냉철하게 성찰하지 않고, 청산하지도 않은 채 ‘상황론과 불가피론’을 내세워 현실에 안주해버린 몰역사성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교회의 몰역사성 개념은 ‘친일전통’이라는 용어에 함축되어 있다.
한국교회의 병적인 현상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이 도래하게 된 까닭이 있게 마련이다. 최근에 발생한 기독교인 관련 옷 로비 사건, 감리교 김ㅇㅇ 목사 사건, 그리고 ㅇㅇ도지사 사건 등은 이러한 병적인 현상의 일부라고 본다. 이러한 인과관계 도식은 다소 논리적인 비약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으나 앞서 살펴본 ‘교회부패-사회부패’에 대한 동시적 연계통찰 도식에 적용해보면 설득력이 있다.
저자는 ‘친일전통-교회부패’를 인과관계(因果關係)로 이해한다. 역사단절, 곧 배교와 신사참배에 대한 참회와 권징을 통한 거듭나기가 없는 한국교회에 대대로 불순한 전통이 유전(遺傳)되고 있다고 본다. 앞서 살펴본 ‘교회부패-사회부패’에 대한 동시적 연계통찰 도식은 이 불순한 전통의 유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3) “오염된 환경(참회와 권징이 없었기에 오염됨-서평자의 주)이 가져다 준 교권주의, 형식지상주의, 중세기적 미신의 확산은 막기가 어렵다”고 본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기질, 체질, 전통에는 그것을 결정지은 일련의 역사적인 사건들이 있다. 우리의 오늘은 어제로부터 이어졌고 현재는 과거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한 공동체의 기질과 전통은 어느 날 갑자기 형성되지 않는다. 우리의 어제에는 배교, 우상숭배, 백귀난행(百鬼亂行), 민족배신, 비인도적 행위들이 있었고 그것에 대한 진정한 참회고백이나 역사청산은 없었다. 우상숭배를 하고서도 참회하지 않은 상태로 교인들에게 신행일치와 하나님 말씀에 따른 순종과 참회를 가르쳐 왔다. 역사단절(배교·신사참배에 대한 참회와 권징을 통한 거듭나기-서평자 주)의 실패로 인해 한국교회의 혈관에는 불순한 전통이 유전(遺傳)되고 있다. 신앙정기와 민족정기가 회복되지 않고 가치관이 뒤틀린 채로 흘러가고 있다. [중략] 세상 사람들로부터 ‘대한판 가룟 유다’라는 비난을 받는 자들이 참회나 자숙 없이 한국교회를 주도해 오는 동안 친일파 전통이 고착되었다(33).
왜 저자는 한국교회의 오염된 환경이 가져다준 교권주의, 형식지상주의, 중세기적 미신의 확산 등을 논하면서 이른바 오염된 환경의 기원을 친일파 전통에 두는가? 그것도 1930년대 중반기를 그 분기점으로 보는가? 그만한 이유와 근거가 있다. 그가 지적하는 친일전통은 ‘교권주의, 형식지상주의, 중세기적 미신’ 그 자체가 아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자연스런 결과였으며 그 원인은 배교, 곧 신사참배에 있다고 간파한다. 신사참배가 있기 전 한국교회는 높은 사회적 영향력과 도덕적 권위가 있었으나 신사참배를 용납하고 참회 없이 안주해 온 탓으로 갖가지 질병을 유발하게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주장이 근거 없는 것이거나 논리적인 비약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이래 1930년대 중반까지 한국교회는 높은 사회적 영향과 도덕적 권위를 갖고 있었다고들 한다. 한국교회가 이 지경에 이른 데는 여러 가지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현재의 질병, 부조리, 악습이 주로 일제말기 사건과 그것에 대한 역사청산의 부재 그리고 친일파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은 결코 근거 없는 주장이나 논리적인 비약이 아니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는 한국교회의 온갖 질병을 유발했다(31-34).
C. 도식 ③: ‘친일파전통 청산 - 미래의 비전’
저자는 위 도식 ①과 ②에서 주장을 마무리하지 않는다. 만일 거기서 그의 논의가 마무리되었다면 본서는 고발서 혹은 비판서 정도의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저술 의도는 도식 ③: ‘친일파전통 청산-미래의 비전’ 도식에 있다.
저자는 만일 한국교회가 진정한 참회고백과 권징을 통해 거듭나는 과정, 곧 과거사 청산이 있었다면 친일파전통을 단절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도식 ①: 사회부패와 동시에 교회부패, 도식 ②: 인과관계로서의 친일전통-교회부패를 극복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저자의 논의는 진일보하여 비록 지금까지는 과거청산의 작업이 수행되지 못했지만 이제라도 이 운동을 전개해야할 역사적 필연성, 곧 뉴 밀레니엄 맞이하고 있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만약 한국교회가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또 악의 전쟁에 협력한 것에 대해 제대로 참회고백을 했다면 불행한 전통은 단절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적인 자숙과 통회정화를 통해 내적인 갈등 요인을 해소했다면 신앙정기를 회복하고 치리회적 원칙과 질서를 되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34). 과거사 청산과 역사바로세우기 그리고 참회고백은 현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 사회가 광복과 더불어 친일파를 척결하고 민족정기를 회복하고 불순한 전통을 단절했더라면 새 조국 건설과정에서 친일파 문제로 황금과 같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사회적 부조리와 부패가 극성을 부리지도 못했을 것이다(557-558). 죄를 양심적으로 청산하고 참회고백을 하여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고 성경적 기독교 신앙을 회복할 때만 비로소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한국교회는 그 때에 비로소 새 천년기를 자신의 역사의 장으로 만들 수 있다. 교회의 회개에는 적절한 시기는 있지만 유효 시기는 없다(563).
D. 도식 ④: 성경적 ‘조상의 죄-후손의 청산’
저자는 위 도식 ③의 정당성을 신학적─성경적 관점을 가지고 제시한다. 과거사 청산은 “교회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일”이며,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 유지하고 말씀과 성례가 조롱당하지 않도록 하기”(558) 위함이라는 대전제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성경적 근거를 가진 ‘조상의 죄-후손의 청산’ 도식을 전개한다. 이 도식은 도식 ③의 “교회의 회개에는 적절한 시기는 있지만 유효 시기는 없다”는 건설적 논지를 견지해 준다. 다만 그가 예레미야 애가 5장 7절을 인용하면서 의역을 한 점이나 ‘가계저주론’을 언급한 점은 다소 흠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겠으나 서평자가 앞서 정리한 도식 ③을 견지해 준다는 점에 의의가 크다.
성경은 우상숭배에 대한 가르침에서 아비의 죄가 자손 삼사 대까지 이르게 된다(출20:4-6)고 명시한다(553). 우리들의 선조는 죄를 범했습니다. 조상은 가고 없지만 그들의 범죄에 대한 책임은 저희들이 받고 이어가겠습니다(애 5:7)(556). 우리의 죄와 우리 열조의 죄악을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에게 수욕을 받음이니이다. (중략)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단 9:4-19)(556).
II. 친일파 전통 관련 주요 이슈들-교회론적 고찰
본서가 다루는 역사적인 이슈들은 신학적, 교회론적, 정치학적, 사회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들이다. 저자는 이 이슈들을 주로 신학적, 교회론적으로 접근하고, 정리한다. 교회사는 교회론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그의 역사관을 드러낸다. 그것은 교회론적 교회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참회와 새로운 출발을 논할 때 주로 ‘양심적,’ ‘성경적,’ ‘신학적,’ ‘치리회적,’ ‘교회헌법적’(344-345)이라는 용어들을 반복적으로 구사한다. 칼빈의 교회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A. 이슈 ① : 친일전통 단절로서의 공적 참회와 권징론
저자가 논하는 공적 참회와 권징은 폭넓게는 친일전통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며 좁게는 배교, 곧 신사참배를 의미한다. 우선 친일파 전통과 관련하여 공적 참회와 권징론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1. 왜 권징을 논해야만 하는가?: 도식 ③과 ④의 연계성
저자는 공적 참회와 권징의 필요성을 논하면서 칼빈의 신학체계에 입각하여 개혁주의가 주창하는 참교회의 3대 표지를 논한다. 참 교회와 거짓교회를 구분한다. 칼빈의 교회론4)에 기초하여 공적 참회와 권징론을 논하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5) 궁극적으로 도식 ③: ‘친일파전통 청산-미래의 비전’ 도식 ④: 성경적 ‘조상의 죄-후손의 청산’의 연계성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곧 과거사(친일전통)의 청산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고자 하는 적용적(실천적)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한국교회의 권징의 부재를 교회의 타락과 부패상에 직결시켜 설명한다. 더욱이 그것이 “장로교회의 교회론적 기초를 허무는”(74) 처사이며, 이 같은 습성은 친일전통에서 비릇된 것이라고 진단한다.6)
치리회의 질서가 와해되면 권징(penitential discipline)의 시행이 어렵다. 권징이 시행되지 않으면 말씀과 성례 곧 복음이 조롱을 당하게 된다. 권징은 개혁교회의 3대 표지 중 하나이다. 권징의 부재는 교회의 부패, 불명예를 가져오고 하나님이 진노를 유발할 여러 가지 부조리를 연출시킨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기본적 속성인 거룩성, 통일성, 보편성, 사도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 치리회적 무질서는 권징의 부재를 가져오고 권징의 부재는 치리회적 무질서를 낳는다. 신앙실천의 윤리적 결여를 가져온다.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 교회와 교회 사이, 교단과 교단 사이의 끝없는 분열과 무질서를 조장한다. 한국장로교회가 끝없는 분열을 경험해온 가장 중요한 까닭은 이 같은 습성을 가진 친일파 전통의 유전(遺傳) 때문이다(131-133).
2. 친일파 인사들의 참회와 권징 해당 사항은 무엇인가?
저자가 말하는 친일파 전통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 구조적 틀은 배교, 곧 신사참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신사참배 관련 세부 사항들을 방대한 분량으로 정리한다. 해방 직전뿐만 아니라 최근 교계동향 가령 주기철 목사 복권과 복적, 한신대의 역사날조 등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해방 직전과 직후의 친일전통이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다는 것이다.
권징은 친일전통에 입각한 기득권 계층에게 자신들의 교권과 교좌 수호에 결격사유 또는 활동의 제한사유가 될 수 있는 무거운 걸림돌이었다. 친일파 인사들의 참회와 권징은 그 당시(해방 후) 기독교 기득권층의 사적 혹은 공적 참회를 요구하는 사항들이었다. 저자의 분석과 지적은 철저하게 교회론적이다. 장로교 치리회 원칙에 근거해 있다.
참회와 권징을 수행해야 할 친일전통은 과거의 친일유산과 현재적 친일유산으로 대별된다. 과거(해방 전후)의 친일유산으로 인한 친일전통은 다음과 같다.
(1) 우상숭배-신사참배, (2) 황거요배, (3) 교역자들의 신도세례, (4) 배교-신도주의로 신학개조, (5) 민족배신, (6) 백귀난행-황군의 전승기도회, 지원병과 정신대에 나가도록 강연한 일 등, (7) 순정일본적 기독교인 신도교로 개종한 일, (8) 국가의 교회 간섭에 항거하지 않은 일, (9)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동역자를 파면한 일 등, (10) 신자들에게 우상숭배를 강요한 일, (11) 동료교역자와 그 가족에게 무정했던 일 등, (12) 신앙동지와 동족을 돌아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리석은 신앙을 가졌다고 폄하한 일, (13) 참회고백과 권징(자숙)거부, (14) 한부선 목사에게 해벌을 통고한 일, (14) 고려신학교에 대한 모함과 부당한 처사, (15) 치리회 질서(교회헌법)를 무시하고 위반한 일, (16) 경남(법통)노회를 불법으로 단절한 일, (17) 총회가 경남친일파의 손을 들어주어 교회를 분열한 일, (18) 교권주의, 형식지상주의, 교회주의에 빠진 일, (19) 개체교회를 분열 시키고 이간한 일, (20) 고신계 출옥성도들에게 분열의 책임을 미룬 일, (21) 출옥성도들을 분리주의자로 몰아세운 일, (22) 신사참배 취소성명서 채택한 일, (23) 신앙승리자들에게 적대감을 가진 일(564-565).
저자는 친일전통이 고착되고 그것이 현재까지 유전되고 있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해방직전뿐만 아니라 최근 교계의 친일전통적 동향까지도 논한다. 그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위의 문단에서 인용한 것은 원인(cause)에, 아래의 인용한 것은 결과(effect)에 해당된다.
(18) 교권주의, 형식지상주의, 교회주의에 빠진 일, (24) 교회의 기초를 허무는 미신적 결정을 하고 행사를 가진 일-주기철 목사복권 결의와 선포, (25) 순교자를 상품화하고 순교자 영웅주의를 조장한 일, (26) 주기철을 자파의 위상향상과 정통성 확보수단으로 이용한 일, (29) 반세기 동안 공적 참회를 지연한 일, (30) 친일파 전통의 고착을 묵과하고 친일파 인사들의 착종논리를 용납하고 또 교회의 성경적 좌표설정에 무관심한 일(565).
3. 권징의 목적
저자가 공적 참회와 권징의 시행을 주장하는 것은 신학적인 근거와 실제적인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제25장에서 해방 전 새문안교회의 당회록에 기록된 권징결정 사항들을 제시하면서 도덕성과 영적 권위를 지닌 참교회상을 설명한다. 그 내용은 단순히 권징의 역사적 사례들에 대한 집록 수준을 벗어난다. 제26장은 그 유익을 논하는 차원으로 연계된다. 여기에 제25장의 집필 의도가 나타나 있다. 그는 권징을 실시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가 조롱당하지 않게 하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예를 높이기 위함”(387)이라는 대 전제에 있다는 것을 밝힌다. 권징의 유익을 칼빈의 권징론에 입각하여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추악하고 부끄러운 생활을 하는 자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빼앗기 위한 것이다. 그들로 인해 교회의 이름과 머리되신 주님께 치욕과 수치가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둘째, 선한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과 교제함으로써 선한 사람들이 타락하는 일들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곧 나쁜 생활을 보면 바른 생활을 버리고 끌려가기 쉽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셋째, 비루한 자들,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회개케 하기 위함이다. 곧 공적인 참회 권징을 통해 자기 의 악행에 대한 징벌을 받고 매를 맞아 각성하여 유익을 얻도록 하려는 것이다(386).
B. 이슈 ② : 친일전통으로 파악한 주기철 목사 복권·복적
1. 왜 복권·복적이 친일전통의 결과인가?
주기철 목사의 목사직 복권(復權)과 학적 복적(復籍)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마땅한 절차이며 의심의 여지없이 후예들에 의해 추진되어야 할 과업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것이 논리적이며 신학적인 오류를 담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의 지적과 주장은 설득력이 있으며 타당하다. 저자는 복권과 복적 작업이 친일파 전통과 연계되어 있다고 하면서 그 근거를 ‘정치적 행정적 친일파 인사들 중심의 해결과 교권주의,’ ‘형식지상주의,’ ‘힘의 논리’에서 찾는다.7) 곧 한국교회가 과거의 고착된 친일적 사고방식 때문에 복권과 복적을 거행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비판은 비단 주기철 목사의 복권과 복적뿐만 아니라 신사참배 취소성명서 사건, 한부선 목사의 해벌 사건에 대한 논의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한국교회의 과거사는 배도와 우상숭배와 천인공노할 범죄였다. 교회가 신조를 위반하고 여러 가지로 범죄한 것을 단지 행정상의 과오로 여겨 취소하기로 한 것은 이 문제를 성경적 양심적 치리회적 신학적으로 풀지 않고 다만 행정적으로 정치적으로 친일파 인사들 중심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힘의 우열과 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매듭지었다. 교권주의, 형식지상주의가 총회를 철저하게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취소성명서를 채택한 장로교총회의 접근 방법과 방향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제명당한 한부선 목사에 대한 ‘해벌’을 통보하고 과거사 청산의 필요를 제기한 고신파를 축출한 것과 동일하다. 통합측 교단이 주기철 목사 복권을 결의 선포하고 복적을 선포한 것과 일치한다. 한국교회에 온존하고 있는 친일파 전통의 정체를 드러낸 사건이다(345).
2. 복권·복적에 대한 교회론적 고찰
저자는 주기철 목사의 목사직 복권과 학적 복적 문제를 신학적으로, 교회론적으로 논하면서 그것이 ‘원인무효,’ ‘참회 없는 복권작업,’ ‘복권작업의 동기,’ ‘로마교식 교권’의 횡포라는 것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비판한다.
1) 원인무효론
저자는 주기철 목사의 복권과 복적에 관련하여 ‘제명은 원인무효’(58)이며, ‘치리회적 유효성 없음’(122)이며, ‘교권의 횡포’(139)인 동시에 ‘불법이며 무효’(140)라고 한다. 이러한 일관성 있는 주장은 교회론 중심의 신학적 통찰, 교회의 신조에 관한 칼빈의 견해에 근거로 한 셈이다.8) 복권은 오히려 면직을 정당한 것으로 옹호한 셈이 되었으며(75, 107) 과거의 결정에 대한 유효성까지도 인정한 처사(162, 177)라고 주장한다. 그것이 원인무효라는 것을 신학적으로 설명한다.
주기철은 파면되었으나 그 파면은 교권의 횡포이며 원인무효이다.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고 거기에 절하지 말라’는 계명에 기초한 교회가 우상숭배를 거부한다고 목사직을 면직한 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이기 때문이다(139).
2) 참회 부재의 복권작업
위에서 제시한 원인무효론이라는 까닭 한 가지만으로도 친일파 전통의 오류가 무엇인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저자는 계속해서 교권주의가 빚어낸 구조적 부패상을 드러내기 위해 ‘참회 없는 복권작업, 복권작업의 동기, 로마교식 교권’ 등을 논점으로 부각시킨다.
공적 참회 없이 진행된 목사복권 행사는 ‘과거사 청산 없는’ 작업(147)이며, ‘문제의 역사성과 심각성을 모르는’ 작업(171)이다. 저자는 단호하게 묻는다.
조상들의 죄악을 대신하여 석고대죄를 해도 부족할 문제를 다루면서도 단 한 마디의 사죄(謝罪) 표현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도리어 주기철과 그 유족에게 선심을 쓰는 듯한 복권결의, 선언한 것은 무지 때문인가? 무관심 때문인가? 문제의식의 결여에서 비롯된 실수인가? 무엇이 그토록 중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간과하게 했는가?(172)
3) 복권·복적의 동기와 적법성
저자는 복권작업의 동기를 친일파 전통, 곧 교권주의와 형식주의의 표출로 분석한다. 고착된 친일전통 하에서 기구적 연속성과 고전성, 정통성, 적자성의 은전을 확보하려고 한 교권주의적 정치적 발상이이라고 지적한다. 신앙의 후예로서 마땅한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
주기철 목사 복권 선포식은 명백하게도 복권 그 자체에만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주기철을 자파의 인물로 끌어들여 자파의 위상을 높이려고 한 것이거나 아니면 자파만이 주기철의 목사직을 복권할 수 있는 기구적인 연속성(continuity), 고전성(antiquity), 정통성(orthodoxy)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했다. 적자성 확보의 기회로 삼은 것이다(178).
장신대학과 통합측 교단은 저 끔찍한 사건을 다루면서 고작 자기 학교와 자파 교단의 정통성, 적자성 확보를 위한 배타적 선언의 기회로 삼았다(183).
저자는 복권과 복적이 적법성 없음을 논하면서 통합측과 장신대학이 해방 전 장로교단과 평양노회(주기철 목사를 면직시킨 노회), 평양신학교의 법적 승계에 위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복권과 복적을 결정할 수 없다는 점을 주장한다. 동서울노회가 복권을 결정한 일(125)이나 총회장이 복권을 선포한 일(90-91, 125-126), 그리고 장신대학이 평양이 아닌 서울 회기동에 소재한 산정현교회에 복권 공문서를 발송한 일(163) 등은 모두 적법성에 위반된다는 지적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저자가 이런 논지를 전개한 의도는 승계의 의미를 기구적 연속성에 두지 않고 영적, 정신적, 신앙고백적 유산들에 대한 계승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주기철 목사와 동일한 신앙노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장신대학이 주기철의 학적을 복적시킨 것 역시 친일전통에서 비롯된 발상(245)이라고 평가한 것도??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종교개혁자들은 개신교회의 정통성, 곧 기독교 신앙의 정통성, 적자성을 신앙고백적 연속성에서 찾았다. 일제 말기의 신사참배 거부자들은 일제와 우상숭배를 행하는 기존교회로부터 이중으로 공격을 받으면서 성경적 진리 하나를 깨달았다. 교회의 기구적 연속성, 고전성, 정통성은 절대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며 기구적 유전에 집착하는 것은 죽은 전통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정통성을 진리성과 성경적 기초를 가진 신앙에서 찾았다(197).
교부 이레네우스(Irenaeus)는 교회의 보편성과 계승의 의미를 사도적 신앙과 전통 그리고 전파에 두었다. 이러한 보편성 혹은 계승의 의지는 후일 종교개혁자 특히 칼빈에 의해 그 취지가 확연해진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개혁주의적 교회계승론의 의미를 잘 부각시킨다.9)
4) 로마가톨릭 유형의 교권주의의
저자는 복권과 복적 문제를 교회론적 기초를 허물고, 성경적 신앙과 개혁주의 전통 및 장로교의 근본을 위협한 사건이라고 해석한다(89). 죽은 자는 지상교회치리회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136), 장로회 치리원리와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며(92), 미신적 행사이다(243). 천주교의 치리원리를 수용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본다.
베드로의 열쇠는 이처럼 이승에 있는 자를 저승으로 보내기도 하고 저승에 있는 자를 이승으로 보내기도 한다. 천상천하의 전횡적(專橫的) 교권을 가졌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죽은 자를 치리의 대상으로 삼는다. 죽은 지 반세기가 넘은 장로교 목사 주기철의 목사직 복권을 결정하고 성대한 선포식을 가진 것은 죽은 자를 치리의 대상으로, 교회법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86-87).
C. 이슈 ③: 친일전통으로 파악한 교회분열
1. 인과론과 책임론
저자는 고신교단의 출현을 ‘이탈’로 보는 대다수 교회사가들의 시각에 대해 강력하게 항변한다. 고신측에 대해 3세기 말의 노바투스주의자들과 4세기 초의 도나투스주의자들처럼 교인 구성원의 성결과 완전성이 교회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분리주의관을 가지고 분열해나갔다는 견해를 취하는 대다수의 교회사가들에 대해 강력하게 반론을 제기하면서 민경배, 김의환, 이상규 교수 등을 비판한다(477-482). 이러한 항변의 정당성을 이슈 ① ②에서 본 것처럼 친일전통에서 거론함으로써 분열의 문제에 대해 인과론과 책임론을 제기한다.10)
1) 인과론
분열을 다루는 저자의 주장은 본서 초두의 ‘몰아냈고’(20)라는 표현에 함축되어 있다. 저자의 관심은 ‘몰아냈고’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저자는 본서의 초두에서부터 그 원인을 단호하게 “친일파 전통”이라고 한다.
교계 친일파의 횡포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출옥성도들을 교단 밖으로 몰아냈고 교회를 분열시키기까지 했다. 친일파 전통이 자리 잡은 곳은 기존의 한국교회사이다. 다수의 저명한 한국교회사가들은 친일파의 당파적 시각과 뒤틀린 가치관을 가지고 역사를 기술했다. 참회고백의 필요성을 말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은총의 신비를 빌미로 독선주의자로 매도했다. 한국교회 안에 온존하는 친일파 문제를 다룰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 까닭은 친일파 전통이 너무도 강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20).
2) 책임론
분열에 대한 인과론에 이어서 책임론도 크게 다루고 있다. 저자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는 비고신측 장로교회들의 역사진행 과정이 바로 그가 말하는 책임론을 입증하고 있다고 본다. 분열의 근거가 친일파 전통에 있다고 평가하는 것은 그의 접근의 전제이자 분석의 전체적 논거, 곧 틀이기도 하다.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은 두 얼굴을 가졌다. 조직 기구의 결정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길 때가 있는가 하면 자파의 이해가 걸린 문제에 대해서는 그 치리회 질서를 초월해 버린다. 한국장로교회가 끝없는 분열을 경험해 온 가장 중요한 까닭은 이 같은 습성을 가진 친일파 전통의 유전(遺傳) 때문이다. 작은 땅 코리아, 그것도 사우스 코리아에 무려 128개(1996년 현재)의 장로교단들이 존재하게 된 것은 교회의 질서와 권징이 무너진 것에서 비롯된 불행이다(133).
2. 고신측의 관심 : 연합정신과 영적재건 정신
고신측에 대한 저자의 견해는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고신측의 연합정신이며, 다른 하나는 기득권을 가진 친일전통 수호자들에 의한 불법적 축출이다.
1) 연합정신
저자는 교회사가들이 고신분열의 책임을 고신측에 전가하려는 태도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고신측의 연합정신’을 주요 논거로 삼는다. 본래 고신측은 분리 혹은 이탈을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기존교단에 남으려 했다. 다만 친일전통을 앞세운 기존 기득권자들의 교권주의에 의해 교회의 표지인 참회와 권징이 파기되면서 분열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앞서 논한 ‘인과론’과 ‘책임론’은 고신측이 아닌 기존 기득권자들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일정한 공적 참회고백 과정은 참된 교회의 필수 요건이기 때문에 타협 혹은 양보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고신파는 장로교회 재건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들은 신사참배자들과 함께 하나의 교회를 재건하기를 희망했다. 다만 신사참배를 죄로 인정할 것과 교회의 규례에 따라 일정한 공적 참회고백 과정을 거치는 것이 양심회복과 교회재건의 필수 과제라고 보았다. 교계 친일파는 광복을 맞이한 조국의 땅에서도 변함없는 교권적 폭력을 행사했다. 신사참배를 죄로 인정하지 않았고 참회고백을 거부했다. 신사참배 문제를 제기하는 자(고신측-서평자 주)를 책벌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394-395).
2) 영적, 정신적, 신앙고백적 재건
저자는 한국장로교회의 첫 번째 분열이 친일파가 출옥성도들 중심의 고신측을 불법적으로 축출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한다. 그 축출은 출옥성도들의 영적이고 신앙고백적인 교회의 재건에 대한 관심을 교권주의자들이 억압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제27장 ‘ㅇㅇㅇ 물세례 사건’과 친일파와 출옥성도들 간의 갈등에 대한 설명에서 그것을 논하고 있다. 아래의 글은 두 그룹간의 ‘신앙고백적’ 혹은 ‘교회주의적’ 태도를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출옥성도들은 교회의 신앙고백적 영적 재건과 치리회 질서 회복에 관심을 두었다. 반면에 친일파 인사들은 오로지 조직기구의 복구와 교권확보에 관심을 가졌다. … 전자는 신앙고백적 전통을 유지했고 후자는 교권주의적 교회주의적 전통을 유지했다. 이 차이는 종교개혁가들과 로마가톨릭교회의 차이와 같다. 이 두 흐름은 현재도 한국교회 안에 변함없이 자리 잡고 있다. 주기철 목사 복권 사건은 후자의 신앙노선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다(403).
D. 이슈 ④ : 친일전통으로 파악한 교회주의
1. 교회주의, 교권주의, 형식주의의 고착
저자는 교회주의, 교권주의, 형식주의를 논하면서 ‘친일전통에서 나온 기질’(144), ‘강조의 오류’(fallacy of accent)(141), ‘힘의 논리’(142), ‘일제가 남긴 교회교의 잔영’(174) 등의 표현들을 사용한다. 교회주의와 교권주의 그리고 형식주의가 고착되어 현재까지 유전되고 있는 것에 우려를 표명한다. 간간이 ‘역사단절’의 부재 혹은 ‘역사청산’의 부재도 이와 같은 의미이다. 이러한 전통의 고착과 유전이 고신측이 제안한 성경지상주의의 영적 교회재건(참회와 권징을 통한 역사단절)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 점에서 저자는 두드러지게 이것을 인과관계로 설명한다. ‘친일전통’이 그 원인이며 ‘교회주의, 교권주의, 형식주의’를 결과로 본다.
아래의 글에서 저자는 교회주의와 교권주의 그리고 형식주의를 염려하는 출옥성도들의 자세를 선지자적 경고로 평가한다. 미래를 내다보는 통시적 안목을 지닌 것으로 본다.
교권주의, 형식지상주의, 제도주의를 골격으로 하는 친일파 전통은 한국교회의 기질로 자리잡고 있다. 출옥성도들은 광복 직후에 이미 한국교회의 이 같은 위험성을 예견하고 경고 한 바 있다.’ 순복음운동을 교란시키는’ 방종적 신앙생활을 경계할 것을 천명하면서 한국교회가 ‘성경지상주의’로 돌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성경 교훈보다도 총회나 노회의 결의와 또는 목사의 말은 지상명령으로 준행’하는 교권주의와 형식지상주의를 경고했다. 선지자적인 안목을 가진 경고였다(144).
2. 교회주의에 의해 파생된 현실 문제들
저자는 한국교회의 교회주의, 교권주의, 형식주의가 오늘날에도 유전되고 있으며 교회의 부패상과 사회적 타락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11) 교회주의와 교권주의 그리고 형식주의에 의한 부패의 구체적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1) 교회의 부패상
저자가 지적하는 교회의 부패상은 교파분열, 옷 로비 사건, 감리교 김ㅇㅇ목사 사건, ㅇㅇ도지사 사건, 저질의 신학교육·자격미달의 교역자 양성·교역자 책임의식 빈약·기복신앙·윤리의식 부재·교회성장 제일주의, 주기철 목사 복권과 복적, 도덕적 영향력 상실, 도덕적 권위 상실, 권징실시 불가, 역사날조, 친일파전통의 고착과 묵과, 교회의 성경적 좌표 설정에 대한 무관심 등이다.
2) 사회의 타락상
사회의 타락상은 군사독재, 인권유린, 부정부패, 금권선거, 범죄, 폭력, 잔인성, 상호불신, 타락, 거짓, 부정, 이기주의, 향락주의, 빈부격차 등이다(30-31).
E. 이슈 ⑤: 친일전통으로 파악한 사회참여의식
1. ‘신사참배반대=사회참여’ 도식
사회참여 문제를 논할 때 흔히 보수진영은 근본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사회참여에 눈을 뜨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1960년대 잣대로, 그것도 자유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보수주의를 폄하 하는 판단이다. 오히려 교육활동과 의료활동, 민족계몽운동, 문서선교, 독립운동, 개화사상, 105인 사건과 3·1 독립운동, 농촌 사회지도, 야학운영, 계몽단체 조직, 문맹퇴치운동 등 초창기의 활동적 운동은 보수진영의 사회참여의식을 증거해 주는 사례들이다. 물론 1930년대 중반쯤부터 다양한 신학사조와 사회복음주의 기류가 형성되면서 보수진영의 대응이 차츰 근본주의적 입장으로 선회한 점은 사실이다. 또한 사회개혁이 개인윤리 차원이었는가 아니면 범사회적(공동체적, 구조적) 차원이었는가 하는 점도 하나의 평가의 잣대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한국교회의 친일파 전통을 논함에 있어 ‘신사참배반대=사회참여’와 ‘신사참배반대=반친일전통’의 도식을 세워 사회참여 차원에서의 새로운 해석의 시야를 열었다. 보수주의에 대한 박봉배의 도피주의론과 정하은·김재준의 사회참여부재론(253-256)12)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보수진영(특히 반신사참배 진영)의 3대 사회참여와 정치참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아래의 글은 ‘신사참배반대=사회참여’의 도식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신사참배반대 무의미론자들, 저자에 따르면 박봉배, 정하은, 김재준 등에 대한 항변이기도 하다.
신사참배 항거자들은 그 항거가 교회를 사랑하는 일이며 국가와 교회에 대한 신자의 윤리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박해 아래에서 그리스도의 주권(Lordship)을 입으로 가슴으로 몸으로 고백하며 고난을 받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윤리적 실천이었다. 한상동이 신사참배 운동을 ‘정치운동’으로 전국적으로 전개하자 거창의 주남선도 이에 따라 나섰다. 자신들은 오로지 종교적 이유로 항거한 것이지만 그 행위의 결과는 매우 정치적인 것으로 파악되는 것은 역사가 의도된 행동보다는 획득된 결과로 평가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가장 적극적인 사회참여, 정치참여였다. 개화기 독립사회운동, 3·1 운동과 더불어 일제치하에서 성공한 3대 사회참여, 정치참여 중 하나였다. 그것은 종교적 동기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사회적인 의미를 지니고 영향을 주었다(270-272).
2. 일제치하의 사회참여: 황민화 배척
저자는 일제치하 신자들의 진정한 사회참여를 항일투쟁에서 찾는다. 당시의 사회참여의 진정성은 ‘배도,’ ‘야합,’ ‘민족배신’을 극복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했다는 것이다. 복음의 순수성을 상실한 사회복음주의적 노선은 사회참여에 실패했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 시각이다.
저자가 사회참여의 의의를 논하면서 순수한 ‘복음주의’와 ‘황민화 극복’ 양면을 전제한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이 양면성은 서평자가 앞서 파악한 ‘신사참배반대=사회참여’와 ‘신사참배반대=반친일전통’의 도식과도 궤를 같이 한다. 이 도식에 의하면 친일전통의 울타리 안에 있는 한신대학측의 김재준·정하은에게는 사회참여신학이 부재했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진보주의 신학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신사참배를 행하고 부여 신궁 건설을 위해 부역을 아끼지 않은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책임을 다한 것이 된다. 사회참여를 위해서라면 배도, 야합, 민족배신이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이다. 김재준·정하은이 이 순교자들에게 ‘신학이 없다’고 한 것은 사회복음주의 신학이 없었다는 뜻이다. 김재준·정하은의 참여만능주의, 사회복음주의는 복음의 순수성을 거부하는 또 하나의 극단이며 배타주의이다. 사회참여신학을 내세우는 진보주의자들은 정작 사회참여에 실패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황국의 교역자 양성기관들을 세워 황민화에 기여한 것을 두고서 사회참여를 한 것으로 보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굳이 성공한 것이 있다면 친일적 야합과 배도적 반민족적 사회참여였다(274-275).
더욱이 한신대학의 역사날조와 은폐(311-313)13)의 비양심적 처사가 친일파 전통이 고착된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311)이라 비판한다. ‘신사참배=사회참여’와 ‘신사참배= 반친일전통”의 도식이 요원(遙遠)함을 강조한다.
F. 이슈 ⑥: ‘신사참배-성경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대결구도
저자는 ‘신사참배-성경관’의 연계도식을 통해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대결구도를 정리한다. 성경의 영감범위의 축자영감, 영감방식의 유기적 영감, 그리고 실용주의에 대립하는 항존주의(恒存主義: perennialism)의 기초 위에 형성된 보수주의 진영과 상황성, 주관성, 역동성에 입각한 자유주의 진영은 대립구도로 나타났다고 분석한다.
저자는 정통신학과 맥락주의 혹은 자유주의 신학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식론적 특징에서 찾는다(218-220). 수진수난 성도들의 항쟁의 배후에는 개혁파 정통주의 성경관이 자리잡고 있다고 본다. 그들의 항쟁을 성경관과 관련시킨다. 주기철을 비롯한 수진수난 성도들의 항쟁의 배후에는 근본주의 곧 개혁파 성경관이 자리잡고 있었다.14) 그들의 “사상은 그 신봉하는 장로파 기독교리의 독선적 해석으로 출발하여 성경을 여호와 신의 명시묵시(明視默示)의 성지(聖旨)를 여실히 기재한 것으로 그 의탁된 신의(神意)는 전부가 절대로 현세에 현현되어 그 예언은 장래에 필히 실현될 것으로 확신했다”(223-224).
저자의 ‘신사참배-성경관’의 도식을 통해 본 신학적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대결 혹은 갈등 구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축자영감, 유기적 영감, 항존주의에 기초한 근본주의 5대교리, 신사 참배 반대, 수진수난은 궤를 같이 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우상숭배자”라고 비난한다.
상황성, 주관성, 역동성에 기초한 신사참배, 친일활동은 궤를 같이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신바리새주의자”라고 비난한다.
이러한 갈등 구조는 실용주의의 상황윤리관이냐 아니면 항존주의의 의무론적 윤리관이냐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보수진영은 성경영감론을 근간으로 항존주의의 입장을, 자유주의 진영은 실용주의를 근간으로 상황윤리관을 채택한다.
저자의 상기 도식, 곧 보수주의·자유주의 구도에는 난점이 있어 보인다. 가령 신사참배는 했지만 근본주의 5대 교리와 축자영감론을 수용하는 다수의 인사들도 자유주의 그룹에 분류할 것인가 하는 점(가령, 후일 신사참배를 한 번 했다고 고백한 박윤선 박사의 경우)이다. 간하배 교수의 『한국장로교신학사상』에서도 나타난다.15)
IV. 비평적 평가
1. 고무적인 기여
1) 역사회생통찰(歷史回生通察)
서평자는 본서를 처음 대했을 때 그 제목 자체에서부터 거북함을 느꼈고 처음 몇 장을 읽어 가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동의하기보다는 도리어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논지가 성경적, 신학적 정당성을 지녔고, 저술 의도 역시 어거스틴적 직선사관에 입각한 과거·현재·미래의 조명과 참교회론(세 가지 표지)에 있다는 점을 간파하면서부터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본서의 공헌은 역사회생통찰(歷史回生通察)이다. 신사참배 결의와 해방 후 참회와 권징이 없었던 교회의 처신을 기점으로 한국교회가 참교회의 표지를 지닐 수 없게 되었다는 지적에 대해 공감한다. 진일보하게도 이러한 역사적 잔재가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결정지은 동인이 되었다고 하는 진단도 탁월한 분석이다.
서평자는 저자의 이러한 안목을 ‘역사회생통찰’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미 해방 이후 반세기가 지났고 당대의 주역들도 대부분 별세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져 가고 있으며 더군다나 후세대는 일제통치하에서의 신사참배 문제를 생소한 사안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굳이 과거사를 들추어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역사를 회생해 내어 ‘과거를 통한 현재의 조명’과 이에 바탕을 둔 ‘미래설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이다.16) 어거스틴의 직선사관은 현재에 비중을 두면서도 과거를 반성의 차원에서 그리고 미래를 기대의 차원에서 접근한다.17) 어거스틴의 관심은 현재에 있다. 저자가 역사회생적 통찰로 접근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그의 역사참여의식이 투철함을 보여준다.
최덕성 교수의 역사의식은 어거스틴의 사관과 일맥상통한다. 아무리 반세기 전의 잊혀진 과거사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특히 부정적 과거사를 발굴하고 성찰하고 그것을 가지고 현재를 조망하는 작업은 사가(史家)의 마땅한 책무이다.
2) 교회론적 조명 : 권징론을 통한 참교회상 회복
한국장로교회는 저자가 지적한 대로 ‘권징을 교회의 3대 표지 중 하나로 보는 개혁주의 전통에 선 교회’(378)이다. 권징이 경시되면 ‘말씀과 성례가 조롱 받게 된다’는 저자의 논지는 그가 칼빈의 교회론을 충실하게 받아들인 증거이다.
신사참배에 관한 권징론에 대해 이견 내지 반론을 제기하는 학자들 혹은 목회자들의 주장은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대등소이하다. 분열 직후에 김인서 목사가 쓴 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신앙생활』 1955년 제6-8호에 게재된 “회개 거부란 무슨 말인가?” 하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교회분열의 책임을 고신측에 물었다. 그의 회개론은 내적 참회에 기초하고 있다. 회개를 ‘의식(公的)이냐’, ‘마음(心, 內的)이냐’의 문제로 접근하면서 공적 참회와 권징을 주장하는 고신측의 자숙안이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회개는 마음에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공적 참회의 필요를 주장하는 고신측의 태도를 로마가톨릭적 발상이라 혹평했다.
무엇을 가지고 회개 여부를 말하는가? 신사참배 죄는 출옥성자의 앞에서 회개하여야 사함받는다는 로마가톨릭적 생각이라면 이는 예수의 피를 모독하는 것이다. 고신파 분열의 첫째 원인은 출옥성자란 영웅심이요 조선인 망국적 당파근성이다. 고신파만 회개하고 장신파는 회개하지 아니하였다는 정죄는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내리는 판단이다.18)
김인서의 주장은 ‘법이냐 사랑이냐’를 놓고 고민하며 양자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점에서는 일면 의미가 있다고 하겠으나 그는 ‘가시적·유형적·제도적 교회’에 불가시적 교회 못지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명백하게도 공적 권징을 확립한 칼빈의 교회론에 역행(逆行)하고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 질서, 그리고 악한 세력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하여 성경적 원리에 따른 공적 권징(딤전 5:20, 마 18:17)을 참교회의 표지에 포함시켰다. 로마 교황권을 규탄하며 로마교회는 적그리스도의 나라(살후2:4)로,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한 것도 로마교회가 말씀, 성례전 그리고 권징의 표징을 잃어버린 데 대한 비판이었다.19) 그가 교회 분열을 우려하여 “교회의 결함을 이유로 버리면 안 된다”고 한 것은 ‘참 교회상’을 전제하여 죄 용서를 실천할 기회를 준다는 취지였다.20)
서평자는 평소에 칼빈의 『기독교강요』(제4권)에 나타난 참교회론·거짓교회론을 숙지하면서 왜 한국교회에는 권징이 시행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모 교회의 중·고등부를 지도하던 시절에는 음주한 4명의 학생에 대해 권징을 했다. 남학생 3명과 여학생 한 명이 어느 날 새벽 교회 옥상에 술 취한 채 잠을 자고 있다가 사찰집사에 의해 발견되었다. 사찰집사는 새벽기도 때 이를 당시 교육전도사였던 나에게 조심스럽게 알려주었다. “전도사님 모르는 척해 주세요” 하면서 통고했다. 권징을 받은 네 명의 학생들은 모두 성가대원이었다. 성가대원 자격정지 및 교회 출석정지의 결정을 내렸다. 이들 네 사람은 별도로 내 집을 방문하여 통회하면서 권징을 철회해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한국교회에 권징의 전통이 사라진 역사적 배경은 개인적으로 고찰해본 적이 없다. 신학수학 중(약 9년간) 이 영역에 대해 연구해 볼 기회조차 없었다. 특히 본서에 조목조목 열거된 새문안교회의 당회록에 나타난 다양한 권징사례들, 주기철 목사의 권징시행 사례들은 현 한국교회가 권징을 회피하는 의도적 혹은 불가항력적 사유들을 조명해볼 수 있는 좋은 지침이다.
서평자는 현재 시무하는 교회의 ‘성경강해반’ 교육 중(고린도전서 11장에 있는 성찬식에 관한 내용) 권징에 관련된 사안이 있어서 『한국교회 친일파전통』, 364-369쪽을 소개했다. 새문안교회의 당회록(권징록)에 나타난 다양한 권징사례들과 주기철 목사의 권징시행 사례들을 소개했다. 그리고 어느 주일의 1, 2부 예배에서 사사기 2장 5-15절을 본문으로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라는 제목으로 신앙전수를 강조하면서 적용단계에서 신사참배의 죄에 대한 참회부재를 조명했다.
본서는 칼빈주의에 속한 목회자라면 필독해야 할 도서이다. 권징론을 통한 참교회론 정립을 위해서라도 그러하다. 단어구사, 문체, 가혹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비판, 타 자료의 일방적 인용(특히 민경배의 저서) 등을 핑계하여 멀리해서는 안 될 책이다. 지적받을 점과 인정받을 점이 공존하지만 인정해야 될 점이 지적받아야 할 점을 구실로 가려져서는 안 될 것이다.
현 한국교회는 실제로 권징을 시행하지 않고 있으며 참교회상을 말할 때 권징을 교회의 표지로 내세울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심지어 특수사항에 대해 제한적으로 행해지는 권징마저도 객관성, 타당성의 의문이 제기되는 경우가 많다(가령 노회분립 혹은 제명처분과 같은 특수사항들). 이러한 처지에서 저자가 ‘권징을 통한 참교회상 정립론’을 주창한 것은 한국교회의 현실을 정당하게 진단한 것이며 추구할 바람직한 미래상까지 합리적으로 제언한 의미 있는 일이다.
3) 의미심장한 도식 제공
저자는 한국교회의 부패상을 논하면서 교회의 부패상(기구주의, 형식주의, 교권주의, 성직주의, 영적 도덕적 타락, 분열 등) 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의 유기적 관련 속에서 사회의 부패상을 동시에 연계하여 논한다. 과거사에 대한 아무런 참회고백 없이 교권을 쥐고 교계의 요소요소에 자리 잡은 친일인사들 때문에 친일파 시각, 정신, 기질, 관습, 성격이 한국교회에 자리 잡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점과 비록 아직까지는 과거청산의 작업이 수행되지 못했지만 이제라도 이 운동이 전개되어야 할 역사적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조상의 죄-후손의 청산’을 논하고 있다. 현재와 미래를 지향한 역사신학적 분석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고신측 입장을 변증,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를 대상으로 논리성과 객관성을 가지고 설득력 있게 접근하고 있다.
2. 조언
1) 거부감을 야기하는 용어와 표현
앞에서 우리는 이 책에 대한 가치와 의의를 세 가지로 정리한 바 있다. 저자의 논지와 논거에 동의하면서 그의 성경적 역사관과 교회론적 접근을 조망해 보았다.
그러나 책 이름에서부터 거부감을 느꼈고 초두 몇 장을 소화해낼 때까지도 이러한 느낌이 지속되었다. 충분히 과학성과 객관성에 입각하여 제시된 논지와 논거는 학자적 교역자적 양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득력 있는 논지나 논거라 할지라도 감정적으로 격화되어 있거나 본인의 의도는 아니었더라도 자칫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는 인상을 주는 글(특히 통합측 교단과 민경배 교수에 대해)은 효력을 갖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고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데도 서평자가 처음에 거부감을 가졌던 점과 완독 후에도 이런 느낌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거부감을 야기 시키는 용어 혹은 표현들은 다음과 같다. 한국교회 친일파전통(書名), 친일분자(35), 민족배신 솔선여행(率先勵行)(45),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이단자(53), 우상숭배를 시행하기로 한 과거총회(55), 종교재판(57), 복권-종교개혁자들에 대한 반역(89), 목사작위(94), 더러운 창녀(109), 영적 간음을 행하는 집단(113), 음녀(114, 282), 한풀이(137, 181), 일제의 창기(137), 상품화(183), 로마가톨릭교회관의 시녀(208), 정조를 군국주의에 갖다 바친 음녀(282), 창녀의 구차한 변명(312), 일제 충견들(318), 잡종신학(323), 친일파 인사들(338), 막가파(345), 간음하고 남의 애첩이 된 여인(345), 우상숭배를 강요한 총회(351), x오줌통(393), 인격파탄(401), 야, 이 xx들아(401), 사생아(421), 왕따(425), 가룟 유다들(427), 백귀난행을 저지르던 친일파 인사들(496), 황민화 운동의 선봉장(519), 둔갑(550) 등이다.
2) 타 자료의 비판적 인용
저자의 비판 대상은 교단적으로는 통합측에, 교회사가로는 민경배 교수에 집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가 타 자료를 인용하는 기술은 가혹할 정도로 비판적이라고 느껴진다. 민경배의 경우만을 예로 들어보자. 민경배는 서평자의 은사이며 논문 지도교수이기도 하다. 연세대학교 재학 당시에 서평자가 민경배 교수에 대해 가졌던 인상은 신사참배에 관한 한 결코 저자의 평가와는 같지 않다. 저자는 민경배의 저서를 인용해 가며 “민경배는 배도 야합 민족반역의 행위를 슬기로 평가하고”(357), “민경배는 홍택기의 과거사 청산방법에 격찬하고”(390), “민경배는 칼빈의 교회론 혹은 참회론을 단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것 같다. 권징조례를 전혀 읽어보지 못한 것 같다”(391)고 혹평했는데 이는 민경배의 일면만을 본 데서, 그것도 단지 저자 자신의 입장에서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민경배에 대한 비판은 민경배가 상황성을 중시했다는 전제하에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나 저자가 평가한 것처럼 그가 신사참배를 ‘슬기’로 본 것도 아니었으며 ‘격찬’한 것도 아니었다. 민경배가 신사참배 당시의 상황성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나 결코 신사참배 그 자체를 의로운 일로 본 적은 없다. 그는 신사참배 행위에 대해 ‘몰민족적 몰신앙적 난행’(저자의 ‘백귀난행이라는 표현과 비교해 볼 것)이라고 평가했고 ‘교회역사의 전면을 흐려’놓는 일이라 보았다. 다음의 글이 신사참배에 관한 민경배의 이러한 견해를 증거하고 있다.
일제는 처음 신사의 비종교성을 설명하는 편법에서 출발하였다.(중략) 이것이 1930년대에 이르면 동방요배(東方遙拜)라든가 국기게양, 심지어 신책(神柵)의 교회 내 설치, 구약성서의 폐기, 주일의 폐기에 이르기까지 실로 기독교의 본질 자체를 위협해서, 여기 따르지 않는 자에 대한 가혹한 핍박이 따르게 되었다. 이때 일부 교인들의 신사참배와 그런 행위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고자한 전향 행위의 몰민족적 몰신앙적 난행이 눈에 띄어 교회역사의 전면을 흐려놓고 있었다. 공교회의 신사참배 가결, 캄캄해진 일제 말기 한국역사를 더욱 비탄에 젖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암담과 왜곡과 황잡 속에서 깊은 성서적 신앙에 투철한 이들이 순교의 길에 나서고 있었다.21)
3. 질문
서평자는 저자의 논지와 논거들에 대해 신학적으로 또 신앙적으로 깊이 공감한다. 성경의 기초 위에서 어거스틴적 직선사관론(역사신학적 전개)과 칼빈주의 교회 표지론에 근거한 참교회론을 일사분란하게 전개한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의문점들이 없지 않다. 몇 가지 사안들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 싶다.
첫째, 저자는 신사참배를 분기점으로 한국교회가 1930년대 중반 이전은 높은 사회적 영향력과 도덕적 권위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 이후로는 갖가지 유발된 질병을 지닌 모습으로 평가한다(31-34). 이는 친일전통과 신사참배의 연계성을 강조한 나머지 무리하게 시대를 양분한 것이 아닌가 싶다. 1920년-1930년대 당시 교회상황에 대해서 1924년경의 이대위, 1930년경의 『종교와 생활』의 편집인이었던 최승만, 1933년 『신앙생활』의 주필이었던 김인서 목사22) 등은 물질주의의 만연(이대위), 의식적, 미신적, 분립적, 이기적 교회상(최승만), 영적 윤택의 부재(김인서)를 고발하였다.
基督의 敎가 入하야 一般社會에 福利를 깃친 것은 일일이 枚擧키 難하다. 비록 그러나 그런 運動의 精神과 그런 犧牲의 潛勢力이 아직까지 우리의계 存在하냐고 무러보면 우리의계는 그 名詞밧계는 업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 心에는 堅하고도 또 固한 物質主義가 꽉 차기 때문에 金錢이 잇는 者는 條件업시 別의 待遇를 밧게 되고 勞動者는 條件업시 또한 同等의 待遇를 밧지 못하게 되니 이것은 現時敎會의 事情이요 이것 때문에 그 結末은 宗敎破産論이 起한 것이 안이냐.23)
왜 現代 우리 基督敎會가 彼此에 사랑이 업스며 義롭지 못하며 바르지 못하며 熱情이 업스며 殉敎의 精神이 업는가 그럼으로 現代의 朝鮮敎會는 儀識的이요 迷信的이요 分立的이요 利己的이라는 말을 듯게 되는 것이다. 묵고 썩어지고 냄새나는 生活에서 새롭고 新鮮하고 香氣나는 高尙한 生活에 나가기를 바란다.24)
敎會-비록 外側의 組織이 完備하다 할지라도 內容의 故障이 생겻는지라 여게저게서 醜雜한 일이 드려남을 가리우지 못하며 敎人의계 靈的潤澤이 업는지라 쌀쌀한 經緯와 뻔뻔한 敎權이 맛닷는 대로 이 敎會 저 敎會에서 싸흠소리가 놉하젓나니 이것이 輓近十餘年 동안 醜聞과 紛爭으로 記錄되는 不名譽의 敎會史이엇다.25)
그 밖에도 최태용은 『천래지성』(天來之聲, 1925)에서 도덕의 무력과 종교의 부패를,26) 『개벽』(開闢, 1925)에서는 회칠한 무덤과 같은 예루살렘의 조선이라고 비판하였다.27)
둘째, 한국교회의 교권주의, 교회주의, 성직주의 등 폐단이 친일전통에서 비롯되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19) 일리가 있다. 그러나 유교사관의 부정적 구도(가령, 지배와 피지배, 수직적 명령체계, 당파와 당론, 특정 가문의 세도정치 등)28)와 더 관련성이 깊지 않겠는가? 한국교회의 교권주의, 교회주의, 성직주의, 물질주의 등은 이미 1933년 이전 단계에서도 보편적 현상이었다.
셋째, 저자는 총회나 노회의 결정이 불법인 경우 칼빈이나 루터가 가톨릭에 저항했던 것처럼 불복해야 된다는 논리를 전개한다(107). 고신교단의 설립이 칼빈·루터의 종교개혁과 같은 맥락인가?(마치 로마가톨릭으로부터 개신교가 분리해나갔듯이) 적절하지 않은 비유인 것 같다. 칼빈·루터의 종교개혁은 ‘분리’라고 보아도 흠이 되지 않는다. 신학적으로 정당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신측 교단의 별도설립이 신학적(성경영감론, 참교회론, 역사신학적 관점 등)으로 정당하다면 ‘분리’라고 표현한들 무슨 흠이 되겠는가? 불법적인 축출을 문제 삼는 경우 항시 자기 측의 정당성만을 옹호하여 상호 논쟁과 불신, 비판과 대립양상만이 고질적으로 반복, 지속될 것이다. 축출을 당하지 않는 이상, 흠 있는 교회라는 점을 감안하여 연합을 강조했던 칼빈의 입장을 심사숙고했더라면 더 바람직하지 않았겠는가? 당시 상황을 체험해 보지 않은 믿음의 후진인지라 이런 지적을 하기가 송구스럽기도 하다.
넷째, 근년의 분열을 포함한 한국교회의 분열원인을 초지일관 친일전통에 두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은가? 장로교단이 백 수십 여 개의 교단으로 분열된 것에 대해 친일파 전통과 유관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합동/통합 분리는 친일파전통 때문이라기보다는 주로 세계교회협의회(WCC) 문제에 관련된 것이었다. 따라서 분리는 친일파전통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문제, 정책방향(정치성) 등 다방면의 변수에 기인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다섯째, 일제치하의 한국교회를 ‘중세 가톨릭교회보다 훨씬 더 배교적’이라며(123) ‘혼합기구적 종교기구요 불건전한 교회’이며(115) ‘더러운 창녀’로(109 ff.), ‘음녀’로(113 ff.) 묘사한다. 합동·통합·기장 교단을 ‘순일본적기독교’로 묘사한다(122, 129). 그렇다면 신사참배한 한국교회가 중세 가톨릭교회보다도 더 타락했다는 말인가? “당시의 교회가 역사적 오점을 가졌으나 정통성을 지닌 교회였다”고 한 민경배 교수의 말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신사참배 자체를 정당화할 사람은 없다. 만일 신사참배가 정당한 일이라면, 그리고 종교적 혼합주의가 성경적이었다면, 오늘날도 신사참배는 지속되어져야 한다. 비록 공적 자숙안이 총회에서는 기각되었으나 내적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나름대로 통회하며 자숙을 한 사람들(공적 자숙안대로 한 것은 아닐지라도)은 어떻게 볼 것인가? 물론 이러한 사적 참회는 개혁주의적 공적참회와 권징론을 결코 만족시키지 못한다. 비성경적 차선책이다. 만약 총회가 자숙 안을 통과시켰다면 그 결정에 따라 공적 회개에 참여한 사람들도 다수 있었을 것이다. 로마가톨릭교회는 현재도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제도적으로 우상숭배적 요소들을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는 신사참배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다만 당시의 상황성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가톨릭의 교회관과 개신교의 교회관을 같은 궤로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의 통합·합동·기장 그리고 분열된 장로교파 대부분 교회가 순 일본식 신도기독교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는데(122, 129), 이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동일시의 개념은 사상, 전통, 이론(신학)의 전수 등의 동반을 의미하는데 현재의 통합·합동·기장 그리고 분열된 장로교파들이 해방직전 일본식 기독교와 사상, 전통, 신학을 물려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합동측 목사인 서평자는, 선교차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발언이기는 하나, 배일감정이 각별한 사람이다.
여섯째, 총회 혹은 신학교의 정통성과 계승을 논하면서 법적 근거를 집요하게 논하는 것은 결국 제도화를 견지하는 셈이 아닌가?
한편 이와는 달리, 해방 후 신학대학의 정통성 문제(147, 155) 혹은 노회와 총회의 계승문제 등을 법적 근거가 아닌 신앙적 위치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자세도 무리가 있지 않은가? 가령, 초대 가톨릭교회와 현재의 로마가톨릭교회는 그 신앙과 신학이 판이하게 다르지만 현재의 가톨릭교회가 초대교회를 계승하지 않았다고 단언하기는 곤란하며 설사 신앙과 신학이 변질된 점을 들어 계승에 이의를 제기한다 할지라도 그 시대적 한계선(가령 몇 차 종교회의까지)을 긋기가 어렵다.
마지막으로, 교권주의·형식지상주의·교회주의적 발상(가령 통합 측, 250)이 친일전통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았는데, 그렇다면 실상 보수진영이라고 할 수 있는 합동측이 가장 심한 분열양상을 보이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역시 친일전통 때문인가? 끝
주
1) 최덕성,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0), 4-6.
2) 저자의 사고는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론에 입각한 사회참여이지 사회복음주의를 표방한 것은 아니다. 문화의 개혁자로서의 그리스도인과 관련하여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에 대한 의미는 다음 책을 참고하라. 리차드 니버(H. Richard Niebuhr), 『그리스도와 문화』, 김재준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6장.
3) 저자는 554쪽에서 ‘유전’이라는 용어에 대해 조심성을 기한다. “가계 저주론이나 안수례의 효용성, 가령, 배교자가 준 안수를 원죄의 유전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은 무리이다”고 함으로써 ‘유전’이라는 용어 사용의 진의를 변증적인 차원에서 해명한다.
4) 칼빈은 교회는 표지에 의해 알 수 있다고 보았고 ‘감독직의 임무-말씀으로 가르침, 성례전 집례, 거룩한 권징’ 이 표지들에 근거하여 로마교회를 적그리스도로,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간주했다. <기독교강요> 제4권 7:23-30.
5) 칼빈의 권징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기독교강요』 제4권, 12:2-5): 1. 교회징계의 단계 : 가정을 방문하여 경고와 충고를 준다. 증인들 앞에서 두 번째로 경고한다. 교회법정 곧 장로회 앞에 불러 공적 권위를 더욱 엄히 경고한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를 경멸하는 자로 여기고 출교시킨다(마18:15-17). 2. 숨은 죄와 드러난 죄 : 아직 공개되지 않은 죄의 경우 그 사람만 상대하여 권고한다(마18:15). 드러난 죄는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한다(딤전 5:20). 3. 가벼운 죄와 무거운 죄 : 무거운 죄를 징계하기 위하여 경고, 책망, 더 엄한 대책을 강구한다. 4. 교회징계의 목적(이것에 대해서는 아래의 공적 참회 및 권징론에서 논할 것이다).
6) 교회의 기초로서의 권징론을 논한 그의 주장에 대해서는 그의 저서 3, 56, 62, 76쪽 등을 보라.
7) 1930년대 후반의 한국교회는 일제와 결탁하고 그 후광 하에서 교권을 이용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그것을 강요했다. 일제기독교에 동화하고, 이른바 대동아전쟁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등의 타락상을 보였다. 저자는 현재의 주기철 목사 복권과 복적 작업 역시 여전히 교권을 남용한 친일전통의 횡포와 다를 바 없다고 본다. 복적 해프닝은 일제가 남긴 교권주의, 교회주의, 교회교의 잔영이다(174).
8) 교회의 신조에 관한 권세 중 회의에 관하여(『기독교강요』 제4권, 8-9장): 목자들의 결점이 회의들을 오류에 빠뜨렸다. 성경에 의해서 가부를 결정해야 한다. 니케아 회의(789년)의 오류 - 성상복구명령, 입법권에 관하여(『기독교강요』 제4권, 10장): 인간이 제정한 법 중 용납여부의 식별방법 - 모든 의와 거룩의 완전한 기준은 하나님의 뜻에 있으며 하나님을 알면 선한 생활을 완전히 알게 된다.
9) 안수강, “초대교회의 윤리적 전통에 대한 소고-이레니우스를 중심으로 한 비교 연구”(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1), 66-69. 자세한 내용은 Irenaeus, “Against Heresies” in Richardson Cyril C.(ed.), Early Christian Father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을 보라.
10) 인과는 축출의 원인과 결과이며, 책임은 축출의 책임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고신측을 축출한 교단에 적용된다.
11) 앞의 II. A. 도식 ① : 동시적 연계통찰로서의 ‘교회부패 - 사회부패’ 도식을 참고하라.
12) 저자는 269쪽에서 박봉배, 정하은, 김재준 등이 ‘신사참배거부 항쟁자들의 저항이 어리석고 불필요한 희생이었으며 사회참여에 비하면 계명준수, 곧 제1, 2계명 준수를 무의미’한 것으로 보았다고 평가한다.
13) 저자는 『한신대학 50년사』(1990)는 다섯 가지의 역사날조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303-309). ① 충량유위(忠良有爲)한 황국(皇國)의 기독교 교역자 양성 현 조선교회가 요구하는 건전한 교역자 양성, ② 학교설립 취지와 교육이상은 한국민족과 한국교회가 새 역사를 맞을 준비작업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한 점, ③ 역대 이사장 명단에서 일본인의 이름을 제외한 일, ④ 전직 교수명단에서 일본인 교수들의 이름을 삭제한 일, ⑤ 이사진 구성에 대한 기술이 사실과 다른 점 등이다.
14) ‘저자의 신사참배-성경관’ 도식과 견해를 같이 하는 대표적 학자는 김남식 교수를 들 수 있다. 김남식은 한국교회의 분열이 신사참배 문제가 교권문제와 맞물려 분열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고 진단하면서 신사참배에 대한 해석문제는 경건차원 이상의 지속적 신학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신사참배에 대한 해석문제는 ‘경건’의 문제로 취급될 것이 아니라 신학의 문제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이것이 교권과 직결되어 한국교회 분열의 결정적 요인으로 나타났다. 신사참배 문제는 그 당시 단회적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처리문제로 인하여 한국교회의 분열의 직접적 도화선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김남식, 『신사참배와 한국교회』, 서울 : 새순출판사, 1990, 187).
15) 성경관을 둘러싼 보수·자유구도냐, 신사참배에서의 보수·자유구도냐 하는 문제이다. 성경관과 신사참배 문제를 동시적으로 볼 때 어떻게 구도화 할 것인가? 하비 콘(Harvie M. Conn), 『한국장로교신학사상』(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7), 51-110의 ‘자유주의 신학’을 보라. 간하배 교수의 보수와 자유의 구분점은 무엇인가? 때로는 신학적인 기준(가령 성서무오설 여부) 혹은 정치적인 기준(일본에 동조, 신사참배) 그리고 때로는 교파(장·감) 등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보수와 자유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모호하게 느껴진다.
16) 실상, 참회와 권징을 도외시한 주역들은 후세대 신학생이나 성도들에게 신사참배문제를 깊이 있게 교육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질 못했다.
17) “과거는 지나갔으니 현재에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현재에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며 현재일 뿐이다”는 시간론이다.
18) 정인영 편, 『김인서저작전집』 1 (서울: 신망애사, 1973), 154.
19) 존 칼빈, 『기독교강요』 제4권, 7:23-30.
20) 상게서, 1:10-16.
21)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5),15-16.
22) 더욱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문헌을 참고하라. 민경배, 『교회와 민족』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1), 249-252.
23) 이대위, “民衆化할 今日과 合作運動의 實現”, 『청년』, 4.4, 4.7.
24) 최승만, “宗敎와 生活,” 『청년』, 11.11.
25) 김인서, “조선교회의 새동향”, 『신앙생활』, 1933년 3월호, 5.
26) 최태용, “아- 하나님이여 朝鮮을 救援하시옵소셔,” 『天來之聲』, 창간호 (1925. 6.), 1-2.
27) “에루살넴의 朝鮮을 바라보면,” 『開闢』 6.7(1925), 55-61.
28) 이러한 양상은 일찍이 19세기 말 선교사 아펜젤러의 눈에도 심각하게 비춰졌던 한국의 고착된 사고구조였으며 일기에도 유교의 교리를 적용한 병폐로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분을 간파하며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억압적이고 보잘 것 없는 통치체계를 가진 나라로 평한 바 있다(244-245, 1901년 1월 필라델피아 강연). 또한 아낙네의 중노동을 슬픈 운명으로 묘사하고(45-46, 1887. 4. 20). 정부의 착취와 비보호로 한국인들이 게으르며 가난하다는 지적을 통하여 그릇된 ‘통치관-노동관’ 을 비판했던 점(246, 1901년 1월 필라델피아 강연)도 변질된 유교사관의 부정적 구도를 생각해볼 수 있는 안목을 준다: H. G. Appenzeller, 『자유와 빛을 주소서』, 노종해 역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89). 괄호 안의 숫자는 본서 면 수와 연월일을 의미한다.
위 안수강 교수의 서평논문은 고려신학대학원이 발행하는 신학논문집 『개혁신학과 교회』 제10호 (2000)에 실려 있다. 아래의 글은 위 글에 대한 저자 최덕성 교수의 소감문이다. 『개혁신학과 교회』 제10호, (2000)에 게재되어 있다. 역사 기록으로 남길 목적으로 저자의 소감문을 서평에 덧붙여 수록한다.[편집자 주]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의 현주소/ 최덕성 박사
안수강의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서평논문을 읽고
졸저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2000)은 일제말기의 과거사와 관련된 한국교회의 역사왜곡을 논의한다. 친일파의 잔재가 한국교회의 이곳저곳에 고래등의 심줄처럼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밝힌다. 템플턴 상을 수상한 한경직 목사의 참회고백과 한부선 선교사에 대한 교권의 횡포를 다루는 것으로 시작하여 장로교 통합교단이 행한 주기철 목사복권 사건 그리고 고신파가 독선신앙을 과시하면서 한국장로교회로부터 분리해 나갔다고 하는 역사날조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사건들을 역사신학적으로 평가한다.
친일청산은 우리 사회의 미해결 과제인 동시에 한국기독교계의 미해결 과제이다. 필자가 위 책에서 한국교회가 지금이라도 과거사를 청산하고, 공적인 참회고백을 통해 양심의 교사다운 권위를 회복할 것을 촉구한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단운 정체성을 회복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책은 발간되자마 교계의 화두로 부상했다. 기독교계 언론사들이 일제히 출간 소식을 보도했다. 기독교 텔레비전 방송, 기독교 라디오 방송, 기독교 인터넷 방송은 물론이며, 주요 기독교 신문들이 이 소식을 알렸다. 일간지 『국민일보』와 『문화일보』는 상대적으로 긴 서평을 실었다.
이러한 가운데, 교회사학자 안수강 목사가 비평적 서평논문을 썼다. 안수강 목사의 논문은 교회사가다운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탁월한 관찰력과 분석력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가 교회론적인 관점으로 교회사를 접근하면서 친일파 시각으로 날조되고 왜곡된 기존의 한국교회사를 교정하고 교회의 신앙좌표를 바르게 세우려는 데 목적을 두고 저술했다는 점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다.
안수강 서평의 탁월성은 위 책이 다루는 주제들을 도식으로 파악한 데서 돋보인다. 서평자는 저자가 교회의 부패와 사회의 부패를 연계시켜 통찰하고, 친일전통과 교회의 부패를 인과관계로 보고, 친일파 전통의 청산과 미래의 비전을 연관시키고,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조상의 죄와 후손의 청산과제를 파악한 것을 간파한다. 한국교회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는 여러 가지 불순한 요소들을 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을 간파한다. 한국교회가 교회주의, 교권주의, 교회교주의에 빠져 있는 원인에 대한 필자의 지적을 역사회생통찰(歷史回生洞察)과 권징론을 통한 참교회상 회복의 관점에서 파악한 것도 탁월하다.
안수강은 저자가 한국교회가 역사청산을 통해 거듭나야 한다는 것과 고신분열이 민족사적인 차원에서도 다루어져야 할 심각한 사건이었다고 보는 점들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의 역사관이 “교회론적 교회사관”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의 교회사관이 실상은 그것을 넘어서는 특별한 역사관이라는 점은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의 신앙고백교회사관에 대해서는 추후 상론할 것이다.
안수강은 여러 가지 탁월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다. 친일파 전통이 한국교회 안에 얼마나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한국교회 교회사학자들의 역사인식이 어느 정도로 왜곡되어 있는가를 드러내고 있다.
안수강의 질문과 평가는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2000)에 대한 상당수 교회사가들의 견해와 그들의 역사인식을 대변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안수강에 대한 필자의 답은 위 책에 대해 갖는 독자들의 의문들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는 서평자가 지적하는 점들 대부분이 한국교회를 철저하게 장악하고 있는 친일파 전통이 가져다 준 그릇된 역사인식과 그릇된 평가로 보인다. 과거사와 관련하여 한국교회의 왜곡된 역사 인식을 대폭 수정하고 한국교회사 시각과 패러다임을 성경적으로 전환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는데도, 도리어 그것을 결함으로 평가한다. 그의 서평이 지적하는 점들은 아래의 점들은 오히려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의 현주소를 감지(感知)하게 한다.
첫째, 서평자는 용어와 표현들이 거부감을 야기한다고 지적한다. 아무리 설득력 있는 논지나 논거라고 할지라도 감정이 격화되어 있거나 자칫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는 인상을 주는 글은 효력을 가질 수 없다. 서평자는 저자의 논지와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하면서도 위 책을 처음 대했을 때부터 시종 거부감을 느꼈다고 한다. 거부감을 주는 용어 32가지를 구체적으로 나열한다: 한국교회 친일파전통(書名), 친일분자, 민족배신 솔선여행(率先勵行),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이단자, 우상숭배를 시행하기로 한 과거총회, 종교재판, 복권-종교개혁자들에 대한 반역, 목사작위, 더러운 창녀, 영적 간음을 행하는 집단, 음녀, 한풀이, 일제의 창기, 상품화, 로마가톨릭교회관의 시녀, 정조를 군국주의에 갖다 바친 음녀, 창녀의 구차한 변명, 일제 충견들, 잡종신학, 친일파 인사들, 막가파, 간음하고 남의 애첩이 된 여인, 우상숭배를 강요한 총회, 똥오줌통, 인격파탄, 야, 이 새끼들아, 사생아, 왕따, 가룟 유다들, 백귀난행을 저지르던 친일파 인사들, 황민화 운동의 선봉장, 둔갑 등이다.
책이 출간되기 전에 원고를 읽은 이만열 교수(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표현이 거칠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어떤 역사학자는 한국교회가 그동안 취해온 행태를 생각하면 이 책의 표현이 너무 부드러워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고 평했다. 다시 말하면, 위 책이 다루고 있는 역사적 사건의 성격과 특징을 고려해 볼 때 거칠게 여겨지는 표현들이 반드시 거칠다고 할 수 만은 없다는 것이다. 거칠게 여겨지는 용어와 표현들은 저자가 만들어 낸 것들이 아니다. 대부분 교회사에 이미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이다.
필자의 위 책은 대중 독자의 읽기(readability)를 고려하여 저술되었다. 수사적(rhetoric)인 접근방법을 다소 가미했다. 친일파 문제를 다루는 대중적 책이 어찌 맥박이 고동치는 표현을 마다하겠는가. 교역자들과 기독교인들이 저지른 배교, 우상숭배, 백귀난행, 민족배신, 비인도적 행각들을 어찌 소금에 절여져 숨이 죽은 듯한 문체로 기술해야만 하는가? 그런 문체로는 역사 기술은 자칫 사실을 정확하게 드러내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의도적으로 특정 문체에 따라 저술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객관적’인 역사 기술에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왁자지껄한 한 남대문 시장과 자갈치 시장의 모습을 그려내야 할 작가가 그들의 사용하는 토속적인 용어들 대신에 가지런한 학자들의 용어로 숨죽이면서 묘사한다면 그 생생한 현장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다.
표현이 거칠다고 느끼는 독자는 자신의 기존 시각자체가 이미 친일파 오리엔테이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다루는 주제가 한국교회의 친일파 전통과 교만과 패역을 다룬다. 이러한 주제를 정의의 맑은 눈을 가지고 논의하는 일이 어찌 나약하고 맥없는 표현만으로 진행될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교회사 연구는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19세기의 실증주의 역사 연구와 같은 무미건조한 사실들의 나열로 진행되지 않는다. 역사기술은 족보나 연대기를 기술하는 것과 같은 단조로운 작업이 아니다. 생명력을 가진 역사 재현이며, 재구성이며, 가치 판단이며, 평가이다. 역사 기술에서 용어나 표현을 부드럽게 하면 역사 자체를 왜곡할 수 있다. 나치 정권이 유태인 600만 명을 “학살했다”고 기록하는 것과 “죽였다”고 하는 것은 동일한 사건에 대한 유사한 평가이지만 그 중 하나는 그릇된 역사 기술이다.
둘째, 다른 자료를 인용하고 논할 때 가혹할 정도로 비판적인 태도를 지닌다고 평가한다. 특히 민경배 교수에 대한 저자의 평가가 옳지 않다고 하면서 그가 신사참배를 “슬기”로 본 것도 아니며, “격찬”한 것도 아니며, 그 자체를 “의로운 일로 본 적도 없다”고 한다. 민경배가 신사참배 행위에 대해 몰민족적 몰신앙적 난행이라고 평가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증명하는 몇 가지 전거(典據)를 제기하고 있다. 서평자는 흥미롭게도 자신이 민경배의 제자이며 석사학위논문 지도교수였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저자의 책을 정확하게 읽지 않은 데서 비롯된 오류라고 생각된다. 저자는 민경배가 신사참배 그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았다고 비판한 바 없다. 그가 친일파 교회 시각을 가지고 역사를 그릇되게 평가하고 결과적으로 한국교회를 잘못 지도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민경배는 친일파 인사들의 배교와 우상숭배 행위를 “슬기”로 평가하고, 심지어 그것을 그 나름의 신앙적 행위로 평가한다. 신사참배 사건과 관련하여 “기독교 신앙이라도 난시(亂時)에 순교한 신앙이 있고, 역사 안에서 가능한 생존과 유지의 틈을 찾아 그 행간을 슬기와 인내, 역사적 사명으로 의연하게 살아가는 신앙이 있다”(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 53)고 한다. 저자는 친일파 전통에 충실한 민경배의 회색주의적이고 양시론적이며 비신학적인 시각을 비판했다.
민경배가 홍택기 류의 친일파 시각에 충실하다는 것은 “신사참배 회개의 문제는 각인이 하나님과 직접 관계에서 해결할 정질의 것이라고 단언”한 홍택기의 주장에 “반박 못할 정연한 논리와 신학이 있었다”고 예찬하면서 출옥성도들을 극도로 폄하한 데서도 드러난다(제26장, 375쪽의 내용과 각주에 실린 전거를 참고하라). 그는 일제말기 사건과 광복 후의 그것과 관련된 것을 다루는 거의 모든 글에서 친일파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서평자가 자신이 개혁파 정통주의에 충실한 것으로 알려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장로교 합동측 교단에서 장립을 받은 목사이면서도 민경배의 이러한 친일파적 궤변과 발상을 발견하지 못하는 점이다. 자기 자신이 스승의 친일파 시각과 굴절된 학풍에 충실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친일파 전통이 그 만큼 강력하게 한국교회의 지식인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셋째, 서평자는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사건 이전에 높은 사회적 영향력과 도덕적 권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저자도 위 책에서 그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도덕성과 사회적 영향력의 정도의 차이가 두 시대 사이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는 주장은 호소력을 가질 수 없어 보인다. 서평자는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이대위, 최승만, 최태용, 그리고 “한국교회의 말쟁이” 김인서가 당시 교회의 문제점들을 지적한 것들을 열거한다.
그러나 그가 열거하는 증거들은 오늘날의 교회와 1930년대 이전의 교회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있는 근거로 삼기에는 불충분하다. 그 당시 교회 상태에 대한 몇몇 비판적인 문헌이 있다고 하여 양 시대의 교회가 동일한 도덕적 수준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세포적인 접근이다. 차라리 양 시대의 도덕적 상태에 대한 일련의 통계자료가 있다면 그것을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훨씬 더 호소력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 광범위한 역사적인 자료를 제시할 필요가 없듯이,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도덕적 상태의 심각성이 신사참배 사건 이전의 한국교회의 그것 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통계를 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상태가 신사참배가 행해지던 그 이 전의 상태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넷째, 서평자는 한국교회의 교권주의, 교회주의, 성직주의 따위의 폐단이 친일전통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주장이 일리는 있지만, 유교적 전통에 더 깊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하고 지적한다. 교회의 도덕성 상실이나 분열은 어느 한 가지 이유만으로 발생하지는 않는다. 한국교회가 도덕성을 상실하고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데는 여러 가지 까닭들이 있을 것이다. 로마가 멸망한 원인이 단순하지 않듯이 한국교회가 도덕성을 상실하고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까닭도 다양할 것이다. 유교적 발상이나 당파 혹은 세도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원인을 따지자면 원천적으로는 우리가 범죄한 아담의 자손이라는 데 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에는 그것을 가져온 여러 가지 이유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까닭이 있기 마련이다. 로마의 멸망은 정치적, 경제적, 인종적, 문화적 심리적 요인들과 관련되어 있다. 식민지에서 착취해 온 것들 때문에 로마인들이 열심히 노동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었고, 따라서 자식을 낳지 않음으로써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국민이 줄어들었다는 이유도 있다. 게르만 용병을 끌어들였으나 그들의 동족과의 싸움에서 최선을 다할 까닭이 없었던 이유도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로마의 멸망은 기강과 도덕성이 와해되고 우상숭배가 난무한 것이 가장 중요한 까닭이었다. 한국교회가 이 지경에 이른 가장 중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학문의 왕자는 일반화(generalization) 작업이다. 저자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그 답을 책 전체에 걸쳐 제시하고 있다.
다섯째, 서평자는 고신교단의 별도 설립이 칼빈이나 루터의 종교개혁과 같은 것이라면, 그것이 잘못이 아니며, ‘분리’라고 표현한들 무슨 흠이 되겠는가 하고 지적한다. 옳은 말이다. 신사참배거부운동과 광복 후의 고신운동은 칼빈이나 루터의 종교개혁운동과 일치한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교회사가들이 한국장로교 첫 번째 분열의 책임이 마치 고신파가 “3세기 기독교인들”처럼 극단적인 교회관을 가지고 분열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 데 있다. 한국교회는 과거사 청산 문제와 관련하여 성경적으로 하자고 하면 독선주의라고 폄하하고, 교회의 헌장이나 규칙에 따라서 하자고 하면 율법주의라고 하고, 양심의 법에 따라서 하자고 하면 바리새주의라고 비난해 왔다. 장로교 첫 번째 분열은 고신파가 분리한 것이 아니라 친일파가 그들을 제거한 사건이다. 반민족적 사건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저명한 교회사가들조차 고신파가 독선적인 신앙을 과시하면서 분리했다고 기술한다. 저자는 고신분열을 ‘흠’으로 보지 않는다. 저자는 한국교회의 이러한 교만과 패역을 바로잡고, 날조된 역사를 고쳐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여섯째, 근년의 한국교회의 분열을 초지일관 친일파 전통에 두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지적한다. 합동/통합의 분열은 세계교회협의회 문제와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은 세계교회협의회를 둘러싼 교회의 신앙노선 문제와 총회신학교 교장 박형룡 박사가 신학교 부지를 불하 받는데 사용될 거액의 로비자금을 사취당한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한국교회의 분열의 원인이 단지 친일파 전통에만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냉철히 생각해 보자. 한국교회의 대변적인 정통주의 신학자 박형룡이 신학교 대지를 불하받기 위한 거액의 로비자금을 묵인한 것은 어떤 전통에서 비롯되었는가? 그것도 다름 아닌 “선지학교”의 부지를 불법으로 불하받으려는 목적으로 신자들이 헌금하여 보낸 선교비를 사용하려고 했다. 선지학교와 신학교장의 비리는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박형룡이 고려신학교의 교장에 취임했다가 서둘러 떠난 사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고려신학교를 이탈한 것은 친일파와 손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는 강의실에 개혁주의 교회론을 가르치면서 참회 권징을 필수적인 요소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실제에서는 과거사 청산─참회권징을 필수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박형룡은 기회주의적이고 영웅주의적인 태도는 한국교회의 친일파 전통 고착에 이바지했다. 배교, 우상숭배를 하던 자들이 광복 후에 공적인 참회고백을 하지도 않은 채 반공주의를 시은소로 삼아 신속히 변신하여 애국자 노릇을 할 수는 구실을 제공했다. 결국 장로교 첫 번째 분열(고신분열)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박형룡의 제자들이 70년대 말과 80년대 초에 장로교단을 갈라먹기 식으로 나누어 가진 것을 주목한다. 치리회의 질서를 예사로이 무시하고, 현실적인 이해관계 앞에서는 성경의 가르침이나 교회의 신학과 신앙고백은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전통이 합동측 계열 교회의 하나의 성격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도 본다. 스승의 기회주의적인 발상과 교권적 집착은 제자들에게 힘으로 교회를 다스리려는 자세를 심어준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박형룡의 제자들 일부는 새 천년기에 들어서서도 총회장의 멱살을 잡아끌고 아귀다툼을 하는 따위의 혈투를 벌렸다. 결국 교단을 세 개로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는 그들은 각각 신학교를 따로 세웠다. 과연 이러한 일들이 일제하에서 배운 “슬기”와 기회주의적인 태도와 무관할까? 교권주의와 기회주의는 친일파 전통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저자는 위 책에서 그것들이 결코 과거사와 친일청산의 실패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논했다.
일곱째, 서평자는 과연 일제치하의 한국교회가 과연 중세 가톨릭교회보다 훨씬 더 배교적이었으며 음녀였는가 하고 지적한다. 민경배가 “당시의 교회가 역사적 오점을 가졌으나 정통성을 지닌 교회였다”고 한 말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고 말한다. 사실 지금까지 일제말기의 한국교회의 교회론적인 성격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한 사람이 없다. 필자가 최초로 그러한 작업을 하고 있으며, 그 연구를 통해서 얻는 결과는 민경배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이다.
민경배는 이 문제를 교회론적으로, 신앙고백적으로, 역사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단지 친일파의 당파적 시각으로 접근하고 판단한다. 일제말기의 한국교회는 고대교회 마르시온주의보다 더 이단적이었다. 배절, 변절, 훼절이라는 단어로 묘사될 수 있는 집단이 아니었다. “이단,” ‘배교,” “음녀”라는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며 신학적으로, 역사적으로도 타당하다. 민경배의 시각과 저자의 시각 중 어느 것이 “객관적”인 역사 평가인지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있기를 기대한다.
여덟째, 서평자는 현재의 통합, 합동, 기장 그리고 분열된 장로교파의 대부분의 교회가 순일본식 신도기독교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고 지적한다. 이 문제는 위의 책 제14장 “정통성과 유전”에서 상론하고 있다. 장로교단의 총회연차수 표기, 장신대와 총신대의 설립연도와 졸업회수 표기, 주기철의 목사복권, 주기철 학적 복적 따위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외형적 연속성이나 정통성 개념에 입각하여 보면 대부분의 한국교회 교단들이 일본기독교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공적인 참회고백이나 역사단절이 없었다는 사실은 더욱 이 점을 뒷받침한다. 저자가 조상의 범죄와 후손의 참회고백 그리고 공적인 참회고백과 과거사 청산을 강조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제도적, 기구적, 외형적 연속성에 집착하는 교회관을 탈피해야 성경적 기독교를 회복할 수 있다.
아홉째, 서평자는 성경관을 둘러싼 보수주의·자유주의 구도가 신사참배에 대한 태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고 지적한다. 때로는 신학적인 기준(가령 성서무오설 여부) 또는 정치적인 기준(일본에 동조, 신사참배) 그리고 때로는 교파(장·감) 등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보수와 자유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모호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만사를 보수주의·자유주의 구도로 파악하는 것은 총신대학에서 오랫동안 교수 사역을 한 간하배 선교사와 그의 제자들의 학문 활동에서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총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박용규 박사의 『한국장로교사상사』는 이러한 접근방법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역사연구에서 일반화는 항상 예외적인 것을 전제로 한다. 인문과학의 도식은 자연과학의 도식과는 다르다. 대개 그렇다는 것이지 완전히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진보주의는 독일 나치 정권하에서 그 타협적이고 야합적인 속성을 드러냈고, 일제말기 한국에서도 동일한 태도를 보였다. 사무라이형의 일본기독교도 마찬가지였다. 독일과 한국에서 그리고 일본에서 목숨을 걸고 불의에 항거하던 진리의 증인들은 한결같이 정통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북한공산 통치 초기에도 그 권력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던 교역자들은 한결같이 진보계 인사들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진보주의계 신자들이 높은 성경관을 가진 보수계 신자들 보다 훨씬 더 타협적이었다고 하는 단정하는 것은 무리한 판단이 아니다.
안수강의 서평논문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서평자가 저자의 논지와 논거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고 하는 진술이다. 주장은 옳지만 기분은 나쁘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아마도 위 책을 읽는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 특히 친일파 전통 아래 있는 독자들이 가지는 일반적인 느낌일 것으로 생각된다. 말은 옳지만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이 충성을 바치는 교회─교단이 그처럼 불의한 과거사와 불순한 전통과 날조되거나 왜곡된 역사인식을 가졌다는 것을 수용하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친일파 전통은 이처럼 강력하게 한국교회를 사로잡고 있다. 지식인들의 사고만이 아니라 그들의 감정조차 통제하고 있다. 역사왜곡과 역사평가의 오류는 정당하지 않은 느낌에 기초한 선(先)이해를 가지고 과거사에 접근하는 데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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