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숙한 여인의 표상
추석이면 많은 여성이 잠언에 등장하는 ‘현숙한 여인’이 될 것을 요구 받는 모양이다. 잠언 마지막 장에 나오는 이 여인이 되려면 (1) 돈을 잘 벌어 와야 한다, (2) 집안의 일들도 잘해야 한다, (3) 남편 주변 사람 관리도 잘 해주어 남편이 입신양명하는데 결정적 역할도 해야 한다.
이런 여성을 ‘현숙한 여인’으로 번역한 것은 과잉된 번역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 이유는. 첫째, 카일(חָיִל)이라는 이 남성 어휘를 ‘현숙(한)’이라는 여성 어휘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둘째, 이 여성을 마치 조선시대의 귀족 현모양처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카일은 본래 몸을 비틀다는 동사 쿨(חוּל)에서 비롯된 ‘힘’, ‘능력’ 이라는 명사로서 ‘군대’라는 의미로 80여회나 쓰인 어휘이다. ‘가치’와 같은 어떤 덕목으로 쓰인 건 20여회 밖에 안 되며, 특히 이 남성 어휘를 여성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인 것은 단 2회 뿐이다. 한 번은 잠언 마지막 장인 여기서 ‘현숙한 여인’에게 쓰였고, 다른 한 번은 다름 아닌 룻에게 쓰였다.
그러나 룻에게 ‘현숙한 여인’이라 칭하는 대목은 더욱 넌센스하다. 룻이 유력한 가문의 인물이 잠든 잠자리에 몰래 잠입하여 이불을 함께 덮고 있다가 두려워하고 있을 때 그 유력한 인물 보아스가 이렇게 말하는 대목인데, “네가 ‘현숙한 여인’인 줄 동네 사람들이 다 안다.” 한마디로 네가 이렇게 이부자리로 잠입해 들어왔지만 동네 사람은 널 ‘정숙한 여인’으로 알 것이라는 말이다.
이 역시 카일에 대한 오인에 기인한다. 카일은 ‘현숙한 여인’이 아니라 “용맹스런 여인”이다. 먹고살기 어려운 룻이 유력한(돈 많고 땅 많은) 보아스에게 전략적으로 접근한 줄 알지만 보아스의 말에 따르면 룻이 (정욕을 좇아) 젊은 고엘에게도 안 가고, (부를 좆아) 돈 많은 고엘에게도 안 가고 자기에게 왔다는 것이다.
룻은 보아스의 뭘 보고서 다른 선택지를 버리고 보아스에게 책무를 물었을까. 그것은 바로 룻의 ‘약속’(계약의 성실)을 보는 눈에 기인하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룻이 용.맹.스.럽.게. 보아스를 택한 덕에 보아스의 족보에 룻이 깃든 것이 아니라,보아스의 족보가 룻쪽으로 굴절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시어머니 나오미의 집안은 남자가 하나도 남아나지 않고 사실상 멸절/멸문되었는데 룻의 이 용맹스러움 덕택에 그 집안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한국의 현숙한 여인들은 명절에 용맹스럽게들 전을 부치고 있을 것이다.
참고: “비튼다”는 여성 동사에서 어떻게 군대라는 말이 나올 수 있었을까. 그것은 잉태한 여성이 고통의 인내로써 몸을 비틀어 출산하는 힘을 말한다. 이스라엘은 군대가 여성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믿었다.
김영진/ 호서대학교 교수, 미문교회 목사 (페이스북 글)
<저작권자 ⓒ 리포르만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 시 출처 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