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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thdghk2015.02.25 06:46

다미선교회가 기승을 부리던 1990년 무렵에, 분위기상 '요한계시록'을 건드리지 못하던 종래의 한국교회 풍토를 뚫고, 전국 각처에서 목사님들이 개교회 차원에서 자기성도에게 과감하게 '계시록'을 가르치는 붐이 시작되었다. 자기 양들의 잘못된 종말론에 미혹됨을 방지키 위한 자구책인 한편, 성경에서 계시록만 덮어두고 못가르쳐야 하는 교역자들의 오랜 딜레마를 벗어던지고자 하는 욕구의 분출이기도 했다. 갑작스럽고 급히 번지는 당시 현상에 당황한 각 교단 지도부와 신학교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대책논의에 들어갔다.

유명한 모 교단 신학교도, 대책의 일환으로 젊은 S 교수를 '종말론 담당자?'로 임명하여, 교단적 차원의 종말론을 급조했고, 전교단 개교회에 '새로 만든 교단의 종말론'을 가르치도록 하달했다. 어설픈 새종말론을 받아든 현장 목회자들의 대부분이, 마음 답답-한 채로 서로 궁시렁대며 '교단 종말론'으로 바꾸어 가르치기 시작했다.

교단에서는 당연  '새종말론의 부작용'을 책임지기에 가장 만만한 이에게 그일을 맡겼고, '제멋대로 종말론'들을 우선 막음해놓고 종말론과 대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할 계획이었다.

교단의 지시대로 '우선 종말론'을 연구해 바친 후, 젊은(40대 초반) S교수가 죽었다. 이후 그 교단에서는 '종말론 담당 전문가'를 따로 만들 수 없었다.  (유언비어 아닌 사실임, 2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모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