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666

by dschoiword posted Feb 0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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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복 목사.jpg 

이광복 목사 (종말론 강의 영상캡쳐)

 

 


이스라엘과 666

 

 

이광복 목사는 부산지역 목회자들, 특히 예장 고신 소속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오래 동안 종말론을 강의해 왔다. 아래는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가 2013년 9월에 개최된 교단 제63회 총회에 보고한 이광복 목사에 대한 연구 보고서이다. 관련 위원회는 "종말론에서 통속적 세대주의자들의 견해를 수용한 그의 징조에 대한 해석은 주의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이후 총회는 그에게 소명 기회를 주었고, 그는 해명서를 총회에 보냈다. 2014년에 열린 제64회 총회는 2013년과 동일하게 "성도들에게 잘못된 종말론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2014년 총회 보고 내용에 대해 이광복 목사는 사도신경 부분에 대해서는 교수회의 지적을 적극 수용하여 수정할 의향이 있다고 했고, 종말론에 대해서는 자신의 주장이 한국교회가 함께 연구해야 할 신학적 과제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교회 전체의 공익을 목적으로 아래에 소개한다.


 

이광복 목사의 종말론에 대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평가 보고서 (2013년)

 

 

이광복 목사는 역사적 전천년설을 신봉한다고 하면서, 많은 저서들과 강연들을 통해 그의 종말론 견해를 전파하는 데 힘쓰고 있다. 기본적으로 그는 역사적 전천년주의를 충실하게 따르려고 하며 세대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강변한다. 그는 자신이 세대주의를 조목조목 비판해 왔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종말 징조에 대해서는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중 성경적으로 맞는 부분은 비평적으로 수용한다고 말한다. 이광복 목사가 비평적으로 수용한다고 한 징조 해석 가운데 중요한 것 세 가지는 “이스라엘 독립 문제”와 “EU(유럽 통합) 문제”, 그리고 “EU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온다”고 하는 주장이다. 이 세 가지 문제에 있어서 이광복 목사는 세대주의적 견해를 취하고 있는데 성경해석상 문제가 아주 많다. 그리고 그의 “666”에 대한 견해도 독특하며 문제가 많다.

따라서 위 네 가지 주제에 대한 이광복 목사의 견해를 살펴보고 평가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서 사도신경에 대한 그의 견해도 함께 살펴보고 나서, 종합적으로 결론을 내리도록 하겠다.

I. 이스라엘 독립 문제


 이광복 목사는 마태복음 24:32의 ‘무화과나무 비유’를 21:18-19의 ‘무화과나무가 마른 사건’과 연결시켜 이해한다. 곧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라는 말씀에 대해, 이스라엘이 주후 70년에 멸망하였다가 1948년에 다시 회복된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1948년의 이스라엘 독립을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중요한 징조로 본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우선 마태복음 21:19의 사건(예수님의 저주로 무화가나무가 마르게 된 사건)에 대해 이광복 목사는 “모든 주석가들은 예외없이 이스라엘의 멸망, 심판을 뜻한다고 해설합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사건을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지만(Hagner, Van Leeuwen, 박윤선 등), 그렇게 보지 아니하는 학자들도 많다. 예를 들어 흐로쉐이드는 이 본문은 ‘심판’에 대해 말하는 것이 하니라 ‘믿음의 능력’에 대해 말한다고 한다.

또한 판 브루헌 박사도 이 저주이적에 대해 심판을 선포한 것이라기보다 믿는 자들에 대한 교훈적이고 격려하는 이적으로 본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도 이스라엘 심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기도의 능력에 대한 것임을 볼 때(마 21:20-22), 제자들에게 기도의 능력에 대한 교훈을 주시려고 이런 이적을 행하셨다는 설명이 더욱 설득력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마태복음 24:32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해 여러 말씀을 한 후에, 제자들이 이 모든 일들을 보게 되면 그의 재림이 가깝다는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다(33절). 그런 의미에서 무화과나무를 예로 들어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이런 자연의 변화를 통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 듯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징조들을 통해 종말 곧 예수님의 재림이 가깝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화과나무를 한 예로 드신 것이지 꼭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로 보고서 그 회복을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이 해석이 옳은 것은 누가복음이 직접 증거하고 있다.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21:29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여기에 보면 단지 ‘무화과나무’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나무’를 말씀하신다. ‘무화과나무’ 자체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무’의 성장 과정, 생장 원리를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는 것이다(30-31절).

그리고 이광복 목사는 마태복음 24:32의 ‘무화과나무’ 앞에 관사 ‘테스’가 사용되어 있음을 주목하면서 앞에 나온(마 21:19) ‘한 무화과나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앞의 ‘한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을 지칭했다면, 여기의 ‘그 무화과나무’는 더 더욱 이스라엘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헬라어 관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헬라어 관사는 반드시 앞에 나온 사물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헬라어 관사에 대한 것은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데 헬라어 문법학자 체르윅은··· 관사의 사용은 그 말해진 사물이 저자의 마음속에 정해져 있고 친숙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여러 용법이 있는데, 여기 마태복음 24:32에서 ‘무화과나무’ 앞에 관사가 사용된 것은 무화과나무라는 ‘종’(種, genus)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복음서 기자는 앞에서 나온 무화과나무를 가리키기 위해 관사를 사용한 것이다.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21:29절에서 ‘무화과나무’(텐 쉬켄) 다음에 ‘모든 나무’(판타 타텐드라)를 말할 때에 관사를 사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곧 ‘모든 종류의 나무’라는 의미에서 관사를 사용한 것이지, 앞에서 나온 나무를 가리키기 때문이 아니다.

II. EU(유럽 통합) 문제


 이광복 목사는 다니엘서 2장 33-24절과 41-43절에 소개된 ‘열 발가락 국가’에 대해 종말에 나타날 적그리스도 국가로 보고 이를 ‘유럽 연합’(EU)으로 연결한다. 그러나 다니엘서 2장의 ‘열 발가락’을 EU로 연결시키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따르는 해석이다.

느부갓네살이 본 신상(神像)에서 정금으로 된 머리는 ‘바벨론’이며, 은으로 된 가슴과 팔은 ‘메대-바사’이며,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는 ‘헬라-마게도냐’이며, 철로 된 종아리는 ‘로마 제국’인데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진흙이요 얼마는 철인 것은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을 말한다. 여기까지는 별 이의가 없다. 그런데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린 것에 대해 정통 기독교회는 대개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은 복음운동으로 본다(Augustine, Luther, Calvin, Hengstenberg, Keil, Pusey, Kliefoth, Boutflower, Leupold, Young, 박윤선, 이상근 등), 물론 개혁주의 주석가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레온 우드, A, MacRae 등).

이광복 목사는 ‘사람의 손으로 아니한 돌’의 출현을 재림으로 보고, 하나님이 세우시는 한 나라를 재림 이후에 이루어질 천년왕국으로 본다. 그러면서 이광복 목사는 ‘열 발가락’을 종말의 이 시대에 나타난 EU로 본다. 이 주장에 대해 일곱 가지 이유를 들고 있지만,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은 거의 없다.

예를 들면 그 첫째 이유로 드는 것이 “발과 발가락이 하나”인 것은 인류 역사 마지막 적그리스도 국가가 하나이지만 여러 개의 나라로 나누인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하면서, 이는 지금의 EU의 성격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발과 발가락이 하나”라는 문장은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표현이다. 다니엘서가 말하는 것은 “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철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라는 것이다(단 2:41),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진흙이요 얼마는 철이라는 의미이지, 이광복 목사가 말하듯이 “발과 발가락이 하나”라는 사상을 말함이 아니다. 그래서 이광복 목사는 자기 생각을 집어넣어서 본문을 이해해 놓고서는 “EU는 하나의 연합체이면서 여전이 EU 구성국가들은 독립적인 국가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에 끼워 맞춘다.

그러나 이 세상에 독립국가이면서 연합체를 이루고 있는 나라들은 EU 외에도 많다. 잘 알려진 대로 영국연방도 있고, 구소련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뭉친 독립국가연합도 있으며, 작지만 네덜란드와 아랍에미레이트연합도 연방국가이다. 그런데 왜 EU만 그런 연방체로 보아야 하는가?

이광복 목사는 그 두 번째 이유로, 지금 EU 회원국 중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의 국가들은 강하지만 에이레, 룩셈부르크, 사이프러스, 몰타, 슬로바키아 등의 국가들은 그 힘의 미미함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것도 끼워 맞추기식 해석이다. 영국연방 안에도 영국 본국과 캐나다, 호주, 인도 등은 강하지만 그 외에 작고 미약한 나라들이 많이 있다. 뿐만 아니라 EU 회원국 중에는 강한 나라들과 약한 나라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네덜란드와 벨기에,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등 중간쯤 되는 나라들도 많다. 지금은 EU가 동구라파로 확대되어서 중간쯤 되는 나라들이 많아졌다. 그러면 이런 중간쯤 되는 나라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광복 목사의 이런 주장들에 대해 일일이 논박하는 것은 불필요하며 시간낭비로 생각된다. 그의 이런 주장들은 소위 통속적인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세대주의자가 아님을 강변하지만, 그들의 주장들에 동조함으로써 그 자신도 세대주의적인 종말론을 가지지 않았나 의심하게 만든다.

III. 열 발가락에서 적그리스도의 출현 문제


 이광복 목사는 다니엘서 2장을 계시록 17장과 연결시키면서 열 발가락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온다고 주장한다. 곧 EU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온다고 주장한다. 요한계시록에서 17:10-11의 말씀은 매우 어려운 본문에 속한다. 그런데도 이광복 목사는 이런 어려운 본문에 대해 자신의 문제성 있는 주장을 옳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먼저 계시록 17장의 내용을 살펴보자.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 한 짐승을 보았는데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었다(3절). 천사가 요한에게 그 짐승의 비밀을 설명해 주는데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고 말한다(8절) 그러고 나서 ‘일곱 머리’에 대해 설명해준다.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깐 동안 계속하리라.”(9-11절)

여기서 ‘망한 다섯 왕(나라)’은 박윤선 박사에 의하면 “애굽, 앗수르, 바벨론, 메데 바사, 헬라”인 듯하다고 한다. 헨드릭슨은 “고대 바벨론, 앗수르, 신 바벨론, 메데-바사, 헬라-마게도니아”로 본다. 헨드릭슨의 이 해석은 그 이전에 나온 흐레이다너스의 해석과 일치한다. 그리고 ‘지금 있는 나라’(여섯 번째)에 대해서는 다 로마 제국으로 본다. ‘장차 이를 일곱 번째 왕(나라)’에 대해 흐레이다너스는 “적그리스도의 세상 나라”로 본다. 헨드릭슨은 좀 더 자세하게 “로마의 멸망과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 사이에 교회를 압박하는 적그리스도의 마지막 제국인 모든 적그리스도적 정권의 집합”으로 본다. 한편 박윤선 박사는 “로마 이후 어느 나라인지 확실히 알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광복 목사는 박윤선 박사의 해석을 다 수용한다고 하면서 이 일곱째 왕은 다니엘서 2장의 ‘열 발가락 국가’라고 한다. 그러나 박윤선 박사는 다니엘서 2장의 ‘넷째 나라’에 대해 전통적인 견해를 따라 ‘로마’로 보았다. 이광복 목사는 박윤선 박사를 수용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박윤선 박사의 해석과는 다른 해석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광복 목사는 다니엘서 2장의 ‘두 쇠 종아리 로마’와 철과 흙으로 된 ‘열 발가락’은 전혀 다른 시기의 건으로 보면서, ‘열 발가락 국가’는 미래적, 역사적, 종말론적 국가로서 ‘적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이 적그리스도는 바로 ‘교황’이라고 단언한다. 이광복 목사는 계시록 17:11의 ‘여덟째 왕’은 적그리스도이며 이 적그리스도는 EU에서 나온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철 종아리’와 ‘열 발가락’을 이렇게 날카롭게 나누어 보는 것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니엘서 2:40-43에 보면 ‘넷째 나라’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넷째 나라’와 ‘다섯째 나라’로 나누어서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넷째 나라’는 ‘철로 된 종아리’와 ‘진흙과 철로 된 발과 발가락’을 다 포함하고 있다.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진흙이요 얼마는 철인 것은 ‘그 나라’ 곧 그 ‘넷째 나라’가 나누일 것을 말한 것이지(41절), ‘넷째 나라’와 구별되는 ‘다섯째 나라’ 곧 이광복 목사가 말하는 ‘열 발가락 국가’가 나뉠 것을 말한 게 아니다.

뿐만 아니라 ‘적그리스도’가 EU에서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 찾을 수 없다. 계시록 13장과 17장은 대단히 어려운 본문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짐승’은 ‘교회를 핍박하는 악한 세상 나라’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짐승’은 당시에는 로마 제국이었지만 또한 역사상 존재하는 모든 악한 나라들(제국들)을 총칭한다. ‘짐승’은 세상 정부가, 주님의 교회에 대해 보여주는 바 찢는 속성과 멸망시키는 역사(役事) 때문에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계시록 17장의 일곱째 왕(나라)도 로마제국 이후에 나타날 모든 적그리스도적인 나라들(정부들, 세력들)의 집합으로 보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바 ‘이미 망한 다섯왕(나라)’에 대해서는 구체적인왕(황제)이나 나라(제국)로 보지 아니하고 상징적으로 보는 주석가들도 많이 있다(Mounce,Beale,Van de Kamp 등). 곧, 일곱 왕은 ‘짐승이 그들을 통해 역사하는, 역사상 일어나는 왕들에 대한 비유’로 보는 것이나 일곱은 완전수인데, 일곱 중의 다섯 곧 대부분은 망했다는 의미이다.

어쨌든 계시록 17장에서 교황이 적그리스도이며 EU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온다는 주장은 정당화될 수 없는 잘못된 해석이다. 이광복 목사는 박윤식 박사를 수용하고 거기에 연결되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아니하며 박윤식 박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세대주의적인 주장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IV. 666의 해석 문제


 계시록 13장 끝에 나오는 ‘육백 육십 육’(666)이 누구 또는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그런데 이 숫자에 대해 이광복 목사는 문자적인 의미로 본다. 물론 오늘날 상품 판매에 흔히 사용되는 바코드(Bar code) 등으로 보는 이론들은 반대하지만, 적그리스도가 통치적 수단으로 사용할 화폐의 일종으로 본다. 현재 화폐의 역할을 하고 있는 ‘IC 카드’의 발달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통속적인 세대주의자들이 많이 취하는 견해이다

어떤 학자들은 ‘666’을 로마 제국의 네로 황제(54-68년통치)로 보려고 한다. 라틴어 ‘네로 카이사르’(Nero Caesar)를 히브리어로 옯기면 ‘네론 케사르’(nron qsr)가 되는데, 각각의 알파벳의 숫자를 합치면 666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도 문제가 많으며 받아들이기 어렵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으며, 그 편지의 수신자들도 헬라어를 읽고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로 카이사르’의 이름을 왜 히브리어로 바꾸어서 계산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개혁주의 주석가들은 계시록 13장의 ‘666’에 대해 대개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곧 6은 7에 하나 모자라는 수이며, 인간으로서는 최대한에 도달한 수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안식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교만을 나타내는 수이며, 6이 세 개 겹친 것은 인간의 교만이 극에 달한 것을 의미하며 곧 적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본다. ‘적그리스도’라고 할 때 우리는 꼭 특정의 한 인물만 생각할 필요는 없고,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탄의 세력, 마귀의 세력을 가리키는데, 특히 정부 권력을 통해 역사하며 성도들을 핍박하며 마귀를 경배하게 하는 세력 전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에 그것은 로마 제국이었으며, 특히 그 정점에 있는 로마 황제는 성도들에게 황제 숭배를 강요하고 핍박하였다.

그러나 다르게 볼 수도 있다. 13장 본문은 666숫자 자체가 쓰이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헬라인들에게는 원래 숫자가 없었고 대신 알파벳에 숫자의 개념을 부가하여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 표에 사용된 헬라어는 이름이거나 숫자로 사용된 알파벳이다. 본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니라.”(18절) 여기에 보면, ‘세어 보라’고 말한다. 즉, 계산해 보면 666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666이란 숫자 자체가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통속적 세대주의자들은 신용카드를 사용하게 되거나 베리칩과 같이 몸에 이식하는 칩을 가지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적그리스도의 표를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문은 결코 자신도 모르게 받게 되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적그리스도의 우상에게 절하는 사람에게만 이러한 표를 주어 이것으로 매매하게 한다. 이 표를 받는 것은 완전히 자의(自意)에 의해서이다.

본문의 의도는 적그리스도의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데 있다. 따라서 본문은 지혜 있는 자는 똑똑히 눈을 떠서 그것이 하나님인지 우상인지를 분별하라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숫자이면 7이다. 그리고 7이 셋이면 완전한 하나님이다. 6은 7에 못미치는 숫자로서 적그리스도가 아무리 이적을 행하고 신(神)인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하나님까지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에 불과하다. 본문의 의도는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데에 있지 ‘666’숫자나 ‘IC 카드’같은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V. 사도신경에 대한 이광복 목사의 견해


 이광복 목사는 사도신경에 대해 한편으로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부정적으로 보는 양면적인 입장을 취한다. 긍정적인 면으로는, 사도신경이 한국교회가 바로 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여 주었으며, 사도신경의 내용 가운데는 성도들이 반드시 기억하고 고백해야 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고 확고하게 확신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사도신경에 담긴 문제들을 주지해야 하며 이를 사용하지 않는 이들에 대해 이단시하는 것은 더 더욱 있어서는 안 될 일 이라고 주장한다.

이광복 목사의 사도신경 이해와 비판적 접근은 가톨릭교회에 대한 그의 견해와 침례교적인 그의 사도신경 이해로부터 나온다고 볼 수 있다. 그에 의하면, 가톨릭교회는 적그리스도이며 사도신경을 기초로 삼아 교회연합을 펼치는 종교 다원주의라는 역사상 유례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배교집단인 가톨릭교회가 만들어낸 사도신경의 내용 가운데에는 성도들이 반드시 기억하고 고백해야 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지만, 사도신경 자체는 성경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처럼 절대 권위를 부여하거나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것에는 심각한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고 경계한다. 성경과 사도신경의 관계에 관한 이런 입장의 배경에는 침례교적 영향이 역력하게 드러난다.

1. 사도신경의 기원에 대한 오해


 이광복 목사는 “이와 같이 사도신경의 기원은 전혀 사도들이 아니며, 로마 카톨릭이 그들의 거짓 교리들을 세우면서 형성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종교개혁 이전과는 달리, 종교개혁 이후에 사도신경이 사도들의 저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나 교파는 없다. 그럼에도 사도신경이 성경을 요약하고 있으며 사도적 복음을 잘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사도’ 신경이라고 부른다. 이광복 목사의 주장처럼, 사도신경은 성경이 아니며 사람이 만들었다. 그런데 사도신경이 고백하고 있는 내용 중에 ‘공교회’( catholic church)를 제외하고서 성경에 나오지 아니하는 용어나 문구가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이광복 목사는 사도신경의 기원을 가톨릭교회로부터 찾는다. 이것은 옳지 않다. 사도신경은 종교개혁이 비판한 가톨릭교회가 부패하기 전에 이미 형성되었다. 비록 사도신경이 형성될 당시의 로마가톨릭교회가 성경에서 벗어난 주장을 많이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사도신경이 성경을 요약하면서 성경의 용어와 문구로 구성되어 있는 한, 사도신경을 로마가톨릭교회의 산물로 보고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마르틴 루터(1843-1564)도 사도신경의 ‘카톨릭’이란 단어를 싫어하여 대신에 ‘기독교적’이라는 용어로 대치하였을 뿐, 이광복 목사처럼 사도신경을 비판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로마가톨릭교화가 아니라 개혁교회가 ‘공교회’임을 고백한다.

2. 가톨릭교회의 사도신경 이용에 대한 편견


 이광복 목사는 가톨릭교회가 사도신경을 이용하여 교회통합의 기초로 삼는다는 사실과 그리고 특정 문구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이유로 사도신경을 부정적으로 보는데, 이는 옳지 않다.

이광복 목사는 로마가톨릭교회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들 간의 통합을 주장하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이는 로마교의 수장인 교황 로마가톨릭교회, 루터파와 개혁파의 교회통합의 토대로 삼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설령 로마교회가 사도신경을 통합의 근거로 삼자고 주장한다 하더라도, 이에 응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며 또 그런식으로 사도신경을 경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우리는 로마교의 성경 이해는 우리와 다르다는 이광복 목사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에 기초하여 이광복 목사가 사도신경에는 ‘성경’에 대한 고백이 들어 있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비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로마교의 성경관이 아니라 우리의 성경관으로 사도신경을 해석한다면, 성경에 대한 고백이 사도신경에 빠져 있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사도신경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사도신경에 특정 항목이 없다는 지적은 전에도 있었다. 종교개혁 당시에도 일부 루터파는 사도신경에 ‘이신칭의’가 없기 때문에 사도신경을 폐기하거나 새로운 신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지만, 개혁파는 말할 필요도 없고 루터파 안에서도 큰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19세기에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빌라도의 이름 거명 등을 비판하면서 사도신경 폐기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침례고 및 그와 유사한 교파를 제외한 서방교회 모두는 사도신경을 굳건하게 고백하였다.

이광복 목사는 가톨릭이 채택한 번역어인 ‘외아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담고 있지 않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물론 우리도 ‘외아들’보다는 ‘독생자’라는 역어가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에 해당하는 라틴어 원어가 ‘외아들’이라는 의미만을 지닌다는 주장은 지나치다. 이광복 목사의 주장처럼, 사도신경과 그 모체인 로마신경에는 ‘외아들’로 번역할 수 있는 용어(unicus)가 나온다. 그런데 그 당시 로마에서 같이 사용되었던 헬라어본에는 ‘독생자’(모노게네스)가 나온다. 그 이후 성경 라틴어역인 불가타(Vulgata)는 독생자와 같은 의미를 지닌 새 역어(monogenitus)를 사용한다. 기존 용어(unicus)도 새 역어(monogenitus)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도신경은 편의상 기존 용어를 계속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광복 목사는 한스 큉(Hans Kung)이나 차동엽 등 제한된 소수의 가톨릭 신학자들의 사도신경 해설을 인용한다. 이들의 주장이 가톨릭교회 전부를 대변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사도신경 해설을 비판하면서 로마교회의 사도신경 사용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에서 밝혔듯이 우리는 개혁 교회의 입장에서 성경을 따라 사도신경을 바르게 해석하면 된다.

3. 침례교적 사도신경 이해의 영향


 이광복 목사의 사도신경 비판에는 성경관을 중심으로 삼아 로마교회를 비판하면서도 침례교의 주장은 수용한다. 우리는 침례교회나 그와 유사한 교파가 우리와 같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존중한다. 그렇지만 이들의 성경관이 우리와 똑같지는 않다. 가령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침례교의 입장은 우리와는 다른 언약 이해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과 모든 면에서 보조를 같이 할 수는 없다.

그 중의 하나가 ‘공교회’에 대한 해석이다. 이광복 목사가 가톨릭교회의 공교회 이해를 비판한 것에 대해 우리는 동의한다. 그러면서 그는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회중교회적인 교회론을 그대로 수용하여 인용한다. 즉, 신약성경에서 교회는 “독립교회로서 어떤 외부 사람이나 기관의 명령에 좌우되지 않은 지방 독립 교회의 모습을 가졌다.”고 말한다. 이광복 목사가 장로교 목사로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침례교회는 이런 입장에서 노회를 인정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교단’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제 25장에서 무형교회와 유형교회가 다 공교회임을 고백한다. 잉글랜드와 미국의 초기 회중교회와 침례교회는 웨스트민스터고백서를 따라 ‘카톨릭’ 교회를 고백하였다. 그러나 후기로 가면 미국 침례교회는 고백을 단지 ‘선언’의 의미로만 받아들이고 구속력이 없는 참고문헌 정도로 보려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공교회’라는 용어와 이를 담고 있는 ‘사도신경’도 거부하는 경향이 우세하여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카톨릭’의 첫 알파벳을 대문자 C가 아니라 소문자 c로 표기한다는 조건 하에서 사도신경과 같은 고백의 필요성을 인정하려고 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4. 사도신경과 개혁교회의 신조를 부당하게 대비시킴


 이광복 목사는 『사도신경으로 본 카톨릭의 정체』에서 개혁교회의 신조들을 많이 인용하는데, 우리는 이를 지지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광복 목사가 사도신경이 “인간들이 짜깁기한 결과물”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개혁교회의 신조들을 인용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개혁교회의 신조들은 인간의 작품이 아닌가? 만약 우리가 “개혁 신조들은 인간들이 짜깁기한 결과물”이라고 표현한다면, 이광복 목사는 이런 표현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지가 궁금하다.

우리는 개혁교회의 신조들을 중시하며, 장로교회의 직분자로서 이 신조들을 구체적으로 거명하면서 서약한다. 그런데 이 신조들에 대해 ‘인간들이 짜깁기한 결과물’이라고 폄하하는 것이 옳지 않듯이, 고대교회의 선배들이 간명하게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한 사도신경에 대해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5. 사도신경이란?


사도신경의 발생 배경은 세례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베풀 것을 명령하셨다. 이 명령을 따라 교회는 초기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파하였고,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도록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르쳤다. 세례 교육에서 사도신경은 발생하고 발전하였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삼부(三部),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이루어졌다.

사도신경은 초기에는 진술체가 아니라 문답체로 사용되었다. 수세자가 세례조에 들어가면, 집례자는 수세자에게 “그대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수세자가 “믿습니다”리고 고백하면, 집례자는 그를 물속에 집어넣었다. 이것은 에수님과 함께 죽는 것을 상징하였다(롬 6장 참조). 연이어 “그대는 그분의 독생자 에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와 “그대는 성령님을 믿습니까?”라고 묻고, 수세자가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면 연이어 물속에 집어넣었다.

이처럼 사도신경은 이단에 대한 반박이나 헬라 사상의 영향을 받은 신학적 이유 또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정략적인 목적에서가 아니라, 교회 역사 초기부터 세례를 위한 고백과 세례의식과 때문에 발생하고 발전하였다. 따라서 이광복 목사의 사도신경 평가와 비판은 정당하지 않다.

6. 이광복 목사의 사도신경 견해에 대한 결론


 이광복 목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강조하는 것을 존중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이 목적을 위하여 사도신경을 긍정적으로 본다고 하면서도 부정적으로 보고 폄하함으로써 교회 가운데 사도신경에 대한 의심과 때로는 불신을 조성하는 것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이광복 목사는 “결코 교회에서의 사도신경 사용 자체에 대해 반대하거나 그릇된 일이라고 지적한 바가 없다”고 자기를 변증한다. 그러나 사도신경을 가톨릭교회의 산물로 보고 가톨릭적 해석을 마치 유일하거나 절대적인 해석인 양 제시하면서 사도신경을 비판하는 한, 이런 자기 변증은 설득력이 없다. 이미 고신교회 안에서 이광복 목사의 강의로 인하여 사도신경 무용론을 주장한 경우가 있지 않은가?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만, 침례교적인 ‘성경주의적’ 성경해석에는 동의하지 않으며 우리는 공교회를 믿는다.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이광복 목사의 종말론과 사도신경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았다. 그는 종말론에 대해 역사적 전천년설을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그 자신이 인정하듯이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는 통속적 세대주의자들의 여러 견해를 수용하였다.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을 종말의 중요한 징조로 본 것과 EU(유럽 통합)를 종말 직전에 나타날 적그리스도 국가로 본 것, 그리고 EU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온다는 주장 등이 그러한 것이다. 그 외에 ‘유브라데 전쟁’과 ‘666’에 대한 해석 등도 통속적 세대주의 견해와 맥을 같이 한다. 따라서 이광복 목사는 자신은 세대주의자가 아니라 역사적 전천년설을 신봉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세대주의자와 매우 가까운 주장을 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의 징조들 해석과 성경 해석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불건전한 것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사도신경에 대한 그의 견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사도신경에 대해 긍정적으로 수용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많은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는 사도신경의 기원을 로마가톨릭교회로 오해하고 있으며, 사도신경의 많은 부분해석에 있어 침례교적 경향과 반개혁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근본적으로 그의 세대주의적 종말론이 사도신경에 대한 불신의 바탕이 되고 있다.

따라서 이광복 목사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많은 혼란과 문제를 야기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종말론에 대한 불건전한 세대주의적 해석과 사도신경에 대한 기본적인 주장을 교정하고 철회하지 않는 한, 고신교회는 그를 초청할 수 없다고 판단된다.